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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활극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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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KKA
작품등록일 :
2019.07.10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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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15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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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31 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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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쪽

303화

DUMMY

“엿 같은 내 인생······.”


우에스기 사부로 중위가 한탄하며 토해낸 말이었다. 병상에 누워있는 그는 극도로 보0이지 않는 미래에 한숨짓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탄탄대로일 것만 같던 장교의 미래는 완전히 망가졌다. 이시와라 간지 중좌라는 천재 군략가이자 만주를 제국의 품에 안겨준 사람의 연줄을 단단히 잡았으니 출세길이 뻔하게 보인다고 희희낙락했던 날이 엇그제같았다. 그러나 지금 그는 주리가 휘두른 돌에 두개골에 금이 간 채 붕대로 머리를 칭칭 감고 육군병원 병상에 누워 암담한 심경에 한숨만 토해내고 있었다.


사실 미래는 뻔해 보였다. 병원에서 의사가 퇴원이 가능하다는 소견을 밝히는 즉시, 그들은 헌병의 손에 연행되어 영창에 수감된 상태로 기소될 것이다. 군법재판에 회부되어 이 사건의 모든 책임을 지고 불명예 제대를 당하며 육군형무소에 수감될 것이다. 집단 횡령범이라는 낙인이 찍힌 채. 이것을 지시한 자, 이시와라 중좌를 비롯한 관동군 윗선들은 하나도 책임지지 않고.


“나 궁금한 게 있는데······.”


앞 병상의 쿠스노기 모토스케 중위의 말이었다. “뭔데?”라고 퉁명스럽게 답하는 우에스기 중위에게, 쿠스노기 중위는 커다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언제 할복해야 명예로울까?”


그 말에 우에스기 중위는 “내가 알겠냐?”라고 핀잔을 주고 돌아눕는다. 하지만 친구의 말이, 어떻게든 장인어른인 아무개 후작에게 연락을 취하려 시도했으나 후작이 전화를 계속 받지 않는다며 고개를 푹 숙인 친구의 말이 너무나도 가슴을 찢었기에 다시 “엿 같은 내 인생!”이라고 심정을 표한다.


그는 차라리 이시와라 중좌나 이 일에 관련된 사람들이 자신의 입을 막기 위해 형무소 밥에 독을 타서 그의 인생을 끝장내주기라도 하면 좋겠다고 생각하기까지 했다. 불명예 제대한 채 육군형무소에서 형기를 산 그를 받아줄 곳이 일본제국 어디에 있단 말인가? 집안의 자랑거리였던 그도 가문에 불명예를 초래한 사람으로 꼽혀 도움을 받지도 못할 것이다. 대대로 하타모토를 지낸 집안의 여식임을 늘 강조해 온 부인도 이혼을 청구하고 애들 양육권도 받아내려 할 것이다. 그 소송에 대처할 여력도 없을 것이니 패소는 뻔해 보였다. 사실상 사회의 불가촉천민 신세가 되버릴 바에야 적절한 시기에 명예로운 죽음을 택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그러던 와중, 우에스기 중위는 바로 옆 침상의 후지무라 토비자루 중위를 보고 “그거 보면 좀 편해지냐?”라며 한숨을 쉰다.


후지무라 중위는 절망해 한숨만 푹푹 쉬는 친구들과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그는 기타무라 소좌의 조롱과 멸시 가득한 조사를 받을 때 어느 순간부터 달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걸 놓아버린 표정을 한 채, 검은 정장의 책 한권을 주의깊게 읽고 있었다.


바로 성경이었다.


지금 입원해 있는데다가 헌병의 조사대상인 그들이 누릴 수 있는 몇 안되는 자유는, 병원 복도에서 책들이 담긴 수레를 끌고다니는 군속에게 도서를 대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뇌진탕 증세를 보인 우에스기 중위와 쿠스노기 중위가 활자가 눈에 들어올 리 만무했기에, 조금이라도 쉴 수 있는 시간인 취침시간 전에 무언가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은 후지무라 중위밖에 없었다. 특이하게도 후지무라 중위는 수레 속의 책을 고르는 게 아닌 군속에게 병원에 성경이 비치되어 있냐고 묻고는 찾아달라고 부탁한 것이었다.


“아니, 그런건 딱히 아닌데.”


후지무라 중위가 고개를 슬쩍 돌려 친구를 본다.


“좀 찾아볼 게 있어서.”


“이 와중에 넌 머리 계속 쓸려 하냐? 참 대단하다. 난 머리가 깨져 죽을 것 같은데.”


