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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가감정에 시달리는 가스검침원의 노트

판타지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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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지점퍼
그림/삽화
번지점퍼
작품등록일 :
2020.05.31 21:02
최근연재일 :
2021.02.21 2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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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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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209,470

작성
20.12.01 2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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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글자
10쪽

40화 인투 더 와일드

DUMMY

#


'도대체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좋을지...'


작업복 비슷한 차림새의 기택이와 우진이, 강주 세 남자가 지친 기색으로 평상에 앉아 집을 바라보고 있다. 이틀째 낡아빠진 집을 수리하느라 생고생이다.

오랜 세월 아궁이와 온돌 아래를 거쳐 생성된 수천겹의 그을음 탓에 굴뚝 주변부에서 비롯된 시커먼 아우라는 처마를 타고 외벽 전체로 그라데이션처럼 번진 후 거무튀튀하게 삭아버린 슬레이트 지붕 위로까지 이어져 있었다.


장독대 옆의 잡초를 헤치고 석류나무 쪽으로 이동하던 샤샤가 대나무들 사이에서 뭔가를 발견하고 신기한 표정을 지었다. 고장 난 낡은 수도꼭지였다.

지어진 지 최소 육칠십 년은 된 데다 최근 이십 년간은 아무도 살지 않은 채 방치되어 더 황폐해진 듯했다. 아무런 관리 없이 세월이 흐르면서 대나무들이 마당을 점령한 것 같은데, 정작 대나무밭에 수도를 설치한 것처럼 무척이나 자연스럽게 보였다.


이제는 주택으로서의 기능을 상당 부분 상실한 집은 본연의 임무를 포기하고 새로운 존재의 의미와 방식을 부여받은 뒤 자연의 일부가 되기로 마음 먹은 거 같았다.

이를테면 본래의 수명을 다한, 이동력이 없는 어떤 커다란 생명체가 내부에 다양한 유기물들이 터를 잡고 살도록 느긋하게 묵인하고 있는 느낌이랄까. 아무튼 목가적 낭만이나 아날로그한 감성과는 거리가 먼 우진의 표현을 빌리자면 '제대로 썩었다'.


몇천만 원에 집과 땅을 샀다고 멋모르고 흥분하며 기뻐했으나, 상당수 일반인들의 시각에는 꽤 크긴 하지만 딱히 모양도 반듯하지 않은 메마르고 묵은 밭에 초대형 폐기물까지 덤으로 얹어진 무쓸모의 땅을 사버린 바보들로 보일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형, 주방이나 화장실은 제대로 확인하고 계약한 거야?"

"어험.. 친척 어르신 중에 부동산으로 크게 성공한 분이 계신데, 그 분 말씀이 제일 우선하는 목적에 부합하는 조건을 가진 게 나타났다 싶으면 다른 놈이 채가기 전에 얼른 계약하는 게 성공의 비결이라고 하셨거든...."


음료수를 마시던 우진과 기태가 강주의 말을 귓등으로 들으며 일어나서는 잠시 한숨을 내쉬더니 장갑을 끼고 지친 발걸음을 옮겼다.

부지깽이로 뒤적거리면 먼지귀신이 잔뜩 튀어나올 듯한 아궁이는 심하게 파손되어 가마솥을 올리기도 힘들어 보였고, 부뚜막에는 누가 언제 해 놓은 건지 도저히 가늠하기 힘든 썩고 바스라진 장작들이 괴이한 형태로 쌓여 있었다.

당연히 욕실과 화장실도 없었다. 단지 울타리 옆에, 직육면체라고 보기도 어렵고 '변소'라고 불러주기도 과분한 난이도 높은 기하 형태의 음험한 공간이 수줍게 자리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나마도 발로 조금 세게 걷어차면 한순간에 무너질 것처럼 생겨 먹었다. 보안담당인 우진은 이것만은 확실히 고치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전에 없이 강력한 주장을 했는데, 의외로 사샤는 그따위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이 무심한 표정을 지었다.


어디에 무엇이 어떻게 필요한지 가닥을 잡고부터는 대체로 신속하게 진도가 나갔다. 어차피 안락함을 추구하기 위해 각 잡고 고향으로 내려온 것도 아니고, 일행은 암묵적 동의하에 대충 춥고, 불편하고, 배고프고, 지저분하게 살아내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신청한 전기가 들어온 후 지하수 발전기를 가동해보니 딱히 맑아 보이진 않았지만 수도꼭지에 물이 나온다는 것이었다.

필요 이상으로 많은 것을 포기하고 나니 인테리어라는 것은 크게 의미가 없어져 버렸다. 손재주가 좋아 이것저것 만들 생각에 조금 들떠 있던 강주는 약간 김이 샜다. 하지만 기둥과 서까래 정도 손보는 일만으로도 앞으로 꽤 할일이 많았다.


