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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가감정에 시달리는 가스검침원의 노트

판타지는 없다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추리

번지점퍼
그림/삽화
번지점퍼
작품등록일 :
2020.05.31 21:02
최근연재일 :
2021.02.21 22:29
연재수 :
45 회
조회수 :
3,779
추천수 :
441
글자수 :
209,470

작성
20.07.11 08:39
조회
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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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글자
11쪽

20화 한여름밤의 꿈

DUMMY

제 20화


#


"길이 좀 험한데 잘 잡아요."


강주와 통화를 마친 우진이 몸을 돌려 샤샤가 제대로 잘 앉았는지 살펴본 후 오토바이의 시동을 건다. 우려와 달리 몸과 마음이 온전치 않은 상태인데도 샤샤는 코알라처럼 야무지게 잘 매달렸다. 우진도 나름 뒷 좌석의 손님을 배려해 무리해서 속도를 올리지 않고 부드럽게 달렸다.

초가을 같은 밤바람이 제법 청량하게 느껴진다. 또 그 바람은 숲속을 누비며 아찔할 정도로 좋은 소리와 향기를 흩뿌린다.

밤바람에 일렁이는 녹색 계절의 숲은 거대한 생명체마냥 몽롱한 기운을 생성해낸다. 그것은 느리고 고요하지만 때때로 마법처럼 어딘가로 이끌기도 한다. 캄캄한 밤 인적이 없는 평화로운 길을 달려 본 사람이라면 누구든 유사한 감흥을 느낀 적이 있을 것이다.

비록 상황은 좋지 않았지만 샤샤도 한껏 그 순간의 자연을 만끽했다. 그리곤 갑자기 실없는 사람처럼 조금씩 웃기 시작한다. 그리고 알아듣지 못할 언어로 독백처럼 중얼거렸다. 우진이 바람결에 귀를 기울여보다가 '에바'라는 단어 하나를 들었다.



#


한 시간쯤 지날 무렵 갓길에 차를 댄 채 기다리고 있는 강주를 만날 수 있었다.


"야이, 개xx &같은 새끼야~~"


부엉이 티셔츠의 강주를 단박에 알아본 샤샤는 대한민국에서 다양하게 애용되는 욕들을 시리즈로 양껏 퍼부고도 성이 안 차, 긴 다리로 발차기까지 시도했으나 중심을 잃고 휘청거리며 실패했다.

옥신각신 야단스럽게 대화 중인 두 사람을 시동도 끄지 못한 채 잠시 바라보던 우진이 강주의 차 본넷 위에 힙색을 조용히 내려놓고는 웽 소리와 함께 자리를 떴다.

그제야 동작을 멈추고 멀어지는 우진의 뒷모습을 쳐다보던 샤샤는 때늦은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그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순수하고 멋진 영웅도 아니었고 비밀리에 급파된 기적같은 아군도 아니었다. 자신에게 개고생을 선사한 어처구니 없는 멍텅구리의 협력자 중 한사람이였던 것이다.


함께 타고 가는 차 안에서 강주는 손이 발이 되도록 빌고 또 빈 다음, 그 간의 우여곡절, 즉 기택이 누구 때문에 인질로 잡히고 고문과 협박까지 당했는지에 관해 들려주었다. 그제서야 불같이 화를 내던 샤샤의 흥분된 상태도 얼마간 수그러들었다.

샤샤는 그런 와중에 활짝 웃는 얼굴로 브이자까지 만들어 보이면서 셀카를 찍더니 즉시 인수에게 간단명료한 문자를 보냈다.

'걱정 말고 기다려. 곧 갈거야.'


얼마 후 서울에 도착한 강주는 샤샤에게 시급한 손가락 접합수술을 위해 기택이 있는 병원 응급실로 가자고 했다. 그 말을 들은 샤샤가 차를 멈추게 하더니 잘려진 손가락 따위 너나 가지라며 집어던지곤 내리려 했다.

그녀는 보험 안 되는 외국인이라 수술비를 감당하기 어렵다는 것, 할 일이 태산이라 한가롭게 입원할 입장이 안 된다는 것, 입원한다 해도 금방 깍뚜기들의 표적이 될 거라는 것, 손가락 한 마디 없다고 큰일 나지 않는다는 것 등등을 이유로 강주의 제안을 거부했다.

정확한 사정은 알 수 없으나 강주로서도 딱히 반박할 수 없는 이유들이 섞여 있었다. 하지만 자기 때문에 피를 철철 흘리고 있는 사람을 그대로 보내는 것은 본인의 염치와 상식으로 용납이 되지 않았다.

안간힘을 써가며 방법을 궁리하던 강주는 막무가내로 고집을 피우는 샤샤를 겨우 설득하여 면식이 있는 동물병원으로 향했다.



#


도착한 곳은 샤샤에게 줄 가짜 약을 얻었던 그 병원이다. 홍씨는 강주의 전화를 받고 아래 층 병원으로 내려왔다. 24시간 동물병원은 아니지만 사정이 딱한 사람들이 미리 연락을 주면 업무 시간 외에도 곧잘 진료를 해주기도 한다.

