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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활극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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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KKA
작품등록일 :
2019.07.10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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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15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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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24 2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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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7쪽

302화

DUMMY

안 박사가 헌병대 조사실로 소환되기 얼마 전, 아오야기 테츠오 중위는 그 어두컴컴한 지하공간에서 심문받고 있었다.


“중위! 이건 계속 귀관이 입 다물고 있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그를 이렇게 다그치는 심문관은 해군성 특수경찰대에서 파견된 조사관, 흑색 해군제복 차림의 미즈노 카이토 대위였다. 관동군 헌병사령부의 시라키 대위가 심문을 끝낸 후에야 이 사건의 중요용의자인 아오야기 중위를 심문할 수 있게 된 그는 그를 심문하며 속이 꽉 막히는 답답함을 느껴야 했다. 아오야기 중위는 모든 추궁에도 입을 전혀 열지 않던 것이었다. 그저 묵묵히 고개를 푹 숙인 채, 미즈노 대위가 흡사 눈 앞에 없기라도 하듯이 앉아만 있을 뿐이었다.


“본관은 귀관에게 최소한이라도 살아날 길을 제시하고 있다! 아직도 그걸 모르는가? 사관학교 수석졸업자가 그걸 모를 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미즈노 대위가 말한 ‘살아날 길’이라는 건 사실 본인도 그닥 확신하지는 않고 있었다. 그것은 특수경찰대 상부에서, 더 정확히는 해군성이 직접 제시한 길이었다.


조선군 헌병사령부 소속이자 이른바 육해군 합동수사본부장인 기타무라 소좌와의 입씨름과 명목상 자신의 부하로 배속된 해군육전대 중대장 마쓰우라 중위의 이해할 수 없는 움직임 이후, 그는 해군암호전신을 사용해 상부에 상황을 보고하였다. 육군 헌병이 수사에 제대로 협조하지 않고 있으며, 해군육전중대는 본인의 수사지휘에 불만을 품고 있는게 명백하다는 것이 보고의 요지였다.


이에 상부에서는 급히 육군헌병 병력을 견제하기 위해 검토시간을 최소화한 채 실전경험의 유무를 우선 판단하여 그 중대를 파견한 것임을 인정하였고 육전중대에 따로 지휘체계를 명확히 하라는 명령이 해군군령부를 통해 하달될 것임을 밝혔다. 그리고 대위에게는 명확한 수사지침이 하달되었다.


아오야기 테츠오 중위 및 이 사건에 직접 관련된 관동군 장교들을 추궁하여, 이 횡령사건이 관동군 상층부와 얼마나 연관되었는지, 그리고 이에 더불어 육군성과 육군참모본부는 어디까지 연관되었는지 알아낼 것.


중위 계급장을 달자마자 해군 특수경찰대에서 일해 온 미즈노 대위에게는 그 지침이 의미하는 바를 명확히 알았다. 상부에서 그에게 요구하는 것은 너무나도 명백했다.


이 사건을 어떻게든 육군에 타격을 줄 사건으로 만들라.


막부 말기 조슈와 사쓰마의 갈등과 충돌에서부터 시작된 제국육해군의 충돌은 만주사변 이후 가시화되고 있었다. 시베리아 출병이 종결되고 국내에 반전 평화주의 사조가 몰려오던 10여년 전에는 육군이 처음으로 군축대상이 되고 위세가 떨어지며 그래도 조용했었다. 그러나육군이 관동군의 독단행동으로 만주를 제국의 세력권으로 완전히 가져오자 육군의 위세는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치솟았다. 육군 장교들이 음으로 양으로 해군을 무시하고 업신여기는 태도를 보인게 한 두번이 아닌 실정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육군 장교들이 가담한 이번 횡령사건은 해군성이 이를 빌미로 육군성을 틀어잡아 향후 예산편성을 비롯한 여러 갈등소지가 있는 문제에서 주도권을 잡으려는 좋은 기회인 것이었다. 일을 저지른 육군에 짜증이 가득 나있던 미즈노 대위 입장에서도 육군 놈들에게 한방 먹여줄 수 있는 방향으로 수사가 진행되면 대단히 속이 시원할 일이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이는 분명 관동군 상층부와 관련된 일이 분명해 보였다. 어떻게 중위 계급 장교 4명이 이런 담대한 일을 꾸미고 실행할 수 있단 말인가?


