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바하는 엘프, 삥 뜯는 드워프(2)
내가 성큼성큼 다가가자 물빠진 청바지에 때가 잔뜩 낀 반팔티를 입은 그 드워프는 인상을 긁으며 날 노려봤다. 여차하면 한 대 칠 기세다.
“이봐요. 드워프 양반. 피차 힘들게 살면서 이거 너무하는 거 아닙니까? 어떻게 거지 동냥그릇(?)을 털어가요?”
드워프가 더부룩한 수염 사이로 싯누런 이빨을 드러냈다.
“이 꾸질꾸질한 늙은 새끼가 뭐라 캐쌌노. 디질라꼬. 니 뭔데! 거지새끼주제에 시비털다 디지면 누가 챙겨준다 카더나? 존말할때 꺼져래이. 이 시발새끼야.”
“...헐.”
난 잠시 할말을 잃었다. 드워프의 입에서 구수한 경상도 사투리가 육두문자와 함께 신명나게 풀려나온 탓이다.
아... 그렇지. 2세대... 이 놈, 경상도 토박이구나. 하긴 엘프면 몰라도 드워프는 충분히 가능하지. 그나저나 생각보다 많이 어린 녀석인가 본데... 이놈들, 외모론 도통 나이를 모르겠구만.
“아니, 댁 말고 이 근처에 누가 있는데요? 자리 비운지 5분밖(사실은 10분이다)에 안되었고, 그 사이 딱 당신밖엔 없었는데 그럼 당신 말고 누가 그걸 가져갑니까?”
“야이 씨발아. 증거 있나? 증거 있냐고. 이 새끼야!”
“그럼 그 손수레 딱 한번만 뒤져봅시다. 그거 뒤져서 진짜 안나오면 내가 작업해서 번 돈 다 줄게요. 보자... 한 십만원 가까이 되는 것 같은데.”
사실 만원남짓 뿐이지만, 알게뭐람.
드워프가 눈을 가늘게 떴다.
“꺼내봐.”
“음?”
“꺼내보라고. 새끼야. 보여주면 구루마 뒤지게 해 주꾸마.”
이 놈, 삥 뜯을 생각으로 가득하구만. 하... 인생 참 전도다난하다. 난생 처음 만나는 드워프가 경상도 사투리를 쓰면서 삥을 뜯는 드워프라니. 시급 받으면서 편의점 알바하는 엘프는 오히려 양반이다.
내가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자니 겁을 먹었다 판단했는지 드워프가 한걸음 더 다가서며 내가 입은 거적떼기를 움켜쥐었다. 내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자 이번엔 품에서 커터칼을 슬쩍 꺼내보인다. 아마 박스를 정리하는 용도로 쓰이는 물건인 듯 싶었다.
“이 씨발아. 쳐발라버리기 전에 돈 꺼내라고.”
“......”
콜레가에 도착한 후 밤중에 시비를 걸어오는 노숙자들과 드잡이질을 몇 번하면서 깨달은 게 하나 있었다. 그것은 내가 팔다리를 부들대는 늙은이에 불과하다는 자기인식과는 달리, 의외로 제법 강하다는 사실이었다. 아, 물론 어느동네 쥔공들처럼 몬스터 막 때려잡고 하는 그런 레벨의 강함을 이야기하는 건 아니다. 다만 시비를 걸어오는 노숙자들이나 동네 양아치들정돈 어렵잖게 쫓아버릴 수 있는 힘 정돈 갖추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 거다. 그리고 요 며칠, 여러모로 궁리한 결과 그 이유에 대해서도 대충이나마 짐작이 간다.
"이 씨발이가 돌았나, 행님말씀하시는 데 생을 까? 아가리를 조 잡아 째뿌..."
난 말없이 드워프의 손을 탁 쳤다. 단순한 동작이지만 속도가 워낙 빨라 녀석은 자신이 무엇을 당했는지 조차 모르고 비어버린 자신의 손을 보며 멍청한 얼굴을 했다.
“좀 닥치자. 망할 새끼아. 경상도에서 났으면 경상도 놈 답게 연장자 존중을 할 줄 알아야지, 이게 내가 몇살인 줄 알고. 콱. 내가 힘도 연고도 없는 늙은이같이 보이니 아무런 부담없이 털어버릴 생각이었나 본데... 일단 좀 맞자. 응?”
그리고 뒤이어 드워프를 어깨와 다리를 잡고 번쩍 들어올린다. 그것도 어중간 한 높이가 아닌, 왕년에 누가 물양동이 들듯 번쩍 말이다.
“어, 어어? 이 씨발아! 놔! 노라꼬!!!”
위에서 경상도드워프(어째선지 입에 착 달라붙는다)가 발버둥을 치지만 난 그때마다 드워프를 절묘하게 뒤집고 흔들어 그 모든 움직임을 무력화시켰다. 한참동안 욕을 내 뱉던 드워프가 이윽고 서서히 조용해진다. 그리고...
“저... 선생님. 죄송합니다. 제가 좀 발끈하는 버릇이 있어서... 동종업계(?)에 종사하는 정으로 좀 봐주시면... 앞으로 선생님 쓰실 박스는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네?“
“야이 쌍놈아! 이제와서 표준말 쓰지 말라고!!! 헷갈리잖아!!!”
파워슬램!!!
난 그대로 드워프를 잔디밭에 냅다 꽃았다.
꾸웨에에에에엑!!!
아... 시원하다. 물양동이 징글징글하게 들고 있던 시절, 이거 정말 꼭 해보고 싶었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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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릎꿇고 양손을 위로 들어올린 드워프를 난 재차 추궁했다.
