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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비의 서재

당신을 위한 무덤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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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빛
작품등록일 :
2021.05.13 11:19
최근연재일 :
2021.07.17 13:00
연재수 :
7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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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글자수 :
441,5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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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16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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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루루가의 약속

DUMMY

"자네들은 모두 영지로 돌아가게"


반 수사관은 지금 기사들과 함께 산맥의 초입에 서 있었다.

조금 있으면 해가 저물 시간이다. 이제 곧 괴물들의 시간이 찾아온다.

그것을 알고 있어서일까, 기사들을 비롯한 클락 영지의 사람들은 어딘가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듯 했다.


"자, 자작님께서는 어쩌시려고.."


시종 하나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당장에라도 이곳을 벗어나야 할 판에 갑자기 멈춰서다니.

그리고 한다는 소리가 왜 저런 이야기란 말인가.


"나는 가지 않겠네"

"자작님?"


흔히 반 수사관이라 불리는 그였으나, 그의 영지민에게는 그저 클락 자작일 뿐이었다.

자신들의 주인이자, 가장 가까운 왕.

그렇기에 그 누구보다도 우선시하여 지켜야만 하는 존재였다.


헌데 그를 두고 가라니? 시종은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이었다.


"..무언가를 경계하시는군요. 누구입니까?"


허나 모두가 이해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기사 중 하나가 그에게 물었다.

산맥은 위험하지만 그만큼 사람도 없을 터. 무언가 중요한 정보를 전하기에는 가장 알맞은 곳이었다.


"..맞네"

"그렇군요"


오러 나이트, 라팔 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전, 마검이 정확히 나타난 것도 그렇고 룽겔 자작의 배신도 그렇고..의심 가는 것이 많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반 수사관만의 의심이 아니라는 것이 입증된 것이기도 했다.

언제나 다른 누군가의 의견을 반드시 묻곤 하는 반 수사관이 확신을 갖게 되는 순간이기도 했고 말이다.


그가 무언가를 묻는 것은, 언제나 그런 연유에서였다.

혼자만의 생각은 생각에 불과하지만, 다른 누군가 역시 같은 생각을 공유한다면..그것은 점차 진실을 향해 나아가는 발판이 되리라고 생각했으니까.


그것이 사실이냐 아니냐는 나중의 문제였다.


"길버트 황자의 목숨을 노린 것, 소문으로만 듣던 극상품의 골렘이 등장한 것, 그것이 메이거스로서의 계약을 행한 것, 때맞춰 등장한 마검..물론 적들 역시 이상한 것은 마찬가지지. 웨어울프와 오거를 비롯해서 말이야.."


반 수사관은 생각했다. 그 어떤 것보다 위험한 것은, 언제나 등 뒤의 칼날이었다고.


"아버지께 오늘 본 사실들을 전해드리게. 그리고 아버지를 제외한 사람은 그 누구에게도 그것을 알려서는 안되네. 오늘 누가 나를 배신하였는가를 잊지 말게"

"알겠습니다"

"그리고.."


반 수사관의 눈이 복잡하게 흔들렸다.


"..제국에 휴직계를 전하게"

"자작님?"

"한동안은 정말 자작으로 돌아가야겠군"


반 수사관은..아니, 반 자작은 자신이 무엇 하나 확신할 수 없는 상황임을 확신했다. 그렇기에 수도 내의 일에는 얽매일 수 없다는 것 역시도.


"..타국에 가시려는 겁니까?"

"저들을 추격하려 하네. 아마 다음 목표는 성국이 되겠지. 그 전에 잡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말이야"

"..위험합니다. 성국이 불신자들에게 얼마나 잔인한지는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렇다 해도 가야만 하네. 샤스포의, 그리고 동료들과 제국민들의 원수가 저곳에 있네. 하지만 나는 그 무엇도 해내지 못했고 할 수도 없을 테지. 나는 무력하고, 저들은 강하니까"

"그렇다면 저라도!"