“이 사건은 그 친구들이 독단적으로 꾸민 거요.”


관동군 헌병사령부 대표인 시라키 대위가 딱 잘라 그에게 한 말이었다.


“귀측에서 횡령을 주도한 주계장교 및 군속들과 아는 사이었는데, 그 과정에서 횡령이 논의된 것이오. 우리 쪽에서도 참 당황스러운 일이라오. 어떻게 이런 일을 꾸밀 수 있었는지······..”


그 말에 미즈노 대위는 정면에서 코웃음을 쳤었다.


“거 참 놀라운 일이올시다. 저 만주를 제국의 품에 가져다준 위업을 세운 관동군이, 알고 보니 그렇게 위계질서도 없는 조직이었다니 말이오! 그리고 그 말이 맞다면, 그 친구들이 이번 사건 주범들과 교류한 증거를 확보했다는 것 같은데, 그거 공유해줄 수 있소?”


그 말에 시라키 대위는 대단히 불쾌하다는 듯 눈썹을 씰룩였지만, 무언가 험한 말을 입에서 내뱉진 아니하였다.


“관련 증거자료는 아직 조사중이요. 명확히 해야 할 게 더 필요하오.”


“아예 없는 건 아니고 말이오? 그쪽 특무기관이 만들어내고 있는 중은 아니고?”


“못 믿겠으면 내가 그쪽이 우리 사령부와 참모부를 한번 조사할 수 있게 해달라고 건의를 올릴 수 있소. 그렇게 하고 싶으면······.”


“됐소! 어차피 당신네 사령부로 가봤자 나올게 뭐겠소? 이런 중대사건에 관해서 그쪽이 기록 하나라도 남겼겠소이까?


미즈노 대위는 코웃음을 치고 대화를 끝내버렸다. 장쭤린 폭살사건과 만주사변에서 볼 수 있듯이, 관동군에는 정해진 위계질서를 무시하고 일을 터트리는 자들이 한둘이 아니긴 하다. 그 중 세명이 관동군 참모부 각 부처의 참모장교들이라는 점이 그 설명을 뒷받침해주기도 한다. 그래도 저들의 독단만으로 이런 일을 꾸몄을 것이라는 설명은 그 누구도 납득할 수 없을 터였다.


그러나 관동군 상층부와 용의자들 간에 무슨 지시가 오고갔는지 밝혀내는건 결코 쉽지 않았다. 관동군 소속 용의자 4명 중 3명은 현재 육군병원에 입원중이었다. 그들이 횡령한 자금을 강탈한 불령선인과 교전하다가 죄다 당했다고 한다. 다들 목숨에 지장은 없지만 육군병원 측에서는 안정이 필요하단 이유로 면회나 접견을 막고 있었다.


그래서 현재 유일하게 조사가 가능한 대상은 아오야기 테츠오 중위 한 명 뿐이었다. 일로전쟁 당시 203고지에서 공훈을 세운 조슈 출신 퇴역중장의 아들이자 육군사관학교 수석 졸업자라는, 조슈 번벌의 일부라는 배경과 자신의 능력을 모두 갖춘 전도유망한 장교였다. 그런데 몸에서 혼이 다 빠져나간 것 같은 이 중위는 30여분 째 지극한 답답함만 불러일으키는 존재였다. 미즈노 대위가 어떤 말을 해도 대답 하나 안하는 것이 아닌가!


“중위! 묵비권을 행사하면 행사할 수록 귀관에게 불리할 뿐이다!”


미즈노 대위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지금 귀관은 매우 심각한 상황에 처해 있다! 그렇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으면 관동군사령부에서 귀관을 책임져 줄 수 있을 것 같나? 그렇게 생각한다면 귀관의 크나큰 착각이다! 사령부가 귀관과 귀관의 동료들을 희생양으로 삼을 것임은 너무 뻔한 일 아닌가?”