우에스기가 투덜거리며 한 소리였다. 그는 지난 며칠 간의 일들로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지쳐 있었다.


기타무라 헤이스케 헌병소좌와 그의 부하들은 우에스기 중위, 쿠스노기 중위, 그리고 그들의 후배인 미나모토 신이치 중위가 의식을 되찾자마자 바로 심문에 들어갔다. 소좌 계급인 그들의 담당군의관은 쿠스노기와 우에스기가 머리를 세개 얻어맞아 뇌진탕 증세를 보이고 있으며 후지무라 중위도 관통상을 입어 안정이 필요하다는 소견을 말했지만, 기타무라 소좌는 그런 걸 신경 쓸 사람이 아니었다.


우에스기 중위는 깨질 것 같은 두통, 모르핀을 투여해도 가라앉지 않는 두통 속에서도 심문을 받아야 했다.


“등신새끼들. 나 같으면 할복했다.”


기타무라 소좌는 아주 신이 났었다. 그의 사람 깔아뭉개고 비참하게 만드는 화법에 순간 링거 병을 깨트려 그걸로 목을 그을까 하는 충동이 들기도 했다. 그나마 남을 괴롭히는 데서 오는 즐거움이라는 인간적인 감정을 보여주는 소좌와 달리 무감정 그 자체의 인간인 호리 대위의 심문을 받아야 했다. 호리 대위는 그가 겪은 모든 상황들을 극도로 세세하게 캐물었다. 뇌진탕에서 오는 격심한 두통 떄문에 기억을 떠올려 증언하는 것 자체가 지옥을 방불케 하는 고통이었다. 그러나 호리 대위에게는 오직 그가 알고 기록하고 보고해야 할 것만 중요했다.


호리 대위에게, 또는 이른바 합동수사본부 소속 조사관들에게 밤 늦게까지 심문받느라 병상에 누워도 쉴 수가 없었다. 그들 중에는 자신보다 사관학교 기수가 낮은 장교들이나 하사관들도 있었지만, 하나같이 태도가 불손했다. 이들에게 계급상 상급자를 합법적으로 괴롭힐 권한이라는 건 아주 즐거운 것 같았다. 형기를 살고 불명예제대 당할 게 뻔한 사람 상대로 최소한이라도 예우를 갖출 필요가 없다는 기색이 너무 노골적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후배 미나모토 중위가 심한 대우를 받게 되지는 않으리란 점이었다. 그들에 비해 부상이 경미한 미나모토 중위는 이미 퇴원한 채 심문받고 있다. 사령관을 직접 수행하는 비서실에 있다 보니 미나모토 중위의 연루가 인정되면 사령관에게까지 책임소재가 연결될 수 있었다. 그 때문에 책임추궁은 피하겠지만, 그래도 불령선인과 맞붙어서 졌다는 꼬리표는 때어낼 수 없을 것 같았다.


오늘 조사는 끝났지만 다음날에는 이젠 해군성에서 파견된 조사관이 조사한다고 한다. 해군 특수경찰대 조사관인 만큼 헌병보다 더 적대적인 태도로 조사하리라는 생각에 머리가 쪼개질 것 같았다.


내일은 또 무슨 꼴을 당할지 몰라 깊은 한숨만 토해낼 때, 병실 밖 복도에서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조금 있으면 면회시간 종료됩니다. 유념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담당군의관의 목소리였다. 그런데 그 다음에 나온 목소리는, 익숙한 목소리였다.


“중대한 공무요. 시간을 넘기더라도 양해를 바라오.”


그 목소리에 세 장교들은 바로 상반신을 일으켰다. 그 목소리의 주인은 너무나도 잘 아는 사람이었다.


병실 문이 벌컥 열리고 그가 들어왔다. 이시와라 간지 중좌가.


“주······. 중좌님!”


이미 중좌가 자신들을 꼬리자르기용으로 버릴 것이라 생각하던 그들이었지만, 전부 자세를 바로 하고 일제히 경례한다. 사관학교 입학 후 몸에 베여온 군인으로서의 조건반사적 행동은 어쩔 수 없었다.


이시와라 중좌는 쉬어 소리 한마디도 안하고 경례를 받는다. 그의 얼굴은 차갑게 굳어 있었다.


“본관은 귀관들에게 정말 실망하고 있노라.”


그는 부상당해 치료중인 부하 장교들에 대한 일반적인 위로의 말 한 마디도 없이 바로 본론부터 말을 꺼낸다.


