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림의 왕자(6)
둘의 기세는 조금 전보다 훨씬 격렬했다. 전투의 여파가 너무 거세다 보니 전유연이 인상을 찌푸리며 기존에 펼쳐둔 방벽에 물리방벽을 한 겹 더 겹쳐야 할 정도. 칼라의 기세가 사나워진 건 당연하고, 사자 역시도 그런 칼라의 맹공을 나름 능숙하게 막으며 기세를 올리고 있다. 실제 공격횟수는 칼라가 더 많았지만 뒤로 밀리는 쪽 역시 칼라였다. 사자가 방패를 들이민 채 섬큼성큼 밀어붙이는 까닭이었다.
이것 참. 이제껏 보아온 매드퀸은 거의 데우스엑스마키나 같은 느낌이었던 터라 나중은 어쨌건 당장은 저울추가 칼라 쪽으로 기울지 않을까 했는데···
이런 소감을 칼라에게 전하자 칼라가 상황을 냉정하게 평가했다.
“매드퀸은 원래 1:1의 피지컬 싸움을 1:2로 만들어 찍어 누를 때 강점을 보이는 스킬이니까. 5:1에서 5:2로 바뀐 정도론 싸움의 방향이 바뀌진 않아. 오히려 이런 경우 칼라의 전력은 매드퀸이 아니라 마법을 쓸 때 나타나지.”
“마법이라. 물론 칼라가 마법사인 건 알지만···”
펠은 전유연 쪽으로 흘낏 시선을 던지며 말을 이었다.
“유연이는 마법사지. 나와 칼라도 마법사고. 하지만 유연이와 우리의 마법은 달라. 유연이는 마법사로서 마법을 쓰지만 우린 전사로서 마법을 쓰거든.”
“음? 뭐가 다른데?”
“마법은 고난이도의 작업이야. 정통마법은 강한 이미지네이션을 바탕으로 캐스팅과 시동어를 거쳐야 발현이 돼. 거기서 난이도가 올라가면 캘큘레이션과 소매틱이 추가되고. 유연이의 마법은 이런 작업에 공을 들여 ‘최선의 결과물’을 만드는데 그 목적이 있어.”
“......”
“하지만 우리가 그래서야 그건 칼 든 마법사일 뿐이지. 전사의 마법은 전사직과 시너지가 나야 해. 그래서 우리의 마법은 같은 마법이라도 유연이와는 그 궤를 달리하지. 한쪽으로 특화된 형태랄까. 가령 칼라의 경우는 ‘근접전투에 유용한 마법에 대한 간이영창과 무영창’이 특기야. 덤으로 난 ‘분할영창’과 ‘의념영창’이 특기고. 자, 쟤들 싸우는 걸 봐. 보여? 이전의 싸움과는 뭔가 다르지?”
“...사자가 실시간으로 부쩍부쩍 강해지는 중이란 건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은데.”
“그건 짐승처럼 날고뛰고 물지 않아도 칼라에게 자신의 ‘기사’스타일로 을종중급에 걸맞는 힘을 보일 수 있게 되어가는 중이라서 그래. 그보다 더 눈에 확 띄는 변화가 있잖아.”
“어··· 음, 잘 모르겠는데.”
“아니, 오라비. 그걸 왜 몰라?”
“그렇게 말해도 말이지··· 난 너네 없음 지금이라도 당장 사자한테 죄송하다고 큰절하고 튀어야 하는 늅 오브 늅이라고? 묻는다고 뭐든 대답할 수 있을 것 같냐?”
“그게 아니라, 칼라가 욕을 안 하잖아.”
“......”
...그렇네. 진짜 칼라가 조용하다. 큰 차이 맞네.
“근데 그게 마법이랑 무슨 상관인데?”
“칼라는 요 2분 남짓 사이에 벌써 자신의 물리방벽을 세 번이나 갱신했어. 샤프니스도 한번.”
“그, 그래?”
“그게 간이영창이야. 미리 훈련해 둔 축약된 몇 마디로 정식 캐스팅과 소매틱을 대신하는 거지. 빠르고 큰 집중을 요하지 않기에 전투 중에도 응용이 가능하고. 지금은 그걸 하느라 입이 바빠서 욕을 못하고 있는 거야. 잘 들어봐.”