그럼에도 아오야기 중위는 대답 하나 없다. 미즈노 대위는 더더욱 말에 흥분을 섞는다.


“관동군사령부건 육군성이건 참모본부건 이 일에 책임을 지겠다고 나서는 사람은 없다! 그들은 귀관이 다 책임을 뒤집어 쓰고 조용히 사라져 주기만을 바랄 뿐이다! 계속 묵비권을 행사하여 그들을 보호하려 해도 아무것도 돌아오지 않는단 말이다! 억울하고 분하지도 않은가?”


미즈노 대위는 이때, 푹 숙인 얼굴 너머에서 이 불쌍한 육군중위의 안면이 움찔거리는 걸 보았다. 입으로만 나오지 않았지 분명 반응이 있다고 판단한 대위는 더더욱 목소리를 높인다.


“귀관은 중대한 범죄행위에 가담했고 분명 책임을 져야 한다. 하지만, 이 일에 관련된 모든 자들이 응당 져야 할 책임까지 전부 덮어써야 할 이유는 없다! 귀관이 수사에 제대로 협조하고 이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데 도움을 준다면, 귀관은 지지 않아도 될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귀관은 사건의 주범이 아닌 종범으로 판명될 것이다. 상부의 강압에 어쩔 수 없이 불법적 명령을 수행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자연히 형량도 크게 줄어들고 명예에도 손상이 크게 가해지지 않을 것이다. 귀관이 택해야 할 선택이 무엇인지 명확하잖는가?”


그러나 힘을 주어서, 그리고 반쯤은 진심을 담아 말했건만, 아오야기 중위의 침묵은 계속되었다. 미즈노 대위는 더더욱 답답해져서 다시 무슨 말을 하려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 순간, 작긴 했지만 분명 목소리가 들렸다.


“상관······. 없습니다······.”


“응? 뭐라 말했나?”


미즈노 대위가 추궁하자, 아오야기 중위가 서서히 고개를 든다. 해군대위는 그 눈을 보고 가슴이 철렁했다. 아오야기 중위의 눈은 죽어 있었다. 그가 조사관으로 참여했던 투신자살한 수병의 눈을 연상케 할 정도로 빛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이게 어딜 봐서 살아 움직이는 사람의 눈이란 말이던가!


미즈노 대위가 차마 할 말을 잃은 사이, 아오야기 중위가 더듬더듬 말한다. 그 대답은 미즈노 대위가 기대한 답이 전혀 아니었다.


“이젠······. 아무래도······. 상관······. 없습니다······. 본관이 주범이 되건······.. 종범이 되건······. 본관 한명에게······. 책임이 다 쏠린다 해도······. 아무래도······. 상관······. 없습니다······..”


“중위! 그럼 귀관의 미래는 끝장난다!”


어안이 벙벙했던 미즈노 대위가 바로 성화를 낸다.


“귀관의 명예는 짓밟히고 휴짓조각이 되버린다! 귀관이 그런 식으로 받지 않아도 될 처벌까지 받고 출소한 후에 어찌 살려고 그러나? 아무래도 상관 없는 일이 절대 아니다! 귀관이 그저 증언만 잘 해주면 되는 문제를 어찌 이리 힘들게 가려 하는가! 귀관의 부친을 생각해 보라! 일로전쟁에서 제국을 위해 큰 공훈을 세우신 분 아닌가! 그런데 귀관은 그런 부친의 명예에까지도 누를 끼칠 셈인가?”


그러나 아오야기 중위는 그저 탄식하듯 말할 뿐이다.


“이미 본관은······.. 모든 걸 망쳐버렸습니다······. 제 미래도······. 제 명예도······. 아버지의 명예도······. 동료들의 명예와 미래도······.. 차라리······.”


아오야기 중위의 눈에 눈물이 고인다.


“할복을 지시받았으면 좋겠습니다······.”


