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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2의 서재

사막의 소드마스터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전쟁·밀리터리

완결

922
작품등록일 :
2020.05.11 21:30
최근연재일 :
2021.01.18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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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21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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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Re 82. 다시 지하로

DUMMY




01.

유치장이 있는 지하로 돌아와 낮게 깔린 서늘한 공기에 다시 발을 담갔을 때 마드와 유마는 잠깐 동안 잊고 있던 기억을 다시 떠올렸다.


푸석푸석한 은발의 머리와 황금색 눈빛을 가진 노인이 그들 앞에서 갈라진 혀를 날름거렸었다!


물론 마지막 묘사는 사실이 아닐 수도 있었지만, 어떻게 잊을 수 있었을까? 잠깐의 시간 동안 경험했던 압도적인 공포를. 비골라를 구해냈다는 기쁨과 곧이어 날아든 불화살에 대한 경악이 노인에 대한 기억을 잠시나마 덮었던 모양이었다.


마드와 유마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발목까지 잠기는 서늘한 공기에 공포감은 더욱 배가 됐다. 사자의 품에 안겨 뒤척거리는 비골라 역시 이곳에서 만난 은빛 머리의 남자를 떠올리고 있을지 몰랐다. 이 와중에 성큼성큼 거침없이 나아가는 이는 오직 사자뿐이었다.


지하 유치장 복도는 온통 냉기로 가득했다. 위에는 지금 불난리가 나 민병대 사령소를 통째로 오븐에 집어넣은 상황이었는데도 이곳엔 오직 차가운 기운만이 맴돌았다. 노인과 함께 사라졌던 푸르스름한 기운이 어느새 다시 돌아와 그들의 허리께에서 길게 띠를 이루었다.


유마는 그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혹시 그에게만 보이는 건가 싶었지만 마드 역시 심각한 표정으로 파란 띠를 눈으로 좇고 있었다.


"뭔가 왔다 간 모양이군."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사자였다. 마드와 유마가 동시에 사자를 바라보았다.


"뭐라고?"


"당신들의 눈에도 보일 테지. 지금 공기 중을 부유하고 있는 이 파란 띠말이오."


"맞아. 사리안, 당신한테도 보여?"


"물론. 이건 쉽게 볼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주 희귀한 현상인 것은 아니오. 초원에 사는 주술사들이나 서부 왕국의 마법사들이 쉽게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이기도 하고. 자연 속에서도 종종 찾아볼 수 있소."


사자가 파란색 띠 위로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마드는 순간 그를 말리고 싶었다. 절대 만지면 안 된다고, 만졌다가는 큰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외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가 입을 떼기도 전에 사자의 손가락이 파란색 띠에 닿았다가 그대로 휙 지나가버렸다.


띠는 마치 물과 기름 사이에 뜬 접합면같았다. 공기 중에 무수히 많은 파란 벌들이 모인 것 같기도 했다. 또는 매우 밀도 있게 핀 파란색 안개 같기도 했다. 무엇이 됐든 마드로서는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사자가 말했다.


"이건 말하자면 강력하게 발현된 의지의 집합이오. 고도로 훈련되었거나 혹은 매우 강한 정신 감응력을 가진 존재가 뜻하는 바를 실체화 시킨 것이지. 공화국에서는 이를 따로 부르는 이름이나 명칭이 없었지만 서부 왕국에서는 따로 부르는 이름이 있었소. <마나>라고 하지."


"마나......" 마드가 되뇌었다. 어디선가 들은 것 같은 이름인데.


"아무튼 누군가 우리에게 길을 알려주고 싶어 하는 것 같군. 아까 마드 당신이 이야기하려다가 만 존재가 남긴 것 같은데."


"맙소사...... 동화 속 이야기에 들어온 것만 같아. 어머니도 보셨다면 무척이나 좋아하셨을 텐데." 마드가 말했다.


"우리 엄마도."


홀린 듯 파란색 띠를 보던 유마도 덧붙였다.


"아무튼 이 길의 끝이 함정인지 살 길인지는 가봐야 알 것이오. 자, 어서 움직입시다." 사자가 말했다.



02.

공기 중을 가르는 파란색 띠는 유치장 복도를 가로질러 끝에 달린 조그만 문으로 향했다. 마드는 처음 보는 문이었다. 사실 그녀는 지하 유치장으로 내려올 일이 별로 없었다. 애초에 세이마르 민병대가 유치장을 쓸 일이라고는 거의 없었다.


대부분의 유치장은 창고로 쓰였고 사자가 처음 세이마르에 발을 디뎠을 때 처음 손님을 받았다. 그것도 그를 달리 둘 곳이 없어 임시방편으로 사용했을 뿐이었다. 제국에 반기를 든 처지에 누구를 가두고 심문할 일이 어디에 있었겠나.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부족했는걸.


