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 평범한 파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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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 느낌이 다른 오늘이지만.
사실 똑같은 하루다.
아침에는 새가 울고
언제나 똑같은 위치에서 태양이 떠서 똑같은 시간에 태양이 진다.
NPC는 똑같이 움직이며 정해진 대사를 한다.
심지어..
저 굴뚝에 나는 연기도 진짜 자세히 뜯어보면 똑같은 패턴의 반복이다.
게다가 유저들도 똑같이 누군가는 사냥하러 가며 누군가는 놀러, 남자나 여자가 목표일 수도 있고 레이드를 클리어하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변한 것은..
내 마음가짐이다.
아니. 나뿐만이 아닌 우리 파티원의 마음가짐이다.
“ 이번엔 깨죠. “
비장한 모습으로 포크를 들고 소시지를 찍어 입에 넣는 망치님.
“ 어그로 관리 철저히 할게요. “
비장한 모습으로 젓가락을 들고 면치기를 하는 방패님.
“ 후우... 반드시.. 깰 겁니다. “
마찬가지로 비장한 모습으로 생선 부분을 간장에 찍어 초밥을 먹으며 와사비의 맛을 느끼는 바코드님.
“ 잘해볼게요. 반드시. 단 한 명도 죽이지 않겠어요. “
마치 고기라도 뜯어 먹듯이 진지하게 연어 샐러드를 뜯어 먹는 호에에님.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 향하고
나는 가볍게 드레이크 스테이크를 단칼에 베어버린 뒤 입에 넣고 잔인하게 씹는다.
“ 렙빨로 밀어붙여서 순식간에 깨드릴게요. “
비장한 말은 할 줄 모른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에서 최선을 다해 모두에게 든든한 딜러가 될 수 있는 이런 말밖에 하지 못한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에서는 그 어떤 말을 하든 상관없었으리라.
“ 파티 모집. 시작하겠습니다. “
신수 엘크 헤딩팟 최고기록 40% 공략 안 보신 분. 오래 즐기실 분. 웃으며 게임 하실 분..! 5/10
누가 보면 초대기업 회장님들의 모임에서 회의를 시작하는 것 같았지만 뭐 어떤가.
분위기가 중요한 거다 분위기.
“ 혹시 모르니 어제같이 하신 분들한테도 연락 돌려볼까요? “
물론 우리와 진도가 똑같은 그분들과 다 같이할 수 있다면 좋긴 하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지쳐서 그만둔 것이 아닌.
클리어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해 파티원이 나가서 끝나버린 만큼 그들이 다시 돌아와 주지는 않을 것이다.
“ ..일단.. 두죠. 새로운 사람들을 구해봅시다. “
만약 연락해보자고 한다면..
아마 나는 내 친구 창에 추가된 901201님을 불러보게 될 텐데..
숫자님이 먼저 막트를 외치고 그만둔 시점에서 다시 물어보기에는 조금 껄끄러웠다.
아. 친구창 이야기를 안 했나.
파티가 끝나고 해산되기 직전에 숫자님은 나에게 친구 추가를 걸었다.
역시나 이 사람은 나를 계속 신경 쓰고 있었으며 내가 랭킹 1등이라는 것을 알고 우리 파티에 신청했었던 모양인지 밤중에 귓속말로 어디서 사냥하냐는 둥 서로 대화를 몇 번 주고받았다.
...생각해보니
또 여자네.
현실에서는 여자 복이 없더니만 게임에서는 여자 복이 꽤 있을지도?
..그래봤자 현실 만남까지 이어가지는 못하지만.
..아니 뭐 어떤가.
나에게는 여기가 현실인데.
그럼그럼.
“ 저번처럼 딜러들을 최우선으로 받고 랜스는 적당한 레벨로 뽑을게요.
어제 같은 분은 솔직히 운이 좋았던 거고. 방패만 잘 세우면 되.. 크흠.. 아무튼, 뽑을게요. “
순간 모든 랜스들의 민감한 부위를 건드리는 바람에 방패님이 조건반사적으로 망치님을 쳐다보았으며
망치님은 그 맹렬한 시선에 디버프가 생길 것만 같아 억지로 말을 돌렸다.
그렇게 이미 여러 차례 진행해온 헤딩팟인데도 불구하고 랜스 자리는 차고 넘치며
딜러들도 나름 신청해준 덕분에 10분도 안 돼서 9명을 모으는 데 성공했고
마지막 한자리. 우리 파티의 앞길을 밝혀줄 빛 한 줄기는.. 결국, 30분이나 지나고 나서야 겨우 만날 수 있었다.
