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야공자 제13화--1
제13화 진정한 적은?
이야기를 시작하는 진조범의 분위기는 다소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 듣자니 사부님께 아들이 한명 있었다고 하던데 그것이 사실인가?”
원중도가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다. 때문에 원중도는 다소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는 없었다.
맹주에게 출사표를 던진 마당이었다.
그렇다면 의당 이 자리는 앞으로의 나아갈 방향에 대한 논의가 있어야만했다.
헌데 진조범은 과거의 일, 그것도 오래전에 죽은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고 있었다.
그리고 원중도는 진조범이 죽은 왕신림의 아들인 왕망의 존재를 알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다소 의외였다.
“ 뜻밖이군요. 주군께서 그에 대해서 알고 계시리라고는.”
진조범이 씁쓸한 표정으로 원중도를 바라보았다.
“ 그렇군. 실제로 있기는 있었다는 뜻이로군.”
원중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과거 왕망의 모습을 떠올렸다.
“ 그렇습니다. 참으로 훌륭한 분이였지요. 만약 그분이 살아계셨다면 아마도 검마맹의 사정이 지금과는 많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원중도는 이렇게 왕망에 대해서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원중도가 기억하는 왕망은 명실 공히 검마맹의 후계자였다.
이것은 비단 왕망이 맹주의 아들이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이십여 년 전 왕망이 살아있을 당시 왕신림은 입버릇처럼 자신의 제자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후사를 잇게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 이면에는 그의 아들이며 동시에 제자이기도 한 왕망의 실력을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당시 맹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원중도에게도 왕망은 각별한 존재였다.
아니 당시에 검마맹에 소속된 대부분의 무인들에게 왕망은 인상적인 존재였다.
이렇게 왕망은 대부분의 무인들이 인정할 정도로 다른 어떤 경쟁자들보다도 출중한 무공과 그 무공에 뒤지지 않을 빼어난 인품까지 겸비하고 있었다.
원중도를 비롯한 검마맹의 젊은 무인들은 훗날 왕망이 검마맹의 맹주가 될 것을 의심치 않았고, 심지어 왕신림이 아닌 왕망과 함께 천하를 논할 시기가 멀지 않았음을 공공연하게 언급할 정도였다.
그러나 하늘이 왕망의 뛰어남을 시기했던 것일까?
왕망의 수명은 그다지 길지 못했다.
왕망은 스무 살의 어린 나이에 딸 하나만을 덩그러니 남겨둔 채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왕망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그의 아내 정화연 역시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고, 왕신림은 졸지에 아들과 며느리를 모두 잃고 말았다.
하지만 왕신림은 그 충격에도 일체의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고 했다.
“ 못난 놈.”
이것이 왕망의 시신을 대한 왕신림의 유일한 한마디였다.
왕망의 사체는 그야말로 처참한 몰골이었다.
왕망의 몸 곳곳에 치명적인 상처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고, 그를 공격했던 대부분의 무기들에 독이 발라져 있었던 듯 상처부위가 온통 검게 물들어 있었다. 심지어 숨이 끊어진 이후에 남겨진 것으로 추정되는 상처까지도 적지 않았다.
검마맹의 내분을 우려했기 때문일까?
왕신림은 흉수를 찾으려고 하지도 않은 채 조용히 아들을 매장했다.
그렇게 겉으로는 사태가 일단락된 듯했다.
그러나 왕망의 죽음이야말로 검마맹의 불행의 진정한 시작이었다.
후계자로 확실시되던 왕망이 사라지자 왕신림의 제자들 사이에 본격적인 후계자 다툼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여기까지 원중도가 이야기를 끝마치자 진조범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 그랬군, 그렇다면 당시 죽은 왕망에게 딸이 하나 있었다는 말인데, 대체 그녀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원중도가 흠칫 놀라는 표정으로 진조범을 바라보았다.
왕신림의 손녀 왕다련, 그녀는 지금까지 모두의 기억 속에서 사라진 인물이었다.
