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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가감정에 시달리는 가스검침원의 노트

판타지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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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지점퍼
그림/삽화
번지점퍼
작품등록일 :
2020.05.31 21:02
최근연재일 :
2021.02.21 2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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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21 2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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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0쪽

45화 언더 더 세임 문5

DUMMY

#



해안도로를 끼고 수풀 가장자리를 따라서 한참을 걷던 우진은 길이 끝나는 막다른 곳에서 폐공장과 같은 건물을 발견했다. 핸드폰 위성지도에서 허옇고 넙적하게 보인 그 건물이었다. 손바닥만한 섬에서 수상한 인간들이 무슨 못된 작당을 하기에 적당해 보이는 외진 위치와 흉험한 외관이었다.


무너져가는 담장 한쪽에 몸을 숨긴 채 잠시 기척을 살피는데 건물 뒤쪽에서 들리는 파도소리 외엔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다. 이전에 수산물 가공 같은 것을 하던 곳인 듯 남해수산이라 적힌 낡은 상자들이 곳곳에 쌓여 있고 어디선가 퀘퀘하고 배릿한 냄새가 스며나왔다.

인적이 끊긴 지 오래된 곳 같은데 심심찮게 낚시꾼들이 드나든 듯 잡초와 덩쿨 사이로 고장난 릴 파우치가 눈에 띄기도 했고 트롤리 젤리처럼 생긴 낚시미끼나 찌 같은 것들이 갯바위 주변에서 애처로운 모양으로 뒹굴고 있었다.


건물 내부로 들어가니 콘크리트 구조물이 열 개도 넘게 이어져 있었는데, 얼핏 커다란 대중 목욕탕처럼 보이기도 했다. 곳곳에 갈라지고 부서진 채 고인 물이 썩어 있었는데 안쪽으로 들어갈 수록 검푸른 이끼 같은 것들이 바닥에 가득했다. 아마도 종류나 크기에 따라 각종 해산물을 보관하던 시설인 것 같다.

갑자기 바닥 일부가 밝아지자 구멍 뚫린 지붕을 흘깃 올려다본 우진이 어두운 벽면을 따라 다시 안쪽으로 들어가는데 잠시 후 거미줄이 잔뜩 엉킨 커다란 철재 탁자들이 쌓여 있어 다시 가운데 쪽으로 걸음을 옮겨야 했다.


그때, 불현듯 어디에선가 여자의 비명소리 같은 것이 짧게 들려 왔다. 급히 걸음을 멈추고 기둥 뒤로 몸을 숨긴 후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찾기 위해 가만히 서서 귀를 기울이며 두리번거렸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샤샤의 목소리는 아닌 것 같다. 그러고 보면 샤샤는 어지간한 상황에서도 비명을 지르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런 점은 약간 고양이를 닮았다.


어릴 때 잠깐 고양이를 키운 적이 있다. 요즘 집사들 기준으로 보자면 딱히 키웠다고 하기도 힘들고 대충 '들여 놓았다' 정도로 말할 수 있겠다. 주변에 반려동물을 키운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따위를 알려줄만한 사람도 없어 중성화 수술이 뭔지도 잘 모르던 그런 시절이었다.

모친이 집에 쥐가 많다며 시장에서 오천 원을 주고 사왔다. 연옥이 툭 하고 마루에 내려놓은 것을 뭔가 붕어빵 같은 간식인 줄 알고 열어본 우진은 기겁을 했다. 삼 개월 정도 된 노란 고양이는 무슨 식재료마냥 까만 비닐 봉투 안에 얌전히 앉아 있었다.

털이 뻗쳐 있고 뼈가 앙상한 볼품없이 작은 그 생명체는 자신에게 닥쳐 올 운명을 순순히 받아들이려는 듯 죽은 듯이 웅크린 채 잠자코 있었다. 그 무렵에 처음 알았다. 고양이들이 아무 앞에서나 '야옹'하고 소리 내어 울지 않는다는 것을.

그 과묵한 짐승들은 그러니까 대화가 통한다고 생각되는 특정 대상을 만나기 전에는 입을 떼는 법이 거의 없었다. 기껏해야 도전적으로 보이는 치켜올려간 눈으로 상대를 노려볼 뿐.


짐승에게 특별한 감정이 없던 우진이었지만 그런 성격들을 알고부터 약간의 호감이 생겼다. 그래서 엄마가 지은 무성의한 이름 나비를 무시하고 당시 좋아하던 눈이 큰 배우의 이름을 따서 '나영이'란 이름을 붙여 주기도 했다.

