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설하랑님의 서재입니다

곤륜환생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새글

설하랑
작품등록일 :
2023.05.10 10:05
최근연재일 :
2024.06.29 18:10
연재수 :
300 회
조회수 :
1,549,961
추천수 :
31,051
글자수 :
2,281,455

작성
23.08.25 18:10
조회
6,878
추천
118
글자
17쪽

설화(雪花)

DUMMY

※※※



“덕분에 몸이 빨리 나았습니다.”


아무도 없는 산중턱이었다. 나무들로 둘러싸인 공간 사이에 양지바른 비탈길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그곳에 홀로 선 백연. 햇살을 받으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약재, 입맛에 맞더군요. 소저의 충고대로 앞으로는 잘 챙겨먹을 생각입니다.”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나직하게 바람을 타고 휘돌았다. 손에 든 병을 기울이자 그곳을 따라 눈처럼 맑은 물방울이 투두둑 떨어져 흩어졌다.


“설화옥로주(雪花玉露酒)인데, 나름 마련할 수 있는 것 중 가장 좋은 것으로 준비했습니다. 사형도 소저께 목숨을 빚졌다 하던데......이젠 갚을 길이 없군요.”


곱게 세워진 비석을 타고 흘러내린 술이 땅을 적셨다. 옅은 꽃향과 함께 허공을 적시는 향취가 진했다. 그 앞에 선 백연이 술병을 내려놓고 포권을 취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위 소저.”


나지막한 인사와 함께 고개를 숙인 백연이 비석에서 등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위령비를 따라 새겨진 이름이 적지 않았다. 임시로 천주산에 안치된 무인들인데, 향후 각 문파와 세가에서 요청하는 대로 이관을 해준다 들었다.


나름의 예의를 챙긴 것이다. 남궁세가 자체의 일로도 바쁠 와중에.


본디 무림인의 죽음은 특별히 취급되지 않는 법이다. 각 문파에서도 매해 죽어나가는 이가 십수명에 달한다. 강호 무림에 몸담은 이들의 운명이란 그렇다. 검을 목침으로 삼고 죽음을 벗 삼아 살아가는 이들.


용봉지회의 사건이 작은 것은 아니나 무인 개개인의 죽음이 특별히 다뤄지지는 않는다. 기껏해야 청성파의 무인들이 몰살당한 것이나 대대적으로 소란이 일까.


다시 말해.


잊혀질 죽음이라는 소리다. 천주산 중턱에 마련된 위령비에 적힌 이름 대다수는 올해가 끝나기 전에 사람들의 입에서 사라질 이름들이다. 뛰어난 후기지수였다 한들 개화하지 못하고 시들면 그 이름을 새기지 못하는 법이니.


백연은 그것이 싫었다. 그는 잊어본 적이 없었다. 누구의 이름이라도.


“가문에 도착할때 즈음이면 무림 전역에 소문이 파다할거다. 개방이 낮밤 안가리고 바쁘게 뛰어다니고 있을 터이니.”

“헌데 당가는 소가주의 안위가 우선이 아닌지요. 며칠이 지나도록 한명 오는 사람이 없군요.”

“내 안위? 우리 가문에서 내가 죽으면 기뻐할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화기애애한 악가와는 다르지.”


산 능선을 따라 내려가자 귓가에 들려오는 목소리들이 있었다. 비탈 아래 바위에 걸터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악예린과 당소하.


제각기 차려입은 모습이 화려했다. 명문세가의 일원이자 칠룡의 위를 지닌 무인들. 부러 드러내 과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무사하고 건재하다는 것을.


“외려 난 섬뢰신창(閃雷神槍)이 직접 이곳에 달려오지 않은 것이 놀랍군. 그는 너를 끔찍하게 아끼지 않나?”

“가주님도 그리 마음대로 움직이실 수 있는 위치는 아닙니다. 오라버니들도 그렇고요. 검왕께서 푸른 검으로 안휘의 창공을 물들인 이상 다른 위협은 의미가 없으니 걱정을 접었을 겁니다.”

“흐음. 일리가 있는 말......돌아왔군.”


백연의 기척을 알아차린 당소하가 시선을 들어올렸다. 이쪽을 쳐다보는 그의 표정에 옅은 걱정이 담겨 있었다.


“괜찮나?”

“당연히.”

“표정이 나쁘지 않군. 다행이야.”


바위에서 훌쩍 뛰어내린 당소하가 그를 향해 다가왔다. 날카로운 눈매가 백연의 얼굴을 따라 훑어 내리더니 미려하게 휘어졌다.


“떠날 채비가 된건가?”

