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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KKA 님의 서재입니다.

경성활극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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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KKA
작품등록일 :
2019.07.10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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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15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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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14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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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쪽

304화

DUMMY

친구의 입에서 나온 충격적인 말에 두 중위는 입을 딱 벌린다.


“일본을 뜨자니! 그게 무슨 말······”


우에스기 중위의 경악이 담긴 말은 중간에 끊긴다. 병실 문이 덜컥 열렸기 때문이었다.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그들이 며칠 만에 보는 친구였다.


아오야기 중위는 친구들을 보자마자 울상이 되어 바로 털썩 엎어지듯이 무릎을 꿇어버린다. 그들을 보자마자 반드시 하겠다고 수도 없이 다짐한 행동이었다.


“미안하다! 다 내 잘못이야! 내가······. 내가 다 망쳐버렸어!”


그 진심 가득한 목소리에 친구들은 일순간 입에서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그들은 마음에 찌르는 것 같은 고통을 느낀다. 아오야기 테츠오가 어떤 사람인지 알기에, 자신이 누군가에게 폐를 끼쳤다 생각하면 무한히 반성하다 못해 자학까지 이를 수 있는 사람인지 알기에.


“테츠······.. 우리 중 아무도 너 탓하는 사람 없다.”


침묵 속에서 후지무라가 먼저 입을 연다. “그렇지?”하며 동의를 구하는 그의 눈빛에 우에스기 중위도 고개를 강하게 끄덕이고 쿠스노기 중위는 큰 목소리로 동의한다.


“당연하지! 이건 다 그 망할 불령선인 가짜 백작놈과 그 요사한······.”


그러나 쿠스노기는 흥분에 겨워 주리를 모욕하는 말을 하려다, 아오야기가 어떻게 반응할지 몰라 입을 다물고 만다.


“그 얘기는 나중에 해도 될 거야. 일단 지금 중요한 얘기를 해야 한다. 그러니 계속 그렇게 있지 말고 좀 일어나 줘.”


후지무라의 부탁에 아오야기는 극히 어두운 얼굴로 꿇은 자세에서 몸을 일으킨다.


“이시와라 중좌님이 너에게도 불명예전역 후 봉천특무기관에 기용될 거라고 말씀하셨지?”


“그래······.”


“근데 중좌님 말로는 네가 처음에는 그러겠다고 했다가 갑자기 더 시간이 필요하다 했고.”


“맞아······.”


“어째서였지?”


“그게······. 중좌님이······.”


아오야기 중위는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 겨우겨우 입을 뗀다.


“너희들도 내가 특무기관에 들어간다면 너희들도 같이 들어가는 거라고 하셨거든.”


“아, 맞아. 중좌님이 우리에게도 그 자리를 제안했어.”


우에스기 중위의 말이었다.


“근데 그게 왜?”


“그게······. 이 일의 책임은 나 혼자 지는 게 맞는 거라 생각하거든.”


“뭐?”


그렇게 말하는 아오야기의 얼굴은 대단히 진지하다.


“나도 특무기관에 소속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는 잘 알아. 우리가 지난 사변에서 겪은 실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위험한 임무에 투입될 수 있다는 거. 중좌님은 내게 이런 식으로 책임을 지게 하실 생각이셨던 거야. 그게 나 혼자 책임을 진다면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어. 가령 모스크바에 가서 스탈린을 암살하라는 명령을 받더라도. 하지만······. 너희들까지 그럴 위험에 처하게 할 수는 없어. 이 임무의 실패책임은 전적으로 나에게 있으니까. 나는 모든 책임을 지고 민폐를 끼친 대가를 치르고 싶은 것 뿐이야. 너희들까지 책임지는 건······.”


아오야기의 말은 후지무라 중위의 깊은 한숨에 끊긴다. 우에스기 중위도 뒤따라 한숨을 쉬고 쿠스노기 중위는 눈에 눈물이 맺힌다.


“테츠. 네 뜻은 잘 알겠다. 네가 다 짊어지고 싶다는 거 다 알겠어. 하지만, 네가 그래야 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넌 인류의 원죄를 모두 다 짊어지고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야. 네가 짓지도 않은 죄까지 다 책임지겠다는 건 친구인 내가 볼때 너무나도 보기 괴롭다.”


“그래도 난 너희에게 엄청난 폐를 끼쳤어! 그걸 갚지 않으면······..”