우진은 세라믹 재질의 변기를 포함한 기타 등등의 건축 자재와 간단한 먹거리를 사러 차를 타고 읍내로 나갔다. 그 참에 기택이는 버스터미널에 내려 주기로 했다.

강주는 막간을 이용해 샤샤를 위해 2층 침대를 만들 작정을 했다. 방이 두 개이긴 하지만 하나는 창틀이 부서지고 벽의 일부가 유실되어 상당한 보수가 필요한 상태였다. 당장은 따로 방을 내어 줄 공간이 없어 떠올린 궁여지책이었다.

마루 밑에서 다듬잇돌과 방망이를 발견한 사샤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일어서더니 간만에 조금 태평한 표정으로 기지개를 켜며 주변을 둘러보다가 지붕 너머로 얼굴을 내밀고 있는 거대한 감나무를 발견하였다.


강주는 땅 바닥에 간단히 설계도를 그려 놓고 곧바로 나무를 재단했다. 디자인은 간단했지만 넓은 합판을 반듯하게 자르는 일이 생각처럼 쉽지가 않았다. 설마 벌써 전기가 들어왔을 줄이야.

전동 직소와 각도 절단기를 가져와서 다음에 만들까 하다가 다시 힘을 내어 톱질을 해보는데 딱히 지지할 곳이 없는 합판이 수시로 끄덕거렸다. 누군가 밟아주면 좋겠다 싶어 샤샤를 불러보는데 대답이 없다.


집 뒤로 돌아갔더니 샤샤가 커다란 감나무에 매달려 오르고 있었다. 흥, 몇 개 매달린 감이 탐이 나서 그새 그걸 따러 올라가셨군. 외국 사람들은 까치밥의 미덕도 모르나. 돌아서려던 강주의 안색이 돌변하더니 감나무 쪽으로 허둥지둥 달려갔다.

감나무는 보기보다 가지가 약한 걸로 유명한 나무다. 해서 어릴 때부터 뉘집 머시깽이들이 멋모르고 감나무에 올라갔다가 가지가 부러져 크게 다쳤다는 둥의 얘기를 종종 들은 적이 있다.

오죽하면 감나무에서 떨어진 동네 바보형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다 있을까, 라고 생각하기가 무섭게, 샤샤가 멀리 손을 뻗느라 붙들고 있던 가지가 바로 우지끈, 살벌한 소리를 내며 부러졌다. 강주가 나무 밑으로 몸을 날렸다.


강주가 제법 민첩하게 몸을 움직였으나 위를 보느라 제대로 중심을 잡지 못하고 휘청거렸다. 저대로면 머리부터 거꾸로 떨어지겠구나. 라고 생각하며 막연하게 두 팔을 내밀었는데, 샤샤는 거의 안전한 모양새로 강주의 품에 안기듯이 떨어졌다.

쓰러진 두 사람은 낙옆이 소복한 바닥에 겹쳐지듯이 누웠다. 가지가 부러질 때부터 넘어질 때까지 일순간이었지만 강주에겐 꽤 길게 느껴질 정도로 모든 것들이 생생하게 보였다. 둘 다 놀라 얼어붙은 듯 얼마간 그대로 있다가 강주가 더듬더듬 입을 뗐다.


"너 뭐야....?"

"쏘리.."

"그게 아니라.... 너 좀 전에 공중제비 돌지 않았냐?"

"공중 뭐?"

"허공에서 한 바퀴 돌지 않았냐고..."

"먼 헛소리...."

"아냐.... 나 분명히 본 거 같아."

"........."

"........."

"........."

"야, 너.....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꺼냐?"

"어, 좀 있자...."

"어디 다친 데 없어?"

"........."


샤샤는 강주를 깔고 누워 쌔근쌔근 편하게 숨을 내쉬었다. 숨소리가 남다르게 큰 듯했는데 그 소리와 박자가 강주에게도 묘한 안정감을 주었다. 비록 하고 있는 모양새는 이상야릇했지만 두 사람은 꿈을 꾸는 것처럼 몽롱하게 안식의 시간을 가졌다.


누구의 입장에서 하필인지는 모르겠지만, 하필 그때 우진이 도착했다. 우진은 차에서 내린 다음에도 미처 두 사람을 발견하지 못했다. 낙엽 더미 사이에 납작하게 붙은 채 꼼짝 않고 누워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진이 차에서 물건을 내리던 중 두리번거리다 문득 두 사람을 발견하고는 허겁지겁 달려왔다. 누군가의 공격을 받아 다쳐서 쓰러졌다고 생각한 것이다. 우진은 멀쩡한 표정으로 가만히 포개져 있는 두 사람을 내려다보며 황당한 표정으로 물었다.


"뭐 하냐....?"

"어이.... 친구. 좀 도와주라. 둘 중 누군가는 어디 허리라도 부러졌을 거 같다."