“그야 언제든지. 사형은?”

“단휘는 곧 올거다. 열심히 정리하고 있더군. 그 모습만 보면 무인이 아니라 학자인 줄 알겠어.”


백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사형은 만금장의 장부와 종이를 정리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곳에서 머무는 동안 방에 처박혀 해독을 한다며 얼굴도 거의 내비춘 적 없는 사형이다. 덕분에 작업은 더없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이번에 헤어지면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르겠네요.”


그 사이 다가온 악예린이 말을 건넸다.


길다란 창을 짊어진 그녀의 표정에 짙은 아쉬움이 담겨 있었다.


“대련이라도 몇차례 더 해보고 싶었는데.”

“언제든지 환영입니다. 청해 옥수로 오신다면.”

“백연. 이놈은 진짜 갈 놈이다. 실없는 말 하지 마라.”

“저도 가능만 하다면 그러고 싶네요.”


끼어든 당소하의 말에 악예린이 웃었다. 표정 변화가 크지 않은 그녀의 입가를 따라 그려낸 듯한 미소가 새겨졌다.


“하지만 아직 부족한 것이 많으니. 한동안은 스스로를 더 단련할 생각이에요.”

“그 말씀은?”

“폐관이라는 거창한 말까지는 쓰지 않겠지만, 우선은 연환창식의 사십구식(四十九式)을 완성해야지요. 그리고, 가주님께 암천(暗天)을 전수받을 자격을 입증하려 합니다.”


악예린의 말에 당소하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암천화광(暗天火光)? 그건 가주 직전 무공이 아닌가?”

“독룡 당신이 잘 모르는 것도 있군요. 암천화광창은 가주 직전 무공이 아닙니다. 가문의 사람이라면 누구나 전수받을 수 있는 무공인걸요.”

“호오.”

“다만 보통은 익히지 못할 뿐이지요. 그 구결이 워낙......”


악예린의 미간이 좁혀들었다. 그녀가 잠시 고민하듯 눈을 굴리더니 말을 이었다.


“난해해서.”

“뇌룡께선 해내실 수 있을겁니다. 나중에 한번 견식하고 싶군요.”


한번도 본적 없는 무공이다. 다만 악예린의 오성은 그가 익히 보아 알고 있는데, 그녀가 난해하다 표현할 정도면 대체 어떤 무공인 것인지 궁금할 따름.


그의 말에 악예린이 작게 웃었다.


“이름으로 불러요.”

“예?”

“전투 중에는 잘 불렀던 것 같은데.”


흘리는 말투 끝이 조금 올라가 있었다. 장난기가 실린 것인지. 처음 보았을때는 이런 느낌이 아니었던 듯 한데. 이곳에서 일어난 일련의 일들 사이에서 꽤나 마음이 편해진 모양이었다. 스스럼 없이 대하는 모습이 그랬다.


백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예린 소협.”

“나는 안해주나?”


백연이 당소하를 쳐다보았다.


냉막한 얼굴에 슬쩍 올라간 입꼬리가 가벼웠다. 대낮에 술을 마신것도 아닐 터인데 왜 이러는 것인지. 백연이 옅은 한숨을 내쉬곤 입을 열었다.


“소하. 갈 준비는 다 된거야? 네 행낭이나 잘 챙겨와.”

“......갑자기 낯부끄럽군. 먼저 내려간다.”


몸을 돌린 당소하가 휘적휘적 걸어 내려갔다. 펄럭이는 녹빛 장포를 보며 백연이 웃음을 터트렸다. 맑은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흩어졌다. 뒤이어 악예린의 목소리가 따랐다.


“외로움이 있는 이에요. 홀로 강한 사람이지만, 그럼에도 주위에 기댈 사람이 하나 없으니.”

“가문의 일이 복잡해 보이더군요.”

“홀로도 분명 잘 헤쳐나갈 테지만, 그래도 곁에 백연같은 친우가 있어주면 좋을 일이지요.”


이어지는 말이 가벼웠다. 칠룡중 대부분은 서로 어렸을 적부터 봐온 사이라고 했다. 각자의 지위나 위명이 그리 만들었다고. 서로가 오랜 경쟁자이자 이해자인 것이다.


“새겨두지요.”


이윽고 두 사람의 걸음이 독룡의 뒤를 따랐다. 그들의 움직임이 천주산 아래 휘도는 바람결처럼 가벼웠다.


안휘성 천주산의 푸른 창공. 구름 한점 없는 가을 끝자락이 선명하게 다가온다.


돌아갈 시간이었다.



※※※



귀환하는 길은 여유로웠으나 여유롭지 못했다.


