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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님의 서재입니다.

Mr. 할리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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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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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20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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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쪽

Christmas Cargo. (8)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BIFF가 커지면 커질수록 조직위원장과 집행위원장의 권력이 커질 테고, 권한이 많아질수록 문제가 벌어졌을 때 개인적인 차원의 문제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엉뚱하게 영화계까지 불똥이 튑니다. 내 스스로 당당하고 떳떳해야 권력에 대해 옳은 소리를 할 수 있고, 그들의 외압으로부터 저항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것 따위 없다.

때가 되어 그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이 그 자리로 가게 되는 것 뿐.

20억 예산으로 운영되던 부산국제영화제가 영화의 전당이 완공된 이후부터 120억 원으로 예산이 껑충 뛴다.

단 10일 간 열리는 영화제 예산이 그렇다.

그 외에 영화의 전당 운영비와 부산국제영화제 조직위 자체 예산은 별개다.

매년 부산국제영화제 산하에 이런 저런 조직들이 계속해서 생겨나게 된다.

공익사업 법인이 마치 영리목적 법인처럼 문어발식 확장을 한다.

일자리 늘어나니 좋은 것 아니냐고 할 수도 있다.

투명하고 합리적인 이유로 만들어지고, 또 운영되면 누구도 뭐라고 할 수 없다.


‘그 놈에 끼리끼리 문화가 문제지.’


영화제의 독립성 보장이라는 화두에 가려진 문제다.

사적인 짬짬이 직원채용, 예산의 부절적한 집행, 전시행정 조직 신설 등.

시간이 가면서 영화제 명성만큼의 필요성과 내외부적인 요구에 따라 몸집이 조금씩 커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한국의 영화제들은 마치 한강의 기적이라도 일구려는 것인지, 몇 년 만에 급격하게 또 가시적으로 커져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다.

이제 12년 된 영화제가 수십 년 전통의 국제영화제의 외형적 규모를 거의 다 따라왔다.

화려하다.

초청작과 샐럽 그리고 수준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겉으로 보이는 영화제가 그렇다.


- 이러다 빛 좋은 개살구 된다. 붕 뜨지 말고 내실을 기하자.


그 같은 충고와 우려를 표현하는 영화인은 없다.

찬물을 끼얹는 것이라 되레 비난을 받을 수 있으니까.

잘나가는 영화제를 시샘한다는 오해를 살 수도 있다.

이전 삶에서 류지호는 국제영화제에서 자원봉사를 제법 했다.

초창기에는 재밌고 보람도 있었다.

회가 거듭될수록 실망하게 되었다.

조직위원회가 지나치게 관료화된 것이라든가.

폐쇄적이고 투명하지 않은 끼리끼리 문화에 신물이 났다거나.

어떤 조직이든 시간이 지나면 관행이라는 것이 만들어진다.

관행은 편법과 무사안일주의와 밀접하다.

관행 중 상당 부분이 비리로 이어지게 된다.

감시와 견제를 받지 않는 조직은 썩게 마련이다.

2억짜리 조직이든.

600조짜리 기업이든.

공평하게.


“안에만 오래 있다 보면 뭐가 문제인지 모를 때가 있습니다. 부산국제영화제를 세계적인 영화제로 키우겠다는 순수한 열망으로 여기까지 온 것은 칭찬받아 마땅합니다. 그런데 이젠 순수한 열망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노련하고 세련된 조직 운영과 관리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영화제는 세계적인데, 조직 운영을 쌍팔년식이면 되겠습니까? 충무로처럼 좋은 게 좋은 거란 식으로 하면 되겠습니까? 본인들은 예전 선배들과 다르다고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주장했으면서?”


집행위원장은 왜 이 시점에서 류지호가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자신이 보기에 부산국제영화제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으니까.

문제가 없다고 여기는 것.

그것이 문제인 줄 모르고.

류지호 정도 되는 투자자는 돈의 규모와 쓰임새를 보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대충 가늠할 수가 있다.

영화제의 외형은 날로 화려해지고 있다.

좋은 영화를 초청하기 위한 예산도 그 만큼 넉넉해지고 있다.

해외 유명 감독과 배우를 초대하기 위한 명성도 쌓여간다.

한편으로는 부산시의 영화제에 대한 영향력도 커지고 있다.

