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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가감정에 시달리는 가스검침원의 노트

판타지는 없다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추리

번지점퍼
그림/삽화
번지점퍼
작품등록일 :
2020.05.31 21:02
최근연재일 :
2021.02.21 22:29
연재수 :
45 회
조회수 :
3,784
추천수 :
441
글자수 :
209,470

작성
21.01.09 2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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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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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글자
11쪽

43화 언더 더 세임 문3

DUMMY

#


혜원은 별안간 벽 너머에서 뭔가 둔탁하게 내리치는 듯한 소리와 함께 어수선한 기운이 느껴져 방문에 귀를 바짝 대고 소리에 집중했다. 누군가 꽤 화가 났고, 그 화를 나름의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는 중인 거 같다. 과학적으로 설명할 순 없지만 그런 느낌은 비교적 정확하다.

혜원은 문 손잡이를 조심스레 돌렸다. 별 기대 없이 혹시나 했는데 구리로 된 차가운 손잡이가 부드럽게 돌아가고 문이 열렸다. 아까까지 함께 있던 초로의 남자와 상고머리 여자가 보이자 화들짝 놀라 문을 도로 닫았다. 작게 딸칵하고 문이 여닫히는 소리가 들렸을법 한데 무슨 대화에 열중하고 있느라 두 사람 다 신경쓰지 않았다.

다시 귀를 대고 소리에 집중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뭔가 자기 얘기를 하는 거 같기도 했다. 혜원은 겁먹은 두더쥐처럼 침대 위 아늑한 이부자리 속으로 파고들었다.


이곳에서 일어난 일들이 모두 꿈 같아서 아직도 좀 몽롱한 기분이다. 늙은 남자가 원하면 얼마든지 여기서 살아도 좋다고 했다. 너무 고마운 나머지 조금 이상하게 굴어도 약간 참아 줄 작정이었다. 하지만 그는 비교적 신사처럼 행동했다.

물론 부담스러운 눈빛으로 너무 여기저기를 오래, 빤히 쳐다봐서 불편한 마음은 있었다. 심지어 발가락까지 뚫어지게 보고는 감탄하듯이 신음 섞인 소리를 내었을 때에는 솔직히 속도 좀 울렁거렸다.

인간들의 불편한 시선 같은 것은 그럭저럭 단련이 되었다. 매니저 아저씨도 나를 무척 사랑했었던 거 같다. 그는 언제나 쓰레기 봉투 냄새가 나는 입을 헤벌리고 뚫어지게 보는 것으로도 모자라 가능한 신체 모든 곳을 사진으로 찍어 간직하고 싶어했다.

'혜원의 발그스레한 귓볼', '이부자리에서 뒹구는 혜원의 귀여운 체모' 등의 제목으로 본인의 은밀한 SNS에 올리고 싶어 했었으나 소속사의 저지로 그 소박한 소망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는 어느 여름날 수천 장의 사진만을 남긴 채 한적한 시골길에서 객사했다.

너무 좋아하고 사랑해서 하는 얄궂은 행동들은 이따금 이해해줘야 한다고 소속사 어르신들이 늘 귀에 딱지가 않도록 말했었다. 누군가에게 사랑받는 일은 감사한 일이다. 사랑은 훌륭하고 고마운 것이니까.

나 역시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필시 그의 발가락 거스러미까지 사랑하게 될지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한편으로 그들이 부럽기도 했다.


그는 갖고 싶은 게 있는가, 먹고 싶은 게 있는가. 불편한 게 없는가 등등을 물어보기도 했다.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평생 누구도 그런 것을 세심하게 챙겨주는 사람이 없었다.

늘 몸무게를 유지하기 위해 굶어야 했고, 남들이 치밀하게 짜놓은 일정에 의해 생명이 없는 장난감처럼 끌려다니며 살았었다. 먹고, 자고, 배설하는 등의 최소한의 욕구 외에는 마음껏 충족시켜 본 경험이 없다. 소속사에서도 일거수 일투족 감시만 할뿐 한시도 마음편히 지내 본 적이 없다.

바보같이 점점 더 초라한 기분이 들어서 눈물만 흘렸는데 남자가 상냥한 눈빛으로 토닥여줬다. 좋은 사람임이 분명하다.



#


잠실에 위치한 어느 북까페. 각 테이블 사이에 세련된 구조의 책장이 파티션처럼 인테리어된 꽤 큰 규모의 까페다. 우진이 들어서자 창 쪽에 자리한 청년이 한 손을 흔들며 기척을 냈다.

가까이서 보니 모자를 돌려쓰고 마스크를 한 채 까페에 비치된 노트북으로 게임을 하고 있던 중이다. 마스크를 턱 밑으로 내리며 일어나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우진을 껴안았다.


"임자 형! 대체 얼마만이지? 어째 더 어려진 거 같기도 하고..."

"어, 센타야 잘 지내지?"


부둥켜안는 게 어색하고 거북한지 우진이 얼른 두 팔을 이용해 풀며 악수를 했다. 잠시 회포를 푼 두 사람이 자리에 앉자 까페 직원이 다가와 주문을 받고 갔다.


