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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가감정에 시달리는 가스검침원의 노트

판타지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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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지점퍼
그림/삽화
번지점퍼
작품등록일 :
2020.05.31 21:02
최근연재일 :
2021.02.21 22:29
연재수 :
4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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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1
글자수 :
209,470

작성
20.10.01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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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31화 어둠 속의 아이

DUMMY

#



돌아갈 때는 지름길로 가지 않았다. 두 사람은 꼬불꼬불 언덕길을 따라 한참을 말없이 걸었다. 나란히 함께 보폭을 맞춰 걷는 게 아니어서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각자 자기의 길을 가는 두 사람이 우연히 한 방향으로 걷는 듯이 보이기도 했다.

우진이 뭔가 여러가지 생각에 잠긴 복잡한 표정이라면 샤샤의 경우 희노애락 중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無'에 가까운 표정이었다. 약간 뒤에서 느리게 따라 걷던 우진이 어느 순간 샤샤와 보폭을 맞춰 걸었다.


"그때... 사람이 아니라고 한 건 무슨 뜻이야?"

"......."

"물론 평범한 상황은 아니었으니까, 기억이 안 날 수도 있어."

"......."

"아니면 약에 취해 나온 헛소리 같은 건가?"

"......."


샤샤가 그 자리에서 우뚝 멈춰 섰고 우진은 한 걸음 정도 앞에서 멈춰 섰다. 우진이 돌아보자 황금빛이 도는 커다란 갈색 눈망울로 그의 눈을, 마치 안구 너머 그 안쪽이라도 헤집고 들여다볼 기세로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심장이 약한 사람이라면 견디지 못하고 시선을 피했을지도 모른다.



#


금천경찰서 강력3반. 옆자리에서 동료가 잡범과 말씨름 중이라 시끄러운지 오형사가 한쪽 귀를 막고 통화 중이다.


"오케이, 고마워, 신... 나중에 블루오페라에서 한번 보자. 응, 응, 땡큐~"


통화를 끊은 후 재빨리 폰과 노트북을 연결하더니 일어나서 팩스 수신함을 뒤져 서류 한 장을 골라 들고 온 후 노트북에 연결된 폰 자료함에서 동영상 파일 하나를 찾아 클릭한다.

촬영 각도로 보아 CCTV 영상처럼 보인다. 인천 부평구 어느 유흥가 뒷골목 앞에 승합차가 한 대 세워져 있다.


지숙은 사건 당일, 일대 CCTV와 통행기록을 통해 새벽 두 시에서 다섯 시 사이 미술학원 인근을 오갔던 차량들에 대해 조사했다. 새벽 시간인데다가 재개발구역이라는 특성 때문에 다행히 통행 차량은 많지 않았다. 쓰레기차와 정선태의 SUV를 포함시켜도 백여 대 정도였다.

지숙은 각 차주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어 간단히 알리바이를 확인했는데, 연락이 안 되는 차량 열두 대 중 딱 한 대만 차량등록증에 나와있는 차량과 영상에 찍힌 차량이 일치하지 않았다. 대포차라는 뜻이다. 지숙은 그 승합차의 동선을 확인하다가 부평으로 넘어가는 바람에 그쪽 관할 후배에게 동선 추적을 요청했고, 지금 막 관련 자료가 도착한 것이다.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 그녀의 어깨를 툭쳤다.


"야, 니 뭐 하냐?"


직속상관이자 팀장인 서형석이다.


"아, 그냥 혹시나 해서 그 시간에 다녀간 차들 좀 조사하고 있었어요."

"야, 니는 뭘 그렇게 엉뚱한 데까지 쑤시고 삽질을 하느라 쌩고생을 사서 하십니까. 여기서 조사고 뭐고 할 게 어딨다고요... 바로 현장에서 용의자란 놈도 떡하니 같이 잡혀줬겠다. 이만저만 해서 그놈 자슥 입만 열도록 만들면 되지 않겠습니꺄..."

"근데 뭐.... 막상 저렇게 마냥 함구하고 있으면 도리가 없어서..."

"그건 좀 그렇지요? 크크.... 우리 야실야실한 언니들께선 좀 무리긴 할거에요. 상황 봐가면서 눈도 막 싸납게 야리고, 책상도 쾅쾅 내리치면서 무섭게 겁도 팍 쌔리 주고 그래야, 자백이든 고백이든 할 텐데 말이지요... 크크... 야,야이노마, 어서 자배글하지 모테?"


형석은 되지도 않는 여자 성대모사까지 하면서 아주 혼자 살판이 났다. 됐으니까 제발 좀 저쪽으로 가주었으면. 하루이틀 겪는 일도 아니라서 저자의 뻘소리는 얼마든지 참고 들어 줄 수 있다. 하지만 팔을 들썩거릴 때마다 진하게 풍겨오는 땀냄새와 수시로 튀겨오는 타액은 정말이지 너무나 끔찍하고 공포스럽다.


