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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하랑님의 서재입니다

곤륜환생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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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하랑
작품등록일 :
2023.05.10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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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15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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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30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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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8쪽

암화(暗火)

DUMMY

※※※



몇달만에 돌아온 곤륜파는 조금 달라져 있었다. 세워진 전각들과 주변의 모습이 떠나기 전보다도 더욱 깔끔해져 있었다. 이제는 정말로 구파의 일익과 비교해도 괜찮다 평할 수 있을만 했다.


그런 와중에도 여전히 변하지 않은 곳이 한군데가 있었다.


“헛허. 이곳은 너무 좁구나. 다른 곳에 모여 이야기를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


운결이 멋쩍은 얼굴로 수염을 쓸었다. 장문인의 처소는 여전히 사람 몇 명만 들어가면 꽉 차는 작은 크기였다.


썩어가던 나무 기둥을 바꾼 것 이외에는 그가 첫날 올라왔을 때와 다를 바가 없었다.


백연은 옅은 미소를 짓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결 낫구나. 바깥 바람도 쐬고.”


일행이 모여앉은 장소는 바깥의 한 누각이었다. 수련장의 바로 옆에 만들어져 있었는데, 무공 구결을 보고 익히는 장소라 했다. 더해, 글을 모르는 아이들에게 글도 가르치는 일을 겸하고 있다고.


“나 때는 흙바닥에 앉아서 했는데.”


중얼거리는 단휘의 목소리에 백연이 픽 웃었다.


“억울해?”

“......조금?”


그 사이 앞에 곧게 앉은 운결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섯의 얼굴들. 하나같이 무언가 달라진 표정들이 큰 여정을 함께 끝내고 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떠날때는 다섯이더니, 하나가 더 왔구나.”

“선아라고 합니다.”


바르게 일어나 포권하는 모습이다. 자세가 잘 잡혀 있었다. 그 모습에 운결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고운 이름이구나. 어이하다 이런 무도한 놈들과 함께 곤륜에 오게 되었는지는 궁금하다만, 사연은 이야기 하고 싶을때 하거라.”

“거 말씀이 심하십니다 장문인.”

“무도하다뇨.”

“난, 착해.”


제각기 대답하는 사형들에 운결이 웃음지었다. 그때 선아가 입을 열었다.


“백의 운결님. 할아버지......아니, 스승님께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스승님?”

“여기, 이것을 전해드리라 하셨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선아가 길다란 보자기를 운결의 앞에 내려놓았다. 그것을 천천히 펼쳐든 운결의 표정이 천천히 바뀌었다.


산봉우리의 새하얀 눈을 그러모아 만들어낸 것 같은 순백의 검신. 그 위를 운결의 손이 조심스레 쓸어 내렸다. 미소를 띄고 있던 입매가 아래로 내려갔다. 그의 미간에 주름이 패여들었다.


“......이것은 천관의 작품이로구나. 이런 것을 만들었다는 것은.”

“스승님께서 곤륜에 보내는 감사의 표시라 하셨습니다. 백의를 만날때, 검과 함께 감사를 전해달라고.”

“......허어.”


흩어져 나오는 탄식이 짙었다. 무어라 말을 할 듯이 입술을 달싹이던 운결이 이윽고 한숨으로 말을 갈무리했다.


“고맙구나.”

“더해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선아가 목을 가다듬더니 가슴을 폈다. 천관을 연상케 하는 움직임이었다. 목을 내리깐 그녀가 말을 이었다.


“‘골방에 처박혀 슬퍼하지 말고, 검 이름이나 잘 지어라. 이 몸의 유작은 신검(神劍)이다. 네 문파의 지보로 삼을 자격을 특별히 주마.’라고......”


그에 운결이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의 눈길이 검을 훑으며 움직였다.


“내가 그와 만났을 적, 천관의 별명이 있었지. 기세와 성질은 범 같은데 자질은 용이라. 호룡(虎龍)이라 하던 이다. 이제 그 기세는 구름 위로 사라지고 자질만이 남겨졌구나.”


검을 집어든 운결이 그것을 빛에 대어 살피었다. 순백의 검신이 꿈틀거리며 맥동하는 듯 했다. 검 자체에 새겨진 기운이 범상치 않은 것이다.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 모를 검이다. 운결이 검을 쥐고 중얼거렸다.


“운룡검(雲龍劍)이라 이름 짓고 싶구나.”