“ ...갑시다..! “
우선.
우리 다섯 명은 이미 어제 헤딩팟 트라이를 통해 <신수 엘크>의 체력을 40%까지. <파리안>의 체력을 10%까지 깎는 데 성공했었다.
그리고 새로 뽑은 다섯 명은 두 명만 헤딩팟에서 50%, 35%까지 갔다고 하고 나머지는 정말 처음이었다.
그들에게 공략을 보았는지 물어봤으나 아무도 공략을 본 사람이 없었으며 사실 이 레이드는 출시된 지 그렇게 오래 지나지는 않아서 그런지
분명 클리어 한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며 그들 중 일부는 클리어한 시점을 그대로 영상으로 보여주었을 뿐 잘 정리하고 편집해 영상으로 올린 건 단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헤딩팟을 좋아하는(나는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이긴 하지만) 우리에게는 모두와 함께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달릴 수 있는 좋은 상황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우리의 비장한 마음가짐은 고작 3트 만에 시들해질 수밖에 없었다.
“ 다시 리트할게요! “
어쩔 수 없달까.
이미 우리는 어제 6시간이 넘도록 트라이를 했었고
처음 하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만큼 숙련도의 차이가 있어 익숙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짤 패턴과 75%의 검은 꽃 패턴, 제단 패턴까지 익히는 데 2시간이나 걸렸다.
드디어 여기까지 왔다고 말해도 될 것 같은 시간.
기존에 있던 우리 1파티는 다른 헤딩하는 인원들과 수준을 맞추기 위해 이번에는 한 번도 안 해본 외부를 맡기로 정하고 2파티를 내부로 보내려고 했으나...
결국, 2시간이 더 지나 <신수 엘크>의 체력을 50%까지 깎은 시점에서 한 명이 힘들다고 나가버렸다.
“ ...쉽지 않네요. “
쉽지 않다.
이 말은 <신수 엘크>가 쉽지 않다는 것일까.
아니면 사람을 구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일까.
아마 후자 쪽이 조금 더 높은 지분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 어서 오세요. 바로 가시죠. “
“ 아 넵. 처음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
또 처음 하는 사람이 들어왔기에 들어가자마자 몇 초 되지 않아 새로 들어온 사람은 번개 공격에 맞아 죽어버렸기에 빠르게 리트를 해야만 했다.
진짜..
진도를 나가고 싶은데...
나갈 수가 없다.
“ 저 막판 할게요. “
이 기분은 우리 다섯 명뿐만이 아닌 오늘 새롭게 들어온 4명도 마찬가지였는지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는 것에 지친 한 사람이 막판을 선언했다.
지친다.
힘들다.
“ ..오늘은 여기까지 할까요? “
결국, 이렇게 되어버릴 운명이었다.
아마 모두들 마음속으로는 이렇게 될 거라는 것을 알고 있지 않았을까.
이것이..
사실..
현실이다.
10명이 모두 호흡을 맞춰가며 플레이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대부분이 그렇지 않으며 각자의 사정도, 각자의 생각도 다른데 이것이 한 번 꼬이기 시작하면 그대로 끝이다.
이 괴로움을 뚫고 클리어한다면 그만한 기쁨도 없지 않을까. 는 무슨.
이제서야 끝났다며 다시는 경험하기 싫다며 화밖에 나지 않을 것만 같다.
“ 크으.... “
모두가 떠나가고 오랜만에 마시는 술은 굉장히 씁쓸했다.
무엇을 기대했던 걸까.
마음이 잘 맞는 5인 파티를 우연히 만들어놓고 이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걸까?
아니면 10명의 파티 중 5명은 믿을 수 있으니 어떻게든 깬다는 느낌으로 안일하게 생각했던 걸까?
“ 씁쓸하네... “
이렇게 수백 번 깨지고 수백 번 다시 만들어서 도전하는 것이 레이드인데.
이런 걸 알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내 기대가 너무 컸던 것이겠지.
이 맥주의 씁쓸함은 결국 내 마음의 씁쓸함을 넘지 못했다.
“ 저런. 혼자 마시다니. 그건 좀 억울한데요. “
보통 이럴 때면 여성 유저분들이 뜬금없이 와서 나에게 한마디씩 건네주었었는데 오늘은 웬일인지 남성 유저가 내 앞에 앉아서 맥주를 주문했다.
