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빽호 님의 서재입니다.

짧은 이야기들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중·단편

빽호
작품등록일 :
2019.08.05 12:12
최근연재일 :
2020.01.28 16:57
연재수 :
18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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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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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03 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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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쪽

[단편] 고민 상담 방송

DUMMY

“고구마처럼 퍽퍽한 인생의 한 줄기 사이다 같은 방송! 안녕하세요. ‘이다’입니다!”


언제나와 같은 오프닝 멘트를 마친 남혁은 크게 심호흡을 하며 채팅창을 주시했다.


-엥? 오늘 방송 쉰다더니?!

-오, 하는거임?

-이다형님 약속 까였넼ㅋㅋㅋㅋ

-얼마만의 외출인데... (왈칵)


“에이 아니에요. 생각보다 술자리가 일찍 끝나서요. 하하.”


거짓말이다. 술자리는 아직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남혁이 도망치듯 그곳을 빠져나왔을 뿐.


-오 그럼 오늘 음주방송임?

-경찰 아저씨! 여기에요 여기!


“네! 음주방송 맞습니다! 그래도 대리운전만큼은 확실하게 불러서 왔으니 안심들 하세요.”


역시 거짓말이다. 남혁에겐 대리기사를 불러 운전하게 할 차가 없으니까.



*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남혁은 불알친구들과 함께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혁이 너 요즘도 방송, 그거 하냐?”


정우의 질문에 선홍빛 참치를 김 위에 올려놓던 남혁의 손이 주춤했다.

정우는 굴지의 대기업 T사의 직원일 뿐 아니라, 무려 ‘최연소 과장’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계신 몸이다.


“하지 그럼! 나 한번 본 적 있는데 생각보다 사람 많더라?”


시키지도 않은 대답을 대신하고 있는 수현은 그 이름도 찬란한 ‘금수저’다. 잘 나가는 사업가 부모님 덕에, 알아서 잘 굴러가는 매장 몇 개를 운영하며 사장님 소리를 듣고 사는 부러운 인생의 주인공.


“진짜? 몇 명이나 보는데?”


눈을 키우며 묻는 해진은 대학 진학 대신 공무원 시험을 선택하고, 첫 응시에 바로 합격한 능력자 중의 능력자다. 박봉이라 힘들다는 엄살을 입에 달고 살지만, 근방의 중매쟁이들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1등 신랑감.


“매번 다르긴 한데...... 많을 땐 50명 정도?”


그리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하는 이 남자. 정우가 승진턱을 쏜다는 연락에 자존심과 식욕 사이에서 잠시 고민하다 결국 방송까지 취소하고 나온 남혁이다.


“김수현 이 븅신아. 50명이 많은 거냐?”

“아니, ‘생각보다’ 많다고. 이 새끼야!”

“혁이 너, 그걸로 생활은 되냐?”


“그냥...... 먹고 살 정도는 돼.”


거짓말이다. 아무리 친한 친구들이라 해도, 32살이나 먹고 아직까지 부모님께 손을 벌리고 있다는 사실을 털어놓긴 힘들었다.


“올....... 요즘 개나 소나 인터넷방송한다지만, 상위 몇 프로 빼고는 알바비도 안 나온다던데. 먹고 살 정도면 괜찮은 거 아니냐?”

“그렇지. 갈구는 상사도 없고, 출퇴근도 없고. 부럽다 야.”

“하긴 어릴 때부터 남혁이 저 새끼는 뭔가 남다르긴 했어. 입도 잘 털고, 머리도 좋고.”

“아 맞다. 우리 수능 끝나고 설악산에서 조난됐던 거 기억나냐?”

“캬....... 추억 돋네. 그때 남혁이 아니었으면 우리 다 골로 갈 뻔했다, 진짜.”

“그러니까. 초딩 때 배운 모스부호를 10년이 넘도록 외우고 있는 게 말이 되냐?”

“그 말이 안 되는 놈 덕분에 지금 우리가 살아있는 거지!”