※※※



검명은 그리 결정되었다. 검을 받아든 운결은 그것을 처소의 벽면에 걸어 두었다. 선아가 전한대로 문파의 지보로 삼을 생각이라 했다.


“곤륜을 상징하는 기물은 남아있는 것이 없다. 다시 저것으로 시작하는 것도 좋을 일이지.”


백연은 적극 동의했다. 그 정도 검은 세상천지 어딜 가도 구하기 어려웠다. 불가능이라 해야 옳을 것이다. 운룡검은 충분히 곤륜의 신물로 삼을만 했다.


지금은 조금 부족할지 몰라도 세월을 거쳐, 저 검을 잡은 무인들의 기운이 흘러 들어가 백철이 변화하여 내공을 머금게 된다면 진정 신물이라 부를 검이 될 것이다.


“이거, 잘 어울려?”


그 사이 백색의 무복을 걸치고 나온 선아가 앞뒤로 움직이며 돌았다. 백연은 가벼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잘 어울리네. 축하해, 이제 백선아라고 불러야 하나?”

“그, 그런가?”


선아는 곤륜에 입문했다. 문파에 들어오길 원하지 않는다면 다른 일을 알아봐 줄 수도 있다는 운결의 제안을 거부하고 입문을 선택했다.


잘된 일이었다. 야장인 그녀의 능력을 제하고 보더라도, 선아는 무공에 탁월한 자질이 있었다. 백철 야장의 기운 통제력은 범인의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차원에 닿아있는 탓이었다. 지금부터 무공을 수련해도 남들보다 열 배는 빨리 대성할 자질이다.


그렇게 백선아는 곤륜의 일원이 되었다.


평화로운 여름날이었다.

백연에게는 아니었다. 너무 바빠 몸이 두개가 아니라 열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화신풍 구결의 요체는 네가지 의념을 합친 것인데.”

“잠깐만, 앞에서부터 다시 말해주세요. 하나라도 실수하면 처음부터 다시 만들어야 해서.”


틈날때마다 무궁각에 걸음해 청율과 함께 비급을 정리했다. 보법 화신풍과 내공운용법 적양공, 기초 권법인 낙안권을 새로이 엮어낸 개(改) 낙안권. 그리고 새로운 검법인 적화검류의 구결 정리였다. 비급으로 만들어내는 작업은 쉬이 되는 것이 아니었다.


“적양공과 적화검류는 아직 손댈 수 없는 곳에 보관해주세요.”

“그래야 하겠군요. 보아하니 자질이 부족하면 화기에 먹히기 십상일듯 싶어요.”

“조만간 해결할 생각입니다. 천관께서 단초를 주셔서, 수기를 다루는 내공운용법을 만들 생각이에요.”


그를 쳐다보는 청율의 시선이 새삼스럽지도 않다.


“백연은 정말......”

“네?”

“앞으로 무슨 무공을 보게 될지 기대되네요. 항상 제 예상을 뛰어넘어서.”


그렇게 무궁각에 아침 저녁으로 들르고 나면, 나머지 시간은 사형들과 함께 이어지는 수련이었다. 신웅 신유 사숙조들과도 따로 무공 연습을 했다. 무공을 만든 백연 본인이 아니면 그들의 질문에 대답해줄 사람이 없었으니.


“발끝에 풀려나온 경파를 잡아챈다는 감각이에요. 단타로 끊어질 기파를 길게 잡아채 자신의 지배하에.”

“이렇게......아닌가?”

“다시.”


동시에 백연 본인의 무공 수련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외공과 내공 수련 모두 균형을 맞추어 해야 했는데, 덕분에 전보다 배는 무거워진 철환(鐵環)을 차고 밤낮으로 곤륜의 봉우리를 올랐다.


“사형들 것도 만들어 왔어.”

“으으. 더럽게 무겁네.”

“다리, 아파.”


사형들은 입으로만 불평을 늘어놓았다. 몸은 열심히 움직이는 것이 무공 수련을 결코 소홀히 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열심이었다.


실전에서 무공을 펼쳐본 적 있는 무인들은 으레 그렇게 되기 마련이다. 대다수의 무인들은 마음 속에 끝없이 강해지고자 하는 마음을 품고 있다. 어렵게 익혀낸 무학이 손끝에서 펼쳐질 때의 쾌감은 그 무엇에도 비하기가 어려운 탓이다.