다용도실 한켠에 종이박스와 밥그릇을 놔준 후 일 주일쯤 지난 어느 날 나영이가 바짓가랑이에 머리를 부비며 올려다보았다. 아직 일말의 두려움이 남아 있는 그녀의 큰 눈에는 한번 믿어보겠다는 결단 같은 것이 어려 있었다.

한 달이 지나자 이마나 턱을 만져주면 가릉거리며 좋아하고 무릎 위로 폴짝 올라와 잠이 들기도 했다. 때때로 화단과 울타리, 장독대 등을 나풀거리듯 넘나들며 라이온킹처럼 자랑스럽게 바라보기도 했다. 왜 수많은 고양이들이 나비란 이름을 가지게 됐는지 알 것 같았다.

더 후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사납게 눈이 치켜 올려진 고양이들은 대부분 건강 상태가 나빠서 그런 것이다. 보통의 건강한 고양이들은 슈렉의 고양이처럼 바둑알같이 동그랗고 귀여운 눈을 갖고 있다.

탯줄 떼고 세상에 나온지 백일도 안된 녀석이, 누구의 도움도 기대하지 않고 홀로 이를 악물고 고통을 견디다보니 어느새 저절로 눈이 치켜올라갔는지도 모른다.

미술학원에서 짧게 대화를 나누었을 때의 깊은 인상을 받았던 샤샤의 표정을 잠깐 떠올리던 우진은 도리질을 했다. 급한 와중에 이딴 생각이나 하고 있고. 자주 느끼는 거지만 사람은 참 상징적인 것에 많이 휘둘리는 거 같다.


막다른 곳에 다다랐을 즈음 구조를 살펴보니 커다란 창고처럼 천정이 높고 반듯한 넓은 공간이 통로 끝에 자리 잡고 있었다. 뭔가 급박하게 내지른 듯한 비명 소리는 딱 한번뿐이었지만 분명히 소리의 공명이 따랐던 듯하다.

일단 조심스레 주위를 살펴보았다. 계단 쪽을 빼고는 창문이 없어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점점 더 어두워졌다. 콘크리트 바닥 한쪽엔 마치 피흘린 사체라도 질질 끌어 옮긴 듯한 거무튀튀한 얼룩이 널따랗게 말라 있는 게 보였다. 초대형 어종을 끌고 다니며 다굴이라도 한 건가. 등줄기를 타고 뭔가 쎄한 느낌이 전해졌다.

벽쪽으로 회색 캐비넷 두개와 네 칸 짜리 선반 같은 게 있는데 휘어진 낚싯대와 드라이버, 스패너, 망치 등 각종 낡은 도구가 아무렇게나 올려져 있다. 문짝이 뒤틀려 살짝 틈이 벌어진 열려진 캐비넷을 살며시 열어보았다. 물티슈와 휴지, 비누, 이쑤시개 등과 식염수와 바세린, 포비든 등 일상적인 상비약과 먹다 남은 땅콩버터도 눈길을 끌었다.


우진은 메마른 표정으로 포비든을 점퍼 주머니에 챙겨 넣었다. 그리고 선반 위에서 목장갑 하나를 집어든 후 양손에 끼웠다. 뭔가가 잔뜩 묻었다 말라 뻣뻣하고 기분 나쁜 냄새도 났지만, 전투에 앞서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든든한 아이템 하나를 장착한 롤플레잉의 전사처럼 전혀 개의치않는 표정이다.

희미하게 불이 켜진 듯한 창고 쪽으로 소리를 죽여 접근했다. 옹졸하게 달려있는 조그만 창문엔 문틀에 덧대어져 쇠창살이 달려 있는데 아마도 나중에 추가된 듯 군데군데 대충 용접한 자국이 보였다.

벽에 몸을 붙인 채 창쪽으로 바투 붙어 다가섰는데 안쪽에서 뭔가 둔탁하게 부딪히는 소리 같은 게 몇 차례 들려왔다. 커다란 곡식 자루나, 혹은 몸집 큰 짐승이 어딘가에 충격을 받고 내던져지는 소리처럼 들렸다. 그리고 이어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렸다.


"물이 자박, 자박하니 낚시할 맛 나네.."

"와, 히트다 히트..."

"박슨생 오늘은 히트 함 제대로 비주소 마... 그동안 여다 투자한 돈이 얼마요..."

