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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비의 서재

당신을 위한 무덤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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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빛
작품등록일 :
2021.05.13 11:19
최근연재일 :
2021.07.17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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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글자수 :
441,5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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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25 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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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유령과 반요정

DUMMY

지도상으로는 티탄 숲으로 기록되어 있는 울창한 숲.


하지만 피나르 사람들에게는 피나리안 숲이라 불리는 곳에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사흘이 지난 후였다. 최대한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협곡이나 낮은 산지를 골라 온 탓이었다.


물론, 정작 속도가 느리면 안되기에 최대한 직선에 가까운 경로를 고르기는 했다. 덕분에 사흘 내내 먹은 것이라고는 찬물에 섞은 곡물가루와 마른 고기만 먹어야 했지만..

그나마 곳곳에 맑은 샘이 있어 물 만큼은 괜찮게 마셨지만 체력이 온전할 리는 없었다.

물론, 그것은 나와 마리에 한정된 이야기였지만 말이다.


"..괴물 놈들"


나 역시 수사관으로서 수년 간 단련되어 체력에는 나름 자신이 있었는데 저 녀석들과 함께 다니다보니 자신감이 바닥으로 치닫고 있었다.


이미 오래 전에 뻗어 마노 백작에게 업혀있는 마리에 비하면 훨씬 낫긴 하지만 애초에 그녀는 비교대상이 아니었다. 사람과 짚신벌레를 비교할 수는 없으니까.


"후후..좀 더 체력을 키우는 게 어때 샤스포 수사관?"

"..오러 마스터는 닥쳐. 나는 패스파인더 역할도 하고 있다고"


나는 눈앞에서 반짝이는 황녹 색의 불빛을 바라보며 이를 갈았다. 차라리 이걸 할 줄 몰랐다면 체력이 덜 빠졌을 텐데..


"그렇게 말해봤자 나한테는 보이질 않아서 실감이 안 되는데?"

"다른 사람에게도 보이게 하려면 얼마나 힘이 드는 줄 알아?"


나는 능글맞게 대답하는 길버트를 보며 으르렁거리듯 물었다. 아무리 찬밥신세라지만 일국의 황자에게 너무하다 싶을 수도 있겠지만 이제는 시큰둥한 느낌이었다.

탈영에 배신까지 한 마당에 황족에게 말 깠다고 큰일이야 나겠는가.


"흠..일단은 쉬는 게 좋겠군. 마리가 멀미를 하는 모양이야"

"말로만이라도 좋으니까 나를 위해서라는 말도 좀 해주지 그래?"

"음..아무리 그래도 내 나이 또래에게 그런 말 하는 건 좀,,"

"..맞는 말이군"


나는 혀를 차며 주저앉았다. 호흡이 거칠고 다리가 저릿했다.

이래뵈도 제국에서 손꼽히는 저격수이니만큼 인내심에는 일가견이 있다고 생각했는데..아무래도 그건 너무 인간 위주의 생각이었던 것 모양이다.

괴물들에게는 괴물의 기준이 있는 모양이니까.


"..언제 그걸 잡아온 거지?"

"방금"


나는 살짝 얼이 빠진 채로 어디선가 노루를 잡아온 유라를 보고 있었다. 언제 사라졌던 거지? 아니, 언제 잡아온 거지?


"손질 좀 해줘. 사냥꾼 출신이라며"

"샤스포 수사관..당신 사냥도 했었던 거야? 어쩐지 저격술이 뛰어나더라니만"


아마도 유라는 내가 마이크였던 시절을 말하는 거겠지만 길버트가 그것을 알리는 만무했다.

애초에 그는 우리들 사이에서 어디까지나 임시동행 취급을 하고 있었고, 그런 그에게 내 부활에 대해 알려줄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노루를 옮기려다 헛웃음을 흘리며 그만두었다.


"응? 왜 그러지?"

"..보통은 맹수를 피해 좀 떨어진 곳에서 손질하는데..의미가 없다 싶어서"

"음..그렇군"


길버트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에 있는 사람들이 고작 맹수에게 당할 리도 없었고 감당하지 못할 맹수라면 조금 떨어진다 한들 의미가 없을 테니까.