“그렇지! 그리고 멀쩡한 등산로에서 병신같이 굴러떨어진 ‘누구’ 덕분에 조난이 된 거고.”

“아 진짜, 이 새끼 아까부터 겁나 시비 거네.”


언제나처럼 최강의 케미를 자랑하는 수현과 해진의 티키타카를 끊어놓은 것은 정우였다.


“이제 나이도 있는데, 그냥 먹고살기만 해서 되겠냐?”


얼음물을 끼얹은 듯 차갑게 가라앉은 분위기. 이런 반응쯤은 예상했다는 듯, 정우는 무표정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지난주에 본가 내려갔다가 너네 부모님 뵀다. 걱정 많이 하시더라.”

“.......”

“늦은 감은 있지만, 지금이라도 제대로 된 직장 알아봐야 하지 않겠냐? 혁이 너 원래 말주변도 좋고 머리도 잘 돌아가니까, 영업 쪽이 딱일 것 같은데....... 또 그쪽이야 원래 실적 위주 판이니까 잘만 하면 금방 클 거고.”

“.......”

“이번에 대학 선배가 직장생활 접고 창업했거든. 생각 있으면 자리 마련해볼게.”


순간 남혁은 한동안 잊고 있었던 감정이 되살아나는 것을 느꼈다. 인터넷방송을 시작한 후 단돈 1000원의 후원금에도 갖은 립 서비스를 남발해야 했던 남혁이 잊고 살았던 그 감정, 자존심이었다.


“사실은.......”


남혁은 한참이나 손에 들고 있었던 참치를 앞접시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지금 본인에게 가능한 최대의 여유로운 표정으로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말을 이었다.


“준비하고 있는 게 있어.”


거짓말이다. 지금의 남혁에게 ‘계획’따윈 없다. 그저 하던 방송을 계속하는 것뿐. 친구들이 착실하게 자신의 가치를 높여 나갈 때 남혁은 방송에 전념했다. 또한 앞으로도 자신에게는 방송 외의 다른 길은 없다고 믿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다. 남혁에겐 이제 와서 다른 길로 돌아갈 용기가 없었으니까.


“...... 그래?”

“응. 좀 더 명확해지면 제대로 얘기할게. 아직은 구상 단계라.......”

“그래....... 그럼 다행이고. 뭐가 됐든 너무 오래 끌지는 말자. 너네 부모님도 예전 같지 않으시더라. 더 늦기 전에 효도해야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정우는 남혁의 말을 믿지 않았다. 매사 해맑은 수현과 해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남혁 또한, 그들이 믿어줄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저 이 불편한 대화를 한시라도 빨리 끝내고 싶었을 뿐.


“나 먼저 일어난다. 사실 오늘 약속 두 탕이었거든.”


“이 배신자 새끼!”

“연예인이냐?”

“그래....... 다음에 보자.”


남혁은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이제 곧 자신이, 저들의 좋은 술안주가 될 것이라 생각하면서.



*

“오늘은 음주방송인 만큼! 두 분 정도만 후딱 상담해드리고 자러 갈 겁니다. 신청하실 분들은 서두르시는 게 좋겠네요!”


사실 오늘의 남혁은 오히려 고민 상담을 받아야 할 처지였지만, 뭐 어쩌겠는가. 남혁이 지금 믿을 구석, 아니 붙잡을 유일한 끈은 이 방송뿐인 것을.


-줄을~~ 서시오~

-오늘 한정판매랍니다!!


-‘다줄거야’님이 1000원 후원!

[상담 ㄱ]


“네! 다줄거야님, 접수 완료!”


남혁의 방송에서 고민 상담을 신청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후원금과 함께 메시지로 상담을 신청하면 끝. 금액 제약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다들 약속이나 한듯 최소 후원금액인 1000원으로 신청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남혁은 터져 나오려는 한숨을 속으로 삼키며 마우스를 잡았다. 그리고 ‘다줄거야’의 닉네임을 클릭해, 자신에게만 글자색이 다르게 보이도록 설정했다.