아오야기 중위가 절박하게 말하지만 후지무라는 단호히 끊는다.


“끼친 민폐로 따지면 내가 너에게 진작 그랬어. 세츠코 문제로 퇴학당할 뻔 한거 네가 백방으로 노력해서 막았잖아? 네가 아니었다면 난 퇴학당하고 아무것도 아닌 인간이 되었을 거다.”


“하지만 이번은 경우가 너무 달라! 나 때문에 너희들의 미래도 엉망이 되어버렸다고!”


그 말에 후지무라가 강하게 말한다.


“미래는 모르는 거야. 오히려 이번이 기회가 될 수도 있어. 이제까진 나도 대단히 암담했었는데, 오늘 중좌님 제안을 듣고 갑자기 계획이 생각났다.”


“계획이라니? 무슨······..”


후지무라는 아오야기에게도 드디어 본론을 말한다.


“특무기관에 기용되어 해외로 파견나가면, 그 날로 탈주해서 일본을 뜨는 거야!”


그 말에 아오야기는 놀라 입을 벌렸으나, 너무 놀란 나머지 아무 소리도 하지 못한다.


“조용히! 절대로 밖에 새어나가면 안 돼!”


후지무라가 다급히 속삭인다. 물론 아오야기는 놀라 그 자리에 굳어진 나머지 아무 소리도 하지 못한다.


“우리가 봉천특무기관에 기용된다 치자. 테츠 네가 예상한 대로 분명 우리는 사무실에 앉아서 정보분석을 하는 게 아닌 어디든 현장에 파견될 거야. 지나가 되었건 소련이 되었건 간에. 어떤 불가능한 임무라도 수행하라고 거기로 내보낼 거야. 그렇다면 해외로 뜰 기회가 생기지. 특무기관의 감시를 벗어날 기회를 노리다가, 기회를 잡았을 때 도망치는 거야. 잡을 수 없는 곳으로!”


“맙소사. 해외로 내빼 잠적하자니······. 농담하는 것도 아니고······.”


우에스기가 차마 형용하기 어려운 얼굴이 된다. 하지만 후지무라는 엄중하게 말한다.


“특무기관에 계속 있어봤자야. 네가 예측했듯이 언젠가는 이용만 당하고 불가능한 임무를 하달받은 채 해내려고 애쓰다가 버림받아서는 적국의 방첩기관에 잡혀서 고문받다 죽겠지. 거기 들어가는 걸 거부한다면 군법재판을 받고 이 사태의 모든 책을 다 뒤집어쓴 채로 형무소 감방에서 인생을 낭비할 거야. 출소 이후에는 범죄이력 때문에 어디에서도 받아주지 않는 몸이 되버릴 거고. 그럴 바에야 차라리 이 나라에서 사라지는게,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새출발 하는 게 더 낫지 않겠어?”


그 말에 우에스기 중위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끔찍한 형무소 감방에 있다가 나와서 인생 패배자라고 조롱받으며 살아가는 인생과 특무기관 정보요원으로 이용당하다가 처리되는 인생만 남을 줄 알았다. 하지만 후지무라는 그 두 가지 파멸을 피할 수 있는 제3의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최악의 선택지만 남은 줄 알았는데 더 나은 선택지가 제기된 것이다.


하지만 그 선택지를 고르기 전에 두려움이 앞선다.


“그래도 특무기관은 바보가 아니야. 분명 우리에게 목줄을 건 이상 감시할 놈을 붙일 거라고. 그게 누가 되던 말이야. 대놓고 감시하는 사람이라면 또 몰라. 누가 밀정으로 기용되어서 우릴 아무도 모르는 새 감시할지도 모른다고. 그런 마당에 해외로 튀는 게 가능할까?”


그 말에 후지무라는 다소 표정이 어두워진다.


“그게 가장 큰 문제긴 하다. 분명 감시가 붙겠지.”


그럼에도 그의 결의는 확고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대로 앉아서 죽을 수는 없잖아? 나중에 이것조차도 해보지 않았다고 후회하며 죽어가고 싶진 않다. 불확실하고 위험할지라도 희망이 있는 기회가 눈 앞에 있어. 그건 그때가서 생각해도 늦지 않는다. 그리고 해외로 나갔을 때 누가 우릴 감시하고 있는지 모른다면······.”


후지무라는 그러고는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으며 자기 머리를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린다.


“내 추리력을 믿어 봐.”


“그래. 퍽이나 안심이다.”