“아···”
아닌 게 아니라 깨지고 부서지는 굉음에 묻혔을 뿐 가만히 귀를 기울이자 아련한 영창소리가 들려온다.
“...등을 지킬 방패가 되라.”
영창이 끝남과 동시에 칼라의 앞에 붉은 빛이 빠르게 번뜩인다. 아마도 물리방벽. 전유연이 펼친 가시화된 방벽과는 좀 다르다.
“‘붉은 검사의, 등을 지킬, 방패가 되라.’ 5서클 물리방벽의 칼라버전 간이영창이야. 영창이야 마법사들 마다 제각각이지만 저 정도면 소매틱을 빼고도 거의 1/3밖엔 안 되는 길이지. 아, 참고로 강도는 마력과 법사의 역량에 따르지만 숫자는 거의 정해져있어. 기본형이 네 장. 강화버전이 다섯 장에서 여섯 장. 칼라의 간이영창버전은 빠른 대신 세장이야. 중첩도 가능하지만 그 경우 장벽 간 마력간섭 때문에 한 장이 줄어서 다섯 장이 되지.”
가끔 느끼는 거지만, 이 언니도 은근 해설하는 거 좋아한다.
“간이영창이라도 저렇게 무기를 휘두르면서 영창하는 건 또 상당한 훈련이 필요해. 요령은 들숨 때 이미지네이션을 강화하고, 날숨 때 캐스팅 하는걸 반복하는 거지.”
펠이 말한 요령이란 건 금방 확인할 수 있었다. 칼라가 바로 보란 듯 시범을 보여 줬거든.
콰앙!!
사자의 방어를 뚫기가 만만치 않자 아예 작정을 하고 방패 위를 냅다 두드린다. 소 새끼 말 새끼 하는 욕설대신 나지막한 기합위에 실은 영창이 허공에 울려 퍼진다.
“샘을 지키는 힘,”
압박하던 발걸음을 멈추고 움찔 반보를 밀려나는 사자. 칼라는 망설이지 않고 다시 한 번 방패 위를 격렬하게 두들긴다.
콰앙!!!
“이곳에 임하라.”
반동을 이용해 몸을 살짝 뒤로 빼는 칼라. 사자가 인상을 굳히며 밀려났던 한걸음을 검을 치켜세운 채 다시 내디디는 순간,
“척력염동 64연.”
칼라의 옆에서 한 송이 꽃처럼 피어난 하얀 마법진 하나가 염동탄을 사자에게 퍼붓는다.
투두두두두두둥!!
방패며 갑주며 가릴 것 없이 사자의 전신을 두들기는 염동탄. 물론 마법내성이 높디높은 을종마물에게 이런 소소한 마법이 피해를 줄 리가 만무하지만... 집중염동처럼 타격을 주는 게 아니라 상대를 밀어내는 데 특화된 이 염동탄은 아주 잠시나마 사자의 움직임을 멈춰 세우는 성과를 만든다.
“흡!”
그리고 그 잠시는 칼라가 준비동작이 길어 써먹기 까다로운 스킬 하나를 발동할 만한 시간을 벌어주었다.
720도의 수평회전. 아머, 웨펀, 실드와 같은 장비에 대해 파쇄보정을 받지만 예비동작만으로 적에게 두 번이나 등을 보여야 하기에 성능에 비해 찬밥취급을 받는 부, 부창, 대검계열의 공용스킬. 하지만 그녀는 그런 것 따윈 장애가 될 수 없다는 듯, 찰나의 틈을 살려 허공에서 부드럽게 몸을 휘돌린다. 피겨스케이팅의 악셀 마냥 아름다운 동작.
그리고 사자의 라운드 실드를 노리고 처박히는 파쇄의 강격!
“이큅 브레이크!!!”
콰지직!!!
“허어억!?”
단 한방으로 상하로 쪼개지는 방패. 녀석은 떨어져나간 방패의 반쪽을 보며 기겁을 하곤, 뒤로 후다닥 물러나며 부서진 방패를 가슴에 가져다 댔다. 그러자 갑주의 전신에서 부품이 좌르륵 일어나며 부서진 방패에 달라붙는다. 눈 깜짝할 사이에 복구되는 방패.