그리고 의외로 개중에서도 제일 앞서 나가는 것은 단휘였다.


“이렇게 하는거야?”


발끝에 휘감겨 드는 바람같은 기파. 화신풍의 첫 걸음을 내딛은 사형이 백연을 보며 씨익 웃었다. 백연은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잘했어.”


월광 아래 길쭉한 팔다리의 사형이 내딛는 걸음이 춤추는 듯한 감각을 선사했다. 밤 늦게까지 남아 연습하는 모습이 기꺼웠다. 물론 그 연습에 자신을 불러낸 것은 그렇게까지 반갑지는 않았지만.


“......나 이제 자러가도 될까?”

“잠깐만. 한번만 더 해보고.”

“나 아침에 옥수 내려가야 하는데.”

“딱 한번만.”


후욱.


모여드는 바람이 강력했다. 한 걸음의 감각을 잡아챈 단휘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저번부터 알아보았지만 전신의 감각이 탁월한 사형이었다.


그렇게 화신풍 일보를 연달아 연습하던 단휘가 마침내 바닥에 주저앉았다.


“흐아아.”

“열심이네.”


가만히 앉아 지켜보던 그의 말에 단휘가 픽 웃었다. 말끔하게 생긴 얼굴에 이어지는 미소가 시원했다.


“아무렴 너보다 열심일까.”

“그건 나니까.”

“......소홍의 말에 동의하는건데, 백연은 재수가 좀 없는 것 같아.”

“내가 겸양떨면 기만이라고 할거 아니야?”

“하핫. 그것도 맞네. 네가 그러면 기분 나쁘겠다.”


그렇게 바닥에 앉아 물끄러미 하늘을 쳐다보는 단휘.

지켜보던 백연이 입을 열었다.


“왜 그렇게 열심이야?”

“강해지려고.”

“그렇구나.”


백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오히려 단휘가 반문해왔다.


“보통 그럴때는 왜 강해지려 하냐고 묻지 않아?”

“......그래?”


백연이 머리를 긁적였다.


보통 그러한가. 백연 자신은 그러한 선문답 같은 대담을 좋아하지 않았다.


강해지고자 하는데 이유가 필요하지 않다 생각했다. 검을 들었으니 강해지고자 하는 것이다. 그럴 생각이 없었다면 처음부터 검을 들지 않았을 것이다.


“이유에 잡아먹히지 마. 무언가를 강해지고자 하는 목적으로 삼아서 발전하는 것은 좋지만, 대게 그것에 잡아먹히기 십상이니까.”


복수를 목표로 삼아 평생을 자신을 갈고 닦는 무인들도 있다. 백연은 그것이 그리 옳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게 얻어낸 강함은 대다수가 비틀려 있었다. 맹렬한 한가지 목적은 시야를 좁게 만들고 생각을 굳힌다.


“구파에서 무념(無念)과 선인의 경지를 기치로 삼고 걷는 이유가 있는거야. 무도(武道)에 잡념이 끼어들면 길을 잃고 방황하기 쉬워져.”

“......그런거야?”

“물론 적당한 동기는 도움이 되지만. 너무 그 동기만을 마음에 새기면서 검을 휘두르지는 말라는 이야기야.”

“가끔 보면 너는 애늙은이 같은 소리를 한다니까. 아니, 가끔이 아닌가.”

“아하하.”


웃음으로 얼버무린 백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장 옥수에 내려가야 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눈을 한 두 시진 정도 붙여야 할듯 했다. 어제도 밤을 새며 무궁각에서 비급을 만들었기에 피곤이 몰려왔다.


“난 들어간다.”

“그래.”

“너무 오래 연습하지 말고. 몸 상해.”

“네가 할 소린가 싶긴 하다만, 알았어.”


백연은 걸음을 돌려 운향각으로 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뒤편에서 다시금 걸음을 내딛는 소리가 들렸다. 바람을 엮어내는 걸음이 전보다 고민이 깊어진 듯 했다.



※※※



이튿날이었다. 아침 일찍 일어난 백연은 산 아래에서 걸음하고 있었다. 눈앞에 펼쳐진 옥수의 거리가 사람으로 가득했다.


