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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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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잠
작품등록일 :
2017.05.14 22:15
최근연재일 :
2017.05.22 20:00
연재수 :
10 회
조회수 :
845,874
추천수 :
17,881
글자수 :
41,074

작성
17.05.19 20:00
조회
12,022
추천
170
글자
9쪽

하얀 쓰레기

DUMMY

‘망할.’

영건은 망연자실한 눈으로 창가를 바라보았다.

하늘 아래로 떨어지는 눈의 굵기를 보니 불길한 예감이 든다. 잠깐 내리고 그칠 것 같진 않았다.

함박눈이다.

영건과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들의 안색도 어두워져가는 중이었다.

“아오, 씨발.”

심지어 박수철은 아까 전부터 입에 욕을 달고 있었다.

벌컥!

그때 생활관 문이 활짝 열렸다. 문틈 사이로 고개를 내민 이는 오늘의 당직사관 윤 중사였다.

“전 생활관 집합! 빨리 빗자루랑 눈삽 챙겨서 연병장으로 모여!”

윤 중사의 집합령에 병사들은 투덜대며 야상을 챙겨 입었다.

“에이씨.”

“꼭 쉬는 날에만 눈이 쳐 내리고 지랄이라니까, 지랄.”

어기적거리며 늦장을 피우는 선임들과는 달리, 영건은 재빨리 생활관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들에겐 조금 전 윤 중사가 언급했던 빗자루와 눈삽이 없었으니까.

그걸 가져와야하는 사람은 누구?

두 말하면 입 아프다. 다름 아닌 영건이었다.

“영건아, 같이 가자. 혼자 다 가져오긴 힘들 테니까.”

“감사합니다.”

엔젤 지환이 자진해서 영건을 뒤따라왔다.

영건은 대대창고 문을 딴 뒤, 대 빗자루를 챙겨들었다.

밖에서 환경미화원이 주로 사용하는 초록색 솔이 달린 빗자루는 레어 아이템이었다.

평범한 빗자루는 자루가 짧아서 바닥을 쓸 때 불편하게 허리를 숙여야만 했으니까.

대대창고에 보관된 대 빗자루는 오직 서른 개뿐이다. 한 마디로 70명의 대대원 전원이 이 빗자루를 사용할 수 없다는 뜻이다.

영건이 그 여느 때보다도 빨리 창고를 향해 달려간 이유는 따로 있었다. 조금이라도 늦으면 타 중대 막내들에게 그 레어 빗자루를 빼앗기게 될 테니까.

대 빗자루를 사수하지 못하고 작은 빗자루를 가져오는 날엔 박수철 그 자식이 또 가만있지 않을 거다.

“다 챙겼으면 가자.”

“알겠습니다.”

신속하게 대 빗자루와 눈삽을 넉넉히 챙긴 두 사람은 후다닥 창고 밖을 빠져나왔다.

아니나 다를까, 반대편에서 헐레벌떡 달려오는 타 중대 막내들이 보였다.

타 중대 동기가 영건을 발견하고는 말을 걸어왔다.

“영건아. 큰 빗자루는?”

“아직 많이 남았어.”

“휴. 다행이다. 고마워!”

영건과 지환은 곧바로 연병장으로 달려갔다.

연병장에 집합한 3중대 선임들을 발견한 그들은 챙겨온 빗자루와 눈삽을 하나씩 나눠주었다.

“오. 대 빗자루~”

“땡큐.”

쓸기 편한 큰 빗자루를 보며 선임들이 만족해하는 모습을 보고나서야 영건은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다.

“하늘에서 쓰레기들이 사정없이 내리고 있구만.”

박수철이 하늘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군대에서 첫 눈을 맞이했을 때는 미처 몰랐다. 그저 예쁘다고만 생각했을 뿐.

그렇지만 이제는 너무나도 잘 안다.

눈을 하늘에서 내리는 쓰레기라고 정의내린 수철의 말에 영건은 백 번 동의할 수 있었다.

‘빌어먹을 활주로.’

헬기부대가 좆같은 두 번째 이유.

이번에도 문제는 다름 아닌 저 광활한 활주로다.

