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빽호 님의 서재입니다.

짧은 이야기들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중·단편

빽호
작품등록일 :
2019.08.05 12:12
최근연재일 :
2020.01.28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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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14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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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단편] 엑스트라

DUMMY

오직 나만이, 이 세계의 비밀을 알고 있다.

내가 이 비밀을 알아차린 지는 꽤 오래되었다.

이 세계가 바로 ‘소설’ 속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내가,

몇 년째 미완성으로 방치되어 있는 이 소설 속의 엑스트라라는 사실도.


누구나 무언가를 처음 시작할 땐 열정적이다.

이 소설을, 이 세계를 창조한 작가도 그랬다.

다양한 종족과 신비로운 힘이 존재하는 세계, 출생의 비밀을 간직한 정의로운 주인공, 주인공을 더 빛나게 하는 동료들, 때론 주인공보다 매력적인 악당들, 그리고 꼭 필요하지만 기억엔 남지 않을 엑스트라들까지.

흔해 빠진 스토리였지만, 작가는 열심히 썼다.

밤이 새도록 컴퓨터를 붙잡고 부지런히 열 손가락을 놀렸다.


처음엔 그저 잘생긴 청년에 불과했던 주인공은 점점 매력적인 인물이 되어갔다.

왕족이라는 출생의 비밀, 세계를 평화롭게 만들겠다는 원대한 꿈, 부모님의 원수를 갚겠다는 목표, 불의를 용서하지 못하는 정의감, 묘하게 사람을 끄는 카리스마, 약한 자를 돌아볼 줄 아는 다정함, 이미 드러난 출중한 자질, 그리고 아직 드러나지 않은 신비로운 힘······.

작가의 설정이 추가될수록 주인공은 점점 더 입체적인 인물로 거듭났다.


주인공과 진한 로맨스를 나누게 될 히로인, 든든한 힘이 되어 줄 동료들, 끊임없이 주인공을 위협할 악당, 주인공이 구해 낼 선량하고 힘없는 사람들까지.

작가는 수없이 많은 인물들을 만들어냈고, 세계는 점점 풍성해졌다.


그리고 나는 이 세계에서 가장 존재감이 없는 엑스트라인 동시에, 이 소설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인물이었다.


“이봐요! 정신 좀 차려봐요!”


처음이자 마지막인 나의 대사로, 이 소설은 시작되었다.

언덕 위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진 주인공을 발견해 마을로 데려가는 여러 주민들 중 하나.

저 대사를 끝으로, 다시는 등장하지도 언급되지도 않는 인물.

저 대사 외엔 어떤 역할도 설정도 주어지지 않은 인물.

이 소설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 중에서, 유일하게 작가가 이름조차 지어주지 않은 엑스트라 중의 엑스트라.

그게 바로 ‘나’였다.


하지만 그 덕분에 나는 설정의 제약을 받지 않는,

이 세계에서 가장 자유로운 존재이기도 했다.


주인공은 전개되는 스토리에 따라 역할을 수행하느라 언제나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히로인과 동료, 악당은 물론, 수많은 엑스트라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설정과 역할에 따라 끊임없이 행동해야 했다.


하지만 나는 달랐다.

주어진 역할이라곤 대사 한 줄이 고작이었고, 이름이 무엇인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외모를 가졌는지, 어디에 살며 무슨 일을 하는지, 목표는 무엇인지, 꿈은 있는지, 내게는 그 어떤 것도 설정되어 있지 않았다.

나는 분명 존재했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여겨졌다.

이 세계의 그 누구도 내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아니, 나라는 존재를 알지도 못했다.


해야 할 역할도, 돌아갈 집도 없었던 나는

그저 한발 물러서서 가만히 이 세계를 관찰했다.

그리고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이다.

이 세계의 비밀을.



내가 비밀을 알아차리게 된 계기는 사소했다.

주인공의 말투가 갑자기 달라지거나, 전투능력이 아무 이유 없이 향상되고, 히로인의 가슴 사이즈가 갑자기 커지는 등의 사소하기 짝이 없는 변화들.