“ 고생하셨어요 망치님. 자. 짠. “
“ 짠. “
오랜만에 남자랑 마시는 술.
보통 술은 이성과 마시는 것이 맛있다고는 하지만 이런 날은 같은 남자놈들끼리 마시는 것도 나쁘지 않다.
“ 술맛도 나고 느낌도 나긴 하는데.. 확실히 현실이랑은 조금 다르네요. “
...갑자기 그런 이야기를 꺼내시면 저는 조금 우울한데요.
“ 그런가요? 현실 술을 마신 지 꽤 오래돼서. “
“ 하하! 저도 마찬가지에요. 요즘 LLF에 푹 빠져 사느라 술은 입에도 못 대고 있죠. 그런데.. 오늘은 조금 마시고 싶네요. “
씁쓸한 미소와 함께 우리 둘은 또 한 번 맥주를 마신다.
참 잘 만든 맥주 맛에 절묘한 디버프들이 더해 술이 들어간 느낌은 잘 만들었달까.
하지만 실제로 마신 것은 아니기에 말하는 데는 큰 문제가 없다.
“ 우리.. 깰 수 있을까요. “
...최대한 맥주 이야기라도 하면서 억지로 현실을 외면하고 있었는데..
본인이 파티장이어서 책임감을 느끼고 있는 것인지 먼저 어려운 주제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렸다.
정말.. 안주는 맛있어야 하는데 왜 이렇게 쓰디쓴 안주를 꺼내오시는지.
“ 깨야죠. 절대 못 깨는 것도 아니고. 매주 숙제처럼 하는 건데 해야죠. “
그래.. 사실.
아직 모든 패턴을 다 봤다고 할 순 없지만..
<신수 엘크>의 난이도는 상당히 쉽다.
거대한 범위를 피하고자 오른쪽으로 몸을 날렸다가 왼쪽으로 다시 꺾어서 앞으로 구른 뒤 뒤로 몸을 날리면서 가운데에서 힘을 모으는 보스를 때려 다운시킨다 같은 복잡한 것도 없다.
그냥
보고 피하고
내부 들어가서 보고 피하고
딜만 하면 된다.
그런데도 못 깨는 이유는.. 10명이 동시에 그 행동을 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하아.. 이 정도 되면.. 제가 잘못인가 싶기도 하고요.. 클리어 파티는 이렇게 쉽게 나오는데.. 왜 우리는 못 깨고 있는 건지.. “
뭔가 크게 착각하고 있는데..
클리어 파티가 계속 나오는 건 사실이지만
그 이상으로 LLF의 유저 수는 많다.
사람들은 클리어 못 했다! 를 알리는 경우는 없으며 클리어 했다! 만 알리기에
들리는 소식은 클리어 했다는 소식밖에 없는 것이며 그 소식을 듣고 남들은 다 깬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말하고 보니까 SNS랑 별다를 게 없는데..?
“ 괜찮아요. 우리도 깰 거에요. 이젠 호에에님까지 익숙해져서 짤 패턴을 다 피하고 계시잖아요? 우린 문제 없어요. “
“ 그럼 문제는 남은 다섯 명에게 있는 거네요..? “
뭐..
함께 레이드를 계속 뛰어오기는 한 사이지만
뭐 지금은 만나지도 않고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마음 편하지 않겠는가.
사실이 아니더라도 그렇게 믿는 것이 지금 당장 꺾이지 않을 것이리라.
그걸 다른 사람들에게 떠벌리고 남들을 깎아내리지만 않으면 됐지.
“ 어머? 뭐야? 오늘 사냥은 끝난 거야? “
그때.
너무나도 익숙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나를 불렀다.
그래그래.
항상 이런 타이밍에는 아는 여성 유저가 와서 나랑 대화해줬었는데 오늘은 웬일로 남자가 오나 했다.
단지 망치님이 빨랐을 뿐이고 나에게 말을 건 여성분이 느리게 왔을 뿐인 것이다.
나는 뒤를 돌아 얼굴을 확인하기 전부터 조건반사적으로 입이 움직여 뒤에 온 사람을 불렀다.
“ 문어빵! “
“ ..타꼬야끼라니깐? “
레이드를 뛰는 이틀이 너무나도 길었기 때문일까.
문어빵을 한 일 년 만에 만난 것처럼 반가운 느낌이 든다.
“ 애칭이야 애칭. 넌 여기서 뭐해? “
“ 난 이제 사냥 가려고 밥 먹으러 왔지.