"이 방은 대체 뭐......"


마드가 입을 떼기가 무섭게 사자가 비골라를 안아 든 채로 문을 발로 차 부쉈다. 문짝이 쩍하고 경쾌한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사자가 마드를 돌아보았다.


"음? 무슨 말이라도 하려고 했소?"


"아니야. 잘했어. 나이스 킥. 속이 다 시원하네."


뒤에서 유마가 소리쳤다.


"이봐, 한가한 대화는 나중에 하고 좀 서두르면 안 될까? 이제 이 밑까지 연기가 새어들기 시작했어!"


문이 부서진 방에는 정말로 수도가 있었다. 방의 3면은 모두 진흙이 덕지덕지 발린 벽이었다. 문에 마주한 벽에 안쓰러울만치 작은 수도꼭지가 외롭게 달려 있었다. 문까지 그들을 안내한 파란색 띠는 정확히 그 수도꼭지 앞까지 이어졌고 어느 순간 사라져버렸다. 사자가 말한 '강력하게 발현된 의지'는 딱 거기까지였던 모양이었다.


유치장의 신세를 졌던 사자도 이 방은 처음이었다. 그가 이곳의 신세를 졌던 이틀간 이 방을 이용하는 대원은 아무도 없었다. 사실 사자를 포함해서 누구도 이 방의 존재를 인식했던 이는 없었다.


'마치 누군가 의도적으로 방의 존재를 숨기기라도 한 듯이 말이지.' 사자가 생각했다.


"...... 역시 있었군. 그때 들었던 물소리는 착각이 아니었던 모양이야."


비골라가 말했다. 되살아나는 끔찍한 기억에 그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그럼 이제 저 벽 너머에 있을지도 모르는 수원을 찾아가면 되는 건가? 한데 벽을 어떻게 부수지?


이런 곳으로 탈출할 줄 알았다면 해머라도 들고 오는 건데 말이야." 유마가 난감해했다.


하지만 마드는 왠지 방법이 있을 것 같았다. 그것도 다름 아닌 바로 옆에 선 이 남자에게. 사자가 안고 있던 비골라를 내려놓으며 마드에게 말했다.


"아이작님을 잠시 부탁하오."


그리고 방금 복도를 지나오면서 그의 눈에 포착됐던 물건을 가지러 방을 나갔다. 잠시 후 사자가 돌아왔다. 그의 손에는 쇠사슬이 들려 있었다.



03.

"모두 이 방에서 나가주시오. 이왕이면 복도 끝까지 물러나는 것이 좋겠소." 사자가 말했다.


"어, 음. 꼭 그래야 할까? 이미 연기가 퍼지기 시작했는데."


유마가 복도 천정을 자욱이 뒤덮기 시작한 연기를 보며 말했다.


"음. 그래야 하오. 잠시만 숨을 참고 물러서 주시오. 이건 꽤 무자비한 일이니."


사자의 손에서 쇠사슬이 찰그락거렸다. 그 모습을 본 비골라가 숨넘어가기 직전의 사람이라고는 볼 수 없을 만큼 눈을 크게 떴다. 발목을 서늘하게 감싸던 사슬의 차가운 표면, 뼈를 부술 듯 파고들었던 단단하고 완고한 촉감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그를 거꾸로 매달고 시계 추처럼 천천히 흔들어보던 목석같은 사내의 눈이 생각났다.


저 남자가 대체 사슬로 뭘 하려고? 비골라의 눈이 의문으로 가득 찼다.


그렇게 비골라가 자신을 어떤 시선으로 보고 있는지 아는지 모르는지 사자는 다만 손 위에 올린 쇠사슬을 가만히 만지작거렸다. 그의 눈이 수도꼭지가 매달린 벽만 바라보았다.


"사리안의 말을 따르는 게 좋겠어요, 아저씨. 유마님도요. 사리안이라면......"


마드가 사자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꾹 다문 입에서 흐르는 심상치 않은 일의 예감을 읽었다.


"...... 믿을 수 있어요."


"어서 멀리 떨어지시오. 가급적 멀리. 그리고 무슨 일이 벌어지더라도 대비하시오. 저 뒤에 뭐가 있을지 모르니."


마드와 유마가 방을 나와 비골라를 부축해 복도 끝까지 물러났다. 화염은 계단 바로 위까지 다가와 넘실거렸다. 불꽃이 새빨간 혀를 날름거렸다. 지상의 사령소는 완전히 불에 휩싸인 상태였다. 천정에 찬 연기도 까맣게 변했다.


그때 별안간 엄청난 굉음이 사자 혼자 남은 방에서 났다. 천둥이 하늘이 아니라 실내에서 터진 듯, 포탄이 포신을 미처 다 벗어나지 못하고 터져버릴 때처럼 어마어마하고 둔탁한 파괴음이었다. 마드와 유마가 입을 떡 벌리고 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나기 시작한 문쪽을 바라보았다.