"그렇기에, 나는 철저히 수사관이 되기로 했네. 힘으로 대적할 수 없다면, 적어도 모든 진상을 파헤쳐 제국에 전할 걸세"


라팔 경은 무언가를 항변하려 했지만 결국에는 입을 다물어버렸다.

어린 시절부터 보아온 자신들의 주인이었다. 얼마나 고집이 센 지도, 집착이 강한지도 잘 알고 있었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클락 가의 정체성인 지도 모를 일이었다.


"내 보좌관을 보았나?"

"..그 여자 말입니까? 병사들에게 인기가 많더군요"

"데리고 갈 걸세"

"네? 설마.."

"이상한 이야기는 하지 말게. 그런 이유가 아니니까"


차라리 라팔 경의 오해처럼 달콤 쌉싸름한 이야기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아쉽게도, 반 자작은 그럴 수가 없었다.

자신의 보좌관인 엠버..그녀야말로 지금 그가 가장 의심하고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과연 자네는 누구일까. 꼬리인가? 혹은 몸통인가? 그도 아니면..'


그리고 그 의심은, 어느 정도 확신이 되어 있었다.





*




마노 백작은 품 속에서 덜그럭이는 물건을 굴리며 생각에 잠겼다. 라탕카가 준 고블린의 무기였다. 길버트의 방패나 유라가 이번 싸움에서 사용한 뼈로 된 창처럼, 그를 비롯한 일행들 역시 무기를 받은 것이다.


허나 마노를 비롯해 다른 이들은 그 무기를 쓰지 않았는데, 루루가와 마노는 본디 맨손으로 싸우는 사람이었고, 마리는 무기보다는 재료가 필요한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라탕카는 그들의 순위를 미뤄두었고, 모든 사태가 종결된 지금에야 완성시켜 건내준 것이다.


다만 루루가나 마리와 마노의 사정은 조금 달랐는데, 마노는 애초에 지금 당장 필요한 무기를 받은 것이 아니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지금 당장의 싸움에서 이기기 위한 것이 아닌, 아주 먼 훗날을 기약하고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라탕카의 쓸데없는 배려가 아닌, 탄캄 그 자신이 직접 부탁해서 제작한 물건인 것이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건 아닌가, 그런 불안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탄캄과의 대화로부터 보이지도 않는 미래를 완전히 준비한다는 것은 만용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말의 뜻이 다가올 미래에 손놓고 기다리며 아무런 준비도 하지 말라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불안한 구석이 많았던 마노의 계획과는 다르게, 지금의 이 물건은 반드시 도움이 될 물건이었다.


물론, 가능하다면 이것을 쓸 일이 없는 것이 좋을 테지만..


"크륵. 어색하군"


루루가는 자신의 등에 짊어진 수많은 병장기들을 보며 머리를 긁었다.

마노가 부탁한, 그들 부족 모두가 쥘 수 있을 병장기들이었다.


"크륵. 진짜 우리를 해적으로 만들 작정인가?"

"맥 빠지는 소리를 하는군, 애초에 어제 있던 사건의 시작이 무엇이었다고 생각하나?"

"크르..이제와서 하는 말이지만 그런 게 정말 가능한가? 우리는 평생을 육지에서 살아왔는데"

"오히려 오크이기 때문에 가능할 지도 모르지. 적응력이야말로 자네들의 가장 두려운 점 아니던가"


루루가는 어색하다는 듯 시선을 돌렸다. 본래라면 적대관계일 터인 인간이 종족의 장점이니 뭐니 하는 이야기를 해본들 기괴함만이 늘어날 뿐이었다.

물론, 그 기괴함만큼이나 크게 와 닿는 말이기도 했다.


괴물을 어떻게 하면 잘 죽일수 있을 지를 궁리하는 것에 있어서는, 세상 어디를 통틀어도 인간이 최고일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어색한 기분이 전보다 더 강해져버렸지만 말이다.


"크르르르..모르겠군.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 지. 나로선 알 수가 없어..왜 우리를 도우려 하지? 나 역시 인간들끼리의 다툼은 알고 있지만..크르륵. 괴물과 손잡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어떻게 될 지 알지 않나? 대체 왜 그러는 거지? 우리에게 그런 가치가 있나?"