나는 노루의 배를 갈라 피를 받았다.

마이크였을 때와 손 크기가 달라 조금 움직임이 서툴렀지만 영 못써먹을 정도는 아니었다. 굳은살이 다르게 박혀 있어서인지 감각이 좀 헷갈리긴 했지만..


"능숙하군"


길버트가 그런 나를 보며 감탄했다. 하기야 아무것도 모르는 그가 보기에는 그렇게 보일 터다. 그가 본 것이라고는 오직 황성의 일부와 창밖의 수도가 전부였을 테니까.

물론 그렇다고 내 손질이 서툰 것도 아니었지만..


"훈연을 시키는 게 좋겠어. 마른 고기는 질렸으니까"

"추격자는 어쩌지?"

"흔적은 다 지웠고, 어차피 국경지대의 수비대들은 이미 마법으로 우리 인상착의를 전달받았을 거야. 모든 국경을 철통같이 막진 않겠지만 이미 경계는 강화되었다고 봐야지"

"음.."


길버트는 어딘가 아리송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뭐가 문제인거지? 나는 그의 표정을 살피다가 그가 내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새삼 그가 다 자란 청년처럼 보여도 속은 철부지 어린아이라는 것을 되새겼다.


"여기서부터는 빨리 가봤자 의미가 없으니까 배나 채우자는 뜻이야"

"아하"


나는 금방 상할 것이 분명한 내장들을 손질해 직화로 올리고 나머지는 적당히 잘라 나무에 걸어 훈연하기 시작했다. 고기 위로 하얀기름이 녹아 송글송글 맺히기 시작했다. 나는 소금을 조금 뿌렸다. 얼마 없는 소금이지만, 나는 이 근처에 암염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어째서지?


나는 문득 든 의문에 잠시 생각했다. 나는 그제야 이 근처가 마이크의 고향이라는 것을 떠올릴 수 있었다.


"..늑대들이야"


유라가 눈을 빛내며 칼을 뽑아들었다. 나는 손을 휘저어 그것을 저지했다. 유라는 의아하다는 눈빛이었다.


"이 숲에 유일한 맹수들이야. 개체수도 적고 번식력도 약한 녀석들이지. 그래서 저 녀석들이 죽어버리면 짐승들이 끝도 없이 불어나버려..그러다가 먹을 것이 없어지면 마을을 습격하고..늑대들은 오히려 사람들을 공격하지 않아서 안전해"


나는 어딘가 그리운 눈빛으로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회색 늑대들이다. 사람 허리보다 높은 체고의 짐승들이 일제히 어디론가 달리고 있었다. 몰이사냥이었다.


"하얀 늑대?"


유라가 무심코 내뱉은 말에 나는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렸다. 아직 살아있었던가?


"..크군"


마노 백작은 어딘가 질린듯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른 늑대들의 몇배는 될법한 크기의 하얀 늑대.

한때는 따돌림의 대상이었던, 그리고 지금은 무리의 우두머리가 된 녀석이었다.


"..카리안"


나는 무심코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 순간, 그의 시선이 이쪽을 향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순간적으로 푸르게 빛난 그 시선이 짧게 머무르다 사라진다.


"..30년 만인가? 아니..더 된 것 같군"

"..생각보다 나이가 많으셨던 모양이군요. 샤스포 수사관님"


나는 갑자기 존칭을 붙이기 시작하는 길버트의 말을 흘려들으며 웃었다.





*





식량의 수급이 끝나자 우리는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제국의 영역이니만큼 오크와 같은 괴물들은 없을 테지만 숲에 있는 괴물이 오크만 있는 것은 아니니까.


숲에서 밤을 보내면 안된다는 사실은 어린아이들도 알고 있는 상식이었다.


"외눈 까마귀들이야. 다들 물건은 똑바로 챙겨둬"


나는 탐욕스럽게 우리를 바라보는 외눈 까마귀의 무리를 지나며 말했다.

언제봐도 꺼림칙한 녀석들이다. 다행히 이쪽 사람들과의 힘의 차이를 아는 것인지 덤벼들진 않았다.