그리고 아무리 우리가 딱 맞는 파트너라지만 애칭은 좀 징그러운데? 게다가 누구 마음대로 문어빵? “
그 순간.
망치님이 흠칫 놀라며 눈이 커지고 시선을 회피하는 것이 느껴졌다.
진짜 이 녀석은 왜 이렇게 남들이 들으면 오해할 말을 서슴없이 하는 걸까.
나라도 정정해줘서 이 녀석의 이미지를 평범한 게임 폐인으로 고쳐줘야겠다.
“ 그래그래 우린 아주 훌륭한 ‘ 사냥 ‘ 파트너지. 나 레이드 끝나고 나면 다시 귓말할게. 그때 또 사냥하자. “
“ 세상에.. 너 어제도 하고 있지 않았어? 아직도 못 깬 거야? “
..이 자식이 날 긁네?
한마디 하기 위해 문어빵을 째려보자 문어빵은 나 따위에 관심이 없다는 듯이 그대로 지나쳐 망치님에게 가버린... 다.
둘이 아는 사이도 아닐 텐데?
“ 저기요. 이 녀석이랑 같이 레이드 가시는 분인가요? “
“ 네? 네네. 아 네. “
“ 빨리 깨버리고 얘 좀 놔주세요.
이 자식이 없으니까 파트너가 자꾸 힘들다고 떠나버려서 새로 구하기 짜증 난단 말이에요. 알았어요? “
“ 어어. 그 2인 파티로 사냥하는데 자꾸 상대가 힘들다고 떠나서 파티원 구하는 게 힘들다 이 말이지 음음. 그럼그럼. “
“ 왜 내가 한 말을 따라 해? “
니가 오해하게 말하니까 하는 소리잖냐 이 자식아.
“ 내일은 꼭. 깨겠습니다. “
...잠깐만.
아니 잠깐만잠깐만.
우리 5명은 이제 잘하잖아?
새로 구하는 5명이 언제나 불안하잖아?
그러면..
그 5명을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 맡기면 되는 거 아냐?
“ 야야야 문어빵. 너. <신수 엘크> 깼냐? “
망치님도 내가 뭘 하려고 하는지 눈치챘나 보다.
“ 아니? 레벨 더 올려서 초기화되기 전에 공략보고 깨려고 했지. “
아직 공략도 안 봤다는 소리인데.
문어빵의 실력은 내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심지어 나와 비슷한 수준의 !@#$듯한 접속률로 인해 레벨도 높다.
<신수 엘크>의 난이도를 생각하면... 이 녀석만한 인재가 없지 않은가..!
“ 내일! 우리랑 같이 갈래?! 우리 헤딩팟인데 40%까지는 갔거든?! 짤패는 이제 완전 숙련이야! 완숙! “
“ ...에.. “
하긴.
나중에 공략보고 하면 더 빠르고 쉽게 깰 수 있을 텐데 굳이 우리랑 할 이유는 없지.
그렇다면 우리랑 할 이유를 만들어줘야만 한다.
“ 레이드 끝나자마자 같이 사냥해줄게!!! “
“ 콜. 내일 몇 시? 몇 시에요? “
지인팟.
그것은 트라이 팟보다, 헤딩 팟보다 더욱 매력적인 단어다.
아는 사람들과 함께하니 분위기 망칠 일도 없고 중간에 포기하는 경우도 서로 말을 맞춰놓는다면 딱히 없다.
물론 서로서로 아는 사이는 아닐 수 있어도 어쨌든 두 다리 건너 아는 사이인 만큼 서로 친해지면 그만이다.
그렇게 중간에 포기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큰 매리트인데 나의 사냥 파트너이자 게임을 잘하는 문어빵이 참여해주면 너무나도 고맙지.
“ 잠깐.. 어라.. 그러면.. “
딜러 한자리를 채웠다.
이제 남은 건 탱커 한 자리, 딜러 두 자리, 서포터 한 자리가 남았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건 서포터인데...
그런 인재가 내 친구창에 있잖아?
그것도 딜러랑 세트로 말이야.
이 시간대쯤이면 슬슬 접속 종료하는 사람인지라 급하게 친구창을 열어 확인해보니 아직 접속해 있었다.
이춘배 : 혹시 내일 뭐 하세요? 바쁘세요? 레이드 가실 수 있나요? 같이 갈래요?
“ 제발.. 제발... 세트로 안 했어라.. 제발...! “
공남이 : ....에?
- 작가의말
공팟 스트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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