"앗싸.... 오늘 향어회 함 묵어 보자..."

"비잉신, 지랄헌다.... 니는 바다에서 막 향어도 잡고 그라나...."


실내낚시에 열중인 평범한 낚시꾼들인가. 우진이 살짝 긴장을 풀며 안을 들여다보았다. 세 남자가 등을 보인 채 의자에 앉아 있고 종종 찰박찰박 물이 튀어오르는 소리도 들렸다.

낚싯대를 움켜쥐고 목욕탕처럼 생긴 수조를 내려다보고 있는 남자는 방수조끼 같은 걸 입고 있고, 그 옆에 털이 보송보송한 후리스를 걸친 남자가 작대기 같은 것을 들고 훈수하듯이 손짓을 하며 무언가를 지시하고 있다.

입에 오징어 다리 같은 걸 씹고 있는 또 다른 남자는 방금 전 자다가 깬듯이 부스스한 얼굴에 추리닝 차림을 하고 있는데 간밤에 술을 거나하게 했는지 눈자위가 불그딕딕했다. 얼핏 얼핏 보이는 사내들의 옆 얼굴만 봐서는 모두 사십대나 오십대 정도로 보였다.


"에헤이, 고마 빠지뿌다....."

"야야, 채비 하나 잽싸게 다시 끼아라... 자 배 마이 고픈갑다. 크크크"


남자들은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무슨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따금 어깨를 들썩거리며 웃기도 했다. 창이 높고 작은데다 어두침침해 아래 쪽은 잘 보이지 않았다. 안을 제대로 들여다보려면 몸을 높이고 얼굴을 바짝 들이대며 들여다보는 수밖에 없었다.

방법을 고심하고 있을 때 주머니 속 전화기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강주다. 샤샤를 찾았으나 두 남자에 의해 억류되어 있으니 가능하면 서둘러 펜션 쪽으로 와주었으면 하는 내용이었다.


"소세지 다 떨어졌네. 어여 내도 오징어 누깔 함 주바라..... 그기 바늘에 끼워도 쉽게 안빠지고 젤로 나슨 거 같다"


요즘은 낚시 미끼로 그런 걸 쓰나. 우진은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조금 궁금했지만, 일단은 샤샤를 구하는 게 시급하다고 판단하여 벽에서 조심스럽게 몸을 떼었다.

바로 그때 창문 안쪽에서 뭔가가 훅 하고 공중으로 떠올랐다. 미역처럼 젖은 채 달라붙은 파란 머리와 일그러진 여자의 얼굴이 보였다.

온 몸에 물을 줄줄 흘리는 한 여자가 밧줄로 묶인 두 손으로 목 뒤에 연결된 줄을 움켜쥐며 고통스러운 듯이 몸부림쳤다. 하지만 천장 쪽 도르래에 팽팽하게 고정된 줄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이고야, 박슨생 여태 모배았으요. 내 아까부터 그리 가르칬구만, 거서 후딱 챔질부터 하면 우야노. 일단 릴링만 슬슬 해야지... 저래봬도 자 덩치가 있는데 그리 막바로 잡아 땡기올리뿌마 고마 줄만 확 빠진다 아이요."

"흐흐흐 우리 박슨생님은 아무래도 바다낚시는 안되것서유. 여서도 하체가 그리 후들거리먼서 우예 열 시간 동안 배를 탈라카노"


후리스를 입은 사내가 방수조끼를 입은 사내에게 연신 나무라는 소리를 했고, 츄리닝 차림의 남자는 시종 맹한 얼굴로 입가에 웃음을 띤 채 맥락없이 끼어들며 실없는 소리를 툭툭 던졌다.

한참을 버둥거리던 여자는 잠시 후 기운이 빠진 듯 축 늘어졌다. 물에 흠뻑 젖은 여자는 너덜너덜 찢어진 민소매를 입고 아랫쪽은 흡사 반인반어처럼 녹색 테이프로 허리부터 발목까지 칭칭 둘러감아 놓았다.

풍덩 하는 소리와 함께 여자의 모습이 다시 아래쪽으로 사라졌다. 도대체 이 또라이 같은 작자들은 여기서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인가.


"하이고, 황프로님. 내는 이거 고마 심장도 떨리고 맴도 아파가 도통 잘 몬해묵겠다...."

"박슨생요. 말은 그라믄서 그리 사정없이 팽개치면... 암튼 개안아요, 조 가시내들은 어차피 오늘 단디 벌을 좀 받아야 돼갖고...."