"회사 다닌다고 들은거 같는데... 뜬금없이 웬 심부름센타니?"

"어, 그렇게 됐어. 어처구니 없는 댓글이나 달고 앉아 있으려니 좀이 쑤셨는데, 삼촌이 횟집 때려쳤다면서 도와달라잖아."

"삼촌도 잘 지내지?"

"늘 그렇지 뭐. 미세 플라스틱에 찌든 회를 팔면서 그동안 마음이 편치 않았대나 뭐래나... 남은 생을 봉사하는 마음으로 살겠대."


어깨를 으쓱하며 밝게 웃던 센타가 잠시 정색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버님 일은 정말 유감이야, 형... 힘들었겠다."

"내가 뭘 또.... 그래서....뭣 좀 알아낸 거 있어?"

"음... 경찰 조서나 증거 등으로 봐선 특별히 이상한 게 없었어."

"그래...?"

"근데... 오래 전, 인근 해안도로에서 유사한 사건이 있었두만. 그때도 피곤에 쩔은 트럭 운전수가 졸음운전으로 중앙선을 침범했는데... 묘한 게, 그때 사고를 낸 당사자가 이번에 사고를 낸 서부화물의 사장이야."

"흠... 졸음운전 사고야 흔한 일이니... 그 정도론..."

"그렇지, 형. 근데... 이십오 년 전 사고를 내고 감옥에 갔던 그는 갑자기 무슨 돈이 생겼는지 출소한 지 한 달만에 서부화물을 인수했어. 뭔가 이상하지?"

"그러네... 그리고?"

"그때 사고로 죽은 사람은 당시 성곡재단의 대표이사 박평재, 바로 박수진 씨의 아버님이야."

"아..."


의외의 내용에 잠시 놀란 듯 우진의 입에서 가느다란 신음이 한숨과 함께 흘러나왔다.


"서부화물 사장을 좀 더 조사해보면 뭔가 단서가 나올 것 같아."

"....... 그래, 수고해주라...... 그리고, 성곡재단과 ED 엔터테인먼트에 대해서도 좀 알아봐줄래?"

"오케이, 건 다른 건이니 추가입금해야 돼."


우진이 애써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데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이 울렸다. 강주다. 짧게 대화를 나누면서 표정이 조금 굳어진다.


"어, 아직 서울이야...... 그게 또 뭔 말이야...... 알겠어. 바로 출발할게."



#


혜원은 아기자기한 인테리어 소품들을 구경하다가 화분에 꽂아둔 나비 모양의 인형이 눈에 띄어 만지작거리다가 조금 잡아당겼는데 생각지도 못한 날카롭고 긴 꼬챙이가 죽 달려 올라왔다. 통통하고 긴 스투키의 지지대로 세워 둔 모양이다. 그때 누군가 기척도 없이 방문을 열어 혜원이 화들짝 놀라 손을 뒤로 감추었다.

상고머리 여자가 한 손에는 트레이를 들고 다른 손에는 쇼핑백을 쥔 채 들어왔다. 약간 고소한 냄새가 났다. 협탁 위에 가져 온 것을 올려 놓길래 흘낏 보니 삶은 달걀 한 개와 바나나 한 개, 구운 호밀빵 한 조각이 전부다. 실망스럽게도 여태 받았던 식판과 비슷한 구성이다. 어쩌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기 때문인가.

여자가 쇼핑백을 침대 위로 툭 던졌다. 쇼핑백이 벌어지며 쏟아진 것을 보니 속옷이다. 박스에 네 개씩 세트로 들어있는, 편의점에서나 팔 듯한 민무늬 내의들이다. 그 역시 실망스러웠다.

혹시 지금 이 사람이 내게 심술을 부리고 있는게 아닐까? 자신도 모르게 꼬챙이를 들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여자의 왼쪽 광대뼈 언저리에 약간의 멍이 생겼다. 무식하게 누구랑 싸움이라도 했나? 그 모습을 보니 들고 있는 꼬챙이가 한층 더 요긴하게 느껴졌다. 여자의 목소리는 늘 사무적이고 냉랭하다.


"또 필요한 거는?"

"......"

"너 말할 줄 모르니?"

"......."

"야, 야.. 됐다......"


정나미없는 표정으로 나가려던 여자가 갑자기 몸을 획 돌려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리고는 우왁스럽게 혜원의 팔을 꺾어 뒤로 감춘 지지대를 빼앗으려 했다. 꼬챙이 따위로 뭘 어쩌려던 건 아니었으면서도 혜원이 또 기를 쓰며 저항했다.

하지만 여자가 손쉽게 제압해서 빼앗고는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는 보란듯이 끄트머리를 혜원의 목쪽을 겨누듯이 들이댔다. 애매한 자세에서 혜원이 팔을 버둥거리는 바람에 목에 손톱만큼 상처도 생겼다.


"뭐, 이런 또라이가 다 있지. 너 진짜 엄청 머리가 나쁘구나...?"


여자가 혜원을 거칠게 침대로 떠밀었다. 그 바람에 상의 단추가 그대로 뜯겨져 상체가 그대로 노출되었다. 혜원이 아랑곳않고 안간힘을 써서 최대한 도전적인 눈으로 여자를 노려보았다.