우에스기는 위험은 그때가서 감수하겠다는 후지무라의 계획에 비꼬는 말이 저절로 나온다. 심하다 싶을 정도로 불확실하지 않은가? 그러나 한편으로 친구의 놀라운 추리력을 믿기에 안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어서 심정이 복잡해진다.


“야. 근데 그거 밖에 정말 없냐?”


쿠스노기가 울상이 된다. 그 고릴라 같은 얼굴이 이렇게 찌푸려지니 한편으로는 우스꽝스럽기도 하다. 그러나 자기가 말해 놓고 대안이 사실상 존재하지 않음을 스스로 깨달은 그는 현실을 인정하고 만다.


“그래. 어차피 집안에선 망신거리 취급 당할 거고, 장인어른은 나 버릴 거고, 마누라에겐 이혼당할 거고······. 모르겠다. 이거라도 해 봐야지.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다 똑같은데······.”


“좋아. 우리가 어디로 갈 거냐면······..”


그런데 후지무라의 말을 끊는 목소리가 있다.


“토비······.. 미안하지만······.. 난 네 계획에 동참 못한다!”


그 목소리의 주인은 아오야기였다. 그의 얼굴이 흥분으로 붉게 상기되고 있다.


“너희들이 도주하는 걸 막을 생각은 없다. 하지만 난 그렇게 못해! 나는 어떤 형태건 임무실패의 책임을, 이시와라 중좌님을 비롯해 여러 사람들에게 끼친 민폐의 책임을 반드시 져야 한다고! 그런데 도주하라는 건 나더러 그 책임을 회피하고 도망치라는 것과 다를 게 없어! 제국군인으로서 절대 할 수 없는 일이다!”


“야! 그럼 앉아서 죽게? 이용당하다가 뒷골목에서 총맞아 죽겠다고? 너 정신이 있냐?”


우에스기가 답답함을 못참고 버럭 소리를 지를 뻔 한다. 하지만 아오야기는 단호하다.


“그런 죽음으로 내가 끼친 민폐의 책임을 질 수 있다면, 당연히 받아들일 것이다!”


테츠, 이 미친놈아! 우에스기는 아오야기의 완고함을 알기에 이런 반응을 예상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막상 들으니 가슴이 꽉 막혀서 욕설이라도 입에 담을 기분이다. 아오야기의 그 태도에 후지무라의 표정이 무서워진다.


“테츠. 네가 정말로 올곧고 바른 사람인 건 잘 알아. 책임에서 벗어나지 않고 정면으로 바라본다는 건 훌륭하고 존경받을 일이야. 하지만, 지금 그래야 할까? 책임 져야 할 사람은 따로 있는데 네가 그자의 책임까지 다 지고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내 크나큰 탓이오 하면서 자기파멸로 가야 할 이유가 있을까?”


“하지만 내 책임이 크다! 그걸 반드시 져야······.”


“이건 네 책임 아니야. 민폐끼쳤다고 괴로워할 이유도 없어. 민폐는······.”


후지무라가 그 순간 병실 문으로 시선을 돌린다. 잘 닫혀 있는지 확인하려는 것이다. 그러고는 목소리를 최대한 낮춘 채 말한다.


“민폐는 이시와라 중좌님이 먼저 끼쳤어. 다른 사람도 아닌 우리에게.”


그 말에 아오야기는 입을 다시 쩍 벌리고 아무 소리도 못낸다. 후지무라는 그 틈에 그 조선요리집에서 지시를 하달받았을 때부터 흉금에 쌓여있던 생각을 털어놓는다.


“중국 폭력조직들과 러시아 백군 잔당들을 통해 중국 또는 소련과 전면전으로 비화될 수 있는 암살을 의뢰한다고? 그리고 거기 쓰일 자금은 해군 예산에서 횡령한 돈이라고? 그리고 그 돈을 우리가 전달하라고 해 놓고는 실패하자 우리가 다 책임지라고? 이게 책임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할 소리야? 그 계획 세운 분이 할 소리야? ”


아오야기는 충격에 갈피를 잡지 못한다. 그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같이 이시와라 중좌의 신실한 추종자라고 믿었던 후지무라 토비자루 중위가, 이시와라 중좌에게 분노를 쏟는 것이다.


“이 건에 가장 크게 책임을 지셔야 할 분이, 자기는 책임을 직시하지 않고 내뺀다고?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라고 생각해?”