지원한 만큼 발언권도 세지니까.

영화의 전당이 완공되면 부산국제영화제는 부산시와 수평적 관계에서 수직적 관계로 완전히 관계가 변하게 된다.

영화제 독립성을 주장하는 것은 정당하다.

한 편으로 스스로 독립성을 담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를 위해 시민과 영화계의 지지는 필수다.

지지를 받기 위해서는 투명한 회계와 운영이 우선되어야 한다.

문제가 생기고 나서 다 그렇게 하는 줄 알았다.


“문제라는 생각을 못했습니다.”


소용없다.

책임을 져야 할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 무지도 죄다.


❉ ❉ ❉


- 부산에 할리우드 영화팀 들어왔던데, 뭐 찍는지 아는 사람?

└ 류지호 영화 찍으러 왔답니다.

└ 전쟁영화 찍는답니다.


- 센텀시티에 갔다가 우연이 봤네요 배우는 못 봤지만....

└ 가온호텔에 묵고 있나 봄?

└ 합천 영상테마파크가 다음 달까지 일반인 출입 안 받는답니다.

└ 625 영화라고 하던데, 합천이면 맞나봄.


낮 기온이 영상 8도까지 올라갔지만, 체감하기로는 제법 쌀쌀했다.

그럼에도 많은 팬들이 센텀시티 가온호텔 주변을 얼쩡거렸다.


“배우는 여기서 안 묵는다고요?”

“여주 가온타운에서 지낸다고 하네요.”


<Christmas Cargo> 배우들은 출입자가 철저하게 관리되고 있는 여주의 가온타운 내 전원주택을 숙소로 제공 받았다.

따라서 팬들은 발길을 돌려야 했다.


“배우 보러 대전에서 왔는데....”


무명 배우든, 얼굴을 조금 알린 중고 신인이든.

간절하게 필요한 것은 단 한 번의 도약대가 되어줄 영화다.

무비스타까지는 아니어도 안정적인 배우 직업세계로 입성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예기치 못한 한 순간의 도약!

대중은 물론이거니와 업계 관계자들의 이목을 확 끌어당길 수 있는, 그 단 한 번의 결정적인 기회가 필요하다.

엔터테인먼트 산업은 유행의 흐름에 매우 민감하다.

작은 기회조차 맛보지 못하는 이들이 수두룩한 것이 현실이다.

그런 면에서 조현석은 운이 매우 좋은 편이었다.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Ⅲ>에서 스타로 향하는 기회를 잡았고, 영화 <늑대의 유혹>으로 데뷔했을 때 투톱 주인공인 모델출신의 친구와 꽃미남 배우 신드롬에 탑승했다.

이후 한류스타 여배우와 멜로영화를 찍고, 설형기 배우와 <열혈남아>를 찍으며 다음 단계로 도약하는가 싶었다.

그러나 현실은 결코 녹록치 않았다.

함께 모델 생활을 하다가 배우로 넘어온 친구가 스타로 부상하는 동안 조현석은 대중들의 뇌리에서 멀어져만 갔다.

매년 활발하게 영화와 TV드라마를 오가며 활동하고 있지만, 그가 가진 잠재력에 비해 스타성은 날로 희미해져만 갔다.

큰 키와 남성적인 마스크, 괜찮은 목소리와 나쁘지 않은 기본기.

그 연령대 배우들과 비교해 모자람이 없었다.

그런데 <Christmas Cargo> 출연을 계기로 난데없이 연기력 논란이 붉어졌다.

본인과 소속사 입장에서는 몹시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류지호 신작 조현석 캐스팅. 과연 괜찮을까. 왜 류지호는 조현석을 선택했나.]


포털의 영화센션에서 조현석 캐스팅 논란, 연기력 논란이 붉어졌다.

관련 뉴스 댓글란이 논쟁으로 폭주했다.

썩은 고기를 주워 먹는 하이에나처럼 연예부 기자들 또한 가십성 기사를 봇물 터진 것처럼 쏟아냈다.


- 조현석은 남자답게 생기긴 했는데. 연기는 아니지 않나?

└ 진짜 개나 소나 연기.... 지겹다 지겨워.

└ 조현석 정도면 연기 잘하는 거 아님?

└ <열혈남아>에서 설형기한테 안 밀리던데?

└ 다른 영화 본 거 아님요?