아니, 복구가 다 뭐냐. 심지어 라운드 실드가 몸의 절반을 가리는 카이트 실드로 변했다.
“하...?”
이것만큼은 정말 예상 밖이었던지 추격해 들어가던 칼라가 발을 멈춰 세우곤 어이없다는 듯 감탄사를 뱉었다.
덤으로 지켜보던 우리는 역시도 말이다.
“와··· 갑주 쩐다. 아저씨, 봤어? 뭐 저런 게 다 있대?”
“아니요, 대가 없는 복구는 아닐 겁니다. 저런 황당한 게 공짜일 리가 없죠. 보세요. 방패가 크고 두꺼워진 만큼 갑주의 두께가 확연히 줄었습니다.”
펠이 피식 웃음을 머금었다.
“그 덕을 보려면 저 무작시리 큰 방패를 뛰어넘어야겠지만 말이야.”
칼라는 카이트 실드 뒤에 몸을 숨긴 채 인상을 굳히고 있는 사자를 보며 재밌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그래. 이 정도론 역시 안 된단 말이지. 좋아. 흐··· 흐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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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고 있던 두 자루의 할버드 중 왼손의 일삭을 땅에 콱 꽂아 넣는 칼라. 그리곤 목에 걸려있던 낙스의 디바인 마크를 풀어 땅에 박혀있는 일삭의 손잡이에 질끈 묶는다.
-낙스시여.
-나, 여기에 신전을 세우노니 이곳에 당신의 영역을 선포하소서.
칼라의 뜻 모를 말 한마디. 그러자 그 즉시 일삭을 중심으로 어둡고 음울한 그림자가 바닥을 타고 화악 번져나가더니 이윽고 미궁 통로 전체에 음영을 드리운다.
사자가 자신의 발밑에서 일렁이는 어슴프레한 그림자를 발로 툭툭 밟으며 찝찝한 표정을 지었다.
“...이 수상쩍은 건 뭐요? 뭔가의 저주? 디버프? 뭔가 특별히 느껴지는 건 없는데...”
“아무리 수상쩍어도 그 갑주보단 나으니 닥치고 덤벼. 이 깡통 새꺄.”
사자는 칼라를 경계하며 조금씩 움직여 몸 상태를 체크한다. 별 문제가 없다는 걸 확인하곤, 알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자.
“...모르면 부수면 그 뿐. 각오하시오.”
자신이 모른다 해도 뭔가 이유가 있으니 한 일일 터. 사자가 일단 땅에 박힌 일삭과 디바인 마크부터 해결하겠다는 의지를 보이며 그쪽으로 검을 겨눈다.
“그 부창은 이제 하나만 들고 덤빌 생각이오? 둘로도 어려운 싸움, 하나로만 되겠소? 혹여 지금 본관을 얕보는 거요?”
칼라는 마치 땅에 박아놓은 일파를 지키기라도 하려는 듯 앞으로 나서며 자신의 몸으로 그것을 가렸다. 그리곤 왼손이 아닌 양손으로 월파를 질끈 움켜쥔다.
“너한테 하나로도 과분해.”
그리고,
쿠쾅!!!
칼라의 월파와 사자의 대검이 격렬히 부딪히는 것으로 드디어 세 번째 격돌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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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싸움의 양상은 앞의 두 번과는 또 달랐다. 사자가 음울한 그림자를 퍼트리는 수상한 일삭을 노골적으로 노리고, 칼라가 그것을 지키기 위해 물러서지 않고 맞서면서 칼라에게 빠르게 피해가 누적되기 시작한 것이다.
밀어내기 위한 힘과 지키기 위한 힘의 싸움. 박력이야 넘치지만 당연히 부딪힐 때 마다 손해를 보는 건 칼라다. 그녀 역시 그걸 모를 리 없을 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라는 어떻게든 일삭을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쿠쾅!!!
3차전이 시작되고 벌써 세 번째 실드차징. 사자는 칼라의 활동범위가 제한된 것을 이용, 보다 크고 두꺼워진 방패를 앞세워 대놓고 차징을 반복하고 있었다.
“큭!”