안휘성 천주산부터 사천을 거쳐 청해까지. 중원 무림을 반으로 가로지르는 여정이다. 가히 세상 전역을 누비고 다닌다 말해도 좋았다. 동쪽 끝에서 서쪽 끝까지 누비는 표국도 이리 많이 돌아다니지는 않을 듯 싶었다.


덕분에, 길을 따라 마주치는 이들이 많았다.


늦가을의 바람에 올라탄 풍문은 말이 달리는 속도보다 훨씬 빨랐다. 가는 곳마다 들려오는 숨죽인 목소리들.


용봉지회의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고 있는 탓이었다. 정파 무림의 후기지수들이 몰살당한 일은 그 자체로 큰 파장을 불러올 일이었다. 설령 검왕을 죽이고 유망한 후기지수들을 전부 죽이려 하던 만금장의 계획이 실패했다 하더라도.


‘이미 목적을 달성했어.’


절반의 성공, 그 이상을 거두었다 봐도 좋았다.


“난세군.”


짧게 중얼거리는 당소하의 표정이 좋지 못했다. 막 덤벼오는 무림인들 여럿을 격살한 직후였는데, 그들의 병장기에서 풍기는 혈향이 짙었다.


사파의 무인들. 녹림을 위시한 살육자들이 도처에서 날뛰고 있었다. 말을 타고 질주하는 그들을 노리고 공격해오는 적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위협이 될만한 적은 없었으나,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말을 타고 길을 따라 내달릴때면 보이던 사람들. 중원을 왕래하던 이들이 거의 눈에 보이지 않았다. 돌아다니는 사람들은 물론이요 상행들까지 거의 멈춘 탓이다. 중원 무림의 질서가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다.


“난세네.”


백연이 짧게 동의했다.


이미 사파 무인들 한둘을 격살한다고 끝날 일이 아니었다. 그들의 손을 훨씬 벗어난 일련의 상황. 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안좋은 소식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들었소? 글쎄, 감숙의 하늘이 검게 물들었다지 뭐요!”

“검은 하늘? 불길한 소리 마시오. 안그래도 요즘 바깥을 돌아다니기가 심란한데......”

“어허, 이 사람이 무지한 소리를. 검은 하늘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오? 현천(玄天)이오. 현천!”


호북의 끝자락에 다다른 시점이었다. 객잔에 묵으며 이동하던 와중, 귓가에 스치는 목소리가 커다랬다. 객잔 안에 사람이 몇 없어서인지 유난히 크게 귀에 꽂히는 음성.


한 구석에서 술을 마시며 이야기하는 상인들이었다. 그 목소리에 백연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공동의 검제가 지상에 강림했다는 것 아니겠소! 서제(西帝)가 있는 이상 그곳은 안전하오. 다음 상행은 아무래도 감숙으로 가는 것이 좋겠소이다.”

“허어. 그거 기쁜 소식이구려.”


두런거리는 음성 속에서 귓가에 틀어박히는 이름이 강렬했다. 술잔을 홀짝이던 당소하도 슬며시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움직이는군.”

“그러게.”

“작금의 난세. 오래 두고 볼 생각은 없을 것이다. 황실의 여력이 남지 않으면 구파가 움직이겠지.”


이어지는 길에서도 비슷했다. 사천으로 가까이 다가갈수록 들려오는 소문이 많았다.


“글쎄, 머리를 새파랗게 민 무승(武僧)들이 관도를 돌아다니더군. 어찌나 든든하던지.”

“그래? 나는 거지떼가 수십씩 몰려 다니는 모습을 보았소. 고마운 차에 적선이라도 해주고 오는 길이외다.”


개방과 소림. 민생 안정을 위해 분연히 들고 일어난 것이다. 그 자체로 민생과 가장 가까운 두 문파인 탓일까.


참담한 소식만 들려오던 바람에 점차 새로운 말이 섞여들었다. 섬서를 물들인 노을, 사천부터 하남까지의 관도를 따라 바삐 움직이는 아미와 소림의 승려들. 그리고.


“호북은 안전하오.”

“그걸 어찌 확신하는게요?”

“하늘에 태극(太極)이 떠올랐소. 다른 곳이면 몰라도 호북에는 무뢰배들이 발끝도 들이지 못할거외다.”


사천의 코앞에 이른 객잔. 술병을 입에 털어넣던 당소하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그가 백연을 응시하며 헛웃음을 지었다.


“방금 들었나?”

“호북?”

“그래. 저들이 말한것이 사실이라면 정말로 호북은 안전하겠군.”