숲의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다행히 어두워지기 전에 나올 수 있었던 모양이다.


'이 넓은 숲을 하루만에 주파한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지만..'


그래도 아슬아슬하긴 했던지 이미 해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저 멀리 보이는 능선 너머로 노을의 단말마가 녹아내린다. 멀지 않은 곳에 불빛이 보인다.

누군가 불을 피우고 있는 모양이다.

마을이라고 하기에는 작은 것 같고 모닥불보다 조금 큰 규모인 것 같다. 아마 야영을 하고 있는 것이겠지.


"대담한 사람들이네"


유라는 길 옆에 바로 터를 잡은 그들을 보며 그렇게 일축했다. 도시 내에서야 수사관들이 있으니 치안이 좋지만 변방의 시골이나 인적없는 이런 곳은 다르기 때문이다.


"좀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는 게 낫겠지?"

"우리가 얼굴 밝히기는 좀 애매한 처지이긴 하지"


내가 동의를 구하자 길버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황자를 길버트라 부르는 게 무척이나 어색하지만 이런 곳에서 황자 운운 하는 것보다야 그냥 이름으로 부르기로 했다.


물론, 그건 마노 백작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짜고짜 이름으로 부르는 게 좀 격식이 없는 것 같지만 이 근방에서 피나르나 론디아르라는 성은 너무 유명해서 탈이었으니까.


"땔감을 주워오겠습니다"

"..마리..내가 조금 전에 숲에 들어가면 안된다고 알려준 것 같은데?"


유라의 물음에 마리는 아차 하는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나는 여전히 마리라는 여자를 이해하지 못했다. 상식이나 지식이 부족한 건 아닌 것 같은데 정작 그것이 몸에 체득되지는 않은 느낌이랄까?


"아니..마리는 괜찮을걸세"


그러나 그것을 막아선 것은 마노였다. 나는 그 말에 어째선지 위습의 힘에도 감지되지 않았던 그녀를 떠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자네도 마찬가지겠지 샤스포?"


나는 습관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잠시 생각하다 이번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그가 묻고 있는 대상은 샤스포로서의 내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위습이군"


비록 그것이 정령의 부스러기일지언정, 숲과 산의 유령들을 몰아내는 데에는 충분할 터였다.

내가 아직 마이크일 적에, 그리고 마이크가 사냥꾼이었을 적에는 그것을 이용해 밤 사냥을 벌이곤 했었으니까.

그 이후에는 밀수의 수단이 되어버렸지만..


"그러고 보니 당신도 가능한 거 아닌가? 아무리 위습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당신 역시 함께 산을 넘어 밀입국 한 거잖아?"

"아쉽게도, 여기서부터는 불가능하네"

"..길버트 당신은?"

"음..오러가 유령을 막아주지는 못해서.."


나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오러라는 녀석은 분명 마법이나 성법조차 벨 수 있는 힘이 있었지만 어째선지 유령같은 것에는 속수무책이라는 사실을 떠올린 까닭이다.

형태없는 그것들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에 깃들고 마는 이유에서겠지.


"까마귀 놈들이 문제인데.."


나는 결국 한숨을 푹 쉬고는 마리를 보았다. 그러고 보니 조금 전 그녀는 혼자서 뗄감을 주우려 하지 않았던가?


'어쩌면 상식이 부족한 게 아니라..'


문득, 그녀에게는 그녀만의 상식이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저 사람들..아까 그 사람들 아닌가요?"


나는 마리의 질문을 듣고는 그녀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조금 전 길 바로 옆에 당당히 자리를 차지하던 이들이었다. 몸 전체를 커다란 천으로 감싸 숨긴, 어딜 봐도 수상쩍은 사람들..

새삼 우리들이 수배된 입장이 아니라하더라도 저 사람들과 합류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크다"


그리고 나는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 사람..사람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큰 거 아닌가? 거의 3미터는 되어 보이는데?


"..그러고 보니 저 사람들..제법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도 잘 보였었죠?"

"..일단 무시하자"


나와 마리는 암묵적으로 저 사람과 멀어지는 것에 동의했다. 그야 저렇게 키가 큰 사람이 있을수도 있겠지만 저런 사람이 열 명이 넘게 모여 있는 것도 이상한 일 아니겠는가.