아들의 죽음을 확인한 왕신림이 그녀를 안전한 장소로 대피시켰다는 이야기만 있었을 뿐 이후 그녀의 소식은 일절 전해지지 않고 있었다.
당시에는 왕다련이 분명 전혀 위험이 되지 않는 핏덩어리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십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그녀가 무사히 성장했다면 스무 살을 넘겼을 것이다.
불현 듯 원중도의 뇌리에 한 가지 생각이 스치듯 지나갔다.
“ 설마, 맹주가 주군을 받아들인 까닭이 그녀가 돌아올 시간을 벌기 위해서.”
동시에 원중도는 비슷한 시기에 사라진 초대 잠영대주 채문범을 떠올렸다.
원중도는 단 한 번도 왕신림이 제대로 본연의 실력을 밖으로 펼쳐 보이는 것을 목격한 적이 없었다. 실제로 자신이 왕신림에게 패할 당시에도 왕신림은 본연의 실력에 채 삼할도 발휘하지 않았다.
강호는 넓고 신강과 청해성에도 무수한 고수들이 즐비했다.
어찌 그중에 왕신림의 적수가 될 만한 인물이 없었겠는가?
하지만 왕신림의 무공을 제대로 확인한 사람은 원중도의 기억으로는 아무도 없었다.
그 이유가 바로 왕신림의 앞에 육지검마 채문범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채문범이 어떻게 왕신림의 휘하가 되었는지를 아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러나 채문범의 존재는 단순한 잠영대주 이상이었음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채문범은 왕신림을 제외한다면 그 적수를 찾기 어려울 정도였고, 혹자는 채문범의 실력이 왕신림을 능가할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였다.
대부분의 위험한 일은 모두 채문범이 도맡아서 처리했다.
때문에 왕신림은 굳이 전면에 나설 필요조차 없을 정도였다.
오죽하면 왕신림이 채문범에게 자신의 별호인 검마를 하사해 육지검마라고 칭했겠는가?
이렇게 비슷한 시기에 사라진 두 사람을 연결시킨 원중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 하지만 그것은 지나친 억측이 아니겠습니까?”
진조범은 이런 원중도를 향해 가만히 고개를 갸웃거렸다.
“ 그런가?”
이런 진조범의 반응에 원중도가 흠칫 놀라는 표정으로 진조범을 바라보았다.
‘ 설마 주군께서 육지검마에 대해서도 알고 계신다는 뜻인가? 그렇다면 강일운인가?’
진조범의 담담한 반응에 원중도는 어쩌면 진조범이 육지검마 채문범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조각에서 원중도 자신을 제외하고 이 사실을 알 만한 사람은 강일운을 비롯한 중도세력의 후계자 정도였기에 그들을 통해서 진조범이 이런 정보를 접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정보의 출처가 누구인지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원중도는 진조범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채문범과 왕다련을 연결시키는 것이 지나친 억측이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정작 이렇게 고개를 끄덕이는 원중도 스스로도 무언가 떨떠름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자 진조범이 차갑게 가라앉은 표정으로 말했다.
“ 만약에 말일세, 지금까지 죽어나간 사부의 제자들이 사부의 손에 죽음을 당한 것이라면 그것도 지나친 억측일까?”
원중도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당시 잠영대주는 저였고 저는 한시도 맹주님의 곁을 떠난 적은 없었습니다.”
진조범이 원중도를 직시하면서 말했다.
“ 장담할 수 있는가?”
자신을 직시하는 진조범의 시선에 원중도는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 하지만 이내 확신하듯 말했다.
“ 설마 주군께서는 지금까지 맹주께서 복수를 하고 계셨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과연 대공자 등이 이토록 오랫동안 살아남을 수 있었으리라고 보십니까?”
진조범이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말했다.
