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

남자의 축구

웹소설 > 작가연재 > 스포츠

빙잠
작품등록일 :
2017.05.14 22:15
최근연재일 :
2017.05.22 20:00
연재수 :
10 회
조회수 :
845,881
추천수 :
17,881
글자수 :
41,074

작성
17.05.18 20:00
조회
12,410
추천
184
글자
12쪽

선임이라 쓰고 엄친아라고 읽는다

DUMMY

‘보면 볼수록 참 대단하단 말이지.’

한가로이 침상에 앉아있던 영건은 왼쪽을 응시했다.

오늘은 일요일. 월요일을 앞둔 마지막 주말이다.

한 남자가 접이식 책상 위에 책을 펼쳐든 채, 펜으로 열심히 필기해가며 한창 공부에 매진 중이었다.

모두가 알찬 주말을 보내기 위해 끼리끼리 무리지어 몰려나간 지금, 생활관엔 오직 두 사람뿐이었다.

뿔테 안경을 쓴 그는 날렵한 턱선 때문인지 한층 더 지적인 이미지를 풍겼다.

정지환 일병. 다름 아닌 영건의 맞선임이다.

이번 달에 막 일병 계급장을 단 그였지만, 선임들은 그에게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심지어는 그 악랄한 박수철조차도 정지환에게는 유독 너그러웠다.

하긴. 우리나라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대기업 TG전자의 막내아들을 갈굴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여기 정지환이라는 사내는 재벌 3세다.

사회적 지위를 이용해 군복무를 기피하는 재벌 집 자식들이 비일비재하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정지환의 경우는 다소 이례적인 편이었다.

“영건아.”

한참 정지환 일병을 관찰하며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있던 찰나, 독서 삼매경이던 그가 불쑥 고개를 들더니 영건을 마주봤다. 자신을 향한 시선이 불편했던 것일까?

“왜, 왜 그러십니까?”

찔리는 마음에 영건은 말을 더듬고 말았다. 그러나 지환이 그를 부른 건 전혀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심심하면 TV틀어도 돼. 괜히 나 때문에 네가 아무것도 못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어서.”

지환이 웃으며 말했다.

그의 미소를 보며 영건은 직감할 수 있었다.

저 미소에 녹아내리지 않는 여자는 없을 거라고.

왜, 대학을 다니다 보면 같은 학과에 저런 부류의 선배 한 명쯤 있지 않던가?

공부 잘하고 운동도 잘하고 누구에게나 친절해서 여자 후배들이 졸졸 따라다니는 엄친아 선배 말이다.

“아. 전 괜찮습니다.”

“다른 선임들 눈치 보여서 그래? 그런 거라면 걱정 마. 내가 틀었다고 말해줄 테니까.”

“아. 정말로 전 괜찮······.”

영건이 극구 사양했음에도 지환은 굳이 리모컨을 들어 TV채널을 틀었다.

“너 이 드라마 좋아하지? 나도 군대오기 전에 챙겨봤었는데 진짜 재밌더라.”

지환이 특정채널에서 리모컨을 멈추더니 씩 웃었다.

“헛!”

영건은 놀란 눈으로 TV화면을 바라보았다.

그가 고정한 채널에서는 인기리에 방영중인 미국드라마, 왕자의 게임이 흘러나오는 중이었다.

입대하기 전에 종영되었던 시즌 1, 2를 몇 번이나 정주행했을 만큼 영건은 왕자의 게임의 애청자였는데, 최근 고대하던 시즌 3가 시작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하지만 힘없는 막내인 그가 시즌 3를 챙겨볼 수 있을 리 만무하다.

“어, 어떻게 아셨습니까?”

자신의 취향을 정확하게 알아맞힌 지환을 보며 영건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이 왕자의 게임의 애청자라는 사실을 이 부대의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었으니까.

“아마 저번 주였나? 박수철 병장이 우연히 이 채널을 틀었는데, 그때 왕자의 게임이 방영 중이었잖아. 박 병장이 재미없다고 채널을 돌릴 때, 네 아쉬워하던 눈빛이 갑자기 생각나서.”

와, 씨. 하마터면 울 뻔했다.

예전부터 느꼈던 사실이지만 이 사람은 천사다.

힘없는 일개 후임에게 이렇게까지 신경써주는 선임은 없으니까.

“정말 감사합니다.”

“고맙긴. 볼륨 더 올려줄까? 소리가 좀 작게 들리는 것 같은데.”

“충분히 잘 들립니다. 그런데 정지환 일병님, 진짜 괜찮으십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공부하시는데 방해될 것 같아서 말입니다.”

“난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마.”

“저 나중에 전역하면 TG전자 제품만 구입할 겁니다.”

“풋. 고맙다. 내가 본의 아니게 우리 기업 마케팅을 한 것 같네.”

영건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지환은 다시금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보다 2살 많다고 했었지, 아마?’

영건은 지환을 흘깃거리며 생각했다.

하는 행동은 10살쯤 많은 어른스러운 큰형 같다.

‘군대에 와서까지 이러긴 쉽지 않을 텐데.’