“자, 다줄거야님. 뭐가 문제죠?”


-썸녀가 돈을 너무 안 써서 고민임


-갑자기 분위기 호구···

-닉네임부터 불안했자너~

-ㅅㅂ 벌써 목막힘. 이다형님 사이다가 시급합니다!!


단골 상담 소재의 등장이다. 딱 1000원짜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안 되는 고민거리.


“아....... 여러분 일단 진정하시고, 일단 구체적인 상황을 좀 들어볼까요?”


사실 고민 상담이라는 건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니다.


“와....... 진짜 양심 없네. 그래서요?”


적절한 추임새를 넣어가며 상대의 이야기를 충분히 들어준다.


-님 무슨 기부천사임?

-와 진짜 역대급 호구닼ㅋㅋㅋㅋ 오지고 지리고 렛잇고~~

-이래서 내가 썸을 안타는 겁니다 여러분!!

-형님 내스타일인데 나랑 한번 만나보쉴?ㅋㅋㅋ

-다줄형님 모쏠이라는게 학계의 정설


그와 동시에, 남의 고민거리를 파헤치며 자신의 암울한 인생에 조금이나마 위안을 얻으려는 자들. 그것을 위해 이 방을 찾는 고인물 시청자들이 실컷 떠들도록 내버려 둔다.


-그래도··· 나쁜 애는 아님···


“네, 맞습니다! 그 여자분이 나쁜 게 아니라, 다줄거야님이 병신일 뿐입니다!”


충분히 분위기가 달아올랐다 싶으면 강력한 한 마디로 주의를 환기시킨다. 그리고 여론의 흐름에 부합하면서도 남혁의 방송 스타일을 유지할 수 있는 방향으로 마무리를 지어주면 된다.


“늘 그렇듯이 오늘도 팩트 위주로 갑니다.”

“다줄거야님은 그 분을 ‘썸녀’라고 했어요. 근데 과연 그 여자분도 다줄거야님을 ‘썸남’이라고 생각할까요?”

“저어어어어어어얼대 아닐겁니다. 단언컨대, 다줄거야님은 그냥 그 여자분의 ‘지갑’ 내지는 ‘24시간 현금인출기’일뿐이에요.”

“죽도록 야근해가며 번 돈, 언제까지 애인도 아닌, 그렇다고 썸녀도 아닌 여자한테 갖다 바칠 겁니까?”

“차라리 그 돈으로 PT를 끊고, 옷이나 사 입어요. 똥차 가면 벤츠 오는 거 알죠? 곧 나타날 벤츠 기다리면서 자기관리나 하시라고요. 아시겠어요?”


-네ㅠㅠ 정신이 확 드네요.. 오늘부로 연락 끊겠음···


말은 저렇게 하지만 그는 아마 그녀와 연락을 끊지 못할 것이다. 과자 한 봉지 값도 안 되는 상담을 마친 남혁은 급격한 피로감이 몰려오는 것을 느꼈다.


‘그냥 잘 걸 그랬나······.’


후회해봤자 이미 시작해버린 방송이다. 나름 프로정신을 지닌 남혁이 얼른 다음 신청자를 찾아 대충 상담해주고 자야겠다고 마음먹은 그 순간이었다.


-‘다이’님이 1000000원 후원!

[상담 신청합니다]


“네! 다이님. 접수완...... 료.......”


-??????????????????

-100만원???

-ㄹㅇ?

-오류난 거 같은데?

-뭐여 이거ㅋㅋㅋㅋㅋㅋㅋ

-다이님 후원금액 잘못 누른거 아님?

-실수라기엔 0이 3개나 많음. 진짜 100만원 후원한 듯?

-이것이 ‘후원’이란 것이다 이 거지들아!

-엌ㅋㅋㅋㅋㅋㅋ 이다형님 계탔넼ㅋㅋ


채팅창은 불타올랐다. 잠시 얼어있던 남혁은 노련한 방송인답게 금세 상황을 파악하고, 짐짓 여유로운 척 시청자들을 진정시켰다.