"글쎄..내가 그런 걸 알 필요가 있는가?"

"크륵. 설령 당신에게 이용만 당한다 할지라도, 우리에게는 납득할 만한 이유가 필요해. 하지만 당신은 최소한의 명분조차 내어놓질 않는군"

"명분을 내어놓은들, 내게는 입증할 방법이 없네"


마노는 순순히 답했다. 루루가의 미간이 모아졌다.

오히려 그런 태도가 불신을 낳는다는 것을 모르는 것일까? 하지만 루루가는 침묵했다. 말로 따진다 한들, 입만 아플 뿐일 테니까.

자신이 보아온 마노라는 작자는 그런 사람이었다. 일견 무엇이든 유들유들하게 넘어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무엇 하나 양보하지 않는 사람인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렇기에 믿을 수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물론, 그렇다 할지라도 간밤의 일이 없었다면 그를 믿는 일 따위는 없었을 테지.

그럼에도 별 다른 수는 없었으리라. 자신과 자신의 부족들은 어차피 제국 땅에서 살아갈 수 없을 테니까.

그러나 그를 믿고, 신뢰하는 일 따위는 영원히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등 뒤를 맡길 수 없는 아군만큼 신경 쓰이는 존재도 없었으니까.


'신뢰, 신뢰라..'


루루가는 지난날들의 일을 떠올렸다.

죽어버린 자신의 동생과, 살아가야하는 부족민들..원한과 두려움, 그것을 이겨내야만 한다는 책임감.

서로 등을 맞대고 싸우던 시간들과, 결코 자신을 버리는 일이 없었던 마노.


기본적으로 신뢰라는 것은 상대를 믿는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것은 나이를 먹을수록, 사람을 겪을수록, 높은 지위와 명예를 가질수록 덧없게..무겁게 변해간다.


고작 스물의 오크들..본디 수백에 이르렀던 오크들을 잃고 이제는 한 줌만이 남은 부족이지만 그렇다 한들 그것을 포기할 마음은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렇기에 더..그들의 희생으로 살아남은 자들이기에 더욱 그러하였다.


그렇기에 명분을 입에 담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무기와 안식처 따위의 물질 따위가 아니라, 그보다 더 안전하고 확신할 수 있는 무언가를 건네주기를..어리광을 부렸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가 적당한 변명을 늘어놓았다면, 루루가는 속는 척 그것을 믿었을 테지. 그리고 훗날 의심했으리라.


하지만 사실, 루루가는 알고 있었다. 상대방을 진정으로 믿게 해 줄 명분 따위는 그 누구도 줄 수 없다는 사실을.

그야 신뢰는 언제나 용기를 기반해야 하니까.

상대방을 믿는다는 것은, 언제나 불안을 떠안음과 동시에 그것을 이겨내는 행위였으니까.


"크르륵. 그렇다면 이곳에서 말하겠다. 마노 론디아르"


허나 그럼에도 루루가는 결정했다. 자신과, 부족민들의 운명을.


"무엇을?"

"나는, 오크족장 루루가는 당신을 믿겠다"


마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그것이 무슨 의미인가에 대하여.

그리고 오래가지 않아 깨달았다.

그것은 아무런 의미를 품지 않은, 순수한 호의를 담은 말이었다는 것을.


허나 때로는 수면 위로 떨어진 돌처럼, 너무도 단순한 말이 복잡한 파장을 일으키기도 하는 법이다.

마노와 같은 삶을 살아온 사람에게는 더더욱.


"..괜찮겠나? 외부인에게 부족의 운명을 걸어도? 심지어 우리는 자네 동생의 원수가 아니던가"

"크륵. 운명은 우리의 것이다. 당신에게는 걸지 않아. 그건 당신에게나 우리에게나 못할 짓이지. 하지만 당신이 우리에게 보인 호의를, 자비를..우리는 반드시 기억할 것이다. 동생에게는 미안하지만, 서로 죽이고자 했던 결과가 그것이었다면, 그 역시도 담담히 받아들일 것이다"


루루가는 말했다. 설령 당신이 우리를 이용하고 있다 해도 상관없다고.


