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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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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지점퍼
그림/삽화
번지점퍼
작품등록일 :
2020.05.31 21:02
최근연재일 :
2021.02.21 2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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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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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209,470

작성
20.09.18 2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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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쪽

29화 멜랑꼴리 맨 Melancholy Man

DUMMY

#


지숙이 거실 쇼파에 앉아 사건 현장에서 찍은 사진들을 재차 살펴보고 있다. 부서진 의자와 이젤, 책상 등이 찍힌 사진을 머리를 긁적이며 들여다보다가 네모 난 뿔테 안경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탁자 위에는 미술학원 일대가 찍힌 위성지도가 펼쳐져 있다.


오지숙. 30대 중반으로 금천서 강력계 소속이다. 목덜미가 늘어진 메리야스 바람으로 쪼그리고 앉아 막대사탕을 물고 있고, 곁에는 반려견 우디가 납작하게 배를 깔고 누워 홈쇼핑 광고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다. 얼핏 레트리버 비슷해 보이는 믹스견으로 황금빛 긴 곱슬의 털과 영민한 눈빛을 가졌다.


새벽 6시쯤 우디와 산책을 하던 중 얼마간 친분이 있는 정선태 기자에게서 사건이 터졌으니 와서 수습 좀 해보라는 히깔한 연락을 받았었다.

아니나 다를까, 보통의 경우엔 현장 부근에 도착해보면 사건 스타일이라든가, 사이즈라든가 무언가 일감으로 짚히는게 있어야 되는데 여기는 공간 자체가 뭔가 좀 생뚱맞았다.

말하자면 한 건물에서 같은 시각에 두 명의 피해자를 발견했음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공통점이나 연관성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얘기다. 혹시 두 사람은 서로 전혀 다른 사람에게 공격을 받은 것일까?


헤어스타일과 흉터, 옷 스타일까지 거친 인생의 흔적이 노골적으로 느껴지는 떡대 한 명이 피떡이 된 채 계단참에 쳐박혀 있었고, 건물 4층에는 이목구비가 반듯한 젊은 남성이 몸에 있는 피를 거의 다 쏟아낸 듯 파리한 낯빛으로 모로 누운 채 사망해 있었다.


하다하다 시체까지 얼평을 한다고 흉볼 수도 있겠지만 형사 초임 시절 사체 공포증을 참아가며 꼼꼼하게 조사에 임하기 위해 동료들과 함께 고안해낸 나름 효과적인 방법이다.

거기에 별명이나 애칭까지 붙여주면 꿈자리에서 만나더라도 한결 친근하게 느껴지곤 했다. 이 청년은 분위기가 묘하게 우울해 보이니 '무디'라고 불러주기로 했다.


기사와 연관된 정보를 수집하다가 하필 우연히 들른 곳에서 사상자를 발견했고, 얼결에 오형사가 떠올라 신고하게 되었을 뿐이다. 피떡이 된 떡대가 깨어나길 기다렸다가 당신네들의 케케묵은 스킬로 탐문이든 고문이든 해보면 되지 않겠느냐,가 정선태의 입에서 나온 관련 진술이랍시고 할만한 전부였다.


누굴 바보 찐따로 아나. 이래 봬도 강력계 경력만 벌써 십 년이 넘었다. 어디서 그런 씨알도 안 먹힐 소리를 하나. 스포츠 일간지에서 오랜 세월 손쉽게 단물만 빨던 연예부 노땅 기자가 그 새벽에, 기사 자료를 구하기 위해 범죄자와 부랑자들이 우글거리는 재개발 구역으로, 혼자 후비고 들어갔다고?

능구렁이 같은 양반이 틀림없이 뭔가 결정적인 걸 꼬불치고 말을 않는구나 싶은 느낌이 들어 지숙이 계속해서 옆구리를 찌르며 채근하자 늙은 기자가 다크서클이 한뼘이나 늘어진 피곤에 쩔은 얼굴로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하아... 오형사, 솔직히 인제는 나도 뭐든 다 털어놓고 당장 몸부터 사리고 싶은 심정이야. 근데 당췌 지금까지 뭐를 알아낸 게 있어야 협조든 취재든 할 거 아니냐고. 나도 진짜 미치고 환장하겠어요..."