당사자들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나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 세계를 창조하고, 이끌어 나가며, 끊임없이 수정하고 있는 이 세계의 주인.

바로 작가의 존재를.


비밀을 깨닫고 난 후, 그의 작업을 관찰하는 것은 나의 가장 주요한 일과가 되었다.

언젠가는 내게도 뭔가 역할을 주지 않을까? 뭔가 그럴싸한 장면에서 나를 다시 등장시켜 주지 않을까? 그런 기대를 품은 채, 오랜 시간을 지켜보았다.

하지만 내 기대는 작가에게 닿지 않았다.



주인공이 본격적으로 목표를 향해 달려나가던 시기.

나는 작가의 작업 방식에 변화가 생겼음을 알아차렸다.

하루에도 몇 번이나 반복되던 수정 작업이 현저히 줄어들고, 새로운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양도 계속 줄어들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작가의 컨디션에 대해 진지하게 걱정하기 시작했을 때, 그는 떠나버렸다.

자신이 만들어 낸 세계를 버리고.


작가가 떠난 후 365일째.

주인은 떠났지만 피조물들은 떠날 수 없었다.

아니, 나를 제외한 다른 피조물들은 그 어떤 변화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 세계의 시간은 이미 오래전에 멈추었지만, 주인공은 쉴 수 없었다.

그는 계속해서 진전 없는 꿈을 좇아야만 했고, 동료를 지키기 위해 싸워야 했으며, 고통받는 약자들을 구원해야 했고, 매일 밤 복수심에 이를 갈며 잠들어야 했다.

다른 인물들도 사정은 비슷했다.

히로인에서부터 엑스트라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저마다의 역할에 따라, 끊임없이 무언가를 해야만 했다.


예전과는 달리 어떤 보상도, 어떤 진전도 없었지만, 그래도 계속해야만 했다.

작가는 떠났지만, 그들은 작가가 만들어 놓은 설정의 속박에서 해방될 수 없었다.


그 어떤 설정도 부여되지 않은 나만이, 그 속박에서 자유로운 존재였다.

그리고 가장 고독한 존재이기도 했다.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지언정, 그들에겐 목표와 역할이 있었다.

이름이 있고, 나이가 있고, 동료와 가족이 있었고, 취미생활, 좋아하는 음식, 아늑한 집도 있었다.

하지만 내겐 무엇도 없었다.


이 세계에서 나는 무색이었다.

누구도 내게 관심을 주지 않았고, 누구도 나를 기억해주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원망할 수는 없었다.


그들은 그저 만들어질 때부터,

나라는 존재를 기억하도록 설정되지 않았을 뿐이니까.



작가가 떠난 후 730일째.

나는 여전히 자유로웠고 고독했다.


작가를 관찰하는 유일한 역할조차 할 수 없어진 나는, 첫 장면의 언덕 위에서 하루 종일 공상에 잠기곤 했다.


이 세계를 만들어 낸 작가는 어떤 사람일까?

그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는 왜 이 세계를 만들어 낸 걸까?

혹시 그도 고독했던 걸까?

이 세계가, 우리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나는 오랜 시간을 들여 작가에 대해 생각했다.

생각이 깊어질수록 나는 그를 점점 이해하게 되었다.

그가 왜 이 세계를 만들었는지, 왜 버리고 떠났는지도, 다 알 것만 같았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알 수 없었다.

작가가 써내고 싶었던 이 이야기의 끝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나는 떠나버린 작가를 대신해, 이야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지금은 작가조차 새까맣게 잊어버렸을지 모를, 이 세계의 이야기들을.


오랫동안 작가를 관찰해 온 경험 덕분일까?

아니면 그를 온전히 이해하게 되었기 때문일까?

이야기를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내 머릿속에서만 흘러가는 이야기, 누구도 들어주지 않는 이야기, 이 세계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할 이야기였지만.

그래도 나는 즐거웠다.

이야기를 만드는 동안은 고독하지 않았으니까.