미즈노 대위는 그 말에 한숨을 내쉬었다. 답답함에 뒤이어 동정심이 올라왔다. 자기가 어찌될 지는 생각도 안하고 있다. 그저 이미 정신적으로는 죽었는데 육체적으로도 죽여달라고 하고 있다. 육군 장교에게 이런 연민의 감정을 가지게 될 일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오야기 중위에 대한 수사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육군병원에 입원중인 장교들을 당장 수사할 수는 없다. 사실 그는 입원치료는 핑계고 그저 자신의 수사를 방해하려는 헌병의 술책이 아닌가 의심도 하고 있다. 어떻게든 아오야기 중위에게서 증언을 이끌어내야 한다. 그는 우선 해군성이 원하는 방향으로 수사를 진행하기 전에 이 불쌍한 관동군 작전과 참모장교를 어떻게든 설득해야 한다고 느낀다.


“중위. 본관이 보기에 귀관은 참 책임감 있고 순수한 사람일세. 하지만 그 때문에 이용당한 걸세. 귀관 스스로를 더 생각해 주게. 할복한다면 귀관의 명예도 지켜지고 편하기도 하겠지. 하지만 그럼 이 사건의 진실은 영영 묻혀버리고 진정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 책임지지 않게 된다네. 이게 옳은 일인가? 물론 귀관은 책임감이 워낙 강해서 그런 사람들의 책임까지 다 껴안고 싶겠지. 하지만 그래서 귀관에게 돌아오는 건 뭔가? 귀관은······.”


그때였다. 조사실 문이 벌컥 열렸다. 들어온 사람은 수사본부장, 기타무라 헤이스케 소좌였다.


“아. 조사 중인데 실례.”


“뭡니까?”


미즈노 대위는 경계감을 숨기지 않고 드러낸다. 기타무라 소좌가 이번에 무슨 소리로 자기 수사를 방해하려는지 몰랐다. 그런데 소좌는 평소 그 사람을 어떻게 괴롭힐지 계획하며 희희낙락하는 기분나쁜 웃음을 짓지 않았다. 기분이 언짢다는 듯 입술이 불쾌하게 굳어 있다.


“이놈 잠깐 데려가겠다는 분이 오셔서 말이야. 오늘은 조사 중단하고 내일 해야겠어.”


“예? 누가 말입니까?”


소좌는 그 물음에 답하지 않고 조사실 문간에서 비킨다. 다음 순간, 조사실 안으로 새로운 사람이 들어왔다. 입술이 툭 튀어나오고 눈이 가느다라며 코가 둥근, 흡사 웃지 않는 불상을 연상케 하는 얼굴이었다.


해군대위는 그가 누구냐고 물어보기 전, 그의 양 어깨에 달린 견장에 눈이 들어왔다. 중좌 계급장이었다.


“실례하겠네, 대위.”


그 중좌가 말했다. 흡사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은 몽롱한 목소리였다.


“본관의 중대한 공무 때문에 아오야기 테츠오 중위를 잠시 빌려가야겠네.”


갑자기 중좌 계급장의 육군 중견장교가 와서 이러니 미즈노 대위는 순간 당황했지만, 바로 날카롭게 묻는다.


“죄송합니다만······. 어디 소속의 누구십니까?”


그 순간, “주······. 중좌님!”하는 아오야기 중위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미즈노 대위는 직감적으로 아오야기 중위가 이 중좌를 알고 있음을 파악했다. 그렇다면 이자는 관동군사령부에서 파견된 사람이 분명하다.


“사건 관련자라면 곤란합니다. 아오야기 중위는 아직 조사중이고 현재 면회나 접견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아, 그건 어쩔 수 없어.”


기타무라 소좌가 나선다.


“사령부에서 허가가 내려왔거든. 본관도 좀 이러긴 그렇지만, 지시는 지시니까.”


소좌의 눈에는 못마땅함이 엿보였기에, 미즈노 대위는 최소한 이 상황이 소좌가 의도하지 않은 것임은 알았다.


중좌는 아오야기 중위에게 눈길을 돌린다.


“일어날 것을 귀관에게 명하노라. 본관과 갈 곳이 있을지니.”


미즈노 대위는 이런 상황만 아니었다면 이 중좌가 중위를 대하는 말투에 웃음을 터트렸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였다. 에도시대도 아니고 요즘 시대에 저런 고어체로 말하는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럼에도 아오야기 중위는 벌떡 일어서서는, 그 중좌의 명령에 따라 넋 나간 표정으로 조사실을 나가는 것이었다.


