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빽호 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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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중·단편

빽호
작품등록일 :
2019.08.05 12:12
최근연재일 :
2020.01.28 16:57
연재수 :
18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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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4
추천수 :
8
글자수 :
93,746

작성
19.08.09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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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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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글자
11쪽

[단편] 악몽

DUMMY

띵- 동-


악몽은 언제나 익숙한 알림음과 함께 시작된다. 아니, ‘시작’보다는 ‘초기화’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 같다.

나는 끝나지 않는 악몽 속에 갇혔으니까.



어두컴컴한 뒷골목. 나를 쫓는 것이 분명한 발소리.

머지않아 잡히게 될 것이라는 사실쯤은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나는 이 무의미한 도주를 멈출 수가 없다.


“허억...... 허억...... 이년 생각보다 재빠르네.”

“아 그러니까. 그냥 묶어놓고 시작할걸.”

“뛰어봤자 5초컷이라고 객기 부릴 때 알아봤다.”


발소리의 주인공은 교복을 입은 남학생 두 명과 여학생 한 명이다.


“야야, 시간 없어. 빨리 하자.”

“오케이. 가위, 바위, 보!”


가위가 둘, 바위가 하나.


“아싸!”

“아이씨...... 저 새끼는 맨날 주먹이야.”

“알고도 지는 우리가 등신이지...... 아, 됐고. 가위, 바위, 보!”


순서가 정해졌다. 두 학생은 내 양팔을 나눠 잡고, 첫 번째 남학생은 내 앞에 선다.


“고무고무- 개틀링!”


남학생의 무자비한 주먹이 마구 날아든다. 피할 수도, 몸을 웅크릴 수조차 없다. 너무나 익숙하지만 한편으론 언제나 새로운, 고통이 밀려온다.


”야, 이제 교대해!”


두 번째 여학생은 자신의 종아리보다 더 굵은 야구방망이를 들고 다가온다. 작은 체구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완력으로 방망이를 힘껏 휘두르는 그녀. 온몸의 뼈가 으스러지는 고통에 차라리 기절해버리고 싶지만, 그런 자비조차 내겐 허락되지 않는다.


“야...... 쟤 체대 준비하냐.....?”

“몰라...... 앞으로 누님이라고 부르자......”


동그란 안경을 낀 세 번째 남학생은 호주머니에서 작은 커터칼을 꺼내든다.


“와...... 저 싸이코 새끼......”

“저건 언제 챙겼대?”


칼날이 몸을 스칠 때마다 날카로운 통증이 밀려온다. 재미있는 놀이라도 하는 듯, 남학생의 얼굴에는 생기가 넘친다. 지금 이 순간 가장 원망스러운 것은 신음소리를 내뱉을 수도, 눈을 감아버릴 수도 없는 스스로의 무력함이다.



띵- 동-


지금까지 내가 이 알림음을 몇 번이나 들었던가?

알 수 없다. 정확히 9999번까지 센 순간부터 더 이상 세는 것을 포기했으니까.


동화 속에서 튀어나온 듯한 단독주택의 마당.

마당 한가운데의 기둥에 묶여있는 내 몸은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하다. 그 어떤 큰 상처를 입어도, 알림음이 들려오면 몸은 깨끗하게 복구된다.

하지만 사라지는 것은 오직 상처뿐, 고통은 오롯이 내 몸에 각인되어 있다. 지금껏 경험한 모든 고통은 나의 기억 속에, 감각 속에, 쌓이고 또 쌓인다.


단독주택의 문이 열리고 백발의 노부부가 등장한다. 이 악몽 속에서 몇 번이고 마주했던 낯익은 얼굴들이다. 휠체어에 앉은 아내의 얼굴엔 표정이 없고, 휠체어를 미는 남편은 조금 지쳐 보인다.


남편은 내게서 3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휠체어를 세우고, 그녀가 나를 편안하게 감상할 수 있도록 방향을 조정한 후 잠금장치를 건다.


회색빛 얼굴로 날 뚫어지게 바라만 보는 아내를 뒤로하고, 내게 다가오는 남편. 그가 미리 준비해 온 액체가 내 몸 구석구석에 뿌려진다.


“시작할까요?”


다정하고 차분한 그의 목소리에서 상대를 향한 존중이 듬뿍 느껴진다. 아내의 고개가 보일 듯 말 듯 작게 끄덕이고, 이내 내 몸이 불타오른다.