그 모든 행위가 그 자신을 위한 것이며, 그의 호의라 여겼던 것은 모두 당신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할지라도.

그럼에도 자신들이 받은 용서를, 미래에의 약속을, 당신에게 받은 도움을 잊지 않겠노라고.


"..모르겠군. 그것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지?"


마노는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저들에게 보이고 있는 것은 단순한 호의가 아니었다.

루루가에게는 저들이 제국을 견제하기를 바라는 건 아니라 하였지만, 그것이야말로 마노의 진의였다.

바다라는 이름의 무한한 식량과, 각 종 섬들로 이뤄진 거주지가 있다면 저들은 분명 끝없이 증식하게 될 테지.


바다는 넓다. 그리고 종잡을 수 없다.


설령 제국이라 할지라도 그 모든 것을 파악할 수 없으며, 설령 파악했다 할지라도 바닷속의 거대한 괴물들을 무시하면서까지 대대적인 토벌을 하기도 어려울 터였다.


쫒을 수도, 찾아낼 수도, 대적할 수도 없게 한다는 점에서 바다는 가장 이상적인 은신처였다.


필시, 오크들은 번창할 테지. 400년 전 마왕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왔을 적의 그들처럼.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자신의 목적 역시도..


"내가 자네였다면, 그런 말 따위는 하지 않았을 걸세. 신뢰란 덧없는 것이지. 내가 누군가를 믿는 것도, 그 누군가가 나를 믿어주길 바라는 것도 무의미한 일이야. 차라리 묻어버리지 그랬나. 자네가 느끼는 고마움이나, 기쁨 따위는 묻어버리고 모른 척 살아가지 그랬나"

"크르륵. 그래서 그렇게 대하는 건가? 당신이 그토록 애지중지하는 그 아이에게도 말이야"


마노는 입을 다물었다. 표정을 굳혔다. 딱딱한 얼굴로 정보를 감췄다.

하지만 루루가는 보았다. 그의 눈빛을, 말하지 않아도 들리는 진심을.


"크륵. 상관없어. 난 당신이 아니니까"


그렇기에 그는 웃을 수 있었다.


"그러니 믿을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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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계약 갱신 21.06.17 16 0 14쪽
» 루루가의 약속 21.06.16 17 0 13쪽
44 진실의 편린 21.06.15 15 1 14쪽
43 파라크 21.06.14 18 0 17쪽
42 아크롭스 21.06.13 18 0 11쪽
41 고골 21.06.12 18 0 12쪽
40 칠채색의 골렘 21.06.11 20 0 14쪽
39 성좌 21.06.10 19 0 13쪽
38 각성 21.06.09 19 0 13쪽
37 올가 21.06.08 19 0 13쪽
36 뼈창 21.06.07 19 0 16쪽
35 감자 21.06.07 18 0 14쪽
34 진격 21.06.06 17 0 14쪽
33 골렘 병단 21.06.05 18 0 13쪽
32 재회 21.06.04 15 0 14쪽
31 추격 개시 21.06.03 15 0 16쪽
30 유라 란가타 21.06.02 17 0 14쪽
29 유라 란가타 21.06.01 20 0 18쪽
28 연금술사 21.05.31 20 0 15쪽
27 연금술사 21.05.31 21 0 7쪽
26 고블린 21.05.30 20 1 7쪽
25 고블린 21.05.30 23 1 7쪽
24 마경 21.05.29 22 1 13쪽
23 유령 21.05.28 21 1 14쪽
22 오크 족장 루루가 21.05.27 21 0 14쪽
21 기억 속의 늑대 21.05.26 20 0 14쪽
20 유령과 반요정 21.05.25 23 0 13쪽
19 샤스포 미트라예즈 21.05.25 33 0 16쪽
18 수도 탈출 21.05.24 24 1 13쪽
17 수도 탈출 21.05.23 26 2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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