└ 비주얼은 영화 백편 찍어도 모자랄 게 없는데....

└ 비주얼뿐이지 배우가 연기가 중요하지 그럴 거면 모델을 하던가.

└ 여러분 감독이 류지호에요 아무 생각 없이 캐스팅했겠어요?

└ 혹시 소속사가 찬인가? 송라원 있는 회사.

└ 딴 회사에요.

└ 류지호 믿어 봐요. 발 연기 하는 배우는 벼랑 끝까지 몰고 가서 밀어버릴 거임.

└ 류지호는 현장에서 배우한테 연기가지고 이러쿵저러쿵 안 하는 스타일.

└ 완벽주의자라던데...??

└ 내 친구가 배우임.


춘사영화제에서 <열혈남아>로 남우조연상을 수상한 조현석이다.

그럼에도 벌써부터 연기력 논란이 일고 있다.

함께 캐스팅 된 유진우 역시 마찬가지로 연기 부분이 지적되고 있다.

공교롭게도 둘 모두 모델 출신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 부디 한국 배우들이 류지호 영화 안 망쳤으면 좋겠다.

└ 그러게요. 조커 역할한 배우도 나오고 제라드 깁슨도 나온다고 하던데.

└ 차라리 <늑대의 유혹> 동우 오빠 캐스팅하지.


때 아닌 연기론 논란과 함께 한국 네티즌들의 감독놀이 혹은 캐스팅 디렉터 놀이도 활발했다.

각자 한국의 배우들로 <Christmas Cargo> 캐스팅 안을 만들어 올렸다.

영화의 스토리도 모른 채.

이런 영화팬들의 반응이 이상한 것은 아니다.

한국배우들의 할리우드 진출 러시를 두고 우려하는 시선을 반영한 것이다.

괜히 들러리나 서다 오지 않을까 하는.

혹은 한국 배우들의 연기력에 할리우드가 실망하지는 않을지. 네티즌들의 노파심이 포털 영화섹션에 고스란히 반영되고 있다.

<Christmas Cargo>에 캐스팅된 한국의 두 배우 소속사는 나름 중견급 매니지먼트다.

방송과 영화 분야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배우 10여 명이 소속되어 있다.

주연급 배우도 있고, TV 드라마를 주로 하는 관록 있는 배우도 소속되어 있다.

그런 만큼 다양한 캐스팅 제의가 들어온다.

그런데 류지호의 영화는 판 자체가 아예 다른 차원이다.

화려한 각종 국제영화제 수상기록과 오스카 수상자라는 이력.

지금까지 직접 영화를 연출해 망한 기록이 전무한.

제작하면 최소한 중박인.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의 오너이기도 한.

월드와이드 박스오피스 10위에 영화를 랭크 시킨 전적이 있는 세계적인 영화감독이 제작하는 할리우드 영화다.

소속사에서는 <Christmas Cargo> 이후 두 배우의 몸값에 대해 벌써부터 주판을 퉁기고 있다.


“현석아, 좋은 쪽으로만 생각해. 류지호 감독님이 비행기 티켓까지 보내는 성의를 보이면서까지 캐스팅 한 거 잖아.”


JHO Pictures가 두 한국 배우에게 오디션을 보러오라며 항공권과 숙소를 제공한 바 있다.

그때 소속사가 얼마나 난리가 났었는지.

사실 할리우드에서는 그리 특별한 대접이 아니었지만.


“아직도 제가 주인공병 걸려있는 것 같으세요?”

“그런 게 아니구....”

“욕 안 먹게 잘할게요.”

“하긴 감독이 누군데. 류지호 감독님이 어련히 잘 알아서 하실까.”

“의외로 감독님은 연기가지고 뭐라고 안 하세요.”

“에이, 설마? 류지호 감독님 정도 되면 이미지가 좀 안 맞는 것 같고, 발 연기하는 배우라도 데려다가 연기할 줄 아는 배우로 만드는 사람 아니겠냐? 네가 캐릭터 분석을 잘 못해서 매치가 안 되어도 잘 이끌어 주시겠지.”

“연기 가지고는 뭐라 안 하신다니까요. 주로 철학, 심리, 정신분석 같은 이야기를 하시지. 처음에 전쟁영화가 아니라 <세븐> 같은 심리스릴러 영화 찍는 줄 알았다니까요.”