첨단 21세기 디지털 시대의 형사씩이나 되어서 역시 촉이니 뭐니 하면 우습게 들리겠지만 표정만 봐서는 제법 진정성이 느껴졌다. 정선태는 뭐든 단서가 될 만한 것을 입수하게 되면 지체없이 공유하겠노라고 다짐을 한 뒤 허둥지둥 자리를 떴다. 떠나기 직전 의문의 피해자가 모 기획사 소속 연예인의 매니저였다는 것만 슬쩍 흘리듯이 말해 주었다.


지숙은 한때 훈훈하고 따스한 빛의 세계에 속했을 사진 속 남자의 어딘가 슬퍼 보이는 옆얼굴을 보며 혼잣말을 했다.


'무디, 누가 당신을 이렇게 슬프게 만들었나요?'


개가 자기를 부르는 줄 알고 반짝거리는 코를 킁킁 거리며 다가와서는 동거인의 무릎께에 머리를 올려놓고 잠이 든다.



#


"어머니, 거기서 그런 게 왜 필요해요..."


여행 가방 옆구리에 '언제 어디서도 뽑아 쓰기 편리한 물광 마스크팩'과 '아이롱 펌의 자연스러운 연출도 가능한 무선 세라믹 봉 고데기'를 안간힘을 다해 쑤셔 넣고 있던 연옥은 갑자기 뒤에서 들려온 아들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랬다.


"어우, 심장이야. 야, 너는 사내 놈이 뒤꿈치라도 들고 걷니? 왜 왔다 갔다 하는데 통 아무 소리가 안 들려.. 밑에 층엔 죄다 가는 귀 먹은 노인네들만 살아갖고 층간 소음 같은건 신경 안 써도 되는데..."


연옥이 특유의 화법이다. 자신이 뭔가 불리하면서도 관철시키고 싶은 애매한 요구사항이 있을 때, 속사포로 말을 최대한 많이 해서 주체와 객체가 혼란스럽게 만들어, 상대방이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귀를 막고 돌아서게 만드는 수법.


"너가 그랬잖아, 어디 혼자 편의점에도 가지 말라며, 화장실 갈 때도 꼭 얘기하고 가고, 똥도 오래 누게 생겼으면 문자라도 보내라고. 하나 있는 아들이 그렇게나 겁을 주고 말하니까 아무래도 준비성 좋은 내가 만일의 급박한 상황까지 대비해야 하고 또오..."

"네, 네, 알겠으니까, 빨리 준비하세요."



*


연옥은 우진이 운전하는 차의 조수석에 앉아 애써 쾌활한 척 라디오 채널까지 여기저기 바꿔가며 콧노래를 부르고 있지만, 아들에게서 뿜어나오는 불길한 기운을 진작 감지하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 자세한 얘기는 않고 차까지 렌트해 갖고 와서는, 옷과 소지품을 챙기기 위해 집에 다녀오겠다는 연옥을 병원에서부터 줄곧 호위하다시피 따라다고 있었던 것이다.

우진은 굳은 얼굴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문득 모친의 표정을 흘낏 보고는 살며시 손을 잡아주었다.


"별일 아니에요. 뭐, 미리 미리 대비해서 손해 날 거 없으니까요. 또 아저씨도 어차피 누군가 곁에서 돌봐드려야 하고... 번거로우시겠지만 당분간만 제 말대로 조심해서 지내 주세요."


연옥은 말없이 창가로 시선을 돌리고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가 갑자기 가방에서 뒤적뒤적 휴지를 찾아 넓게 펴더니 팽 소리가 나게 코를 풀었다. 그리고는 저도 슬그머니 여기저기 흉터가 있는 아들의 손을 잡았다.


"야, 봐봐... 나 지금 쫌 행복한 얼굴 아니니?"

"예?....."

"너처럼 근사하고 믿음직스런 남자가 내 아들이라니 말이야... 헤헷"

"어,....."

"야, 너 방금 수줍어 한 거지? 맞지, 맞지? 푸헤헤헷,, 멋지고 믿음직스러운데다 귀엽기까지한 우리 아들내미..."

",......"


라디오에서는 무디 블루스의 '멜랑꼴리 맨(Melancholy Man)'이 흘러나오고 있다. 연옥이 한껏 음악에 취한 얼굴을 하고서 가사를 엉터리로 따라 부르고 있다.