가능성이 전혀 없지야 않겠지만, 나는 어딘가 불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

"왜 그래 마리?"

"..눈이 마주친 것 같아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긴장하며 허리춤의 소총을 쥐었다.

반사적으로 마리를 뒤로 당기며 그를 경계하는 찰나, 나는 그가 숲 속 깊은 곳으로 사라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빨리 줍고 가자. 불안하니까"

"..그러는 게 좋겠네요"


우리는 땅에 떨어진 나무들을 줍기 시작했다.

나는 위습을 이용해 지면을 밝혔다. 달이 뜨지 않은 밤이라 어두운 탓도 있었지만, 유령들에 대한 경고이기도 했다.


과거를 통틀어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기는 하지만 나는 그들이 방심을 틈타 녹아든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단 한번의 방심이 어떤 결과를 낳는가에 대해서도..


"..어둡군"


적막한 밤이다. 장막과도 같은 침묵이 숲속을 맴돈다.

드물게도, 바람이 불지 않는 날이었다. 파도처럼 일렁이는 나뭇결들만이 살아있는 생물처럼 부비적거린다.

우리는 양 손 가득 뗄감을 주웠다. 딱히 담을만한 것이 없어서이기도 하고, 만약 부족하다면 밤 사이에 다시 한 번 들러야 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언제나 그렇듯, 부족한 것보다야 남는 것이 나았다.


"새둥지가 있네"

"그건 왜요?"

"부싯깃으로 쓸만할 거야. 빈 둥지 같으니 써도 괜찮겠지"


나는 마른 잎으로 이뤄진 새둥지를 찾아 그것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아니..뻗으려 했다.


"..왜 그러시나요?"

"..생각해봤는데 말이야"


나는 조금 전 깊은 숲 속으로 사라진 사람에 대한 것을 떠올리고 있었다.

본능과도 같은 직감이었다. 순식간에 등골이 뻣뻣해지고, 목뒤가 서늘해지는 듯한 감각.

이성적인 추리는 그 이후에 찾아온 것이었다.


내가 아직 마이크였을 적에..굳이 한 밤중에 이 숲을 찾은 적이 있던가?


"..땔감으로 양손이 꽉 찬 지금이야말로 기습하기에는 딱 좋다고 생각하지 않아?"

"..."


그 순간 어디선가 반짝이는 무언가를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무언가 잘못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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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계약 갱신 21.06.17 16 0 14쪽
45 루루가의 약속 21.06.16 17 0 13쪽
44 진실의 편린 21.06.15 15 1 14쪽
43 파라크 21.06.14 18 0 17쪽
42 아크롭스 21.06.13 18 0 11쪽
41 고골 21.06.12 18 0 12쪽
40 칠채색의 골렘 21.06.11 20 0 14쪽
39 성좌 21.06.10 19 0 13쪽
38 각성 21.06.09 19 0 13쪽
37 올가 21.06.08 19 0 13쪽
36 뼈창 21.06.07 19 0 16쪽
35 감자 21.06.07 19 0 14쪽
34 진격 21.06.06 17 0 14쪽
33 골렘 병단 21.06.05 18 0 13쪽
32 재회 21.06.04 15 0 14쪽
31 추격 개시 21.06.03 15 0 16쪽
30 유라 란가타 21.06.02 17 0 14쪽
29 유라 란가타 21.06.01 20 0 18쪽
28 연금술사 21.05.31 20 0 15쪽
27 연금술사 21.05.31 21 0 7쪽
26 고블린 21.05.30 20 1 7쪽
25 고블린 21.05.30 23 1 7쪽
24 마경 21.05.29 22 1 13쪽
23 유령 21.05.28 22 1 14쪽
22 오크 족장 루루가 21.05.27 21 0 14쪽
21 기억 속의 늑대 21.05.26 20 0 14쪽
» 유령과 반요정 21.05.25 24 0 13쪽
19 샤스포 미트라예즈 21.05.25 33 0 16쪽
18 수도 탈출 21.05.24 24 1 13쪽
17 수도 탈출 21.05.23 26 2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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