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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가감정에 시달리는 가스검침원의 노트

판타지는 없다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추리

번지점퍼
그림/삽화
번지점퍼
작품등록일 :
2020.05.31 21:02
최근연재일 :
2021.02.21 22:29
연재수 :
4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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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209,470

작성
20.08.31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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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1쪽

27화 엇박자

DUMMY

#


우진이 팔짱을 끼며 허리를 곧게 펴고 앉아 잠시 샤샤를 바라보다가 부드럽지만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너도 알지? 지금 어린애처럼 떼를 쓸 상황이 아니라는 거."


인수가 발끈한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바람에 목에 매달리다시피 하고 있던 예지가 다리를 휘청거렸다. 괜히 빈정이 상한 인수가 무슨 말을 내뱉을 거처럼 하다가 어금니만 질끈 물고는 일단 예지를 부축해 조소실로 데리고 갔다. 선태도 이어지는 거북한 상황에 얼굴이 굳어 있다. 우진이 계속해서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에 또 엉뚱한 사람이 목숨을 잃을 뻔했어. 그 정도면 충분히 기다려 줬다고 생각해. 그러니 이제는 네가 알고 있는 것들을 말해."

"......"

"저 애들이지? 저번에 그 사람들이 찾고 있는 게."


단순히 성질을 부리던 샤샤의 얼굴이 조금씩 복잡하게 변해갔다. 그리고는 단전 호흡을 하듯이 숨을 길게 내쉬면서 고개를 추욱 늘어트렸다가 다시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면서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마치 다른 사람처럼 눈빛이 변해 있다. 깊고, 차갑고, 아득하게. 그리고 어딘가 서글프게.


"그래? 말할까? 모두 다? 그러니까..... 들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거지?"


선태가 호주머니 속에 있는 전화기 녹음 버튼까지 신경 쓰는 바람에 한층 더 긴장을 해 유난히 크게 침을 꿀꺽 삼켰다.

우진은 지금의 샤샤가 완전히 새로운 사람처럼 보여서 조금 놀랬다. 물론 어느 정도 예상은 했었다. 약 기운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이전 오두막에서도 또 조금 전 모텔과 차 안에서도 때때로 다중적인 성격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방금 것은 여태껏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완전히 다른 느낌의 인간이었다.

한가한 소리지만 우진은 지금의 상황이 자뭇 흥미롭기도 했다. 성실한 영화학도답게 이 와중에도 샤샤의 역할을 시킬 마땅한 여배우가 혹시 있을까 떠올리고 있었다. 프로렌스 퓨나 이름은 기억 안 나지만 멜랑콜리아에서의 의지가 강한 광대뼈의 그 배우. 샤샤는 다시금 천천히 입을 떼었다.


"네 식대로 하면. 다 죽어. 저 애들은...."

"뭐?"

"뭐가 아니고 왜라고 물었어야지. 왜냐면 쟤들은 너희의 기준에선 사람이 아니거든. 왜? 애당초 이 세상에 존재한 적이 없으니까."

"샤샤, 그만해."


황급히 달려온 인수가 샤샤의 양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


술에 잔뜩 취한 세 명의 젊은이들이 버스 정류장 근처에 서서 시시한 얘기들을 늘어놓고 있다. 모두 셀러리맨들인 듯 고만고만한 정장 차림이다.


"시발, 지가 꼴에 부장이라고 눈 존나 내리깔고는 유성매직으로 엑스 찍찍 긋고 그지랄 떨면 완전 개빡친다니까. 어휴... 서류 그 시발 거 작성한다고 몇 날 며칠 개고생한 거 생각을 하면... 전부 그냥 확,,,"

"난 꼴리는 대로 지 할 말 다 하고 나서 괜히 혼자 실실 쪼개다가 앞으로 잘해봅시다 이 지랄 떠는 게 더 밥맛이야."

"맞아, 맞아 그거 완전 개소름 뜬금포. 시발 앞으로 뭘 잘해, 잘하길.... 늙은 년이 재수없게 뭔 꼬리치는 것도 아니고..."

"양군아, 니 몰랐나, 거 꼬리치는 거 맞다카이. 앞으로도 잘하고 뒤로도 잘하고. 크크크..."

"우엑, 시발 토나와...."

"나 저번에 꿈에서 그 여자 죽이는 꿈 꿨잖아."

"으아, 시발 존나 복받은 새끼. 진짜 개부럽다. 우리는 언제 그런 꿈 꿔보나..."

"야, 그래서, 그래서 어떻게 죽였는데? 목을 막 이렇게 비틀어서?"

"아냐, 발로 막 밟았어. 계속, 존나, 쳐뒈질 때까지.... 한참을 뿌지직뿌지직 밟았는데 그게 그렇게 빨랑 죽지를 않는 거야."