"박슨생 박슨생... 그래 마음이 약하면 낚시 모합니더. 생선 그기도 다 잉간이랑 똑같이 쁠건 피 흘리고 할딱할딱 숨쉬고 지 살갔다고 파닥파닥 몸부림치는 거 보믄 고마 짠해서 놓아 주고 싶은기 또 인지상정이지고...."

"하이고.... 회장님하고 약속 잡아놓은 거 때매 배우긴 배와야 하는디 참 갈길이 멀구만...."


박선생이라 불린 남자가 조금 눈치를 보다가 여자와 연결된 낚싯대를 다시 집어들고 천천히 감아 올렸다. 물에 처박혀 있던 여자의 상체가 떠오른 후 아무런 반응이 없자 어쩔 줄 모르고 서 있다.

한숨을 내쉰 츄리닝 남자가 어슬렁거리며 다가가 여자의 머리카락을 거머쥐고는 거칠게 끌어당겼다. 그 모습을 본 후리스 차림의 황프로가 오징어 조각이 달린 작대기를 허공에 빙빙 돌리며 못마땅한 표정으로 혀를 찼다.

일 미터 높이의 수조에 절반 정도 물이 찬 상태라 앉아 있는 사람이 잠길 일은 없지만 두 다리를 동여맨 상태인데다 손도 자유롭지 않아 중심을 잃고 옆으로 쓰러지면 꼼짝없이 물을 들이켜야만 할 것 같았다.

수조 밖으로 끌려나온 여자의 깡마른 몸은 여기저기 바늘에 찔린 듯한 상처가 보였다. 스타킹을 여러 번 말아 또아리처럼 만든 것이 목에 걸려 있는데 낚시 바늘을 걸기 위해 매어 놓은 듯하다.

갑자기 다른 쪽에서 흐느끼며 울먹이는 소리 같은 것이 들렸다. 여자가 한 명이 아닌 것이다. 츄리닝 차림의 남자가 흐느적거리며 구석 쪽으로 걸어가더니 뺨을 후려 갈기는 소리가 들렸다. 다급하고 짧은 비명소리가 들리더니 곧이어 숨이 넘어갈 듯한 괴로운 신음이 이어졌다.

츄리닝 남자가 바닥에 있던 여자를 깔고 앉아 입을 벌리고 낚시 바늘을 하나 집어 혀를 꿸듯이 쑤셔넣었다. 여자가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팔다리를 바르작거렸다. 보고 있던 박가는 심기가 불편한듯이 이맛살을 찌푸렸고, 황프로가 마뜩찮은 표정으로 한마디했다.


"야야, 고마 시끄럽다. 와 자꾸 고객들 물건에 함부로 기스를 낼라카노. 걍 저쭈 좀 처박아 놔삐라."


츄리닝 차림의 남자가 머쓱한듯이 두 사람을 향해 웃고는 잡고 있던 여자의 멱살을 뿌리치듯 내려놓았다. 여자가 포댓자루처럼 털푸덕 소리를 내며 힘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황프로가 박선생에게 소곤거리듯이 말했다.


"저 변태 새끼는 물고기를 잡아도 틈만 나면 산채로 꼬챙이로 푹푹 쑤셔가면서 괴롭힌다니까.... 암튼 새끼, 완전 또래이 사이코패스야...."


박선생이 짐짓 안쓰러운 표정으로 옆에 있던 오징어 다리를 하나 집어서 바닥에 있던 파란색 머리의 여자에게 던져 주었다. 죽은 듯이 웅크리고 있던 여자가 허겁지겁 줏어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그러나 이빨이 부실한지 제대로 씹지 못하고 컥컥거렸다.

츄리닝 차림의 남자가 가까이에 있던 낫을 줏어 들고 검은 머리 여자에게 겁을 주면서 한쪽으로 몰았다. 여자는 겁에 질린 가축처럼 뒷걸음질쳐서 구석으로 가 납작 엎드렸다.


당장이라도 문을 부수고 뛰어들 듯 노려보던 우진이 마음을 진정시키려는 듯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대로 들어가서 놈들을 작살내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허나 그 와중에 잘못하면 미술학원에서처럼 여자들이 다칠 수도 있다.

그때 배에 칼을 맞은 채 끌려갔던 예지라는 아이는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잠시 복잡한 표정을 짓던 우진은 어느새 평정을 찾으며 무심한 눈빛으로 돌아왔다.