두 번은 어찌어찌 빗겨낸 칼라지만 이번만큼은 힘을 죽이지 못하고 스키드 마크를 남기며 뒤로 좌르륵 밀려나간다. 쿨럭하고 피를 토하는 칼라. 그럼에도 기어코 땅에 박힌 일삭을 지켜내는데 성공한다.
그걸 본 사자의 얼굴에 확 짜증이 어렸다. 토요일 저녁 7:59, 로또 당첨 번호를 아는 데 돈 100원이 모자라 로또를 못 살 때의 표정이 꼭 저렇지 않을 까 싶을 정도의 격렬한 감정표출이었다.
난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펠에게 다시 물었다.
“저게 대체 뭔데? 얼마나 대단한 거길래 저렇게 지키려 드는 거야? 저것도 스킬?”
펠이 고개를 저었다.
“영역선포라는 거야. 고위성직자 기술이지. 간이 신전을 세우고 거기에 디바인 마크를 설치함으로서 주변을 자신이 믿는 신의 영역으로 선포하는 거야. 주먹구구긴 하지만 이 경우는 땅에 꽂은 일삭이 신전역할을 하는 셈이지. 효과? 뭐, 모시는 신이나 신관의 역량에 따라 여러모로 다양해.”
“칼라가 고위성직자야? 낙스교는 교황도 신전도 신관도 없다면서?”
“오라비. 전에 말했었잖아? 아무것도 없는 대신 우린 낙스엘프 전체가 교황이며 신관이며 몽크라고.”
“아···”
“그래서 낙스엘프 중 재능 있는 일부는 타 종교의 성직자들이 하는 것들을 약간 흉내 낼 수 있어. 저건 그중 하나고. 아, 물론 대단한 걸 할 수 있는 건 아냐. 낙스엘프 수가 얼만데. 당연히 낙스신의 권능이 분산되니 그 대부분이 열화판이고 짝퉁이지. 칼라의 저것도 보긴 그럴듯해 보이지만 실제 효과라곤 부의 감정, 특히 분노를 서서히 증폭시키는 게 전부야. 쉽게 말해 열 받고 짜증나게 하는 거지.”
“즉 혈압을 올린다는 거? 그게 끝이야?”
“그게 끝.”
“그럼 왜 저걸 저렇게 지키려 애쓰는 거야? 저것 때문에 안 봐도 되는 피를 보고 있잖아?”
“저 깡통사자는 그걸 모르거든.”
“엥?”
“쉽게 말해 떡밥을 까는 중이랄까. 안그래도 욕도 처먹을 만큼 처먹었겠다, 분노가 차오르고 짜증이 치밀어 오르면 상황을 받아들이는 눈도 바뀌지. ‘피지컬이 압도적인 만큼 시간이 흐르면 승기를 잡는 유리한 상황.’에서 ‘약해빠진 저깟 엘프 하나를 아직도 어찌 못하는 불쾌하고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 되는 거야.”
“음? 불 끄고 누우면 왱왱거리다가 불만 켜면 사라지는 모기를 봤을 때 같은 심정인가?”
펠이 손가락을 딱 튀겼다.
“정확해. 그럼 열 받은 사자는 그 짜증과 답답함의 원인을 어디서 찾을까?”
흠. 그거야 지금 칼라의 싸우는 모습을 보면 답이 쉽게 나온다.
“...아. 그래서 떡밥인가?”
“그래. 영역선포의 매개가 되는 일삭과 디바인 마크를 노리게 되는 거야. 뭔진 모르지만 저토록 그걸 필사적으로 지키고 있으니 저기에 뭔가가 있다고 밖엔 생각할 수 없을 테니까. 시야가 확 좁아지는 거지.”
“흠... 미지는 신비와 두려움을 낳는다...인가.”
“그런데 지금까지의 드잡이 방식으론 당장 저년을 제끼고 저걸 어쩌진 못해. 사자도 그걸 알 테고. 그래. 이왕 모기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오라비는 그 모기 결국 못 때려잡으면 결국 어쩔 거야?”
“음··· 수단을 바꿔야 겠지. 그러니까, 방에다 살충제를 뿌리지 않을까?”
펠이 참 잘했어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리고 칼라는 지금 녀석이 빡쳐서 살충제 뿌리는 걸 기다리는 중이야.”
- 작가의말
無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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