“이건 그저 돈만 옮기면 되는 일이 아니었던가? 일개 이등졸에게 시켜도 할 수 있는 일이었노라. 그런데 제국육군의 장교이자 지난 사변에 공훈을 세운 그대들이 일을 이렇게 망쳐놓을 줄은 진정 몰랐느니라! 그대들의 실력이 그런 불령선인들에게 미치지 못했다는 것이 참으로 통탄스럽도다! 어떻게 본관을 이리도 실망시킬 수 있단 말이던가!”


들어오자마자 힐난을 쏟아내는 이시와라 중좌의 입에 장교들은 굳어진 표정으로 그걸 듣는다. 이시와라 중좌의 얼굴은 흡사 분노하여 눈을 흡뜬 인왕상과도 같았다.


“본관 뿐만 아니라 이에 연관된 모든 분들이 귀관들을 믿었을지어니! 그대들이 일을 그르치는 바람에 너무 많은 것이 어긋나버렸도다! 다가올 세계최종전쟁을 위한 사전준비 중 하나가 첫 단추부터 잘못 꿰게 되었을진저! 귀관들은 엄중한 책임을 지게 될 것이로다!”


그 말에 우에스기 중위의 마음 속에서 욱하는 것이 올라온다.


말은 똑바로 하십시오! 왜 우리만 책임져야 합니까? 우리가 책임져야 할 일을 지시하신 분은 바로 중좌님이십니다! 그리고 이는 사령부 수준에서까지 승인을 받은 일이 아닙니까? 왜 우리들이 도마뱀 꼬리처럼 잘려서 모든 책임을 다 뒤집어써야 합니까! 우리에게 책임을 물으실 거면 중좌님 스스로에게도 그러셔야 하는 게 아닙니까?


그러나 그 말은 오직 입 안에서만 맴돌 뿐이었다. 그는 감히 중좌 앞에서 이런 말을 감히 내뱉을 수가 없었다. 그랬다가 지금보다 더한 불이익을 받을 거라는 두려움이 그의 분노를 억누르고 있다.


그런데 이시와라 중좌는 그렇게 그들을 힐난한 후, 갑자기 얼굴 표정을 푼다. 방금 전의 인왕상과 같은 표정은 바로 탱화 속 부처나 보살의 얼굴을 방불케하는 자애로운 모습이었다.


“그러나, 귀관들이 져야 할 책임이 육군형무소에 들어가는 건 아닐수 있을지어다.”


그게 무슨 말이냐는 표정이 된 장교들에게, 이시와라 중좌는 대단한 자비를 배푸는 것처럼 목소리를 더욱 부드럽게 한다. 수인이라도 맺었다면 그럴싸해 보였을 것이리라.


“본관은 그럼에도 귀관들의 능력을 높게 사왔을진저. 그리고 귀관들이 니치렌 대성인을 열성적으로 섬기고 우리 국주회의 가르침을 받들어 온 것도 외면할 수 없을진저. 그건 귀관들이 무참히 실패한 지금도 마찬가지이니라. 본관은 귀관들이 형을 살고 불명예스럽게 군문을 떠나는 것보다 더 확실한 책임을 질 방도를 가지고 있노라.”


“중좌님. 그게 무엇입니까?”


쿠스노기 중위가 놀라서 묻는다. 형을 살지 않고도 책임을 질 수 있다니? 그런 방법이 있단 말인가? 이에 이시와라 중좌는 즉답을 해주지 않고 이런 말을 한다.


“우리 특무기관들에 현역 군인만 소속된 것은 아니니라. 군속들도 있고 또 군과 전혀 무관한 사람들도 특무기관에 기용되어 있을지니. 오히려 군인이 아니라는 점이 특무기관 소속 민간인의 장점이니라. 군조직의 질서에서 한층 벗어나 오히려 군이 생각할 수 없는 일을 고안해 낼 수 있으니 말이다.”



중좌가 간접적으로 돌려 말하였지만, 이 세 장교들은 이게 무슨 말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귀관들은 군문을 떠나서라도 그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가지게 될 것이니라. 비록 불명예스럽게 떠날지라도 말이니라. 하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더 자유롭게, 제국의 국익에 이바지하고 다가올 세계최종전쟁에 대비하기 위한 여러 일들에 자유롭게 헌신할 수 있을지어다. 나는 여기 오기 전 이미 봉천특무기관장 보좌 하나야 소좌와 이 문제를 이야기했노라. 하나야 소좌는 본관이 부탁하면 전역처리된 귀관들을 특무기관에 기용할 것임을 보장하였느니라. 다시 나라를 위해 공을 세울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다!”