“워워....... 여러분 진정하세요.”


말과는 달리, 지금 정말 진정해야 할 사람은 다름 아닌 남혁이었다. 남혁의 심장은 금방이라도 밖으로 튀어나올 듯이 격하게 뛰고 있었다.


“아니, 여러분! 원래 제 방송에서 후원금액은 무제한입니다! 다 아시면서 왜들 이러세요.”


무려 100만원이다. 1000원짜리 고민 상담을 1000번이나 반복해야 얻을 수 있는 돈.

하지만 이 돈의 진정한 가치는 금액이 아니었다.

이 100만원은 ‘기회’였다. 1000원짜리 고민만 넘쳐나던 남혁의 방송에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 줄 수도 있는 기회.


-후원금을 100이나 쏠 수 있는 사람도 고민이 있다고??

-여러분 인생이 이렇게 힘든겁니다!

-100만원짜리 고민은 어떤걸지 상상도 안감


“자자 여러분, 집중! 후원금액이 얼마든 제 상담의 진정성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남혁은 이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겠다 다짐하며, ‘다이’의 닉네임을 클릭해 글자색을 설정했다.


“어? 그러고 보니...... 다이님, 제 방송 초창기부터 쭉 구독하셨죠?”


-네


-구독자가 넘 없어서 닉네임 다 외우는 클라스

-그럴만하지...............(왈칵)


“에이 그런 게 아니라, 제 닉네임 거꾸로 한 거잖아요. 그래서 기억하고 있을 뿐입니다!”


남다른 기억력을 가진 남혁이지만 모든 시청자들을 기억하진 못했다. 하지만 방송 초기부터 꾸준히 시청하면서 단 한 번도 채팅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 심지어 자신의 닉네임을 거꾸로 뒤집어 사용하는 사람이라면, 기억에 남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 본격적으로 상담 진행해볼게요. 다이님, 고민은요?”


-제가 정말 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네, 그런데요?”


-가족들이 원하지 않을 것 같아서 못하고 있습니다


“어떤 일이길래요?”


-그건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인터넷이 끊어지기라도 한 듯 조용한 채팅창. 아마 지금 이 방송을 지켜보고 있는 모든 시청자들은 남혁과 같은 의문을 품고 있을 것이었다. 잠시 망설이던 남혁은 마른침을 삼키며 물었다.


“다이님. 굉장히 조심스럽습니다만.......”


-네?


“혹시...... 자살...... 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아ㅋㅋ 아닙니다ㅋㅋㅋ


-ㅅㅂ 개쫄았네ㅋㅋㅋㅋㅋ

-닉네임도 하필 ‘다이’야 왴ㅋㅋㅋㅋㅋㅋ

-긴장감 오졌닼ㅋㅋㅋㅋㅋㅋ


모두가 품었던 불길한 의문이 해소되자, 채팅창은 다시금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그럼 지금 상황은 가족들이 이미 반대를 하고 있다는 게 아니라, 아마 반대를 할 것 같다는 말씀이신 거죠?”


-네 분명 반대할 겁니다


“음....... 아무래도 하시려는 게 뭔지를 모르니 상담해 드리기가 좀 애매하네요.”


-아,., 흠.. 그건.,.. 죄송합니다.,..


“아뇨, 아니에요. 죄송하긴요.”


남혁의 말대로 ‘다이’라는 닉네임을 사용하는 남성이 죄송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오히려 남혁은 ‘다이’에게 절이라도 하고픈 심정이었다. 그는 이미 엄청난 금액의 상담료를 지불했고, 심지어 남혁의 고민 상담이라는 행위 그 자체의 품격을 1000배로 높여 주었으니까.


이후의 상담은 물 흐르듯 진행되었다. 남혁은 충분히 들어주었고, 시청자들은 마음껏 떠들어댔다.


“대충 다이님의 상황은 충분히 알 것 같네요. 잠시만요.”