"클클... 그나저나 형사 생활 십수 년을 하고도 그렇게나 감이 없어서 어떡하셔요. 보세요 언니. 이 사건은 해도 해도 너어무 단순해. 봐라, 한 건물에서 두 놈이 나자빠져 있다. 근데 한 놈은 뒈졌고 한 놈은 뒈지기 직전까지 뚜들겨 맞았다. 그럼 뭐냐, 걍 두 놈이 치고 받고 싸우다가 하나 죽고 하나는 튀기 일보 직전에 잡힌 거야."

"그나저나 두 사람이 그리 죽도록 싸운 이유는 뭘까요?"

"답답하다 진짜. 머가리를 요로케 조로케 함 굴려보세요 온니, 남자인간 둘이 죽도록 치고받았을 때 뭔 이유가 있겠어요. 빤하지. 돈, 아니면 여자!"

"오, 그러네요... 역시 베테랑은 다르시다..."


지숙은 부디 형석이 빨리 자리를 떴으면 싶은 심정으로 대충 장단을 맞추어 주었다.



#


이제는 밤이 되자 가을 바람이 제법 쌀쌀하게 느껴진다. 세 사람이 게스트하우스 마당 한켠 느티나무 아래, 둥그런 철제 탁자를 사이에 앉아 있다.

탁자 위에는 반쯤 마신 오백 미리 생수병과 바나나 몇개, 그리고 재떨이처럼 쓰이는 큼지막한 뚝배기가 있다.


"한 번도 이상하다고 생각 안 해 봤어?"


샤샤가 담뱃재를 톡톡 털어가면서 애매하게 꺼낸 이야기를 차분하게 이어갔다.


"왜 누구도 쟤들을 찾는 사람이 없을까? 요즘같은 첨단 소셜 네트워크 시대에...."


샤샤가 강주 쪽을 보면서 물었다.


"너 유뷰트 많이 보지?"

"어, 어떻게 알았지... 맞어, 나 진짜 많이 봐."

"근데 거기서 한 번이라도 혜원이나 또 누구를 찾거나 함께 지낸다고 하는 가족이나 친지 얘기 들어본 적 있어?"

"어... 없을 껄... 아마.... 없지?"


강주가 우진이 쪽을 묻듯이 쳐다보았다가 우진이 유튜브를 거의 보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머리만 긁적거렸다. 우진의 표정이 약간 굳어지는 듯 싶더니 호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고는 담뱃갑은 그대로 탁자 위에 올려놨다.


"뭐, 워낙 많으니까, 어딘가에 있을 테지만 미처 보지 못했다고 생각.... 했을 껄? 아마?"

"아마? 없을 꺼야. 분명히..... 못 믿겠으면 언제 한번 다양하게 검색해 봐."

"씁, 그게 왜 그런 거지? 아..... 그래, 혹시 가족들이 새삼 언급되는 게 꺼려져서 그런 거라면......"

"그러면 친구는? 이웃은? 아무도 없을까? 지인도? 친하게 지낸 단골 미용실 언니도? 하루가 멀다하고 연예 톱뉴스에 얼굴을 보이던 유명인인데? 너도 나도 유뷰브든 인스타든 지 엉덩이 문신까지 자랑하고 싶어서 안달난 세상에?"

"뭐야, 뭐야....샤샤 지금 무슨 얘길 할려는 거야. 그럼 우리 혜원이는...."


강주가 갑자기 한기를 느껴 몸을 부르르 떨면서 입고 있던 가디건을 꼭 여미다가 맞은편의 샤샤를 보더니 바로 벗어서 건넸다. 샤샤가 손을 저어 사양하다가 강주가 계속 팔을 뻗은 채 내밀고 있자 가디건을 받아 무릎 위로 덮었다.


"헤이하이쯔라고 들어봤지?"

"헤이하이쯔라면.... 흑해자....? 어둠 속의.... 아니 근데, 그건 중국 얘기잖아. 맞지?"


강주가 이번에도 우진을 돌아봤지만 우진은 여전히 심각한 얼굴로 담배 연기만 빨아들이고 있다. 샤샤는 가끔 난해하고 어려운 낱말을 동원해야 할 때는 영어를 동원하기도 했다. 강주가 스마트폰을 꺼내 놓고 종종 검색을 한다.


"왜 그런 아이들이 생겨났는지 니네도 대강 들어서 알지. 중국 같은 경우엔 억지로 산아제한 정책을 폈기 때문에 그렇다고 하지. 그런데 다른 나라엔 그런 비슷한 애들이 없을까?"