"그나저나, 직장까지 몇 달 쉬고.... 에휴, 우리 당분간 머 먹고 산다니...."

"음.... 아무래도 집을 팔아야 할 거 같아요."

"뭐라곳?...... 에.. 미안, 아까꺼에서 믿음직은 뺄게.."



#


병원에 도착한 연옥은 침상 옆의 옹졸하게 생긴 사물함에다 본인의 옷가지를 가득 쑤셔박은 후, 마땅히 둘 자리를 찾지 못한 고데기와 마스크팩을 끌어안고 초조하게 눈을 굴리고 있다. 최동석과 우진이 그런 연옥을 바라보며 함께 어이없는 표정을 짓고 있다.


담당의사로부터 최동석은 다행히 예후가 괜찮은 편이라 좀 더디긴 해도 제대로 치료만 끝내면 손상된 장기들도 꾀죄죄하나마 정상인에 가깝게 복구가 될 듯하다는 얘기를 들었다.

최악의 상태까지 각오하고 있었던 연옥은 당면한 현실을 조금 즐기기로 했다. 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하루 하루를 마지못해 등 떠밀리듯 살아가던 직장인들에게 있어 장기입원 생활이란 충분히 그 나름의 미덕이랄 것도 존재하므로.


연옥은 파란색 글자가 찍힌 환자복과 커플룩의 느낌으로 맞춰 입은 하늘색 원피스 차림으로 동석의 얼굴에 바짝 붙어서서는 환한 얼굴로 인증 사진을 찍었다.

우진은 그런 모친의 모습이 조금 낯설고 어색하게 느껴졌지만 딱히 싫지는 않았다. 우진은 새삼스레 반듯하게 서서 허리까지 크게 굽혀가며 최동석을 향해 꾸뻑 인사를 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쳇, 너는 무슨 전치 사십 주 환자한테 팔팔한 사람을 부탁하고 그러니. 웃긴다 얘... "


동석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눈빛만으로 굳게 약속을 했다.


"최선을 다해서 지킬 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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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43화 언더 더 세임 문3 +4 21.01.09 64 8 11쪽
42 42화 언더 더 세임 문2 +6 20.12.31 59 8 10쪽
41 41화 언더 더 세임 문 Under the same moon +2 20.12.09 72 8 13쪽
40 40화 인투 더 와일드 +6 20.12.01 62 8 10쪽
39 39화 라비린스 Labylinth 3 +9 20.11.22 72 10 11쪽
38 38화 라비린스 Labylinth 2 +4 20.11.15 66 10 10쪽
37 37화 라비린스 Labylinth +4 20.11.09 74 10 11쪽
36 36화 묘곡모자 猫哭耗子 +6 20.10.31 73 10 9쪽
35 35화 뒷골목 어벤저스 +4 20.10.18 90 10 9쪽
34 34화 고립과 갈망 2 +2 20.10.11 81 11 9쪽
33 33화 고립과 갈망 +7 20.10.09 66 10 11쪽
32 32화 경제적 동물 +8 20.10.04 65 12 9쪽
31 31화 어둠 속의 아이 +9 20.10.01 63 12 11쪽
30 30화 리셋 Reset +8 20.09.27 89 11 12쪽
» 29화 멜랑꼴리 맨 Melancholy Man +8 20.09.18 91 11 9쪽
28 28화 암탉의 영혼 +4 20.09.13 87 12 13쪽
27 27화 엇박자 +4 20.08.31 64 11 11쪽
26 26화 의중 +4 20.08.28 58 9 12쪽
25 25화 재회 +4 20.08.21 60 8 14쪽
24 24화 터미널 +6 20.08.12 83 8 12쪽
23 23화 성난 괴수와 웃는 나무 +6 20.08.01 84 11 11쪽
22 22화 경계선 +5 20.07.27 69 9 8쪽
21 21화 라스트 액션 히어로 +2 20.07.18 60 9 11쪽
20 20화 한여름밤의 꿈 +3 20.07.11 62 9 11쪽
19 19화 좋은 놈, 나쁜 놈, 애매한 놈 +4 20.07.07 69 10 7쪽
18 18화 하늘나라 동화 +2 20.07.07 62 7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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