그 말에 우에스기 중위는 긴장한다. 쿠스노기 중위도 마찬가지였다. 아오야기 중위가 고함을 지르며 후지무라 중위에게 달려들 것을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다행이도 예상은 완벽히 빗나갔다.


“중좌님은······. 중요하신 분이야······.”


아오야기 중위가 힘이 빠질 대로 빠진 소리를 토해낸다.


“니치렌 대성인과 다나카 선생님의 높으신 가르침 아래······.. 오족협화가 완성된 왕도낙토의 이상국가를 만주에 만드려는 분이라고······. 그리고 서양의 패도에 맞서······. 동아세아 전체를 동아연맹으로 단결시키고······. 세계최종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전 세계가 왕도낙토가 되는 팔굉일우의 세계로 전 세계를 이끄실······..”


아오야기의 그 태도가 가진 의미를 후지무라가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스스로 납득하지 못하고 있지. 안 그래?”


그 말에 아오야기는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를 떨군다.


“이젠 나도······. 뭐가 뭔지 모르겠다······. 세계최종전쟁으로 정말 항구적 평화가 올지······. 전쟁에서 패배한 서양이 우리의 왕도와 팔굉일우의 세상을 받아들일지······ 그 전에······. 세계최종전쟁이란게 정말 있을지······.”


그 말에 후지무라는 매서운 표정을 푼다. 그의 얼굴에 안도의 미소가 지어진다.


“거기까지 생각한 것만으로도 큰 진전이다.”


“하지만······. 너도 믿었잖아.”


아오야기가 고개를 들어 친구를 바라본다.


“너도 나와 같이 이시와라 중좌님을 진심으로 받들고 함께 남묘호렌게쿄를 호념하며 니치렌 대성인과 다나카 선생님의 가르침을 모셨잖아. 그런데 너도 어떻게······.”


“그래. 믿었지. 니치렌 대성인의 가르침 아래 모두가 다 천황 폐하의 백성으로서 동등히 대접받는 날이 세계최종전쟁으로 실현될 거라는 중좌님의 말씀에 넋이 나갔었지. 팔굉일우의 세상이 오면 부라쿠민도 천대받지 않고 폐하의 백성으로서 평등하게 대우받을 거라는 말씀에 가슴이 뛰었지. 그런데······. 다른 것들을 접하고 더 생각해 보니 뭔가 이상하더라고.”


후지무라는 그러며 자기 손에 잡힌 걸 들어 보인다. 성경책이었다.


“세상이 대전쟁 끝에 종말하고 더 훌륭한, 더 나은 새로운 세상이 온다는 가르침은 니치렌 대성인만 말한 게 아니야. 당장 여기, 성경의 요한묵시록부터 그렇게 쓰고 있어. 세츠코가 하도 권유하기에 성경을 읽어 봤는데, 이걸 보니까 너무 기시감이 들었어. 성경의 마지막 장인 요한묵시록은 아마게돈이라는 선과 악의 최후의 전쟁 끝에 믿는 자들이 승리하고 적그리스도의 세력이 패배한다는 내용이야. 그리고 그리스도교의 신, 야훼 하느님이 산자와 죽은자를 모두 심판해 죄인을 영원한 불못에 던지고 믿는 자들을 영원한 낙원으로 이끈다고 하지. 이 요한묵시록에서, 솔직히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의 위치에 니치렌 대성인을 넣어도 이야기가 되는 거야.”


그 말을 할 수록 아오야기 중위의 몸이 떨려온다. 후지무라는 개의치 않고 말을 계속한다.


“성경 뿐만이 아니야. 북구 신화에도 세상이 선과 악의 최후의 전쟁 끝에 멸망하고 다시 탄생한다는 이야기가 있어. 회교도 마찬가지고. 바라문교에서는 아예 창조신인 범천과 파괴신인 대자재천의 뜻에 따라 세상이 창조와 멸망, 그리고 재창조를 순환한다고 하지. 내 생각에는 세계최종전쟁론의 근거가 된 묘법연화경의 말법시대 언급도 여기서 영향을 받은 거 같아. 불교도 따지고 보면 바라문교에서 나온 거니까. 요는 뭐냐면, 선악의 최후전쟁이라는 서사는 어디에서든지 찾아볼 수 있는 서사란 거야. 니치렌 대성인과 다나카 선생, 그리고 이시와라 중좌님이 특별한 진리, 독창적이고 전례없는 가르침을 말한 게 아니었어.”