사택이 한 건물에 있는 덕분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동물이나 타인에 대한 배려심이 많은 사람이다.

홍씨에게 사정을 있는 그대로 말할 수는 없어 대강 파렴치한들에게 쫓기는 가련한 불법체류자 신세라고 둘러댔는데 그것으로 충분히 통하였는지 홍씨는 샤샤의 치료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애초에 봉합 정도로만 기대하고 온 터라, 시설이나 인력 여건상 미세혈관이나 신경까지 접합하긴 어려우므로 잘해야 괴사되지 않고 매달려 있는 수준이지 예전처럼 제 기능을 기대하긴 어려울 거라는 홍씨의 설명에 기택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홍씨는 돋보기를 들고 먼저 검지의 절단면을 관찰한 후 조심스레 식염수에 젖은 거즈를 풀고 토막의 상태를 확인하더니 뜬금없는 감탄사를 흘리며 중얼거렸다.


"오... 이건 숙련된 일식집 장인이 손댄 것처럼 절단면이 깔끔하네. 물론 인간이 유형동물은 아니지만... 이렇게 금방이라도 살아 꿈틀거릴 거 같이 쌩쌩하구만."


왼손 검지로 탁자를 톡톡 치며 잠시 생각에 잠겼던 홍씨는 구석으로 걸어가 낡은 안과용 현미경을 살펴본 후 뭔가 결심이라도 한 듯 갑자기 전화를 걸어 아내와 딸을 불렀다.

전화를 끊은 홍씨가 가업을 잇기 위해 기꺼이 수의학을 전공하고 있는 딸에 대해 잠시 자랑하는 동안 아내와 딸이 내려왔는데 자다가 깬 딸의 입이 닷발이나 나와 있다.


홍씨는 두 사람에게 간략하나마 전후사정을 이야기하고 얼마나 까다로운 수술인지 대충 설명한 다음 함께 수술 준비에 들어갔다. 강주는 수혈 가능한 O형 피를 가진 건강한 사람을 알아보라는 홍씨의 주문에 다시금 우진을 소환해야 했다.

홍씨는 자신의 모든 경험과 기술을 동원하여 가급적 많은 혈관과 신경을 접합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때로는 긴장하며 때로는 능숙하게 아버지를 돕는 딸의 진지한 얼굴에 쉴 새 없이 땀방울이 흘러내린다.

두 시간이 지나고부터 지친 홍씨의 아내를 대신해 허드렛일을 돕고 있던 강주는 21세기에 잘려진 손가락 마디 하나 잇는 수술이 이토록 난이도 높은 기술과 긴 시간을 요하는 대수술인지 미처 상상도 못했다는 생각 따위를 하며 수시로 시계를 쳐다보았다.

모두가 기진맥진할 무렵 마지막 가위질을 마친 홍씨가 긴 숨을 내쉰 후 소맷자락으로 이마의 땀을 훔치며 말했다.


"다들 고생하셨네."


#


친목과 우애를 돈독히 하는 약간의 뒤풀이가 필요했던 오늘의 용사들은 길 건너 국밥집에서 이런저런 해장국들을 취향껏 배달시켜서 먹고 있다.

딸 영심이가 뭔가 고무된 기분에 사로잡혀 있더니 은근슬쩍 아버지에게 이제라도 의예과에 지원해보면 어떨까 하는 의견을 피력했다.

딸의 수줍은 속내를 들은 홍씨는 짐짓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백년을 과분하게 사는 널널한 인간들 머리털 빠지는 것까지 수발 들며 사느니, 이 배덕의 별에서 태어난 죄로 생을 다할 때까지 몹쓸 일만 겪다가 죽어가는 가엾고 사랑스러운 생명들을 돌보는 게 어쩌면 더 가치있는 일일지 모른다는, 꽤 설득력있는 조언을 담담하게 들려주어 딸의 꾀죄죄했던 긍지마저 살려주는 매우 모범적인 아버지 상을 연출했다.

부녀의 말을 듣고 감탄한 듯 고개를 주억거리는 강주에게 홍씨가 충고하듯 말했다.


'하느라고 했지만 우린 전문가가 아니지. 인간은 도룡뇽과는 달라서 갑자기 피부가 틀어질 수도 있고 괴사가 진행될 수도 있어. 약 잘 먹이구 소독 잘 하구... 혹시 수상하다 싶으면 그땐 꼭 큰 병원으로 가야해.'


#


샤샤는 차가운 스테인레스 시술대 위에 누워서 수액을 맞으며 잠들어 있다. 수술대 근처 케이지에는 오래도록 갇혀 지낸 아픈 짐승들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샤샤를 보고 있다.


강주와 우진은 수술실 바깥쪽 카운터 근처에 서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있다. 우진은 가서 겪은 상황들을 강주에게 대략 정리해서 들려주었다. 그리고 나서 주머니에 챙겨 넣었던 약병을 꺼내 보였다. 강주는 진심으로 감격해서 우진이를 꼬옥 끌어안았다.