“송라원 배우가 스승님이라고 한다며?”

“진우가 미국에서 엄청 고생했어요. 연기 때메.”

“진우가? 그 놈 연기는 충무로 감독들이 다 알아주는데?”

“어린놈이 벌써부터 자신만의 쪼가 박혀있다고. 따로 불려가서 엄청 혼나고 그래요.”

“진우가 쪼가 있어?”

“감독님이 보시기에는 그런가 봐요.”

“너한테는 별 말 없고?”

“만날 똑같죠. 뭐.... 스타 되고 싶냐 배우 되고 싶냐. 그에 따라서 연기를 해라.”

“푸하하하.”


많은 사람들이 조현석에게 오해하는 부분이었다.

스타병, 배우병이 들었다는 루머다.

사실 드라마로 막 떴을 때는 그런 병에 걸렸던 적도 있긴 했다.

영화로 넘어와서 그 생각이 송두리째 바뀌었지만.

20대 초반까지만 해도 소위 어깨에 뽕 좀 넣고 다녔던 조현석이다.


“감독님이 촬영 들어가면 사람이 백팔십도 확 바뀐다는데 잘하고 있는 거지?”

“그럼요. 말로만 들었는데, 정말 촬영현장이 무슨 자동차 만드는 공장 같아요. 정확하게 착착.”

“철두철미. 완전무결. 할리우드 현역 감독이 오죽하겠냐?”

“한국에서 격년으로 영화 찍으시잖아요.”

“최대한 감독님께 잘 보여 놔. 또 아냐. 나중에 널 원톱으로 해서 영화 하자고 하실지.”

“꿈 깨세요. 감독님은 할리우드 아무나 안 데리고 가신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조현석이 시나리오로 시선을 돌렸다.

소속사 대표는 더는 방해하지 않고, 자리를 비켜주었다.


“......”


조현석이 시나리오를 들춰보았다.

오로지 자신과 유진우에게만 전달된 대본.

<Christmas Cargo>의 대본 중에서 단 두 권만 제작된 한글 대본이다.

조현석이 넘긴 페이지에는 첫 문장부터 범상치 않았다.

대규모 전투씬이다.

할리우드 영화라서 그런 것인지 몰라도, 아이오와 로케이션 촬영 스케일은 역시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전부 사용하는 것인지 의심이 갈 정도로 온갖 촬영 장비를 쌓아놓고 촬영했다.

배우 개개인에게 캠핑카를 줬다.

메인 스태프만 200이 넘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언제 또 이런 경험을 해 보겠냐....?”


<열혈남아>로 남우조연상을 수상하고 나서 다짐했었다.

붕 뜨지 말자고.

자신과 유진우는 영화에서 주로 전쟁씬에만 등장한다.

드라마적인 분량은 적었다.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단역보다는 비중 있는 소위 ‘조단역급’ 배역을 맡았다.

처음 대본을 일고 느낀 것이지만.

류지호 감독의 시나리오 지문대로 영화를 찍는다면, <라이언 일병 구하기> 저리 가라할 영화가 나올 것 같았다.

시나리오와 함께 스토리보드 북도 세트로 받았다.

조현석은 시나리오를 읽을 때마다 스토리보드와 비교하면서 봤다.

이번에는 류지호가 따로 보내 준 릴 재본 된 책자를 집어 들었다.

장진호 전투부터 흥남철수 이후까지 역사적인 사건을 요점과 핵심만 추려 정리한 내용이 담겨 있다.

또한 주요 인물들의 일생이 에세이형식으로 담겨 있다.

류지호가 직접 정리한 내용이란다.

조현석은 자신의 배역이 시작되는 페이지를 찾았다.

출생년도, 가족 구성원, 25살 까지 살면서 경험했던 주요 사건들, 성격부터 행동, 버릇, 취향, 전투력, 말투 등 아주 세세한 것까지 적혀 있는 캐릭터 분석 요약본이었다.


‘할리우드는 이런 것까지 세세하게 적는구나.’


할리우드 영화판에서는 모두가 이렇게 하는 줄 알았다.

나중에 미국 현지 코디네이터로부터 듣기로는 류지호만의 특별함 중 하나였다.

이런 캐릭터 에세이, 풀 스토리보드, 현장 편집은 할리우드에서 오직 류지호 감독만 하는 작업 스타일이라고 한다.

