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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드는 생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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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밀히
작품등록일 :
2019.02.15 17:03
최근연재일 :
2019.06.14 23:00
연재수 :
12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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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6,0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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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12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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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120화 - 신기루 (1)

DUMMY

가슴으로는 합리화할 수 없어도 머리로는 이해가 갔다. 이렇게 된 이상, 어떻게 보면 칼레디의 말처럼 슬래이야가 이곳까지 찾아오는 걸 막아야 했을지도 모르겠다. 로우는 차갑게 식은 눈으로 길랑 청을 바라보았다. 이미 그것은 인간의 형상을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이마 위로 솟아난 거대한 산양의 뿔 한 쌍은 흡사 악마를 연상케 했으며 몸체는 인간의 3배 정도로 거대해졌고 몸은 검붉은 근육이 탄탄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오른손엔 역수로 쥐어진 십자가가 있었는데, 마치 신을 부정하겠다는 듯한 의미가 담긴 것만 같았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것의 등에는 아주 자그마한 단검이 꽂혀 있었는데 그곳을 통해 보라색의 기운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젠장. 어떻게 할 거야?”




“뭘 어째. 일단은 싸워야지.”




모두가 잔뜩 지칠 대로 지친 상황이다. 미처 체력을 회복할 틈조차 없이 이곳까지 달려왔다. 당장에 달려갈 기운조차 없는데도, 그런데도 상대해야만 했다. 지금까지 사랑하는 연인을 찾기 위해 홀로 외로운 여행을 해왔던 그녀를 위해, 슬래이야를 위해서.




“······저 녀석, 레벨이 너무 높아. 분명 개죽음 당할 거야.”




“나도 알아. 아무래도 이 퀘스트······ 내가 받기에는 굉장히 이른 모양이야. 어쩌겠어, 내가 자초한 일인데.”




처음 행와인 저택에 잠입했을 때 만났던 가디언들과 옌의 레벨만 생각해봐도 당시의 로우가 상대하기엔 아득히 높은 상대였다. 그 점을 생각해봐도 이미 로우는 적정 레벨보다 한참이나 뒤처진 상태에서 퀘스트를 승낙해버린 것이다.




“저도 싸우겠습니다. 여기서 빠지긴 애매하니까요.”




“나, 나도 싸울래.”




칼레디와 신아까지 싸우겠다고 나섰지만 로우는 딱히 말리지 않았다. 애초에 이길 수가 없는 상대였다. 그러니까, 이제 와서 뺄 필요가 없다는 소리였다. 슬래이야는 어느 사이엔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흐느끼고 있었다. 이 감정은, 야안을 향한 것이 아닌 그들을 위한 것이었다.




“그, 그만두세요······. 죽을 걸 알면서도 왜······.”




그러자, 로우는 씨익 웃으면서 말했다.




“우린 죽지 않거든. 최소한 의미 없는 죽음이 아니라면 말이야.”




그 말을 뒤로하며, 로우가 앞장서서 천천히 길랑 청에게 다가간다.




이후는 굳이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모두가 알 것이다. 거대한 몸집에서 나오는 육중한 파워, 행와인에 축적되어 있던 숨겨진 마법을 쏟아내는 연사력과 마치 퍼즐처럼 꼬여 있는 패턴을 이용한 기믹까지. 완벽하게 삼박자를 두루 갖춘, 그야말로 완벽한 보스였다.




그나마 제일 레벨이 높은 바일렌을 탱커로 내세워 몸빵을 시키고 메리세와 로우는 그 특유의 스피드를 이용해 길랑 청에게 대미지를 누적시켜갔다. 의외로 칼레디의 스킬이 굉장한 도움이 되었는데, 사방에서 와이어가 쏟아져 나와 길랑 청의 움직임을 방해하거나 땅에서 송곳니가 솟아나와 발을 꿰뚫어서 그 자리에서 홀딩시키는 등 적시적소에 들어오는 완벽한 어시스트는 그야말로 환호성이 절로 나올 정도였다. 비록 그들의 평균 레벨은 이제 간신히 70대를 웃돌았지만 어디 평범한 유저들이던가. 각자의 분야에서 탑클래스를 달리고 있는 그들은 칼레디의 오더를 따라서 서서히 길랑 청의 체력을 깎아나갔다.




하지만, 로우 일행이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게임은 결국 게임. 레벨이 깡패였던 점이 문제일까, 한 명씩 서서히 쓰러져가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쓰러진 건 메리세였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도끼에 찍힐 뻔한 신아를 구하기 위해 달려들다가 되레 본인이 당해버린 것. 그 다음은 신아였다. 나름 공격하겠다고 길랑 청에게 달려들었지만 뒷발질에 그대로 날아가서 절명해버렸다.




바일렌은 땀을 뻘뻘 흘리며 숨을 힘겹게 몰아쉬었다. 현재 길랑 청의 HP는 무려 70%. 레벨 100대의 유저 수십 명이 몰려와야 클리어할 수 있는 던전의 보스를 무려 30%나 깎은 점은 분명히 대단했지만, 아무래도 여기까지가 한계인 듯싶었다.