다음 달 월세까지 보증금으로 넣고 대여한 위치추적기였으나 위험을 무릅쓰고 험한 일 겪을 친구에게 차마 그것까지 잘 챙겨오라고 요구할 순 없었기에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도 받은 아이마냥 감격해한다. 우진이는 징그럽다는 듯이 친구를 털어냈다.


"암튼 얘기 들어 보니까 걔들이 이런 식으로 그냥 넘어가진 않을 거 같다.".

"경찰엔 연락했고?"

"아니. 무슨 사정인지 죽어라고 경찰은 안된다고 그러네."


우진이 잠시 미간에 주름을 만들며 생각에 잠겼다가 어깨를 으슥한다.

"흠... 비밀이 많은 친구네."

"근데 젠장...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나 알아야 돕든가 대비를 하든가 하지......"

"그러니까 이번엔 그대로 보내지 말고 앉혀 놓고 얘기를 좀 들어 봐."

"으아.... 무서바... 퍽도 저분이 나한테 사근사근 말하겠다. 너라면 몰라도....."

"그건 니가 몰라서 하는 말인데......"



#


같은 실수를 또 다시 되풀이한 강부장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으나 변명이라도 구색을 갖춰 성심성의껏 해야 했기에 CCTV, 블랙박스 등 가능한 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열심히 경과 브리핑을 하고 있다. 유상무와 양실장 등이 팔짱을 낀 채 듣고 있는데 모두 적잖이 화가 나 있다.


"어차피 대한민국에서 접합수술 잘하는 병원이 몇 군데 안됩니다. 이미 애들 쫙 다 풀었으니 그 쪽에서 잡는 건 시간 문제입니다."

"그놈들이 병원 드나들만큼 한가한 형편이 아니라면?"

"어차피 거기 아니라도 갈 데가 없습니다. 갑을병정 몽타주까지 다 확보한데다 직장, 차넘버, 전화번호... 그리고 녹사평 신참이 신통찮지만 프락치도 하나 심어 놓은 거 같습니다."


유상무가 그제서야 관심을 보이며 끼어들었다.

"양몰이로 한꺼번에 다 잡을 수 있다면 것도 나쁘지 않긴 한데...."


강부장이 스크린의 화면을 확대해 짐짓 유능한 작전 참모라도 되는 듯한 말투로 지휘봉으로 일일이 짚어가며 설명을 했다.


"그것은 그런데... 찝찝한 게 좀 있습니다. 천천히 저 장면을 보세요. 저 새끼... 계집애가 갑자기 지랄발광하며 소리 지르느라 죄다들 벙쪄 있는 바로 그 순간에, 액션배우처럼 창문을 깨고 뛰어들어 왔지요. 근데 가만히 놈을 바라보는 여자애 표정과 몸짓을 보세요. 반가워하거나 안심하는 분위기가 아닙니다. 아, 시발 저건 또 뭐지, 하는 뭔가 상당히 겁에 질린 표정 아닙니까. 그러니까, 저것들은 저 당시 초면이라는 얘기가 되겠습니다."

" 그게 말이 됩니까? 모르는 사람이 모르는 사람을 위해서 몸을 던져가며 구하러 오나?"

" 쓰읍, 그러니까 그건 또 말이 안 되긴 하는데...... 조직이 디게 커서 점조직으로 활동하나 싶기도 하고......."

" 얘기가 그딴 식이면 사태가 훨씬 더 심각하다는 소리 아니요?"


강부장이 머리를 긁적이며 유상무의 추궁에 얼버무리고 있을 때, 어둠 속에서 양실장의 눈은 놀라움으로 가득했다. 두 사람은 모두 양실장이 익히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채병주 회장의 큰 손자 채우진과 올 초부터 ED소속사에 적을 두고 활동 중인 샤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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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3

  • 작성자
    Lv.10 쨈보
    작성일
    20.07.13 15:40
    No. 1

    심각한 상황에서도 (쓸데있게) 유쾌하여 이사카 고타로의 소설을 읽는 듯~ 즐겁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2 번지점퍼
    작성일
    20.07.13 16:01
    No. 2

    저는 요즘 쨈보님 댓글 읽는 맛에 삽니다. 헤헷,
    이사카 고타로.... 뉘신지 모름. 일본소설 안읽어본지 최소 십년은 된듯,...
    애국자라서 그런게 아니구... 미국소설은 최소 이십년... ㅜ.,ㅜ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2 번지점퍼
    작성일
    20.07.13 16:07
    No. 3

    그래스 호퍼 지금 바로 구매했습니다!
    또 좋은 작가 알려주시면 열심히 공부할게요.
    난독증이 좀 있지만.... 헤헷,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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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25화 재회 +4 20.08.21 60 8 14쪽
24 24화 터미널 +6 20.08.12 83 8 12쪽
23 23화 성난 괴수와 웃는 나무 +6 20.08.01 84 11 11쪽
22 22화 경계선 +5 20.07.27 69 9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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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18화 하늘나라 동화 +2 20.07.07 62 7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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