그저 뜨겁다는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이 시작된다. 정신마저 녹아내릴 것만 같은 이 고통은 수차례 경험해 본 것임에도 언제나 새롭다.


일렁이는 불꽃 사이로 그들이 보인다. 웃고 있지만 왠지 슬퍼 보이는 표정. 그들에게 왜냐고 묻고 싶다. 어째서 항상 그렇게 슬픈 눈을 하고 있느냐고.



띵- 동-


이 악몽이 시작된 건 언제부터였지? 악몽이 시작되기 전의 나는 누구였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 꿈의 내용이 잘 기억나지 않는 것처럼, 꿈에서는 현실을 떠올릴 수 없나 보다.

차라리 다행이다. 언젠가 이 악몽에서 깨어날 때, 이 모든 고통의 시간도 한여름 밤의 꿈처럼 잊히겠지.

물론, 이 악몽에 끝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말이다.


“지수 엄마! 같이 좀 가!”

“저 여편네는 밥 먹고 등산만 했대? 어우......”

“내 말이!”


붉게 물든 단풍잎이 바람에 날리고, 그보다 더 알록달록한 등산복으로 멋을 낸 한 무리의 중년 여성들이 다가온다.


“아줌마들! 그렇게 굼떠서 어디 본전 뽑으시겠어요? 호호호.”


지수 엄마라 불린 그녀는 가장 먼저 내 앞에 도착한다.


철썩-


망설임 없는 그녀의 손짓에 왼쪽 뺨이 얼얼하다. 그래도 이 정도는 견딜 만한 편. 어쩌면 이번 악몽은 조금이나마 편안할지도 모르겠다.


“아야야......”

“아이고, 지수 엄마. 그러다 손 다쳐.”

“하여간 저 여편네 성격 급한 건 알아줘야 된다니까. 자, 이거!”


언뜻 보기에도 두 치수는 작아 보이는 브랜드 등산복을 억지로 껴입은 뚱뚱한 여성. 그녀가 배낭에서 커다란 공구 상자를 꺼내 내려놓는다.


“대에에에박!”

“언니, 준비성 장난 아니다!”

“우리 신랑 알잖아. 꼭두새벽부터 설친다 싶더니, 이렇게 다 챙겨놨더라니까? 호호호.”

“이 언니 신랑복 하나는 타고났어. 우리 신랑은 아직도 자고 있을걸!”

“자자, 얼른 시작하자고요!”


여성들은 제각각 마음에 드는 공구를 집어 든다. 잠시나마 편안함을 기대했던 스스로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새삼 깨닫는다. 쇠 비린내를 동반한 무지막지한 고통이 시작된다.


“기태 엄마, 왜 그러고 있어?”

“아, 그게...... 저는 좀......”


한창 작업에 열중하고 있던 모든 여성들의 관심이, 뒤쪽에 멀뚱히 서 있던 여성에게 집중된다.


“뭐야. 기태 엄마, 또 혼자만 점잖은 척하는거야?”

“아니, 그게 아니라...... 아무래도 제가...... 임신 중이다 보니......”

“그러니까 더 제대로 해야지!”

“그래! 이게 다 조기교육인데!”

“언니들 말이 맞아! 얼른 이리 와, 기태 엄마!”


잠시 망설이던 그녀가 자신의 배를 쓰다듬는다. 이내 결심한 듯 발걸음을 옮긴다. 그녀의 손에 작은 실톱이 들린다. 지금 사방에 진동하는 이 냄새가 쇠 비린내인지, 피 비린내인지, 나는 더 이상 분간할 수 없다.



띵- 동-


온통 붉은색으로 칠해진 작은 방 안. 벽에 열십자로 매달린 나의 발끝이 보이는 순간, 자동적으로 온몸이 떨려온다. 그가 왔다.

이 지긋지긋한 악몽 속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한 사람. 그리고 내게 가장 크고 다양한 고통을 선사한 사람.


그는 언제나처럼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까만 정장 차림이다. 또한 언제나처럼 안락의자에 기대앉아 나를 가만히 바라본다. 그의 눈빛이 내 몸에 날아와 꽂히면, 지금까지 겪어 온 모든 고통들이 한꺼번에 되살아나 나를 덮쳐온다.


그가 의자에서 일어난다. 손발톱이 뽑히고, 팔다리가 뜯겨도, 목이 졸리고, 내장이 쏟아져도, 나는 죽을 수조차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이 고통을 오롯이 받아들여 선명하게 느끼는 것 뿐이다.