지환이 들여다보는 경영론 서적은 깨알만한 글씨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옆에서 힐끗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지끈지끈할 정도다.

‘하긴. TG기업 규모가 얼마나 큰데. 비록 막내아들이라고 해도 TG계열사 하나 정도는 떡하니 물려받을 테니까. 미래를 대비하는 거겠지.’

벌써 3시간째 열공 중인 지환을 바라보며, 영건은 속으로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아. 벌써 끝이네.’

늘 그렇듯, 호기심을 자극하는 마지막 장면에서 왕자의 게임은 귀신같이 절단마공을 시전했다.

‘꼭 이런 식이라니까.’

영건은 아쉬운 마음에 입맛을 다셨다.

‘슬슬 몰려오겠군.’

시계를 올려다보니 어느덧 16시 50분.

17시가 되기 10분 전이다.

족구, 플스, 당구 등.

각기 다른 취미생활을 즐기는 헬기 3중대원들에게도 하나의 공통된 취미가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야. 빨리 와!”

시계바늘이 16시 55분을 넘어서자, 선임들이 우르르 몰려들어오면서 지금껏 고요했던 3생활관이 순식간에 왁자지껄해졌다.

“7번 틀어라~”

슬리퍼를 벗은 박수철이 침상 위로 슬라이딩해서는 자기 자리에 안착했다.

순식간에 팔로 턱을 받치고는 세상 누구보다도 편한 자세로 TV를 시청할 준비를 마친 박수철.

저것도 나름 말년병장의 노련미라고 볼 수 있을까.

3생활관에서 ‘생방송 인기가요’가 방영되는 일요일 17시의 일과표는 암묵적으로 정해져 있었다.

다름 아닌 TV시청.

누구 하나 TV를 봐야한다고 강요하지 않았음에도 17시 정각만 되면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중대원들은 너나할 것 없이 TV 앞으로 몰려들곤 했다.

축구를 할 땐 좀처럼 찾아볼 수 없었던 3중대의 단결력이 빛나는 순간이었다.

마침 리모컨 근처에 있던 지환이 7번 채널을 틀었을 땐 시계바늘이 정확히 17시 정각을 가리키고 있었다.

“치얼 업 베이베~ 좀 더 힘을 내~”

인기가요의 첫무대는 트웬티스.

무려 20명의 소녀들이 바람직한 의상으로 무장한 채 무대를 휘젓는 중이었다.

요즘 대세로 부상 중인 명실공히 최고의 인기그룹 아이돌 그룹이었다.

심지어는 지환조차도 책을 덮고는 흥미로운 시선으로 TV를 시청하는 중이었다. 군대에서 여자아이돌 그룹의 저력을 엿볼 수 있는 아주 좋은 예였다.

“야. 역시 주연이가 젤 이쁘지 않냐?”

“무슨 말씀이십니까? 다혜가 짱이지 말입니다.”

“야. 솔직히 다혜보다는 주연이가 훨 낫지!”

“신성모독입니다!”

어느새 누가 트웬티스의 짱이냐에 대한 주제로 열변을 토하기 시작한 선임들이었다.

그 ‘짱’이라는 것의 기준은 가창력보다는 주로 외모나 몸매 쪽에 큰 가산점이 붙곤 했다.

“치얼 업 베이베~”

가장 좋은 위치에서 인기가요를 시청하던 박수철이 트웬티스의 춤을 따라 추기 시작했다.

‘아씨. 극혐.’

그가 따라하는 저질 춤도 충분히 혐오스럽지만, 무엇보다도 자신의 시야를 절묘하게 가리고 선 박수철의 만행에 영건은 치를 떨 수밖에 없었다.

“박수철 병장님. 거기 계시니까 우리 정현이 모습이 잘 안 보이지 말입니다.”

가만히 지켜보던 지환이 결국 한 마디를 했다.

“아! 그래? 미안하다.”

수철은 순순히 자리를 비켜주었다.

이건 가히 놀랄만한 일이다.

후임들 갈구기로는 원톱이라고 단언할 수 있는 그가 까마득한 후임의 말을 순순히 듣다니.

수철이 이렇듯 저자세로 나온 건 지환이 재벌 3세라는 이유도 있겠지만, 지환의 센스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었다.

“역시 지환이 네가 뭘 좀 아는구나. 트웬티스는 정현이가 최고지. 그치?”

“맞습니다.”

수철의 말에 지환이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었다.

수철이 트웬티스의 멤버, 정현을 가장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선 일부러 그녀를 언급했을 거다.

“이제 잘 보이지?”

“최곱니다.”

지환의 배려에 영건은 엄지를 추켜세웠다.

대세 아이돌답게 트웬티스는 타이틀곡이 끝났음에도 무려 두 곡을 더 완창하고 나서야 비로소 무대 아래로 사라졌다.

“아! 한 곡만 더해주지.”

트웬티스의 무대가 끝나자 수철이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평소 수철을 싫어하는 후임들, 심지어 영건조차도 그 순간만큼은 수철과 한 마음 한 뜻이었다.

예전엔 아이돌에 관심조차 없었는데, 입대한 이후로 아이돌 이름을 줄줄 꿰게 된 영건이었다. 물론 걸그룹에 한해서.