"왜? 벌써 반품되고 싶은 모양이지? 근데 어쩌냐.... 우린 귀찮아서 반품같은 건 안해. 불량품은 폐기될 뿐이지...."


한껏 기분나쁜 표정으로 훑어보던 여자는 다시금 특유의 넓은 보폭으로 성큼성큼 밖으로 나갔다. 저 여자는 대체 왜 자꾸 나를 괴롭히는 걸까. 처음부터 무섭고 기분 나쁜 소리만 하고 틈만 나면 거칠게 행동하고.

특별히 내게 친절했던 사람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저렇게 대놓고 모멸감을 주는 사람도 없었다. 이대로 당하고만 있으면 점점 더 우습게 볼지도 모른다.

그리고 처음 봤을 때 했던 '아직이네'란 말은 무슨 뜻일까. 어쩌면 지금까지 있었던 끔찍한 일들도 모두 저 여자가 꾸민 게 아닐까. 무기력하게 있다가 언제 다시 지옥 같은 곳으로 내몰릴지도 모른다. 더이상 당하고만 있지는 않을테다. 나도 뭔가 할수 있는 걸 해야 한다.



#


우진이 센타에게 빌린 차를 급하게 몰고 있다. 강주가 읍내 철물점에 간 사이 샤샤가 잠깐 나갔다 온다는 메모를 개발괴발 적어놓고 사라졌는데, 벌써 반나절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문산시에서 샤샤가 반나절씩이나 볼일을 볼만한 건수는 없었다. 마음이 다급해진 우진이 악셀을 밟은 발에 한껏 힘을 주었다.

어느 새 문산에 도착한 우진은 강주가 준 메모를 살펴보았다. 틀림없는 샤샤의 글씨였다. 진작 폰 하나 장만해주지 못한 게 후회스러웠다. 문산의 바쁜 남자 이승기에게 대포폰을 하나 신청해 놓은 상태다.

우진과 강주는 초조한 표정으로 집 주변을 둘러보았다. 혹시라도 모를 납치의 흔적 같은 것을 확인하는 듯했다. 그때 낯선 번호로부터 문자 메세지가 왔다.


'여기 오죽도. 도움 바람... S샤'


상대 번호로 전화를 걸어보니 먹통이다. 강주와 우진은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 오죽도로 떠날 차비를 했다. 어차피 다른 단서는 없고 마냥 기다리고 있을 수만도 없는 노릇이니 일단 출발하는 수밖에 없다.

설령 샤샤가 보낸 메세지가 아닐지언정 누군가 샤샤를 알고, 샤샤가 지금 집에 없다는 것까지 알고 있다면 어차피 오늘 상황의 주 관련자일 확률이 높은 것이니 함정이든 뭐든 망설일 여유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저건, 아무리 봐도 샤샤의 말투가 맞는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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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44화 언더 더 세임 문4 +4 21.01.26 70 7 21쪽
» 43화 언더 더 세임 문3 +4 21.01.09 65 8 11쪽
42 42화 언더 더 세임 문2 +6 20.12.31 59 8 10쪽
41 41화 언더 더 세임 문 Under the same moon +2 20.12.09 72 8 13쪽
40 40화 인투 더 와일드 +6 20.12.01 62 8 10쪽
39 39화 라비린스 Labylinth 3 +9 20.11.22 72 10 11쪽
38 38화 라비린스 Labylinth 2 +4 20.11.15 66 10 10쪽
37 37화 라비린스 Labylinth +4 20.11.09 74 10 11쪽
36 36화 묘곡모자 猫哭耗子 +6 20.10.31 73 10 9쪽
35 35화 뒷골목 어벤저스 +4 20.10.18 90 10 9쪽
34 34화 고립과 갈망 2 +2 20.10.11 81 11 9쪽
33 33화 고립과 갈망 +7 20.10.09 66 10 11쪽
32 32화 경제적 동물 +8 20.10.04 65 12 9쪽
31 31화 어둠 속의 아이 +9 20.10.01 64 12 11쪽
30 30화 리셋 Reset +8 20.09.27 90 11 12쪽
29 29화 멜랑꼴리 맨 Melancholy Man +8 20.09.18 92 11 9쪽
28 28화 암탉의 영혼 +4 20.09.13 87 12 13쪽
27 27화 엇박자 +4 20.08.31 65 11 11쪽
26 26화 의중 +4 20.08.28 58 9 12쪽
25 25화 재회 +4 20.08.21 60 8 14쪽
24 24화 터미널 +6 20.08.12 83 8 12쪽
23 23화 성난 괴수와 웃는 나무 +6 20.08.01 84 11 11쪽
22 22화 경계선 +5 20.07.27 69 9 8쪽
21 21화 라스트 액션 히어로 +2 20.07.18 60 9 11쪽
20 20화 한여름밤의 꿈 +3 20.07.11 62 9 11쪽
19 19화 좋은 놈, 나쁜 놈, 애매한 놈 +4 20.07.07 69 10 7쪽
18 18화 하늘나라 동화 +2 20.07.07 62 7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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