강주가 생수병을 들어 물을 벌컥벌컥 마신 후 몹시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마치 구원의 손길이라도 잡듯이 자기도 담뱃갑으로 손을 뻗었다.


"최초의 원인은 각 나라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세상 어디에나 그 비슷한 아이들이 존재한다고 보면 돼."

"가만, 그럼 혜원이도... 그런 케이스란 거야?"

"내가 알기론....."

"아, 세상에..."


뚝배기만 점점 더 수북해지고 있을 무렵, 주인 아저씨가 무슨 따뜻한 차 같은 걸 만들어 쟁반에 내오는 바람에 대화가 잠시 중단되었다. 가끔 반딧불이 한 두마리가 주변에서 반짝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했다.


"아... 진짜 너무 말도 안돼. 어떻게 요즘 같은 저출산 시대에...... 중국이나 멕시코 같은 나라라면 또 모를까...."

"그쪽은 그나마 형편이 괜찮... 다고 하면 이상하지만, 최소한 걔네는 뭐든 불리는 이름이라도 있지. 그건 그 존재를 다 함께 인정하고, 고민하고 있다는 얘기니까. 그래서 알량하지만 이후에 이런저런 해결 방안들이 모색되어 왔던 거고...."

"샤샤, 넌, 그럼.... 어떻게 듣고 우리나라를 오게 된 거야. 다른 나라에도 많이 있다며..."

"동료들이 좀 있어. 그리고 니네 나라가 또 약간 특이한 곳이라....."

"뭐야, 뺑뺑이야? 너도 참, 운이 없구나..."

"동료들은 나더러 운이 좋다고 하던데?"

"그, 그런 거야?"

"이 나라는 최소한 총 맞아 죽을 일은 없겠다면서......"

"이런, 맙소사...."


말없이 이야기만 듣고 있던 우진의 표정은 점점 더 어두워졌다.


"어, 근데... 잠깐, 샤샤, 그런 애들 대부분 범죄나 뭐 쫌 이상한 쪽으로 이용된다고 들었었는데... 그럼 혜원이 같은 경우는 뭐지....?"

"휴..... 그건 좀 쉬었다가 다시 이야기 할까. 채동식 쪽 관련해선 니네도 특별히 관심이 많은 거 같으니까."

"채.... 채동식....?"

"응....? 뭐? 왜?"


강주가 당황한 낮빛으로 샤샤와 우진을 번갈아 보자, 샤샤도 우진과 강주를 번갈아 보면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우진이 한숨을 내쉬고는 뻐근하다는 듯이 뒷목을 주물럭거렸다.



#


중년의 여자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등을 보이고 앉은 여자애의 머리를 브러쉬로 빗어내리고 있다. 앞에 앉아 있는 여자아이는 혜원이다. 베이지색 티 드레스 아래로 앙상한 어깨가 드러나 보인다.

뒤의 여자가 엉킨 머리가 제대로 빗겨지지 않자 브러쉬에서 머리칼을 잡아뜯듯이 당겼고, 그 바람에 꽤 많은 머리칼이 뽑혀나왔다. 여자가 혀를 차면서 뭐라고 혼잣말을 하는데 확실하진 않지만 동남아쪽 언어같다. 그녀는 기계적인 손놀림으로 뻗친 머리카락를 대충 간추린 후 양갈래로 나눠 리본으로 묶기 시작했다.

혜원은 아픈 기색도 없이 거칠게 당겨지는대로 머리만 이쪽 저쪽으로 까딱거리고 있는데, 이 공간에 처음 도착했을 때보다 꽤 호전되어 보인다. 볼살이 다시 약간 차올랐고 예의 그 빛나던 뽀얀 피부가 어느 정도 회복되어 살짝 홍조마저 비친다.

그런데 여태 무표정하게 있던 그녀가 갑자기 무릎 위에 올려진 낡은 인형의 성긴 머리칼을 천천히 잡아 뜯기 시작했다. 맞은 편 하얀 벽 위로 환영이 보였다. 굶주린 하이에나 떼에 둘러싸여 의혹과 분노, 절망이 느껴지는 어린 사자의 눈망울. 애처러운 포효 소리와 함께 환영이 꺼지면서 혜원의 눈도 초점을 잃고 허공에 머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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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33화 고립과 갈망 +7 20.10.09 66 10 11쪽
32 32화 경제적 동물 +8 20.10.04 65 12 9쪽
» 31화 어둠 속의 아이 +9 20.10.01 64 12 11쪽
30 30화 리셋 Reset +8 20.09.27 89 11 12쪽
29 29화 멜랑꼴리 맨 Melancholy Man +8 20.09.18 92 11 9쪽
28 28화 암탉의 영혼 +4 20.09.13 87 12 13쪽
27 27화 엇박자 +4 20.08.31 65 1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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