"크크크 쬬렙용사가 만렙상사를 처단하는게 쉽겠냐."

"뭐, 슬리퍼라서 그랬나, 암튼, 꿈에서도 어찌나 악랄하게 버티는지.... 내가 나중엔...."


그때, 정류장 뒤쪽 울타리 너머 화단 깊숙한 곳 무성한 백일홍 나무 밑 뱀처럼 가지가 엉킨 영산홍 더미 아래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 커다란 덩어리가 일순간 꿈틀 움직였다. 식겁한 인간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뇌까렸다.


"아, 시발 놀래라... 개야, 뭐야."

"시발, 개가 왜 저기서 저래....."

"아냐,,,, 뭐지 저거, 꼭 사람 같은데...."

"야, 야, 뭔지 가보자..."

"얌마, 냅둬. 뭘 가봐."

"어,어.. 절마 존나 겁없네..."


잠시 후, 꺼드럭거리며 화단 안쪽 나무 아래로 다가갔던 일행 중 하나가 질색을 하며 튀어나오더니 일행들 팔을 호들갑스럽게 잡아끌었다.


"으악, 가자, 가..."

"뭔데 뭔데..."

"몰라 몰라 자세히 안 봤어. 노망난 틀딱 같아. 토하면서 땅을 막파고 혼자 개지랄 났어..... 으, 완전 지옥의 냄새..."

"으악,, 무섭다....."


호들갑 떨던 한무리의 인간들이 자리를 뜨자 죽은듯이 납작 엎드려 있던 행색이 초라한 노파가 상체를 꾸무럭 일으켰다. 잠시 고개를 들어 초점 없이 허공을 응시하는데 동공이 구별하기 힘들 정도로 심하게 백태가 덮여 있다. 이어 기능을 상실한 두 개의 공허한 구멍 양쪽으로 무언가 눈물인양 주루룩 뺨을 타고 흘러 내렸다. 피고름같기도 하다.

그리고는 갑자기 발작적으로 각혈을 하더니 또 다시 미친듯이 손가락으로 땅을 파기 시작했다. 파고, 파고, 또 파고... 거친 자갈과 뿌리에 손톱이 짓이겨지면서도 그는 계속해서 나무 옆의 땅을 팠다. 그렇게 끝없이 흙을 파고 들어가면 마치 자신을 보듬어줄 다른 세상이 존재하기라도 하듯이.



#


강이 내려다 보이는 고층의 아파트. 족히 사십 평은 넘어보이는 휑한 실내에 눈에 들어고는 가구라고는 거실의 대형 TV와 멋대가리 없이 커다란 검은색 가죽쇼파, 그리고 여덟 명 정도가 앉을 수 있는 기다란 플라스틱 탁자가 전부다. 냉장고 앞에는 생수와 강장음료, 즉석식품 등이 담긴 박스들이 수두룩하게 쌓여 있다.

그리고 창가에는 다양한 크기의 덤벨들이 마치 전시라도 된 것처럼 가지런히 놓여져 있다. 한귀퉁이에는 백리터짜리 재활용 봉투들이 무언가 가득 채워진 채 몇 덩이가 포개져 있다. 얼핏 보면 무슨 체육인들이 임시로 사용하는 숙소 분위기다.

접이식 플라스틱 탁자 주변에 둘러앉은 체육인 못지 않게 떡대가 좋은 대여섯 명의 남성들이 소파에 앉아 치킨을 뜯어먹으며 열심히 입을 털고 있는 동래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나가 오밤중에 연락을 받고 허벌나게 아그들 몇 명 추려서 운남로에 따악, 도착하니께 이미 상황 종료, 게임셑... 바닥이 피로 흥근하이, 쪼매 과장해서 수십 명이 피칠갑을 혀서 나뒹굴고 있지 않겄냐. 근디, 갑자기 쩌그서 머시기가 꿈지럭 일어나는 거여. 머지, 하고 요로코롬 보니께, 바로 용수형이, 몸 이짝저짝 사시미가 꽂힌 채로, 달빛을 받으며 차박차박 걸어나오더라 이 말이지."

"으어,.. 우리 강부장님 진짜 소싯적에 한따까리 하셨납다."

"어... 근데 그거이 모랄까 주먹 보다는 맷집빨이긴 한디....."


그때 철커덩 현관문 여닫히는 소리가 들리더니 강부장이 경식과 함께 들어온다. 입을 털던 사내가 강부장을 보자 호들갑스럽게 손을 들며 반긴다.


"어이구, 우리 용수성 양반은 못 되네... 와서 치킨 좀 잡숴."

"아그들아... 짐 한가하게 치맥파티나 할 때가 아이다. 어여들 인나 준비들 해라. "

"맥은 빼고 치만 하고 있었슴다..."