활주로 전역에 떨어지는 굵은 쓰레기들을 보며 그들은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주말이라도 활주로는 항상 깨끗해야만 한다. 그래야 긴급상황 발생 시, 헬리콥터들이 즉각 출발할 수 있을 테니까.

“자, 모두 주목!”

야속한 마음에 바닥에 쌓인 눈을 신경질적으로 툭툭 차고 있는데, 전투모를 눌러쓴 당직사관 윤 중사가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지금 눈이 많이 내리고 있으니까, 헬기 대기 중인 활주로 위주로 청소할 수 있도록 한다. 1중대랑 2중대는 활주로 왼쪽에서부터 깨끗이 쓸고, 3중대랑 본부중대는 날 따라올 수 있도록. 오케이?”

“예.”

“주말에 쉬고 싶은 마음은 잘 아는데 별 수 없잖냐? 빨리 치우고 들어가서 쉬도록 하자.”

병사들의 대답이 시원찮은 이유를 윤 중사도 잘 알고 있기에, 그는 병사들을 다독이며 쓰레기 제거작전에 돌입했다.

“아. 맞다. 거기 영건아.”

무언가가 생각났는지, 윤 중사는 마침 자신의 앞으로 지나가던 영건을 불러 세웠다.

“아무래도 눈 내리는 속도를 보아하니 제설기가 필요할 것 같다. 네가 제설병들 좀 데리고 와줘.”

“알겠습니다.”

영건은 후다닥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빈 생활관 문을 여니, 침상 위에 드러누운 채 TV를 시청 중인 병사 둘이 보였다.

문을 열고 들어온 그들이 영건을 돌아보며 물었다.

“왜요?”

“아저씨들, 당직사관이 찾아요.”

“어? 눈 내리네.”

그들은 그제야 밖에 눈이 내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에휴. 귀찮아. 알았어요. 금방 내려갈게요.”

저 제설병들은 타 부대에서 파견 온 병사들이었다.

겨울에는 활주로에 쌓이는 눈을 감당할 수 없다는 이유로 제설기를 운전할 줄 아는 파견병들을 타 부대에서 데리고 오는 시스템이었다.

‘부럽다, 진짜.’

영건은 허구한 날 생활관에 쳐박혀 빈둥거리는 그들이 그렇게나 부럽지 않을 수 없었다. 제설기를 가동할 때를 제외하고는 평일, 주말을 가리지 않고 빈둥거리는 게 그들의 주 업무였다.

‘나도 어디 파견나갈 일 없나?’

파견병들에게 윤 중사의 말을 전한 영건은 부러움과 동시에 극심한 자기연민에 빠져들었다.


‘와. 미쳤다. 미쳤어.’

영건이 다시 부대 밖을 나섰을 때, 그는 질렸다는 듯 입을 떡하니 벌렸다.

시간이 지날수록 하늘에서 떨어지는 눈의 규모는 점점 더 불어만 갔다.

좀 전에도 눈이 많이 내린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아까 전보다도 훨씬 심했다.

방금 부대 밖으로 나왔건만, 벌써 어깨 위에 허옇게 눈이 쌓일 정도였다.

이대로라면 주말이고 나발이고 눈만 치우다 오늘 하루를 다 보내야할 판이다.

뽀드득. 뽀드득.

‘시발.’

하얗게 쌓인 쓰레기들을 밟으며 활주로를 향해 나아가는 영건의 기분은 가히 절망적이었다.

“차영건! 빨리 안 뛰어오냐?”

터덜터덜 걷고 있는데, 반대편에서 박수철의 목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개새끼.’

영건은 부리나케 제설작업 중인 3중대를 향해 내달렸다.

“야, 차영건. 니 고참들은 좆 빠지게 눈 치우고 있는데 넌 어디 갔다 오냐?”

3중대와 다시금 합류하기 무섭게 수철의 갈굼이 시작되었다.

이 새끼는 심각한 기분파여서 기분이 안 좋을 때 잘못 걸리면 평소보다 곱절은 더 무자비한 갈굼을 감내해야만 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날이 바로 오늘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트웬티스 춤동작 따라한다고 엉덩이를 씰룩거리던 녀석의 기분은 극도의 저기압으로 떨어진 상태였다.