“그만······. 제발······.”




슬래이야는 아예 오열하기 시작했다. 이 상황이 제발 꿈이길 바랐다. 다시 깨어나면 행와인 저택으로 돌아가 야안과 함께 행복한 나날을 보내던 그 시절이었으면 좋겠다. 꽃밭을 뛰어놀던 그 행복했던 시절, 그땐 왜 그 행복이 소중한 줄 몰랐던 걸까. 왜 이제야 그걸 깨달은 것일까. 다시 한 번만, 정말로 한 번만 더 기회가 주어진다면 다시는 놓치지 않을 텐데. 정말로 그럴 수 있을 텐데.




문득, 주마등처럼 그 옛날이 스쳐지나갔다. 야안과 함께, 허공을 날아다니는 애완 물고기 옌과 함께. 들판을 뛰놀던 그 어렸던 시절. 누구보다도 찬란하게 빛나는 아름다운 사랑을 했던 그 소년소녀들.




소녀는 머리 위에 꽃다발을 쓰고선 자신보다도 키가 훨씬 큰 분홍빛의 꽃들 사이에 앉아서 싱그럽게 미소 짓고 있었다. 아아, 아름다운 그대여. 사랑하는 그대여. 그 모습을 바라보는 야안의 눈에는 사랑이 가득했다. 순진하고 천진난만했으며 아무것도 몰라 정말로 순수한 사랑을 했던 그들에게. 영원히 깨어지지 않겠다며 맹세를 했던 그 꽃에게. 휘몰아치는 꽃잎과 떨어지는 벚꽃 사이로 비춰지는 그들의 사랑.




“······.”




로우는 자신의 가슴에 꿰뚫린 철봉을 손으로 어루만졌다. 미처 반응할 틈도 없이 사각에서 치고 들어오는 공격에, 대응하지 못하고 결국 적중당하고 말았다. 힘겹게 고개를 꺾어 아래쪽을 내려다보자 바일렌은 이미 쓰러져 있었다. 칼레디는 온데간데없이 보이지 않았는데, 한참 전에 죽어서 사라진 모양이었다. 이젠 그들의 영혼만이 허공에 둥둥 떠다닐 뿐.




“하, 하아······.”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고통이 없어서 망정이지, 이런 끔찍한 경험은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았다. 점점 몸에서 힘이 빠져나간다. 손에서 검이 뚝, 하고 떨어져 바닥에 꽂혔다. 몸이 축 처지고, 마침내 HP가 전부 소진되려는 순간 저 멀리서 슬래이야가 기어오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움찔,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오면 안 된다. 오지 말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그럴 만한 힘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




“악······. 으.”




있는 힘, 없는 힘을 쥐어짜내, 슬래이야는 조금씩 야안에게 다가간다. 비록 흉측하게 변해버린 그의 모습에도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추억 속, 잘생기고 멋진 얼굴은 아니었지만 언제나 사랑스럽고 빛나던 그 모습이 비쳐 보였다.




“괴로워하지 말아요.”




길랑 청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외로워하지 말아요.”




들고 있던 십자가를 내려놓는다.




“제가 언제나 함께할 테니까요.”




안광이, 그 눈빛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맹세했으니까요.”








띠링.




[알 수 없는 이유로 길랑 청이 분노합니다!]




[던전 공략에 실패하여 행와인 시계탑이 시리사나 대륙의 상공을 영원히 떠돌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로우마저 목숨을 잃고, 길랑 청은 등 뒤에 꽂혀 있던 단검을 저 스스로 뽑아내 하늘을 향해 쏘아 올렸다. 슬래이야는 여전히 그에게 손을 내뻗고 있었고, 길랑 청은 무엇 때문에 그리도 화가 난 것인지 온 세상이 원망스럽다는 듯이 절규했다.




쿠오오오오!!




그 울음소리가 그 무엇보다도 구슬프게 들린 것은 기분 탓일까. 그날 저녁 상공에 울려 퍼진 길랑 청의 울음소리는, 엔딩 월드를 플레이하고 있던 모든 유저가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아주 먼 훗날, 공식 홈페이지에는 단 한 장의 스크린샷이 떠돌게 되었다. 정말로 별것 없는, 어찌 보면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그런 내용이 담겨 있는. 그저 반쯤 부서진 광장에서 소녀가 쓰러진 채로 소년을 향해 손을 뻗고 있는 그런 사진이, 결국은 손마저 닿지 못한 채 결말이 지어져버린 그런 엔딩이.








4부 끝 5부 시작












신기루








휘날리는 눈썹 너머로 보이는 아무것도 없이 황량한 대지, 습기 없이 건조한 바람에 잔뜩 섞여 있는 모래가루, 비는 대체 언제 내린 건지 잔뜩 갈라진 땅이며 구름 한 점 없이 지나치게 맑은 하늘. 깨어 있는 시간 내내 소나기가 떨어지던 레인 켈로스 고성과는 계절 자체가 판이하게 달라진 이곳을 보며 그들은 낭만적이고 로맨틱한 생각을 떠올렸다.