본디 이 정도로 큰 도시가 아니었다. 지금 눈앞의 인파는 섬서 서안이랑 비교해도 그 밀도에서 밀리지 않을 듯 싶었다. 바글바글한 사람이 잔뜩인 것이, 모여드는 상행과 물류가 평시의 배로 늘어난 듯 했다.


‘왜지.’


그가 곤륜산으로 돌아온지도 이 주 가까이 지났다. 그 사이 옥수를 내려온 적이 없었다 한들, 이렇게까지 급격히 사람이 많아질거라 생각하지는 못했다.


점차 번영하고 있는 모습이 기껍긴 했으나 이럴 이유가 없었기에 의아했다.


그렇게 걸음하던 찰나.


‘음?’


백연의 몸에 누군가가 스쳤다. 어깨를 들이밀고 들어오는 움직임이 부딪힐 듯 한 동작이었다. 가벼이 진기를 발끝에 걸어 옆으로 디뎠다. 환상처럼 지나친 그의 몸짓에 상대의 어깨가 그를 살풋 스치고 지나갔다.


“어이쿠!”


그러나 상대는 과장된 몸짓으로 어깨를 움켜잡았다. 실제 부딪히기라도 한 듯이. 그걸 본 백연이 눈살을 찌푸렸다.


“......개방도?”


허름한 옷차림과 너저분한 얼굴. 제멋대로 뻗친 수염과 하나 빠진 이빨이 빈말로도 깨끗하다 일컬을 모양새는 되지 못했다. 누가봐도 흔한 거지의 꼴이었는데, 허리춤에 매달린 매듭진 끈만이 그가 평범한 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었다.


“크흠. 실례했소 공자. 사람이 많아서 원. 부딪히기가 십상이니.”


넉살좋게 이를 드러내며 웃는다. 바보같은 웃음이 사람 좋아보이는 인상을 만들었다. 그러나 백연은 차가운 시선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오결개군요. 개방의 총타주씩이나 되는 사람이 여기 청해에서 무엇하는 겁니까.”

“호오, 공자는 뉘시길래 우리 개방에 대해 그리 자세히 아시오?”


그리 말하며 빙글빙글 웃는 모습이 썩 기분 나빴다. 백연이 가만히 미간을 좁히자 거지가 턱을 쓰다듬더니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아하. 그러고 보니 들은적이 있는데. 흑단같은 머리칼, 백도(白桃)를 빚어놓은 듯한 뺨. 열기가 있는 짙은 눈동자에 날카로운 눈매. 요요하게 뻗어있는 콧날이라고. 눈앞의 공자분과 똑같은 모양새구려?”

“그건 무슨 미친......”

“소협께서 그 소문의 암화(暗火)셨소? 들은 묘사보다 더 수려하게 생기셨소이다. 허허.”


말하며 껄껄 웃는다. 표정 변화와 눈의 움직임이 빨랐다. 필시 처음 부딪히려 한 시점부터 그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던 것이다.


‘용모파기까지 알아둔건가.’


묘사가 요상하다는 점이 좀 걸렸지만, 그의 얼굴도 이미 알고 있었다. 개방다웠다. 그를 부른 명칭은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지만 지금 신경쓸 일은 아니었다.


“청해는 개방의 영역은 아닐텐데요.”

“천하 중원에 개방의 영역인 곳이 어디며, 또 아닌 곳이 어디겠소? 거지는 그냥 발걸음 닿는대로 떠도는 것이지.”

“오결개씩이나 되는 분이 온 것도 그렇고.”


그의 말에 거지가 고개를 저었다. 여유로이 턱을 쓰다듬는 꼴이 검파에 손이 가게 만들었다. 잠깐 검을 뽑아들까 고민하는 사이 거지의 말이 이어졌다.


“전할 말이 있어 왔소이다. 겸사겸사 곤륜이라는 문파의 소문도 확인하고. 이곳이 조금 위험한 동네라 간만에 직접 걸음했지.”

“그렇습니까?”

“하오문의 루주에게 말은 전해뒀소. 지금 만나러 가는 길인듯 보이는데.”

“루주를 만났습니까?”


백연은 검을 쥐고 있던 손을 슬그머니 놓았다. 루주에게 뭔가를 전하러 온 사람을 공격할 수는 없었다.


“그렇소. 이것저것 이야기를 했소만, 소협과 관련있는 이야기도 좀 있으니.”

“흐음.”

“루주에게 가 물으면 재밌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것이오.”

“예 뭐. 알겠습니다.”