그 말에 쿠스노기 중위가 믿지 못하겠다는 듯 눈을 꿈쩍거린다. 이런 엄청난 실패를 초래해 상부에 크나큰 폐를 끼쳤는데 다시 기회를 준다고? 형무소에 들어가지 않아도 된다고? 그런데도 특무기관에 기용될 수 있다고? 이런 기회가 주어졌다는 게 도무지 믿기질 않았다. 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이시와라 중좌에게 영영 버려지는 줄 알았는데 어떻게 일언 일이!


“중좌님! 본관은······..”


쿠스노기 중위는 중좌에게 열렬한 감사를 표하고 그 일을 수락하겠다고 당당히 말하려 했다. 그런데 그의 말을 우에스기 중위가 끊고 나선다.


“주······. 중좌님! 기회를 주신 건 감사한 일이나······..”


단순한 쿠스노기 중위와 달리 우에스기 중위는 이시와라 중좌의 제안이 가진 속뜻을 눈치채고 말았다. 중좌가 명시적으로 얘기하진 않았지만, 특무기관에 소속된 민간인이라 함이 사무실에서 펜데를 굴리고 타자기를 치는 직무는 절대 아닐 것이다. 바로 특무기관 소속 정보요원, 속된 말로 밀정을 말하는 것이 분명하였다. 특무기관 소속이되 군인은 아닌, 그래서 정보공작이 잘못되더라도 언제든지 쓰고 버릴 수 있는 패. 적에게 잡히더라도 군인 신분이 아니라 언제든지 끊어버리고 존재까지도 부정할 수 있는 존재.


이시와라 중좌는 그들에게 이 역할을 맡으라고 하는 것이다. 무슨 어마어마한 자비를 베푸는 태도를 보이면서! 적지에서 뭔가 일을 하다 잡혀도 도움 하나 주지 않을 일을 시킬 거면서! 무슨 장제스나 스탈린을 암살하라는 임무를 내리고 붙잡히면 나몰라라 할 거면서!


그 생각에 우에스기 중위는 친구가 그 제안을 수락하려는 그때 끼어들고야 말았다.


“무슨 할 말이 있는가, 우에스기 군?”


중좌의 시선이 그에게 향한다. 그러나 다급히 입부터 열고 본 우에스기 중위로서는 “아······ 그게······.”라고 더듬다가, “분명 감사한 일이나······. 본관들로서는 더 생각해 볼 시간이 필요합니다.”라고 겨우 말을 꺼냈다. 쿠스노기 중위는 친구가 이 좋은 기회를 거부하려는 기색을 보이자 어이없다는 듯 눈총을 가한다.


그런데 그 순간, 중좌의 자비로워 보이는 눈배가 갑자기 그 인왕상, 또는 다이고쿠텐의 모습으로 바뀐다.


“생각할 시간이 어째서 필요하단 말이던가? 귀관들이 져야 할 책임의 무게를 생각해볼지어다! 그리고 특무기관에 기용되지 않는다면, 귀관들은 군법재판을 받고 형을 살게 될 것일진저! 여기에 생각해 볼 것이 어디에 있단 말이던가? 생각할 시간은 또 어디 있단 말이던가?”


“아······. 중좌님······.. 그것이······.”


우에스기 중위는 차마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한다. 그 말대로였다. 특무기관에 들어가지 않으면 남은 것은 육군형무소에 들어가는 거고, 그렇게 되면 그의 미래는 완전히 끝장난다. 그래도 특무기관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소득이 보장되는 일자리는 유지되는 것이고 또 뭔가 중대한 임무를 성공시키기라도 한다면 오히려 장교로서 출세하는 것보다 더 나은 출세길이 열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특무기관이 완전히 불가능한 임무를 내려버린 뒤 그를 내팽겨쳐 버릴 수도 있다는 공포감 때문에, 이를 바로 수락하겠다는 결단이 차마 떨어지지 않았다. 소련 오게페우나 중화민국 CC단의 심문실에서 여생을 마치기보다는, 그래도 형무소에서 몇년 참고 나와서 자기 집 다다미에 눕는게 더 낫지 않을까?


그런데 나서는 목소리가 있었다.


“중좌님. 본관은 그 기회를 기꺼이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는 바로 후지무라 토비자루 중위였다. 우에스기는 크게 놀라 뜨악한 표정이 되어 친구를 바라본다.