샤샤의 말처럼 나쁜 놈들을 혼내는 게 목적이 아니다. 조금 더 지켜보며 방법을 찾아보자. 강주에게 전해 들은 내용에 따르면 상대쪽은 고작 두 명이다. 설사 한두 명 더 있다 쳐도 샤샤와 동료인 듯한 젊은 남자도 있다 하니 쉽게 당하진 않을 것이다. 그리고 어차피 여기 저 작자들은 당장에 여자들을 죽이거나 하진 않을거 같다.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때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며 황프로가 밖으로 걸어 나왔다. 우진이 급히 어두운 캐비넷 뒤쪽으로 몸을 숨겼다. 누군가와 통화를 하는 듯한데 잘 들리지 않는지 목을 빼며 큰소리로 외치다가 이내 전화를 끊었다.


"뭐여, 시발... 왠 지랄맞은 색귀들이 머 쳐먹을 게 있다고 여까지 기어 들어온겨...."


뒤따라 나온 츄리닝 남자와의 대화 내용으로 미루어 짐작해 보건데 강주가 있는 펜션 쪽에서 걸려온 전화인 것 같았다.


"어이, 임봉아, 대충 추스려 놓고 언넝 댕기 오자,.... "


임봉이라 불린 츄리닝 차림의 남자가 위협적으로 낫을 휘두르며 천천히 걸어나왔다. 앞서가던 황프로가 살벌하게 움직이는 낫의 궤적에 몸을 사리며 잠깐 인상을 구겼다. 그리고는 저도 뭔가 손이 허전한지 공구들이 놓인 선반 쪽으로 가더니 벽에 기대어 있는 삽 한 자루를 챙겨 들었다.


"어이, 박슨생, 우덜 올때까정 줄 떤지는 연습만 더 하고 기시쇼. 괜히 챔질 같은 거 하다가 비싼 낚싯대 뿌라먹지 말고.... 영 심심하면 저 퍼런 놈으로 회나 쳐서 자시고 기시쇼.... 크크크"


두 남자는 박선생이라는 사람을 창고에 남겨 놓은 채 어슬렁어슬렁 건물 밖으로 걸어나갔다.

우진이 약간 불안한 눈빛으로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하나같이 눈자위가 불그딕딕한 것이 표정만 봐선 물불을 안 가리는 놈들 같다. 법의 손길이 미약한 고립된 지역에 살며 심성이 거칠어진 사람들이 종종 저런 얼굴들을 하고 있었다.


창고에 엉거주춤하게 서서 남아있던 박선생은 조금 어색한 표정으로 파란 머리의 여자에게 다가갔다. 수조 밖으로 건져진 여자는 온몸에 물기를 머금은 채 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남자는 조금 안쓰러운 표정으로 뼈가 앙상히 드러난 등허리를 가만히 손으로 쓸어내렸다. 여자의 몸이 움찔하면서 겁먹은 해파리처럼 오그라들었다.


두 놈이 합류하면 친구들이 위험해질 수도 있다. 저들의 뒤를 쫓아가야 하나. 아니면 방비가 허술한 지금 여자들을 먼저 구해야 하나. 고민은 오래 가지 않았다. 건물 안에서 또 다시 고통스러운 비명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문은 활짝 열려 있다. 망설일 게 없었다.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섰다. 박선생으로 불렸던 사내와 파란색 머리의 여자애가 보이지 않았다. 그새 어디로 사라진 거지. 몇 걸음 더 안으로 들어서니 구석 쪽에 짧은 머리 여자가 죽은 듯 누워 있었다.

밧줄로 손목과 발목을 한덩어리로 묶인 채 새우처럼 웅크리고 있다가 무언가를 발견한 듯 눈동자가 커졌다. 손가락을 입술에 댄 채 다가간 우진이 재빠른 솜씨로 손목을 풀어준 뒤 조용하게 그림자처럼 안쪽으로 스며들었다.

다용도실 비슷한 공간인데 한 뼘 정도 벌려져 있던 문이 소리 없이 열리며 우진이 들어섰을 때 박선생은 여자의 몸을 깔고 앉아 얼마 남지도 않은 옷가지를 잡아 찢고 있었다.


어느 틈에 뒤로 다가선 우진의 손이 가볍게 허공을 갈랐다. 팡. 인간의 손이 다른 인간의 머리를 때릴 때 날 수 있는 가장 경쾌한 소리가 짧게 울리더니 거구의 사내가 컥 소리를 내며 옆으로 쓰러졌다.