남혁은 미간을 좁히며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마우스 휠을 위로 움직였다. 답은 진작에 정해 두었지만, 조금 더 신중해 보이기 위해서였다.

한참이나 채팅창을 위로 올려보던 남혁은 빨간색으로 표시된 한 문장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리고 보일 듯 말 듯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Go, 아니면 Stop.”

“이건 철저히 다이님의 선택에 달린 문제지, 누가 답을 내려줄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이님께서 저를 믿고 도움을 요청하신 만큼, 감히 참견 한번 해보겠습니다.”


잠깐 뜸을 들인 남혁은 단호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무조건 Go 하세요.”

“아직 나이도 어리신데, 앞으로 남은 평생을 후회 속에 살아간다면 너무 끔찍하지 않겠어요?”

“가정의 평화? 물론 중요하죠. 그럼 내 마음의 평화는요?”

“눈치 보지 말고 그냥, 저질러버리세요! 세상의 모든 위업에는 고난이 뒤따르게 마련이니까요.”


“그 대신.”

“하나만 약속해주세요.”

“선택의 결과가 어떻든, 반드시 본인 스스로 책임을 지겠다고.”

“어른이니까요. 알겠죠?”

-네 알겠습니다 정말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ㅗㅜㅑ 오늘 이다형님 좀 달라보인다야

-쌉ㅇㅈ.. 코찡했자너..

-아아, 이것이 ‘100만원 파워’라는 거시다

-쿨내퍽발ㅋㅋ 지려버림ㅋㅎㅋ


“자, 그럼! 예고했던 대로 오늘 방송은 여기서 마치도록 할게요. 다들 좋은 밤 되시고, 내일 다시 만나요!”


방송을 마친 남혁은 곧장 냉장고를 열어 소주 병을 꺼내들었다. 뚜껑을 열자마자 단숨에 반 병 정도를 들이켰지만, 두근대는 심장은 쉽게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후우.......”


남혁은 크게 심호흡을 하며 바닥에 주저앉아, 남은 소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오늘 이 특별한 상담이 자신의 방송에 어떤 변화를 불러올 것인지, 또 그로 인해 자신의 인생은 얼마나 달라질 것인지 생각하면서.



*

지잉- 지이이잉-


남혁은 쉴 새 없이 울려대는 진동소리와 함께 눈을 떴다. 정우였다.


“여보세요.”

“야!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아!”

“잤어....... 왜?”

“너 지금 실검 1위야, 1위!”

“뭐?”


그대로 정우의 전화를 끊어버린 남혁은 멍한 표정으로 휴대전화를 쳐다보았다. 총 77통의 부재중 전화. 정우, 수현, 해진에 이어 부모님과 친척들, 오래전에 연락이 끊어졌던 동창들까지.

사태의 심각성을 느낀 남혁은 급히 인터넷 창을 열어 실시간 검색어를 확인했다.


[1] 이다

[2] 트위스트TV 이다

[3] 율흠동 일가족 살인사건

[4] 살인종용 스트리머

[5] 트위스트TV 방송 다시보기

[6] 일가족 살인범 자수

.......



*

그날 이후, 남혁의 인생은 완전히 달라졌다. 그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처음 며칠간은 경찰 참고인 조사와 각종 인터뷰로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야 했다. TV, 포털사이트, 신문, SNS에 이르기까지. 온갖 미디어에서 남혁을 이야기했다.


바쁜 나날을 보내던 남혁이 오랜만에 방송을 재개했을 땐, 많아봐야 50명 정도에 불과하던 실시간 시청자 수가 5만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이다형님··· 고생많았슴···

-ㅅㅂ살인자새끼ㅋㅋ 다시 방송하는거 봐라

-이다가 왜 살인자임ㅡㅡ 갓직히 피해자 아님?

-미필적고의다 씹덕들아~ 카바칠걸 쳐야지ㅉ

-이게 어떻게 미필적 고의죠? 이다님이 점쟁이라도 되나요? 님은 채팅 몇 분 하고 그 사람이 살인범인지 강간범인지 판검사인지 다 알아낼 수 있나요?