강부장이 팔을 들어 때리는 시늉을 하다가 은근슬쩍 방향을 틀어 닭다리를 하나 집어들고는 먹성 좋게 베어문다.

잠시 후, 보스 조인철이 유상무와 함께 들어오자 전부 우루루 자리에서 일어선다.


"아, 괜찮아. 괜찮아. 편히들 먹어... 어이 강부장은 잠깐 보지."


세 사람이 창 쪽으로 다가간다. 강부장이 기름진 손가락을 빨고는 한껏 결의에 찬 표정으로 말한다.


"형님, 준비는 다 돼았슴다. 쥐새끼들 죄 모여 있을 때 싹다 찢어발겨버릴랑께."

"어, 근데 그게 지금 좀 속시끄럽게 생겼다. 금방 유상무편으로 들어온 소식인디, 쩌그 쑥고개 별장서 너랑 함 붙었던 글마가, 채회장 손자라는구만."

"네에? 아니 무슨 그런.... 말도 안되는 야그가 다 있습니까?"

"쯧, 암튼 상황이 지금 좀 엿같으니까 우덜은 돌아가는 분위기를 쪼금 더 보다가 움직이기로 하자고. 까딱하면 고생만 직싸게 하고 덤터기 쓰게 생겼응께."

"그거이 채회장도 알고 있답니까?"

"글쎄. 영감이 알고서도 가만히 있진 않았을 거 같은데. 좌우지간 오늘은 일단 보류....."


조인철이 유상무랑 떠나자 강부장이 한숨을 크게 내쉬고는 겉옷을 벗어 쇼파에 던지고는 털푸덕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곤 닭날개를 하나 집어 경식에게 내민다.


"어이, 아그야, 여 맥도 좀 가와라."



#


선태랑 우진은 미술학원에서 나와 차에 올라탔고, 곧바로 시동을 켜고 출발했다. 샤샤의 해괴한 소리를 얼버무리려는 듯 애쓰는 인수에게서 몇 가지 이야기를 들었지만 아직도 결정적인 사실을 은폐한 채 대충 상황만 모면하려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러나 샤샤가 현재로는 정상의 컨디션이라 할 순 없었기에 휴식을 취한 후 날이 밝으면 다시 모이기로 약속을 하고 자리를 파했다.


"어떻게 입을 열면 열수록 궁금증이 풀리는 게 아니라 점점 더 미궁 속으로 빠져드는 느낌이지 않나?"

"계속 저런 태도로 일관하고 있는 한 방법이 없죠. 무슨 고문이라도 해서 알아내지 않는 한...."


시종 침착하고 냉정해 보이던 우진의 눈빛에도 조금쯤 짜증이 묻어나 보였다. 피곤해서 그런 탓인지도 모른다. 계기판의 시계는 새벽 세 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쯧, 저러고 버티다 된통 당해봐야 정신을 차릴런지...."


선태의 언짢은 중얼거림을 들으면서 우진은 돌아나온 길쪽을 백미러로 계속 보고 있었다. 차가 음습하고 삭막하기 그지없는 재개발 구역 일대를 벗어나 가로등이 훤한 매끈한 지면으로 올라설 무렵, 우진이 무슨 생각에 잠겨서인지 자꾸만 미간에 힘을 주고 표정도 차츰 심각해져 갔다. 그러더니 갑자기 핸들을 움직이고 있는 선태의 팔을 손으로 꽉 잡았다.


"죄송합니다. 기자님, 제가 뭘 빠트린 게 있어서 급하게 다시 돌아가 봐야 할 거 같습니다."


출발한 지 얼마 되진 않았지만 꺼림한 구간을 겨우 벗어난 상태라 선태는 그곳을 다시 되돌아갈 생각에 조금 맥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우진이 표정만 보아서는 뭔가 더 지체해서는 안될 거 같은 느낌도 들어서 군기 바짝 든 운전병마냥 말 떨어진 자리에서 바로 휘리릭 유턴을 했다.


'암만 봐도 어디 뭘 빠트리고 다닐 위인이 아니지 싶은데. 에휴.... 이러다 오늘 뭔가 험한 일 보는 거 아닌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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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34화 고립과 갈망 2 +2 20.10.11 81 11 9쪽
33 33화 고립과 갈망 +7 20.10.09 66 10 11쪽
32 32화 경제적 동물 +8 20.10.04 65 12 9쪽
31 31화 어둠 속의 아이 +9 20.10.01 63 12 11쪽
30 30화 리셋 Reset +8 20.09.27 89 11 12쪽
29 29화 멜랑꼴리 맨 Melancholy Man +8 20.09.18 92 11 9쪽
28 28화 암탉의 영혼 +4 20.09.13 87 12 13쪽
» 27화 엇박자 +4 20.08.31 65 1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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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25화 재회 +4 20.08.21 60 8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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