“이리 처참한 실패를 한 본관들에게 생각치도 못한 기회를 주셨습니다. 우리가 어찌 큰 민폐를 끼친 책임을 마다하겠나이까? 그리고 다시 우리 제국을 위해 싸울 수 있을 기회를 마다하겠나이까?”


그 말에 이시와라 중좌의 얼굴이 다시 자애로운 모습을 되찾는다.


“훌륭하도다, 후지무라 군이여! 과연 그대는 니치렌 대성인의 신실한 신도이며, 우리 국주회의 기둥일지니! 귀관의 책임감은 본관이 그대의 직속상관보다 더 잘 아느니라!”


“감사합니다, 중좌님. 저는 그저 감사드릴 따름입니다.”


후지무라 중위가 미소를 띄우며 고개를 숙인다. 우에스기는 이 녀석이 대체 무슨 의도로 이러는지 생각해보려 하다 두통이 밀려오는 바람에 얼굴을 찌푸린다. 이때 이시와라 중좌가 시선을 우에스기 중위에게 돌린다.


“우에스기 군은 더 시간이 필요한가?”


후지무라가 저렇게 나서자 우에스기로서는 도무지 중좌의 눈길을 피하기 어려운 지경이 되었다.


“본관은······. 중좌님의 은혜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좋느니라. 좋느니라.”


이시와라 중좌가 만족스럽다는 웃음을 짓는다. 이에 가장 먼저 제안을 수락하려 했으나 결국 제일 마지막에 제안을 수락하게 된 격인 쿠스노기 중위가 재빨리 “중좌님의 은혜가 하늘과 같습니다!”라고 그를 칭송한다.


그런데 이때 이시와라 중좌의 표정이 슬쩍 굳어진다.


“그런데 아오야기 군은 지금 답답하게 굴고 있도다. 본관이 제안을 하자 처음에는 기쁜 기색이 되었다가, 갑자기 어두워지더니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하는 것이니라. 지금의 우에스기 군처럼 말이니라.”


그 말에 다들 놀라 눈이 커진다. 그들 중 가장 열성적으로 이시와라 중좌를 섬겨온 아오야기 중위가 그런 태도를 취했다고?


“테츠가 그렇게 말했단 말씀입니까?”


“그러하느니라. 그래서 귀관들에게 부탁하건데, 아오야기 군을 설득해 주길 바라노라. 내 그대들의 우정과 전우애를 잘 알고 있을지니. 귀관들이라면 그를 능히 설득할 수 있을 것이라 믿노라. 지금 본관은 아오야기 군을 밖에서 대기시키고 있느니라. 본관이 있으면 대화에 불편해질 것 같아서 말이니라. 안으로 들여올터이니 잠시 기다릴지어다.”


중좌는 그 말을 끝으로 방을 나간다. 우에스기 중위가 바로 후지무라 중위에게 성을 낸다.


“토비! 무슨 생각으로 그러겠다고 한 거야!”


“엥? 넌 왜 그러냐?”


쿠스노기 중위가 고개를 갸우뚱한다.


“형무소 안갈 기회 주신다고 하시잖아?”


“이 멍청아! 생각 좀 해 봐라!”


우에스기 중위는 이렇게 단순한 친구에게 크나큰 답답함을 느낀다.


“민간인 신분으로 특무기관에 소속되었다가 일이 잘못되서 적에게 잡힌다고 치자. 그럼 특무기관이 우리 구해줄 것 같냐? 모든 관계를 부정하고 입 싹 씻어버릴 게 당연하잖아!”


“어? 그런 거였냐?”


쿠스노기 중위는 그제야 특무기관에 민간인으로 일한다는 숨은 뜻을 이해해버리고 만다. 쿠스노기가 이에 성을 내기 전에, 후지무라가 싱긋 웃으며 대답한다.


“중좌님의 의도는 너무 뻔해서 추리할 필요조차도 없다. 우리에게 일이 잘못된 책임을 전가하고 그 책임을 빌미로 이용할 대로 이용하겠다는 거겠지.”


“아니, 너 정도로 머리가 돌아가는 녀석이 그걸 알면서도 왜?”


“오히려 내겐 이게 엄청난 기회로 보이거든. 이런 기회를 얻을 준 생각도 못했어.”


우에스기 중위와 쿠스노기 중위는 친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라 어안이 벙벙하다. 후지무라 중위의 입에서 나직히 이런 소리가 나온다.


“이 기회에 일본을 뜨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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