그 말에 아오야기는 더더욱 힘이 빠진 채, 그가 믿어왔던 것이 사실 별게 아닌 것임을 안 사람이 그러듯 어딘가에 기대어 숨을 헐떡이고 싶은 심정이 된다.


“그래도 나는 이시와라 중좌님을 믿었어. 세츠코를 사랑했다는 것 만으로도 쫓겨날 뻔하고 한직만 맴돌며 천대받게 되니까 세상이 뒤집어지고 활활 타는 꼴을 보고 싶었거든. 이상적인 왕도낙토가 오지 않더라도, 그저 지금 상황에서 뭔가 급격히 뒤엎어지는 걸 보고 싶었던 거야. 아마 볼셰비키들도 나와 같은 심정으로 혁명에 뛰어든 거였을 게다. 그래서 세계최종전쟁을 보고 싶었기에 중좌님을 따랐어. 근데 중좌님이 이렇게 나오니, 이젠 더 이상 그럴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그럼······. 우린 뭐가 되지?”


아오야기가 부르짖듯 말한다.


“다가올 세계최종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만주국을 독립된 만주인의 민족국가이자 오족협화가 이루어진 왕도낙토로 만들어야 한다는 믿음으로 작년에 작전을 개시한 거잖아? 만주를 왕도낙토로 만들기 위해! 그럼 우린 뭘 한건데? 작년에 우린 뭘 한건데? 다가올 세계최종전쟁이란 말이 어느 나라에나, 어느 종교에나 다 있는 거라면 우린 뭘 한건데?”


이때 우에스기의 얼굴이 극도로 어두워진다.


“테츠. 네가 말한 그거, 만주국이 만주인의 독립된 민족국가이자 오족협화가 실현된 왕도낙토가 된다는 거, 그거 지금 와서 말할 게.”


그가 깊은 한숨을 쉰다.


“그거 완전히 사기야.”


“사기라니? 무슨 말이야?”


아오야기는 이미 지난 며칠 간 충격에 충격을 받아 왔는데 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질렸다는 표정이 된다.


“내가 있는 정무과에서 의정서 하나를 준비하고 있어. 내각이 만주국을 정식으로 승인하면 만주국 정부와 체결할 의정서야. 근데 말이지, 거기 핵심 내용 중 하나가 뭐냐면······.”


우에스기의 얼굴에는 이번에는 옅게 냉소가 띄인다.


“만주국 정부 관리 임명은 항상 관동군사령부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는 거야.”


그 말에 아오야기는 더 참지 못하겠다는 듯 주먹을 꽉 쥔다.


“만주국 정부에 자리를 얻을 사람들, 모두 다 우리 정무과에서 관리하고 확인하고 있어. 우리 과는 단지 신생국가 만주국의 발전을 도와주기 있는 게 아니야. 사실상 참모부 정무과가 만주국 정부고, 푸이 나리의 조정과 정부는 그저 구색맞추기용이라고. 그냥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만주국 정부는 그냥 관동군사령부의 괴뢰로 구상되고 설계된 거야.”


그 말에 다시금 침묵이 흐른다. 아오야기는 이제는 완전히 지쳐버렸다는 듯 빈 침상에 주저앉아 고개를 떨군다.


“언제부터 알았어?”


“정무과로 인사이동된 직후부터.”


“왜 말 안했어?”


“어떻게 말하냐? 너는 만주국이 왕도낙토가 될 거라고, 우리 일본은 그저 만주국을 도와주기만 할 뿐 지배하지 않을 거라고 절실하게 믿고 있었는데······. 나보고 네 희망을 깨라고?”


아오야기 중위는 다시 고개를 들지 않는다. 후지무라는 이제까지 믿어 온 모든 것이 무너질 상황에 처한 아오야기가 빠르게 마음을 결정하지 못함을 안다.


“아직 시간은 있어. 머리 식히고 더 천천히 생각해도 늦진 않을 거다.”


아오야기는 그 말에 말없이 고개만 끄덕인다. 이때 쿠스노기가 묻는다.


“하지만 토비. 해외로 내뺀다 해도 어디로 갈 건데? 장기간 도피하고 잠적한다 치면 갈 데가 있긴 한 거야?”


“당연히 있지. 그것도 이미 생각해 놨다.”


후지무라의 입에서 뜻밖의 나라가 언급된다.


“바로 브라질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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