우진이 일순 난감한 표정으로 여자를 바라보았다. 아직 앳딘 느낌이 드는 얼굴인데 상체가 거의 드러나 있고 하체는 테이프로 칭칭 감겨져 있었다. 여기를 벗어나려면 일단 테이프를 떼어내야 할 듯한데 그 작업도 만만치가 않을 거 같았다.

일단 쓰러져 있는 박선생의 옷들을 대충 벗겨낸 다음 여자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한쪽 무릎을 꿇고 조심스레 웃옷을 걸쳐주었다. 반쯤 넋이 빠진 표정의 여자는 지퍼를 올려주는 동안에도 잠자코 얌전히 있었다.

그러나 허리 아래로 감긴 테이프에 손을 대자 갑자기 잃었던 정신이 돌아온 듯 두 팔을 휘두르며 있는 힘껏 저항했다. 그 바람에 우진의 얼굴에 손톱 자국까지 생겼다. 다듬어 지지 않은 긴 손톱은 짐승의 그것마냥 만만찮은 무기로 돌변했다.


"미안, 널 해치려는게 아냐. 하지만 이대로는 움직이기 힘들어....."


이렇게 저렇게 대화를 시도했으나 여자애는 막무가내로 버둥거리며 우진의 손길을 거부했다. 왜 그러는지 짐작이 되니 섣불리 다그칠 수만도 없었다. 한 시가 급한 상황인데 일이 점점 공교롭게 꼬이고 있다.

구조 대상이 구조를 방해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미처 못한지라 생각을 수습하기가 쉽지 않았다. 여기서 시간을 더 지체했다간 친구들이 위험해질 수도 있다. 게다가 이 여자들이 샤샤가 찾고 있는 그 아이들인지도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이 지경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그대로 두고 가버릴 수도 없다. 잠시 망설이던 우진이 오른손으로 가볍게 여자애의 뒷목을 쳤다. 여자애가 맥없이 정신을 잃고 축 늘어졌다.


실신한 파란 머리 여자애를 불편한 자세로 어깨에 둘러멘 채 걸어나오자 한쪽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있던 짧은머리 여자가 잔뜩 겁 먹은 표정을 지으며 당장이라도 도망칠 자세를 취했다. 우진이 약간 답답한 표정으로 호소했다.


"아까 그 놈들이 오기 전에 여기서 벗어나야 해. 그래, 샤샤! 샤샤에게 데려다 줄게."


샤샤라는 이름을 듣고도 여자애는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우진은 저도 모르게 한숨이 터져나왔다. 어깨에 둘러멘 여자애가 왠지 한층 더 무겁게 느껴졌다.

약간 포기한 심정으로 손만 내밀었다. 여자는 우진의 눈빛을 몇 차례 미심쩍은 듯이 올려다보며 얼마간 망설이다가 가만히 내밀어진 손을 잡았다. 우진의 손을 잡고 천천히 일어서던 여자가 갑자기 다리를 휘청이며 다시 주저 앉고 말았다. 그 바람에 셋이 중심을 잃고 다 함께 고꾸라질 뻔했다. 다시 눈앞이 캄캄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잠시 후 그는 왼쪽 팔로는 어깨에 얹어진 끈적거리는 다리를 끌어안고, 오른 팔로는 짧은 머리의 여자를 겨드랑이쪽에 감싸 안은 채 천천히 건물 밖으로 나아갔다.


'와, 이건 진짜 역대급 상황이다.'



*


작가의말

매번 늦어서 죄송합니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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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36화 묘곡모자 猫哭耗子 +6 20.10.31 73 10 9쪽
35 35화 뒷골목 어벤저스 +4 20.10.18 90 10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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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26화 의중 +4 20.08.28 58 9 12쪽
25 25화 재회 +4 20.08.21 60 8 14쪽
24 24화 터미널 +6 20.08.12 83 8 12쪽
23 23화 성난 괴수와 웃는 나무 +6 20.08.01 84 11 11쪽
22 22화 경계선 +5 20.07.27 69 9 8쪽
21 21화 라스트 액션 히어로 +2 20.07.18 60 9 11쪽
20 20화 한여름밤의 꿈 +3 20.07.11 62 9 11쪽
19 19화 좋은 놈, 나쁜 놈, 애매한 놈 +4 20.07.07 69 10 7쪽
18 18화 하늘나라 동화 +2 20.07.07 62 7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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