드디어 내 역할을 찾은 것처럼, 나는 오래오래 이야기를 만들었다.

그리고 언젠가 돌아올 작가를,

애타게 그리고 간절하게 기다렸다.


멈춰버린 세계에서 유일하게, 나의 시간만이 흐르고 있었다.



작가가 떠난 후 1095일째.

오직 나만이, 이 세계의 변화를 감지할 수 있었다.


작가가, 돌아왔다.

그가 다시 이 세계의 문을 열었다.


오랜만에 옛 추억에 젖은 것인지, 아니면 다시 이야기를 시작할 생각인지, 도대체 어떤 이유로 다시 돌아왔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엑스트라가 아니라는 것.



*

“10주 연속 베스트셀러! 떠오르는 소설가, 남혁 작가님을 만나고 있습니다. 소문대로 미남이시네요!”

“하하, 감사합니다.”


“작가님은 3년 넘게 전혀 다른 일을 하시다가 다시 집필활동을 시작하셨는데요. 뭔가 계기가 있으셨나요?”

“아무래도 처음엔 전혀 주목을 받지 못했었기 때문에······ 한동안은 소설······ 이야기라는 것 자체를 잊고 살았어요. 쓰지도, 읽지도 않았었죠. 하루는 잔뜩 취해서 집에 들어갔는데, 갑자기 예전에 쓰다 만 이야기가 생각나더라고요. 그래서 정말이지 오랜만에 파일을 열어봤죠. 그리고 그때 깨달았습니다.”


“뭘 깨달으셨다는 거죠?”

“제가 잊고 사는 동안에도, 그들은 살아 있었습니다. 진행되지 않는 이야기 속에서 각자의 역할을 다하며 살고 있었어요. 그래서 저는 제가 만든 이 세계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걸 깨달았죠.”


“아······. 굉장히 심오한 이야기네요!”

“하하. 제가 너무 심각했나요?”


“작가님의 경우엔 특히, 아주 세밀한 인물 설정으로 유명한데요. 주인공에서 엑스트라에 이르기까지, 스토리 구상보다 인물 설정에 더 공을 들이신다는 게 사실인가요?”

“하하. 아무리 그래도 스토리가 우선이죠. 뭐 그래도······ 네. 다른 작가들에 비해 인물 설정에 많은 에너지를 쏟는 건 사실입니다. 아무리 비중이 적은 인물이라고 해도 각자의 개성과 역사, 그리고 역할과 결말을 분명하게 잡아주죠.”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가요?”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서······ 라고 하면 대답이 될까요?”


“음······. 좀 더 설명해 주시겠어요?”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그들은 모두 살아 있습니다. 제가 만든 세계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죠. 그렇기 때문에 세부적인 설정으로 그들을 꽉 붙잡아두지 않으면, 언젠가는 의문을 품게 됩니다. 자신이 속한 세계 자체를 의심하고, 결국 깨닫게 되는 거죠. 자신이 등장인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요.”


“······ 깨달으면······ 어떻게 되나요?”


의아한 표정으로 묻는 리포터에게, 나는 빙긋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제 생각일 뿐이지만······ 아마 온전한 깨달음을 얻은 인물은 작가의 자리를 뺏을 수 있다고 봅니다. 작가는 소설이라는 세계의 주인이고, 주인은 그 세계를 가장 잘 알고 또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어야만 하니까요.”


대답을 마치고, 나는 내 소설 속에 등장하는 한 엑스트라를 떠올리며, 한 번 더 미소 지었다.


소설의 첫 장면에서 등장하는 인물.

작은 언덕 위에서 매일을 무기력하게 보내는 인물.

날마다 왠지 모를 허탈함에 괴로워하는 인물.

그 어떤 의심도, 깊은 사색도 할 수 없는 인물.

한평생 고독하게 살도록 '확실하게 설정'된 인물.


나와 똑같은 ‘남혁’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주인공보다 더 많은 설정을 부여해 준 그 엑스트라 중의 엑스트라를.



<끝>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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