단언하는 모습. 백연은 잠자코 귀를 기울였다. 당소하의 말에 대답한 것은 곁에 앉아있던 단휘였다.


“호북이라 하면 그인가? 무당의.”

“맞다. 드디어 내려왔나 보군.”

“......무당의 장문인.”


단휘가 중얼거렸다. 목소리에 어린 경탄이 짙었다.


“마지막으로 그의 검이 휘둘러졌을 때에 마교의 좌호법이 바뀌었다고 들었는데.”

“맞는 말이다. 오랜 기간 무당산의 위에서 관조하고 있던 이가 직접 움직일 정도라.”


당소하가 입매를 비틀었다.


“좋은 소식인지 잘 모르겠군.”

“그만큼 어지러운 상황이라는 의미네. 마교에 비견될만큼.”


백연이 중얼거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장은 좋은 소식이라 봐야 옳았다. 언제까지고 사람들이 죽어나가게 놔둘 수는 없는 터. 중원 무림의 정파가 서서히 몸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일련의 과정은 전부 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비무제전때 다시 보지.”


사천에 다다른 일행. 손을 휘젓는 당소하의 작별 인사가 가벼웠다. 확언하듯 뱉는 말에 백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년도 안되서 다시 보겠는데.”

“겨울이 끝나면 열리지 않을까 싶군. 정파 무림의 거두들이 움직이기 시작한건 그런 의미이니.”

“몸 조심하고.”

“그래. 단휘 너도 다음에 보면 더 강해져 있겠군.”


작별 인사는 가벼웠다.


막 날씨가 쌀쌀해지고 있는 참이었다. 피부에 와 닿는 공기는 이미 겨울의 초입에 들어서고 있었다. 말을 타고 달리는 단휘와 백연의 얼굴도 찬바람을 맞아 발갛게 달아올랐다.


여정의 끝자락. 말을 달리는 사형의 얼굴은 올때와 조금 달라져 있었다. 조금 더 단단해진 듯한 모습이다. 적양공과 현음공을 익힌것 때문인지, 아니면 안휘에서 겪은 일들 때문인지.


“돌아가면 적화검류 초식부터 알려줄게. 다른 사형들도 이제 적양공과 현음공을 배울때가 되었고.”

“겨울내내 바쁘겠네.”


중얼거리는 단휘의 얼굴이 어느샌가부터 웃고 있었다. 그들의 앞에 펼쳐진 길이 익숙한 탓이었다. 시야 저편으로 드높게 펼쳐진 벽과 같은 그림자. 지평선을 지워버리는 거대한 산맥의 벽이 눈앞을 가로막는다.


하늘 높이 솟은 칼날같은 산맥 아래, 펼쳐진 성도가 눈에 들어왔다. 구름이 가득 낀 하늘 아래 분주히 오가는 사람들의 행렬이 많았다. 본래라면 사마외도의 무뢰배들이 가장 날뛰어야 할 도시이건만.


“......집이다.”


단휘가 중얼거렸다.


그때 시야 곁을 따라 무언가가 하늘하늘 떨어져 내렸다. 무겁게 드리운 구름 아래로 바람을 타고 흩어지는 새하얀 조각들.


첫눈이었다.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던 백연의 귓가를 타고 희미하게 들려오는 숨소리가 있었다.


“왔어?”


사박.


어느새 소리없이 다가온 신형. 비스듬히 검을 비껴매고 다가온 검객의 눈매가 여전한 졸음기를 담고 있다. 키 작은 사형의 움직임은 더 조용해져 있었다. 그 사이 살수 무공이라도 연마했는지.


그럼에도 그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약하지 않았다. 입꼬리에 생긋 매단 미소가 진했다.


“소홍 사형.”

“둘다, 고생했어.”


말에서 훌쩍 뛰어내린 백연에게 소홍이 다가왔다. 단휘와 백연을 한번에 끌어안는 품이 작았다. 그제서야 몸의 긴장이 탁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긴 여정의 끝이었다.



※※※



“사형들이 여기를 지키고 있었다고?”

“하오문도, 함께.”

“그렇다곤 해도 사파 무리들이 많았을텐데. 다들 괜찮아?”

“응. 네 생각보다 강해. 다들.”


산을 올라가며 들려준 소홍의 이야기. 청해 옥수에 상행들이 무리없이 오가는 이유였다. 곤륜파의 사형들과 하오문이 함께 길을 지키고 있다고.


무뢰배들이 나타나면 전부 베어버렸다고 한다. 가을부터 지금까지 계속. 덕분에 지금 이곳에는 사파들이 잘 쳐들어오지 못한다고 했다.


“나도, 강해졌고.”