이 거지같은 눈 때문이겠지.

“죄송합니다.”

영건이 사라졌던 이유는 윤 중사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그 이유를 설명하는 대신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였다.

‘윤 중사가 시킨 일이 있어 잠깐 다녀왔습니다.’ 라는 해명을 해봐야 박수철 저 자식의 심기만 건드릴 뿐이다.

보나마나 고참이 말하는데 말대꾸를 하냐는 둥 어쩌구하면서 2차 갈굼이 시작될 게 뻔하다.

그런 소릴 들을 바에야 그냥 빨리 사과하고 1차에서 끝내버리는 게 낫다.

“빨리 가서 저쪽에 있는 눈 쓸어.”

“알겠습니다.”

“에이 씨. 못해먹겠네.”

눈을 쓰는 둥 마는 둥하던 박수철은 이내 빗자루를 내동댕이치고는 건물 구석진 곳으로 가서 담배를 뻑뻑 태우기 시작했다.

세상에. 양아치도 저런 양아치가 따로 없다.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죄다 마음에 들지 않기도 힘든 일인데. 그런 박수철이 이제는 존경스러울 지경이다.


눈은 계속해서 쏟아져 내렸다.

많이 내리는구나, 정도로 표현할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하늘이 미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지독한 폭설이었다.

병사들이 눈을 치우는 속도보다 바닥에 떨어지는 눈의 양이 훨씬 많았다.

처음엔 후딱 치우고 빨리 들어가서 쉬자, 라는 마인드로 열심히 제설작업에 임했던 병사들도 18시가 넘도록 눈이 멈추지 않자 하나둘 단념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모두가 염원했던 눈이 완전히 그쳤을 때, 시계바늘은 어느덧 2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꿀 같은 주말 오후가 통째로 날아가 버린 셈이다.

‘하.’

영건은 끝없던 빗자루 질을 멈추고 허리를 폈다.

온몸이 꽁꽁 얼어붙은 듯했다.

깔깔이, 야상, 귀마개와 장갑 등으로 전신을 무장했음에도 이놈의 추위는 통 가실 줄을 모른다.

밖에서는 대충 외투 하나만 걸치고 다녀도 별로 춥다고 느껴본 적이 없었는데.

바깥사회와 부대는 서로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게 아닐까 의심이 갈 정도다.

‘들어가서 발 닦고 따뜻한 침낭 속에서 잠이라도 푹 잤으면 더는 소원이 없겠다.’

TV시청이고 나발이고 영건의 머릿속을 사로잡고 있는 건 숙면, 오직 숙면뿐이었다.

병사들은 22시에 모두 잠을 청한다. 그러나 모두가 22시에 잠이 들 수 있는 건 아니다.

‘젠장.’

애석하게도 오늘 영건은 22시에 잠이 들지 못하는 희생양 중 한 명이었다. 22시부터 24시까지의 야간근무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영건이 근무표를 바라보고 있는데, 본부중대의 행정병이 알림판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리고는 기존에 있던 근무표를 떼어내고 새로운 근무표를 붙였다. 수정사항이 있는 모양이었다.

‘어?’

새로운 근무표를 응시하던 영건의 눈동자가 절망으로 물들었다.

‘씨발. 이거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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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말

본격 주인공 굴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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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실력발휘? +5 17.05.21 11,866 179 9쪽
8 차명석 +7 17.05.20 12,066 172 11쪽
» 하얀 쓰레기 +11 17.05.19 12,023 170 9쪽
6 선임이라 쓰고 엄친아라고 읽는다 +6 17.05.18 12,410 184 12쪽
5 운명의 데스티니 +6 17.05.18 12,423 175 6쪽
4 이 빌어먹을 축구! +8 17.05.17 12,690 176 9쪽
3 발암이 분다 +4 17.05.16 13,066 193 10쪽
2 까라면 까야지 +13 17.05.15 14,278 193 11쪽
1 프롤로그 +13 17.05.15 17,921 203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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