“ 아니, 솔직히 나는 상상조차 할 수가 없다네, 그토록 기대하던 아들의 주검 앞에서 과연 맹주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를, 하지만 왠지 이후 그의 제자들의 죽음에 그가 어떠한 형태로든 관여하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드는군.”
원중도가 진중한 표정으로 진조범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 설마 그것이 어제 맹주를 대하시고 얻어낸 해답입니까?”
진조범은 굳이 이를 부인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진조범의 반응에 원중도는 잠시 멍한 표정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지금까지 맹주와 보냈던 수많은 시간들, 그 시간들 속의 수많은 일들이 잠깐 동안 영상이 되어 원중도의 머릿속을 스치듯 지나갔다.
원중도는 지금까지 맹주의 수하로서 어떠한 일에도 의문을 품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그의 머리를 어지럽히는 무수한 사건들이 떠올랐다.
결국 원중도는 단순한 느낌이라고 말하는 진조범의 말을 쉽게 부정할 수 없었다.
맹의 입장에서 후계자들의 다툼은 결코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실제로 원중도는 왕신림이 어째서 이런 공공연한 갈등을 묵인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왕신림의 묵인, 그것은 어쩌면 그들의 죽음을 바랐던 것은 아니었을까?
또한 그것이 아들의 죽음에 대한 복수는 아니었을까?
못난 놈이라던 그날의 한마디가 아들을 지키지 못했던 스스로에게 한말은 아닐까?
여기까지 생각을 정리한 원중도가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만약 이런 자신의 생각이 사실이라면 진조범이 앞으로 다른 후계자들뿐만이 아니라 맹주를 상대해야할 경우까지도 상정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원중도의 이런 모습에 진조범의 표정역시 차갑게 가라앉았다.
처음에는 그저 왕신림의 이해할 수 없는 느낌에 대한 단순한 의문이었다.
이런 의문은 언젠가 우연히 강일운등의 대화를 통해서 들었던 왕다련의 존재를 떠올리면서 추측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지금 원중도의 모습을 통해서 단순한 추측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또한 어쩌면 살아있는 손녀인 왕다련의 존재가 얼마 전 왕신림에게서 보았던 미련의 실체가 아닐까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 그렇다면 결국 이곳에서 내가 설자리는 없다는 뜻인가?”
진조범의 중얼거림에 원중도가 잔뜩 인상을 찌푸렸다.
진조범은 가만히 품안에서 한 개의 비도를 꺼내들었다.
맹주전으로 향할 당시 그의 앞길을 막았던 바로 그 비도들 중 하나였다.
“ 설마, 그녀인가?”
진조범의 중얼거림에 원중도가 흠칫 놀라는 시선으로 비도를 바라보았다. 비도를 바라보던 진조범이 피식 미소를 머금었다.
“ 비도의 주인이 왕다련이라면, 그리고 그녀가 굳이 나의 앞길을 막았다는 것은 적어도 나에게는 적의가 없다는 말인가? 하긴 그녀가 왕다련이라면 어쩌면 내가 그녀의 아버지 왕망의 죽음과 하등 관련이 없는 유일한 사람일지도.”
진조범의 중얼거림에 원중도가 흠칫 놀라는 표정으로 진조범을 바라보았다.
진조범 자신이 왕망의 죽음과 관련이 없는 유일한 사람이란 말의 의미는 결국 왕망의 죽음에 검마맹의 17개 방파가 모두 관여했을 가능성을 암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진조범이 씁쓸한 표정으로 원중도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 어떤가? 적어도 한 번 쯤은 확인해볼 필요는 있을 것 같지 않은가?”
원중도 역시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하지만 딱히 어떤 방법으로 이 사실을 확인해야 할지 좀처럼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런 원중도를 향해 진조범이 나직이 말했다.
“ 아무래도 내일은 대사형을 찾아뵈어야겠군, 자네가 준비를 좀 해주게.”
원중도가 흠칫 놀라는 표정으로 진조범을 바라보았다.
“설마?”
진조범은 차분한 표정으로 원중도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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