“오늘 안으로 복귀시켜 준다 하시니까, 취조는 내일 하게. 알았나?”


소좌의 말에 미즈노 대위는 석연찮은 감정을 느끼면서도 별 다른 방도가 없음을 알았다.


한편 아오야기 중위는 가슴이 꽉 조여드는 감각과 함께 이시와라 간지 중좌의 뒤를 따랐다. 심장은 요동치고 다리는 떨렸다. 방금 전까지 그의 마음을 채우고 있던 자포자기의 감정은 한량없는 두려움으로 바뀌었다. 그의 우상, 그의 숭배의 대상이 어떤 말을 쏟아낼지, 임무를 무참히 실패한 그를 어떻게 볼 것인지가 두려움의 근원이었다.


이시와라 간지 중좌는 말 없이 걸었다. 조사실이 있는 헌병대 건물을 나오고서야 한마디 하였다.


“아오야기 군. 귀관에게는 참으로 실망하였도다.”


그저 한 마디만 했을 뿐인데, 아오야기 중위는 그 자리에 쓰러질 뻔한다. 그 다음에는 정말로 주저앉을 뻔했다. 그를 돌아보는 이시와라 중좌의 얼굴은, 한때 어느 신사에서 본 다이고쿠텐(大黑天)의 그림과 같이 무시무시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어떻게 일을 망쳐도 이리 망칠 수가 있는지 진지하게 묻고 싶노라. 그저 가방만 옮기면 되는 일은 일개 이등졸에게 맡겨도 할 수 있는 일이었을진저! 그런데도 아오야기 군은 실패했단 말이던가? 귀관이 그 조선인 계집에게 홀린 게 그 근원임을 알았을 때 사령관 각하부터 격노하셨도다! 사령부와 참모부의 모두가 귀관의 이름을 알게 되고 귀관의 어리석음에 한탄하고 있을지니!”


계속해서 쏟아지는 힐난에, 가장 존경하고 목숨바쳐 충성하겠다고 맹세했던 그가 내뱉는 힐난에, 아오야기 중위의 몸에서 힘이 완전히 빠져나갔다. 중위는 그 자리에서 털썩 무릎을 꿇어버리고 만다.


“죄송합니다! 다 본관의 책임입니다! 본관이 어리석어 모든 걸 망치고 끝도 없이 민폐를 끼쳤습니다!”


중위의 두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흐른다. 굵은 눈물방울이 바닥에 뚝뚝 떨어져 번진다.


“중좌님! 본관에게 할복을 명해 주십시오! 도움 없이 할복하여 고통속에 죽어가며 본관이 질 수 있는 최대한의 책임을 지겠나이다! 이 수치를 않고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마지막 자비를! 부디 마지막 자비를 베풀어주소서!”


아오야기 테츠오는 이제 중좌를 향해 절한다. 머리를 바닥에 찧다시피하였다.


그런데, 그를 부르는 이시와라 중좌의 목소리는 한층 부드러워진다.


“기립할지어다, 아오야기 군이여.”


기립 두 글자에 아오야기 중위는 조건반사적으로 벌떡 일어나 차렷자세를 취한다. 눈물짓는 그를 바라보는 이시와라 중좌의 얼굴은 다이고쿠텐의 격노한 표정이 아닌, 불상의 인자한 표정을 짓고 있다.


“본관은 그런 방식으로 귀관에게 책임을 지우고 싶지 않노라. 할복을 청하는 귀관의 뜻은 잘 알겠고 또 감명깊은 것이나, 귀관은 더 오래, 더 다른 방향으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중좌는 그 말에 대답해주지는 않는다.


“우선 가면서 들을지어다. 귀관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도 말해주어야 할 사항일지니.”


그러며 이시와라 중좌는 발길을 옮긴다. 아오야기 중위는 이시와라 중좌가 자신에게 다시 인자함을 보여준 것으로도 안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상스러운 불안감이 가슴 속에서 싹틈을 느끼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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