-팩트) 이다가 하지말라고 했음 그 사람들 안죽었다는 거

-레알팩트) 하지 말랬어도 언젠가는 저질렀을 놈임. 궁예질ㄴㄴ

-다시보기 수십번 봤는데.. 이다 때문 맞는듯..

-아니 정작 살인범 본인도 상담은 그냥 별 생각없이 해본거랬는데 왜들 난리얔ㅋㅋ


여론은 극명하게 갈렸다. 과연 남혁은 잔혹한 살인을 종용한 악마인가, 불운한 피해자인가.

사실 남혁에게 사람들의 여론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이미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인터넷 방송인 중 하나라는 사실이었다.



*

“혁아, 오랜만이다.”

“이야....... 우리 남혁 군! 자네 언젠가는 사고 칠 줄 알았다네!”

“김수현, 넌 좀 닥치고. 저거 혁이 네 차냐?”


“어? 어, 맞아.”


“와....... 난 언제 저런 차 몰아보냐.......”

“해진 군, 자넨 인생 10회차에도 안된다네.”

“닥치라고! 이 금수저 새끼야.”


다섯 달 만에 다시 모인 남혁과 친구들. 친구들은 변함이 없었지만, 남혁은 조금 달라져 있었다. 더 이상 남혁은 도망치듯 술자리를 빠져나갈 이유도, 먹음직스러운 참치를 손에 들고 눈치를 봐야 할 이유도 없었다.


“혁이 너 이번에 ‘사이다 쇼’ 들어간다며?”


“응. 어제 첫 촬영했어.”


“박구라가 MC 보는 그 방송?”

“와, 이제 연예인이네! 이 자랑스러운 자식!”

“진짜 인생역전이다. 너 그 살인범한테 사식이라도 넣어줘야 되는 거 아냐?”


“.......”


“수현아. 그건 좀 아닌 것 같다.”

“저 금수저 새끼는 철이 안 드냐 왜.......”

“내가 또 오버한 거냐? 쏘리, 쏘리!”


“아니야. 그 사람 덕분인 건 사실인데 뭐.”


“오....... 대인배.......”

“사람 마음이란 지갑 두께만큼 너그러워진다는 게 사실이었어!”

“헛소리 그만하고 술이나 먹자.”


챙-


남혁과 친구들은 잔을 높이 들어 부딪혔다. 맑고 투명한 소주를 한 입에 털어넣은 남혁은 부드러운 참치를 씹으며 생각에 잠겼다.


그때, 그가 찍었던 점들은 단순한 우연에 불과했을까?


[ 아,., 흠.. 그건.,.. 죄송합니다.,.. ]


남혁이 방송을 시작한 초반에 딱 한 번 이야기했었던 친구들과의 설악산 조난 일화. 그는 그 이야기를 줄곧 기억하고 있었던 걸까?


[ -∙- ∙∙ ∙-∙∙ ∙-∙∙ ]


그는 정말로 자신이 하려는 일을, 남혁에게만 알려주려고 했던 걸까?


[ K I L L ]


죽으려는 게 아니라, 죽이려는 거라고.

남혁에게만은 사실을 털어놓고, 진실된 조언을 받고 싶었던 걸까?


“야야. 그 살인범 무기징역이래.”

“자수했는데도 무기야?”

“자수가 대수냐. 부모님에 누나에 동생에...... 자기 가족을 싹 다 죽였는데.......”

“그래! 이런 놈은 사형이지!”

“사형 판결 나 봤자지 뭐. 집행도 안 하는데.”


해진의 휴대전화를 함께 들여다보며 떠드는 세 친구들을 바라보던 남혁은 다시 빈 잔을 채웠다. 그리고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도록, 마음속으로 속삭였다.


당신의 메시지는 잘 받았다고.

책임지겠다는 약속, 지켜줄 거라 믿었다고.

당신보다 내가 더, 진심으로 고맙다고.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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