이 그룹의 멤버가 몇 명이고 대표곡은 뭔지, 리더가 누구고 메인보컬이 누구인지도 말이다.

심지어는 무려 스무 명의 대 인원을 자랑하는 트웬티스의 멤버 전원의 이름을 완벽하게 외우게 된 그였다.

<역시 명불허전 대세돌, 트웬티스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었던 무대였습니다. 자, 다음 무대는 아마 여러분들 모두 처음 보는 가수일 텐데요. 바로 오늘이 첫 데뷔무대라고 합니다.>

사회를 보는 MC의 말이 이어졌지만, 트웬티스가 남긴 여운에 취해있던 그들에게 MC의 목소리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추운 겨울, 우리들의 감성을 자극할 싱어송라이터, 아린을 소개합니다!>

“아린? 갑자기 웬 듣보잡이야?”

“신인가수라는데 말입니다.”

생활관 선임들은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음? 얼굴은 꽤 반반한데?”

지독한 외모지상주의인 수철의 동공이 커졌다.

“저 정도면 한 번쯤 사겨줄만 하지, 안 그러냐?”

떡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김칫국 한 사발을 원 샷하는 박수철이었다. 제발 거울 좀 봤으면.

아린이라는 가수는 섹시미를 자랑하는 트웬티스와는 달리 청초한 이미지였다.

키가 작은 건지 기타가 큰 건지, 그녀가 든 기타가 콘트라베이스처럼 느껴졌다.

“쟤 졸라 긴장한 것 같은데?”

“저래가지고 기타나 제대로 치겠냐?”

무대 중앙에 마련된 의자에 앉은 그녀는 몇 번인가 호흡을 크게 내쉬고는 천천히 기타 줄을 튕기기 시작했다.

“와. 보는 내가 다 불안하다.”

수철이 심드렁한 얼굴로 말했다. TV화면상으로도 그녀가 느끼는 긴장감이 전해질 정도였다.

<흰 눈이 내리면······.>

정적에 휩싸인 무대 위에서 아린이 기타연주와 함께 첫 가사를 내뱉었다.

“별론데.”

“너무 루즈한 거 아니냐?”

“무슨 자장가도 아니고. 잠 오겠다, 야.”

노래가 시작되자, 그렇지 않아도 부정적이었던 선임들이 한층 더 훈계질을 했다.

‘난 좋은데.’

그런 선임들에 비해, 영건은 아린의 노래에 매료되는 중이었다.

취향저격이라고나 할까? 딱 그의 스타일이었다.

무, 물론 노래가.

“너무 긴장한 것 같다.”

“그러게.”

그 말에는 영건도 동의한다.

‘음색 자체는 좋은데.’

문득 아린이 운도 지지리도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첫무대라 부담감도 상당할 텐데, 무려 트웬티스의 바로 다음 순서라니.

“다들 부정적이시네. 난 듣기 좋은데. 노래 자체는 굉장히 좋아.”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렇지? 싱어송라이터라고 했으니까 노래는 본인이 직접 만들었을 텐데. 실력은 있네.”

지환의 혼잣말에 영건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러는 사이 아린의 첫 무대는 조용히 막을 내렸다.

애석하게도 무대반응은 그리 좋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대다수는 트웬티스의 열혈 팬이었으니까.

신나는 댄스곡을 선보인 트웬티스와는 전혀 상반되는 이미지와 잔잔한 발라드 곡을 들고 나온 아린에게 큰 반응을 기대하긴 어려웠다.

“아린이라. 나중에 다른 노래도 찾아들어봐야겠다.”

지환이 중얼거렸다.

영건도 기회가 되면 아린의 노래를 더 감상할 용의가 있었다. 그러니 적어도 아린으로선 이번 첫무대에 아예 수확이 없었던 건 아니었으리라.

“어?”

TV를 보던 수철의 동공이 확장되었다. 그의 시선은 TV 너머의 창문에 고정되어있었다.

“씨발.”

수철의 미간이 구겨졌다.

조금 전까지 화창했던 날씨가 어째 심상치 않다.

“좆 됐다.”

창문 너머로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추천 꾹~ 선작 꾹~ 댓글 뙇~ 해주시면 힘이 납니다. ㅎㅎ


작가의말

눈이라 쓰고 쓰레기라고 읽는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6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남자의 축구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10 좋아 자연스러웠어 +17 17.05.22 12,172 188 8쪽
9 실력발휘? +5 17.05.21 11,866 179 9쪽
8 차명석 +7 17.05.20 12,067 172 11쪽
7 하얀 쓰레기 +11 17.05.19 12,023 170 9쪽
» 선임이라 쓰고 엄친아라고 읽는다 +6 17.05.18 12,411 184 12쪽
5 운명의 데스티니 +6 17.05.18 12,424 175 6쪽
4 이 빌어먹을 축구! +8 17.05.17 12,691 176 9쪽
3 발암이 분다 +4 17.05.16 13,066 193 10쪽
2 까라면 까야지 +13 17.05.15 14,279 193 11쪽
1 프롤로그 +13 17.05.15 17,922 203 7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