“그러니까, 신문을 가져간 건 맞는데, 양동이같은 건 본 적이 없다?”
녀석이 잠깐 침묵한 후 진중하게 대답했다.
“네. 선생님. 전 정말 모릅니다.”
이 녀석, 이 상황에서도 뻥을. 하긴, 녀석은 여기서 자백하고 한 번 더 잔디밭에 얼굴도장을 찍느니 걍 버티는게 낫다고 판단했을지도 모르겠다.
“알았어. 믿지. 가 봐.”
“감사합니다! 선생님! 앞으로 선생님 잠자리는 제가 고르고 고른 멋진 박스떼기로 꼭 책임지겠습니다!”
녀석은 자기가 가져간 신문 대신 깔개로 쓸만 한 박스 하나를 내게 바치곤 뒤도 돌아보지 않고 후닥닥 달아났다. 다리도 짧은 녀석이 손수레까지 끌고 달리는데도 불구하고 그 속도가 심상치가 않다.
이윽고 공원 입구까지 달아난 녀석은 아니나 다를까,
“야이! 개 시발새끼야! 뒤에 뒤통수 조심해라!!! 내가 뒤에서 콱 쪼사뿔텐께!!!”
그리곤 다시 부리나케 달려나간다. 그렇게 이내 시야에서 사라지는 드워프.
난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니까 왜 욕할때만 경상도 사투리냐고.”
근데 저렇게 보내도 되냐고? 저놈이 들고 간 양동이는 어쩔거냐고?
누가 그냥 보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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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냐하하핫. 양동이. 양동이! 그것도 그 징글징글한 양동이를! 냐하하하하하핫!!!”
“......”
한참동안 내등을 두드리며 웃던 유카는 간신히 웃음을 거두며 말을 이었다.
“하하핫. 당신이 이해해요. 언니는 정말 그것 밖엔 줄 수 없었던 거에요.”
“알아. 아는데...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하잖아. 세계를 구원하라면서? 전설의 검이 있어도 시원찮을 판에, 양동이가 뭐야. 양동이가.”
내가 양동이를 손으로 탕탕 두들기며 불만을 표시하자 유카가 뭔가 흐응 하며 즐거운 미소를 떠올렸다. 유카검정 1급으로서의 견해를 말하자면 저건 뭔가 재미있는 생각이 떠올렸을 때의 표정이다.
“흠. 언니는 당신과 세계간의 계약에 한축을 담당하고 있어요. 그래서 계약에 굉장히 엄격할 수 밖에 없죠. 하지만 전 직접적인 당사자가 아닌 만큼 약간은 여유가 있어요. 그러니...”
“...그러니?”
“전설의 검은 몰라도 전설의 양동이는 한 번 만들어 볼까요?”
“전설의 양동이? 이 양동이에다가 뭔가 할 생각이야?”
유카가 양동이에 손을 가져다 댔다.
“우선 Improved absolute recall(강화된 절대 귀환)부터 인챈트 해 보죠.”
유카의 손에서 흘러나온 빛이 허공에서 복잡하기 그지없는 문양을 한번 그린 후 양동이로 흘러들어간다.
“그게 뭔데?”
“recall은 보통 물건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사용하는 주문이에요. 일정범위안에만 있다면 어디에 있든지 내 손으로 다시 가져오는 거죠. 제가 방금 부여한 건 그 강화판이에요.”
“...그딴 양동이 잃어버리든 말든.”
“냐하핫. 너무 그러지 말아요. 이러니저러니 해도 1000년이나 같이 한 물건이잖아요. 게다가 이게 정말 필요하게 될 지 또 누가 알아요?”
...세계를 구원하는데 양동이가 필요한 경우? 이걸로 마왕얼굴이라도 후려칠까?
“그리고 리콜은 꼭 물건을 회수할때만 쓰는 주문은 아니에요. 쓰기에 따라선 여러가지 용도로 응용이 가능하죠.”
“음...? 잠깐.”
난 머리에 번뜩 스치는 게 있어 유카에게 다시 물었다.
“...강화판이랬지? Improved absolute(강화된 절대~)라고? 그러고 보니 수식어가 심상치 않은데... 범위라던지 그런 건 어떻게 되는 거야?”
유카가 빙글빙글 웃었다.
“히히힛. 좀 있다 비파괴 설정(Non-destructive setting)까지 추가할 건데요, 그럼...”
“그럼?”
“태양에 던져놓고 지구에서 리콜하면 1kg기준으로 10분이면 돌아와요.”
“......”
착한 아이 여러분. 광속의 80%로 날아가는, 부서지지 않는 1kg짜리 양동이가 가지는 운동에너지를 계산해 봅시다. 이거에 맞으면 무슨 일이 일어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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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조용히 시동어를 읇었다.
“Improved absolute recall.”
콰아아아앙!!!
“으어어어억!!!”
공원 바깥 저만치에서 폭음과 함께 작살난 손수레가 허공을 날아오른다. 덤으로 드워프도. 그러게 아무리 상황이 나빠도 남의 밥그릇을 깨트리면 쓰나. 룰은 지켜야지. 안 그래?
쉬이익!
그리고 뒤이어 날아오는 둔중한 은빛의 물체.
난 내앞에 멈춰선 양동이를 붙잡아 바닥에 엎어놓곤 그 위에 대망의 제육볶음 도시락을 착, 얹었다.
“자... 일 시작하기 전에 일단 배부터 채워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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