우진이 그제서야 약간 걱정스러운 듯 샤샤의 양쪽 겨드랑이에 손을 넣고 일으키는데 샤샤가 간지러운 듯이 꺄르르 소리를 내어 웃었다.


"어? 저건 뭐지?"

"음...? 뒤쪽으로 창고를 달아냈나 보네...."


샤샤를 아무렇게나 내려 놓은 우진이 키보다 큰 잡초들을 헤치고 창고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삽, 괭이, 낫, 호미, 화로, 우산, 이불, 비료 포대 등.... 낡고 녹슨 다양한 농기구와 잡동사니들이 아무렇게나 쌓여 있었다.

잠시 삽과 괭이의 상태를 확인해보던 중 무심코 고개를 돌리다가 창고 한켠에 마련된 먼지투성이의 보일러를 발견한 우진의 눈이 빛났다. 보일러가 있다는 소리는 부근에 수도꼭지와 배수구도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었다.



#


세 사람은 간단히 인스턴트 스프를 끓여서 빵과 함께 끼니를 때웠다. 밤이 되니 날씨도 꽤 쌀쌀해졌다. 부뚜막에 쌓여 있던 장작들 중 쓸 만한 것을 가져다 모닥불을 만들었다. 그리고 샤샤에게서 여태 듣지 못했던 몇 가지 궁금한 이야기들을 들었다.


"모두 등급이 있다고 들었어."

"등급이라니.... 아우, 너무하네 "

"그래 너무하지. 무슨 소돼지도 아니고.... 아무튼 A부터 D등급까지 있는데 각 등급마다 보내지는 곳이 달라진다고 했어."

"혜원이 같은 경우가 A등급일까.."

"글쎄.... 나도 확실히는 몰라, 각 등급이 어떻게 나뉘는지. 어쨌든 그 리스트를 보면 알수 있을지 모른다고 했는데....."

"아, 그놈의 리스트, 어떻게 찾지...."



#


최비서가 고용석을 찾아 여기저기 방을 두드리고 있다. 저번처럼 또 못볼 것을 보게 될지 몰라 일일이 노크를 하고 반응을 기다렸다. 그러다 어느 방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굳이 노크를 하지 않아도 안에서 온갖 요란한 소리들이 들려왔다.

주로 유라의 성질부리는 소리, 집어던지고 부서지는 소리, 뭔가 얼르고 달래는 것 같은 고이사의 말과 소리들이 들려왔다. 최비서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더니 안경을 고쳐 쓰면서 발길을 돌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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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44화 언더 더 세임 문4 +4 21.01.26 70 7 21쪽
43 43화 언더 더 세임 문3 +4 21.01.09 65 8 11쪽
42 42화 언더 더 세임 문2 +6 20.12.31 59 8 10쪽
41 41화 언더 더 세임 문 Under the same moon +2 20.12.09 72 8 13쪽
» 40화 인투 더 와일드 +6 20.12.01 63 8 10쪽
39 39화 라비린스 Labylinth 3 +9 20.11.22 72 10 11쪽
38 38화 라비린스 Labylinth 2 +4 20.11.15 66 10 10쪽
37 37화 라비린스 Labylinth +4 20.11.09 74 10 11쪽
36 36화 묘곡모자 猫哭耗子 +6 20.10.31 73 10 9쪽
35 35화 뒷골목 어벤저스 +4 20.10.18 91 10 9쪽
34 34화 고립과 갈망 2 +2 20.10.11 81 11 9쪽
33 33화 고립과 갈망 +7 20.10.09 66 10 11쪽
32 32화 경제적 동물 +8 20.10.04 65 12 9쪽
31 31화 어둠 속의 아이 +9 20.10.01 64 12 11쪽
30 30화 리셋 Reset +8 20.09.27 90 11 12쪽
29 29화 멜랑꼴리 맨 Melancholy Man +8 20.09.18 92 11 9쪽
28 28화 암탉의 영혼 +4 20.09.13 87 12 13쪽
27 27화 엇박자 +4 20.08.31 65 11 11쪽
26 26화 의중 +4 20.08.28 58 9 12쪽
25 25화 재회 +4 20.08.21 60 8 14쪽
24 24화 터미널 +6 20.08.12 83 8 12쪽
23 23화 성난 괴수와 웃는 나무 +6 20.08.01 84 11 11쪽
22 22화 경계선 +5 20.07.27 69 9 8쪽
21 21화 라스트 액션 히어로 +2 20.07.18 60 9 11쪽
20 20화 한여름밤의 꿈 +3 20.07.11 62 9 11쪽
19 19화 좋은 놈, 나쁜 놈, 애매한 놈 +4 20.07.07 69 10 7쪽
18 18화 하늘나라 동화 +2 20.07.07 62 7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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