과연 그래보였다. 몸에서 흐르는 기세가 예리했는데, 동시에 기척을 읽기가 쉽지 않았다. 연이은 실전의 효과인지.


같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올라가다 보니 이윽고 눈앞에 전각들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 사이 새로 크게 지었는지, 머리 위로 크게 드리운 정문이 굳건했다. 반쯤 열린 문 사이로 소년들이 걸음해 들어갈때였다.


“다시!”


휘익.


허공을 가르는 검격의 소리가 매섭게 귀에 틀어박혔다. 문 안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서 검을 휘두르는 인영들. 제각기 무공을 연마하는 모습이 강맹했는데, 그 사이 유달리 돋보이는 두 무인이 있었다.


그 광경을 본 백연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한쪽은 곰같이 커다란 덩치의 검객. 무진 사형이었다. 떨치는 검격의 파괴력이 강렬했는데 그 속도가 낮지 않았다. 일검 일검에 몸의 힘을 한껏 실어 내치는 모습.


그러나 백연이 놀란 이유는 그것 때문만이 아니었다.


무진의 검을 받아내는 상대편 무인. 짙은 흑색의 무복을 휘날리며 검을 베어내는 모습이 유려하기 그지없었다. 내공을 거의 싣지 않고 휘두르는 검격 만으로도 고절한 수준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의 강자.


이윽고 백연의 기척을 알아챈 것인지, 두 검객의 대련이 멈추고.


“백연? 드디어 돌아왔구나! 고생했다.”


황급히 달려와 그를 반기는 무진. 그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백연의 눈은 검은 무복의 무인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무복 위로 도드라지는 연분홍빛 꽃잎 문양.


여기에 있을 사람이 아니었다.


“......대체 왜 여기에 있는거야?”

“안녕. 오랜만이네.”


맑게 웃으며 인사하는 모습이 천진했다. 정명한 기도가 깃든 소년의 몸에서 옅은 암향이 흘렀다.


“검룡. 폐관이라 들었는데?”

“아하하. 어쩌다보니 일이 이렇게 되었네.”


답하는 모습에 백연이 헛웃음을 지었다.


검룡 유성. 분명 폐관에 들어갔다 들은 화산파의 미래가, 어찌된 일인지 곤륜산에 올라 있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8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곤륜환생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94 네가 만든 마을(4) +8 23.09.20 4,800 99 20쪽
93 네가 만든 마을(3) +7 23.09.18 5,034 98 24쪽
92 네가 만든 마을(2) +5 23.09.15 5,147 106 24쪽
91 네가 만든 마을 +5 23.09.13 5,385 100 18쪽
90 신강(4) +6 23.09.11 5,592 108 23쪽
89 신강(3) +7 23.09.08 5,573 107 21쪽
88 신강(2) +5 23.09.06 5,832 111 21쪽
87 신강 +7 23.09.04 5,933 109 22쪽
86 설화(雪花)(4) +8 23.09.01 6,176 110 21쪽
85 설화(雪花)(3) +9 23.08.30 6,366 117 23쪽
84 설화(雪花)(2) +6 23.08.28 6,574 109 21쪽
» 설화(雪花) +8 23.08.25 6,879 118 17쪽
82 선택(5) +6 23.08.23 7,007 122 21쪽
81 선택(4) +5 23.08.21 6,841 123 20쪽
80 선택(3) +8 23.08.18 7,363 128 22쪽
79 선택(2) +6 23.08.16 7,320 122 24쪽
78 선택 +6 23.08.14 7,485 129 21쪽
77 검귀의 검, 곤륜의 검(6) +8 23.08.11 7,556 141 19쪽
76 검귀의 검, 곤륜의 검(5) +8 23.08.09 7,255 126 20쪽
75 검귀의 검, 곤륜의 검(4) +7 23.08.07 7,383 133 21쪽
74 검귀의 검, 곤륜의 검(3) +6 23.08.04 7,646 135 18쪽
73 검귀의 검, 곤륜의 검(2) +4 23.08.02 7,866 136 19쪽
72 검귀의 검, 곤륜의 검 +5 23.07.31 8,202 140 16쪽
71 검왕(4) +10 23.07.30 7,702 121 13쪽
70 검왕(3) +7 23.07.29 7,453 138 12쪽
69 검왕(2) +7 23.07.28 7,472 135 15쪽
68 검왕 +8 23.07.27 7,569 142 16쪽
67 마기 +5 23.07.26 7,594 134 14쪽
66 금원방(2) +5 23.07.24 7,759 142 16쪽
65 금원방 +4 23.07.23 8,219 137 17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