어깨를 으쓱인 백연이 걸음을 옮겼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거지를 지나치자 그가 당황해 몸을 돌리는 것이 느껴졌다.


“자, 잠깐. 그냥 가는 것이오?”

“예. 바쁜 몸인지라. 옥수 구경 잘하고 가시지요.”

“커험. 거 그래도 인연인데 통성명도 하지 않고.”

“어차피 제 이름은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천하 개방이 그걸 모를리가 없었다. 다 알고 걸음한 주제에 저리 빙빙 돌려 말하는 것이 짜증을 불러왔다. 그에 뒤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본 거지의 이름은 곽전칠이라 하오. 나중에 또 봅시다!”


검을 쥐고 걸음을 가볍게 옮겼다. 마음에 동해 일어난 운연동공의 기파가 발걸음을 뿌옇게 물들였다. 인파 사이에서 바람을 휘감은 그의 걸음이 유령처럼 사람들 사이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렇게 걸으면서 백연은 생각을 정리했다.


‘개방이 이곳에.’


곽전칠이라는 거지의 불쾌함과는 별개로, 그 의미만은 컸다. 개방이 진출한 장소는 곧 주목할만한 곳이라는 뜻이다. 정보와 돈이 모여드는 땅이라는 의미. 갑자기 옥수에 물류가 모여드는 이유도 알 법했다.


그만큼 그가 서안에서 일으킨 파장이 작지 않았다는 소리다. 화산과 종남의 두 문파 앞에서 보여준 무위가 높이 평가된 모양이었다.


더해 하오문의 지원도 없지않아 있었을 터.


‘나쁘지 않아.’


좋은 일이라 생각했다.

그리 고민하며 걸음하는 사이 어느새 그의 앞에 백야주루가 모습을 드러냈다.



※※※



“어머, 우리 공자님께서 벌써 오셨네요?”


주루의 최상층 방이었다. 루주 선화가 그를 환대하며 만면에 미소를 걸었다. 여전히 화려한 외양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기품이 있었다.


자리에 앉은 백연은 여타 잡다한 말을 늘어놓지 않고 곧바로 질문을 꺼냈다.


“밖에서 거지를 만났습니다. 개방이 옥수에 들어왔더군요.”

“아......벌써 만나셨군요?”

“무슨 일입니까?”


그의 말에 루주가 고개를 기울이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오늘 공자를 부른 이유와도 연관이 있어요. 그쪽에서 이리 빨리 움직일 줄은 몰랐지만.”


그녀가 손을 움직여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새하얀 백지로 잘 갈무리 된 종이는 한장의 서신이었다.


“여기, 공자께 온 서신이에요. 본래는 개최하는 쪽에서 직접 발품을 팔아 돌아다니며 전달하는 것인데, 청해는 오기 어렵던지 개방에 맡겼더군요.”


그렇게 말하며 미간을 좁히는 모습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했다. 백연은 가만히 서신을 받아들여 펼쳤다.


안에는 많은게 적혀있지 않았다. 유려한 붓놀림으로 그려진 용과 봉의 형상. 그 가운데에 적힌것은 짧은 글귀였다.


[천하 일절의 검이 지키는 하늘의 기둥 아래, 무림의 후인들이 교분을 나누려 하니.]


백연이 눈을 깜빡였다.


글귀 아래 큼직하게 써져있는 문자는 특히 공들여 썼는지 필체가 더없이 강렬했다.


[암화(暗火) 친전(親展).]


“이게 뭔.”

“뭔지 알겠나요?”


백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지 못할리가 없었다.


“하늘의 기둥. 천주(天柱)로군요. 중원 무림에서 천주라 하면 대저 한곳을 가리키는 말이지요. 천하 일절의 검이 지킨다 하니, 더욱이 한곳밖에 없는데. 안휘(安徽) 천주산(天柱山)의 남궁세가 아닙니까.”


백연이 편지를 내려놓았다.


“이번 용봉지회(龍鳳支會)를 남궁세가에서 개최하는 것이군요. 그런데 받는 사람이 암화라 되어 있는데, 이것은 뭔지.”


그에 루주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야 당연히 공자님의 별호지요. 이제는 암화 소협이라 불러야 할까요?”

“......네?”


당황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루주가 생글거리는 표정을 지었다.


“용봉지회에 초청되셨군요. 축하드려요. 암화 소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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