알프레드 히치콕이나 리드 스콧 감독이 류지호보다 훨씬 더 유명한 스토리보드 신봉자였지만.

이런 일련의 사전작업들이 2010년대로 넘어가면 더 이상 류지호만의 특별함이 아니게 된다.

할리우드에 진출하는 한국 출신 감독이라면 모두가 그렇게 하기 때문이다.

이미 충무로에서 그렇게 작업을 하는 감독들이 늘어나고 있다.

UCLA 영화연출 전공과정, 한국의 몇몇 연극영화과에서는 류지호의 작업방식을 수업에서 가르치기도 한다.

암튼 조현석에게 전달된 자료집과 에세이는 한권의 소설책 두께와 맞먹었다.

<The Killing Road>부터 해오던 일이기에 류지호의 사단은 딱히 감흥이 없었다.

배우들은 달랐다.

류지호의 철저한 준비성과 명확한 캐릭터 구축에 놀란다.

처음 류지호와 작업하는 할리우드 배우들조차 프리프로덕션에서부터 무한한 신뢰를 보낼 수밖에 없다.

이렇게 철저하게 준비하고 들어가는데 영화를 망칠 리가 없기 때문에.

안 되는 것이 없다는 할리우드라는 꿈의 공장에서는 더더욱.

암튼 조현석은 촬영에 들어가기 직전까지 센텀시티 가온호텔에 칩거하다시피 했다.

호텔 객실에서 릴 재본 된 책자를 읽고 또 읽었다.


“관객들에게 눈부신 십대 청춘스타로 다가왔다가 나이 들어 사라지는 배우가 있는가 하면 클루니처럼 처음부터 원숙한 이미지로 다가와 늙어가며 더욱 빛을 발하는 배우가 있어. 우리 직업의 한계는 대중들이 결정하지만. 자신의 삶과 직업세계에서 방향성은 본인이 결정하고 본인이 그 길을 따라가는 거야.”

“예. 감독님.....”

“지상으로 추락할 것을 걱정하는 별똥별이 되기보다, 흐린 날이나 구름에 가려져 있어도 매일 그 자리에 변함없이 자리하는 별이 될 생각을 해보면 어떨까. 비록 누구나 아는 유명한 별자리의 빛나는 별은 아닐지라도.“


류지호가 조현석과 유진우에게 해 준 이야기였다.


‘플라토 신드롬이라고 하셨지, 아마....?’


Plateau syndrome은 고원에 있는 평지를 뜻하는데, 개인이나 조직이 그 고원까지 올라가는 동안에는 목표가 있어서 고난을 극복하고 원하는 것을 이루지만 막상 달성한 이후로는 또 다른 위기를 겪게 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저 욕망에 충실하기 위해 산에 오르는 것밖에 몰랐다가 막상 높은 곳에 이르러서는 당황해 하는 것인데,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고원에 올랐다고 해서 끝이 아니야. 그 곳에는 또 다른 전쟁터가 펼쳐지게 되거든. 또 다른 게임의 시작인 거지.”


고원에 오르는 동안 싸울 힘을 모두 소진한 상태에서 그 전쟁터에서 버텨야 한다.


“그런 상황에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니... 감독님을 어떻게 하고 계세요?”

“원하는 것을 이룬 후에 허무에 빠지는 것은 당연한 거야. 온힘을 다 해 뭔가를 해내고 나면 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겁거나 허공에서 헛발질 하는 느낌이 들잖아. 그건 경험해 보진 못한 사람은 알 수 없어. 누군가에게는 배부른 투정처럼 느껴질 거야. 그럴 때 우리는 다시 한 번 비전을 세워야 해. 내 가슴을 뜨겁게 할 꿈같은 것. 꿈은 이룰 수 없는 거야. 그렇기 때문에 어지간한 목표달성만으로는 허무함이 찾아올 리가 없지.”

“저의 경우는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수상 같은 꿈을 세워야겠네요?”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이 왜 불가능한 꿈이라고 생각하는데?”

“......”

“그런 걸 불가능하다고 규정하지 마. 그걸 이루지 못했을 때는 허무함이 아닌 패배감과 좌절감이란 또 다른 악몽에 시달릴 테니까.”

“......음.”