한시라도 빨리 다음 알림이 울리길 간절히 기도하지만, 언제나 그와의 시간은 수십 배 더 천천히 흘러간다.


이 악몽은 대체 언제쯤 끝나는 걸까? 끝이 나긴 하는 걸까? 아니, 애초에 이게 악몽이 맞긴 한 걸까? 왜 하필 나일까? 알림과 함께 등장하는 저들은 대체 누구일까? 내게 고통을 주는 것 외엔 아무것도 관심 없어 보이는 저들에게, 나의 고통은 대체 어떤 의미인 걸까?



띵- 동-


샛노란 모자와 옷을 맞춰 입은 어린아이들이 선생님의 뒤를 따라 들어온다.


“자아, 차례를 지켜요. 여러분!”


아이들이 한 명씩 앞으로 나오고, 선생님은 그들의 손에 작은 돌멩이를 쥐여준다.


내 몸을 때리는 돌멩이보다, 돌멩이를 던지는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얼굴이 아프다.

돌멩이가 빗나가 아쉬워하는 얼굴이, 머리를 정확히 적중시켜 기뻐하는 얼굴이, 한 번 더 던지게 해달라고 조르는 그 모든 얼굴들이 사무치게 아프다.


“혜은이가 마지막이네. 자, 받아요.”

“고맙습니다. 선생님.”


마지막으로 내 앞에 선 여자아이는 머뭇대며 돌을 던지지 못한다.


“혜은아. 선생님이 도와줄까?”

“......아뇨. 할 수 있어요.”


대답과 달리 작은 돌멩이와 나를 번갈아보며 계속 망설이는 아이. 어쩔 줄 모르는 아이를 바라보는 내 뺨에 이질적인 감각이 느껴진다. ‘눈물’이다.


당혹스러움에 머리가 마비되는 기분이다. 완전히 말라버린 줄로만 알았던 눈물. 이 맑고 투명한 액체가 아직도 내 속에 남아 있었다.


아이는 나보다 더 놀란 듯 내게서 눈을 떼지 못한다. 이내 결심한 듯,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내 바로 앞까지 다가온 아이를 선생님과 다른 아이들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본다.

아이의 자그마한 입이 움직인다.


“아줌마가 울 자격은 있어요?”


아이는 단호한 표정으로 팔을 든다. 손에 꼭 쥔 돌멩이가 내 이마를 향한다.



[띵ㅡ 동ㅡ]

[수감번호 173번의 67만 3581회차 참여형 관람이 종료되었습니다. 관객 여러분께서는 질서를 지켜 퇴장해주시기 바랍니다.]

[출구 좌측의 이벤트 부스에서는 여러분의 소중한 추억이 담긴 사진으로 기념품을 제작해드리고 있습니다. 티셔츠, 머그컵, 폰 케이스 등 다양한 상품이 준비되어 있으니 많은 이용 바랍니다.]



“토끼반 친구들! 재미있었나요?”

“네에-!”

“지금 만나본 수감번호 173번은 세계적으로도 몇 안 되는 무기수랍니다. 173번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 아는 친구?”

“저요! 저요!”

“혜은이가 말해볼까?”

“어린애들을 납치해서요. 아프게 하고, 배고프게 하고, 엄마도 못 만나게 했어요.”

“그래요. 173번은 무려 21명이나 되는 어린이들을 납치했어요. 그리고 오직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아이들을 끔찍하게 고문하고 죽인 희대의 악녀랍니다. 다행스럽게도 그녀가 감옥에서 숨을 거두기 직전에 인공지옥 시스템이 완벽하게 개발됐죠! 자, 그럼 173번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요?”

“영원히 지옥에서 살게 돼요!”

“맞아요. 173번은 모든 기억을 잊은 순수한 의식 상태로, 영원히 인공지옥 시스템 속에서 살아갈 거예요. 본인이 주었던 고통들을 되돌려 받으면서. 단 1초도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죠.”


“아쉽지만 이제 자유관람권은 1장밖에 남지 않았어요. 마지막은 어떤 죄인을 만나러 가 볼까요?”

“66번! 66번! 66번!”



[수감번호 66번 ‘조X순’의 9억 9999만 9999회차 참여형 관람이 시작됩니다. 관객 여러분께서는 질서를 지켜 입장해주시기 바랍니다.]

[띵ㅡ 동ㅡ]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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