그건 말할 것도 없이 사자가 만들어낸 소리였다.



04.

사자가 천둥소리를 지상에서 재현하기 딱 30초 전의 일이다.


사자는 손에 올려놓은 사슬을 가만히 만지작거렸다. 흡사 애인의 손목을 쓰다듬듯 정성스러운 손짓이었다. 동시에 그는 정면에 선 벽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그는 그가 골라온 물건과 눈앞에 선 벽 중에 뭐가 단단한지를 가늠하는 중이었다.


쇠사슬이 벽보다 연하고 약하더라도 차이가 그리 크지 않다면 괜찮았다. 모자란 건 그의 기술로 메워주면 될 일이니까. 이윽고 결심이 선 듯 그가 쇠사슬의 한쪽 끝을 쥔 후 나머지를 늘어뜨렸다. 남는 사슬이 땅바닥에 떨어졌다.


철그럭.


그건 사슬이 내는 소리이기도 했고 그의 머릿속에 달린 스위치가 찰카닥 눌린 소리이기도 했다. 사자의 머릿속 깊숙한 곳에는 보이지 않는 스위치가 있었다.


그건 붉은색이었고 (사자의 상상 속에서) 웬만한 사람들이 두 손 두발 다 들고 달려들어도 누르기 힘들 만큼 단단한 물건이었다. 그 스위치는 사자만이 누를 수 있었다. 스위치의 결정권은 오직 사자에게 있었으니까.


결정을 하고 난 뒤에도 사자는 결정이 옳은지, 틀린 것은 없는지 몇 번을 숙고했다. 대륙을 주름잡는 마스터급 검사라면 당연한 과정이었다. 물론 공화국의 검으로서 사자는 몇 겹이나 더 엄중한 내면 속 배심원들의 판단을 받아야 했지만.


붉은색 스위치 위에는 파랗고 명징한 색깔로 (이 역시 사자의 상상 속에서 멋대로 붙인 색깔이었지만) 절대 보지 않고서는 지나칠 수 없을 만큼 크고 선명한 글씨가 쓰여 있었다.


<그래도 가급적 대화로 해결할 것.>


'아아, 아무렴. 대화만한 해결책이 없지. 지금은 말고.'


사자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사슬을 가볍게 빙빙 돌리기 시작했다. 사슬의 회전에 점점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곧이어 몇 백 마리의 말벌이 한꺼번에 모여 날갯짓을 하듯 섬뜩한 소리가 났다. 윤곽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사슬이 빠르게 돌아갔다.


그리고 사자가 주저함 없이 벽을 향해 휘둘렀다. 사슬 끝에서 천둥이 쳤고, 사자의 앞에 선 벽이 무너져 내렸다.



05.

마드가 달려왔다. 혼자 설 힘도 없어 비척대고 있는 비골라 때문에 한발 늦게 달려온 유마의 눈에 뻥하니 뚫린 까만 공간이 보였다.


마드에게는 그저 심연이 입을 벌린 듯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유마만이 심연 너머의 모습을 보았는데 잘못 본 것이 아니라면 그건 끝없이 펼쳐진 동굴이었다.


"맙소사. 당신 대체 뭘 한 거야? 몰래 폭탄이라도 들고 있었던 거야?" 마드가 말했다.


바닥에 나뒹구는 사슬 조각들이 보였다. 쇠사슬은 마치 거인이 찢어낸 듯 조각조각 찢겼고 찢긴 부위는 녹은 치즈처럼 눌려 있었다. 방금 불로 끊어낸 듯 붉게 띠가 둘러진 것도 있었다.


"음. 별것 아니오. 그나저나 유마 대장. 저 안쪽이 보이시오? 내 눈에도 잘 보이는 것이 없는데."


'뭐가 별것 아니야? 사리안 가만 보면 은근 내 질문을 가볍게 건너뛰는 경향이 있어.' 마드가 입을 삐죽거렸다.


"내가 잘못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안에 강이 있는 것 같은데......"


"여기가 모래땅 밑이라는 걸 잊고 계신 건 아니죠? 강이라뇨, 유마님."


사자에 대한 불만을 대신 풀기라도 하는 듯 조금 공격적으로 마드가 물었다. 유마는 그저 어깨를 으쓱거렸다.


"글쎄, 나야 보이는 대로 말할 뿐. 아무리 봐도 이건......"


그때 그들 머리 위에서 폭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사령소에 남은 폭발물에 불이 붙은 모양이었다. 아니면 그들이 건물을 내려앉히기로 결심하고 폭탄을 던지는 걸 수도 있었다.


"어차피 우리에게 남은 길은 여기밖에 없소. 들어갑시다."


사자가 말했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심연으로 주저 않고 뛰어들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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