“나는 어떻게 하고 있냐고 물었지?”

“예.”

“단순히 영화판에서 끝까지 살아남아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내가 얼마나 멋진 사람인지 또 후배들에게 얼마나 멋진 롤모델이 될 수 있는지 그걸 고민하고 있어. 내 삶만 사랑하다가... 아니 사랑하지 않았던 것 같아 학대에 가까웠던 것 같지만.... 암튼 가족에게 미안함이 있어서 가족들에게 충실한 삶을 살아가려고. 그리고 딸을 얻었는데 사회에 진출할 때 여성으로서 덜 어려움을 겪고 스스로 자부심을 갖고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에 일조하고 싶다는 마음도 있고. 막연히 최고의 자리에 올라야 한다는 그런 것 말고 내 자식들을 위한 선구자가 돼야겠다는 꿈을 갖게 됐지. 아빠는 자식들을 위해서는 불가능한 것도 가능하게 만들어야 할 책임이 있으니까.... 플루토 신드롬이니 또 성공 후 허망함에 무너질 수가 없나봐.”

“저도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아봐야 알까요?”

“모르지. 자신의 마음을 두드리고 사로잡는 꿈은 다 다르지 않겠어? 생긴 것이 다르고 뇌도 다 다르고 심장이 다르고 이루고 싶은 것도 다 다르니까.”


조현석은 류지호가 들려주었던 이야기를 떠올리며 카투사 킴의 에세이를 다시 한 번 읽기 시작했다.


❉ ❉ ❉


경상남도 합천군과 산청군의 경계.

황매산(黃梅山).

한국영화 <내 머리 속의 지우개>에서 극중 철수와 수진이 집을 지은 평원이 바로 이곳 황매산 정산 바로 아래다.

<태극기 휘날리며>의 촬영지로 더 잘 알려져 있는데, 한국전쟁의 두밀령 전투와 낙동강 전투 장면을 촬영한 바 있다.

산 정상 바로 아래 황매평전에는 영화 촬영에 사용된 참호 일부가 그대로 남아 있다.

그런 평원에 <Christmas Cargo> 미술팀이 장진호 전투현장을 재현해 놓았다.

물론 미국 스태프가 아니라 모두 한국인들이 했다.

한국 로케이션 코디네이터인 김재욱이 엄선한 영화미술 전문가들이 동원되었다.

황매산의 절경은 누가 뭐래도 겨울 설경이다.

드넓은 황매평전이 하얀 옷으로 갈아입으면, 그대로 설국이 된다.

경남 합천 지방에서는 보기 드물게 겨울에 많은 적설량을 자랑한다.

경남권에서 멋진 설경을 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산 중의 하나가 황매산이다.

한때는 목초지로도 쓰였다.

그처럼 평평한 고원지대는 다양한 전투장면을 연출하기 최적이다.

그곳과 멀지 않은 곳까지 차량이 올라갈 수 있는 점도 장점이고.

강원도에서 <Christmas Cargo> 로케이션을 위치하기 위해 온갖 당근을 제시했었다.

그럼에도 류지호는 강원도가 아닌 합천 황매산을 로케이션지로 결정한 이유다.

<Christmas Cargo> 제작진이 굳이 한국까지 와서 로케이션을 하는 이유는 리얼리티 때문만은 아니었다.

주로 찍는 장면들이 중공군 관련인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아이오와주 인근에서 아시아계 엑스트라를 구하기가 정말 어려웠다.

밀워키, 미니애폴리스에서 배우로 활동하는 극동아시아계 배우를 수소문해서 모조리 데리고 왔지만 턱없이 부족했다.

멀리 시카고에서까지 가서 데리고 왔다.

비용이 만만치 않았다.


“인디언 혼혈이나 동남아계를 더 많이 섞으면 되잖아. 어차피 분장하면 못 알아 볼 텐데....”


아시아계를 구분 못하는 서양인들이나 속아 넘어간다.

아시아 사람들은 어지간해서는 같은 아시아계 사람들을 구별할 수 있다.

그 같은 엑스트라 문제가 한국 로케이션 결정에 크게 영향을 미친 것도 사실이다.

현지 코디네이터 역할을 하는 김재욱은 경남지역에서만 수백 명의 엑스트라를 모집했다.