‘아, 소나기와 사랑을 나누고 싶다.’




‘강물에 진한 키스를······.’




‘눈물 젖은 물을 마셔보고 싶구나······.’




그림자란 그림자는 모조리 모습을 감춰버리고 햇볕에 피부가 그대로 노출되어 안 그래도 더운데, 식량조차 챙겨오지 못했고 비 한 방울 떨어지지 않는 날씨에 목까지 말라오니 설상가상. 심지어 로우의 바지는 검은색 계열이라 햇볕의 열을 모조리 흡수해대고 있었다.




“더워······.”




“배고파······.”




“목말라······.”




로우와 바일렌소드, 메리세가 번갈아가며 축 늘어진 입으로 중얼거리자 눈앞에 메시지가 연속으로 출력되었다.




[심각한 허기를 느낍니다. 모든 능력치가 50% 이상 감소합니다.]




[햇볕은 부글부글 모래알은 이글이글. 심각한 더위를 느낍니다. 작은 움직임에도 스태미나가 감소하며 전체적인 스태미나 소모 속도가 증가합니다.]




[수분이 부족합니다. 정확히 13분 47초 이내에 물을 150ml 이상 섭취하지 않을 경우 상태이상 ‘탈수’에 걸리게 됩니다.]




“으어어······.”




마치 좀비의 비틀린 울음소리처럼 로우가 신음을 흘리자 메리세가 잔뜩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죄송해요, 저 때문에······.”




“아니야······. 신경······ 쓰지 않아도······.”




대략 3시간 전. 로우는 간만에 사냥이라도 할 겸 알리하스와 하루스를 부른 다음 바일렌소드를 포함해 다섯 명이서 함께 사냥터에서 자리를 잡았다. 본격적으로 레벨업을 위해 사냥을 하던 그들은 아예 며칠 동안 눌러 앉을 기세로 그 일대를 휩쓸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기세가 너무 강력했기 때문일까. 메리세가 실수로 스킬을 광역으로 사용하여 그 일대에 살고 있는 한 몬스터 종족 전체를 건들고 말았는데 하필이면 또 추격에 일가견이 있는 종족이었는지 그들을 지구 끝까지 쫓아올 기세로 따라왔다. 덕분에 로우는 신아에게 마지막으로 ‘난 이 지구상에서 사라질게!!’라는 메시지를 남기고 이곳까지 도주해왔다.




띵.




[허기가 극심해집니다. 바위가 빵으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알리하스는 게임 시간으로 10시간이 넘도록 굶고 있던 참이라 배고픔의 정도는 더욱 심했다.




[주의! 옆에 서 있는 동료는 먹을 수 없습니다.]




[동료를 깨물지 마십시오! 음식이 아닙니다.]




“꺄악.”




결국 눈이 핑 돌아버린 하루스는 앞장서서 걷고 있던 메리세의 어깨를 살짝 깨물고 말았다. 비명소리에 금세 정신을 찾았지만, 알리하스는 더욱 이상한 것을 보았다. 다른 동료들에 비해 하루스가 전혀 지쳐 있지 않은 것이다.




“하루스······. 너, 목마르지 않아.”




“네? 별로요.”




“그, 그럼 더위는.”




“어······. 별로 안 더운데요.”




그 대답에 놀란 쪽은 오히려 로우였다.




“뭐, 뭐야. 특별한 스킬이라도 배웠어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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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 117화 - 내가 지금 갈게 (2) 19.06.09 137 3 12쪽
116 116화 - 내가 지금 갈게 (1) 19.06.08 137 6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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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 113화 - 약속은 깨야 제 맛 (4) +2 19.06.05 150 4 12쪽
112 112화 - 약속은 깨야 제 맛 (3) 19.06.04 154 3 11쪽
111 111화 - 약속은 깨야 제 맛 (2) 19.06.03 156 4 11쪽
110 110화 - 약속은 깨야 제 맛 (1) 19.06.02 153 3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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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 105화 - 제작? (1) 19.05.28 176 5 12쪽
104 104화 - 그거 조금 미끄러워요 (8) 19.05.27 163 4 11쪽
103 103화 - 그거 조금 미끄러워요 (7) 19.05.26 184 4 11쪽
102 102화 - 그거 조금 미끄러워요 (6) 19.05.25 199 4 11쪽
101 101화 - 그거 조금 미끄러워요 (5) 19.05.24 165 5 12쪽
100 100화 - 그거 조금 미끄러워요 (4) 19.05.23 171 4 12쪽
99 99화 - 그거 조금 미끄러워요 (3) 19.05.22 189 3 12쪽
98 98화 - 그거 조금 미끄러워요 (2) 19.05.21 185 5 11쪽
97 97화 - 그거 조금 미끄러워요 (1) 19.05.20 185 4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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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95화 - 탑에 내리는 소나기 (4) 19.05.18 178 3 11쪽
94 94화 - 탑에 내리는 소나기 (3) 19.05.17 182 8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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