일부 전문적인 엑스트라들은 수도권에서 관광버스에 실어 합천까지 데리고 왔다.

그럼에도 아이오와 로케이션 인건비의 절반도 되지 않았다.

일부 배우와 스태프가 해외출장에 대해 투덜거린 것을 제외하고는 저렴한 비용으로 마음껏 전쟁장면을 연출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류지호가 중점적으로 촬영한 것은 중공군들의 리액션 쇼트들이었다.

친구 김영웅이 대표로 있는 스턴트 팀 ‘人Best’를 메인 스턴트팀으로 해서 한국에서 활동하는 200여 명의 스턴트맨들을 모조리 긁어모았다.


“확실히 아이오와 산세와 실제 한국의 산세의 식생이 달라.”


프로덕션 디자이너 마이크 리바의 감상이었다.


“여기는 한반도의 남단이고 실제 장진호가 있는 북쪽과도 또 다를 거예요.”

“가장 다른 것은 이곳은 숲도 있고, 봄에는 각종 꽃들이 만발한다는 사실이지. 북쪽의 장진은 지금도 민둥산이고.”


마이크 리바는 한국에서 고용한 미술팀과 함께 황매평전과 합천 영상테마파크에 야외 세트를 만들었다.

뭐만 하면 한국영화 한 편 제작비가 소요되기 때문에.

일일이 말하면 입만 아팠다.


“슛 갑시다!”


작가의말

연참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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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6 Christmas Cargo. (10) +3 24.03.21 1,280 74 24쪽
805 Christmas Cargo. (9) +8 24.03.20 1,391 81 26쪽
» Christmas Cargo. (8) +4 24.03.20 1,310 69 23쪽
803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 +2 24.03.19 1,447 83 23쪽
802 가온그룹의 선전 덕분 아니겠습니까? +3 24.03.18 1,511 91 31쪽
801 Christmas Cargo. (7) +9 24.03.16 1,485 95 23쪽
800 Christmas Cargo. (6) +10 24.03.15 1,413 86 23쪽
799 Christmas Cargo. (5) +3 24.03.15 1,284 65 25쪽
798 Christmas Cargo. (4) +8 24.03.14 1,432 81 25쪽
797 Christmas Cargo. (3) +3 24.03.14 1,343 75 25쪽
796 Christmas Cargo. (2) +8 24.03.13 1,503 82 25쪽
795 Christmas Cargo. (1) +8 24.03.13 1,482 78 24쪽
794 안 가본 길을 걷고 있었기에. (3) +6 24.03.12 1,604 88 23쪽
793 안 가본 길을 걷고 있었기에. (2) +3 24.03.11 1,590 86 23쪽
792 안 가본 길을 걷고 있었기에. (1) +5 24.03.09 1,656 82 21쪽
791 광폭행보(廣幅行步)! (4) +3 24.03.08 1,623 87 27쪽
790 광폭행보(廣幅行步)! (3) +2 24.03.07 1,608 80 25쪽
789 광폭행보(廣幅行步)! (2) +4 24.03.06 1,660 79 26쪽
788 광폭행보(廣幅行步)! (1) +3 24.03.05 1,715 85 27쪽
787 빅딜 해볼 생각 없어? (4) +5 24.03.04 1,650 86 24쪽
786 빅딜 해볼 생각 없어? (3) +8 24.03.02 1,666 83 22쪽
785 빅딜 해볼 생각 없어? (2) +6 24.03.01 1,635 77 22쪽
784 빅딜 해볼 생각 없어? (1) +4 24.02.29 1,630 78 22쪽
783 고집쟁이는 아니지만, 지나친 완벽주의자... +9 24.02.28 1,586 79 30쪽
782 돈을 번다는 건 분명 좋다! (2) +2 24.02.27 1,560 82 23쪽
781 돈을 번다는 건 분명 좋다! (1) +3 24.02.26 1,593 83 25쪽
780 이 사업은 무조건 된다! +11 24.02.24 1,672 80 27쪽
779 고마워요. 내게 다시 일할 기회를 줘서. +7 24.02.23 1,657 83 23쪽
778 놀면 뭐해... 일할 수 있을 때 바짝 해야지 (2) +4 24.02.22 1,594 79 23쪽
777 놀면 뭐해... 일할 수 있을 때 바짝 해야지 (1) +2 24.02.21 1,641 74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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