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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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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
작품등록일 :
2023.03.11 0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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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23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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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8 0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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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쪽

327. 작업, 한창

DUMMY

*


“어이, 이게······.”


맞냐?


라고 표정으로 물어본다.


사내의 물음에 여인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대공가. 산슈카의 대공은 하나 뿐이었고, 곧 알사드 가문의 가주를 의미했다. 그런 대공가의 전술사단 부단장인 것이 ‘여인’이었다.


워메이지들로 이루어진 집단에서 부단장의 자리를 갖고 있는 건 그녀가 상당한 수준의 전투력을 가졌음을 의미한다.


어지간한 수준의 초상술사들도 아니었고. 기본적으로 마스터 마기아에 근접한 이들만이 알사드 대공가의 전술사단 소속일 수 있었다.


그만한 능력을 가진 이들은 곧 어마어마한 개성을 갖게 마련이다. 개인의 능력이라는 건 그 자체로 개성을 의미하기도 하니까 말이다. 그런 경지에 다다르기 위해서 상상하기 어려운 고련을 거쳤어야 했을 것이고.


험난한 시간들은 개인의 인격에 특이성을 부여하기 충분한 조건이다. 늘.


강대한 능력자들을 통솔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더욱 수준 높은 초능력이 필요한 법이었고. 대공가 특수 전력 부대의 단장급이라 하면, 어지간한 마스터들을 월등히 뛰어넘는 수준이 된다.


제레샤 마드도 그러하다.


당장 전력 비교를 해도 릿샤 애드윈에 비해 크게 떨어지지 않는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플레이어로서, 방대한 정보를 토대로 장비 아이템을 맞춘 릿샤에 비해. 정면에서 승부한다면 근소하게 공격적 출력이 모자라겠지만. 그럼에도 엇비슷한 수준의 워메이지라는 건 사실이었다.


제레샤는 푸른 늑대단의 단장, 멀린 스타본과 함께 하고 있었다.


고작 두 명이었지만, 전쟁터 한복판에 고립되어도 전황을 뒤집어 엎을 수 있을만큼 강대한 능력자들이었다.


제레샤는 나이에 비해 동안과 같은 생김새였는데. 실제 나이는 중년이었고. 겉으로는 밝은 적색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청년기의 미인이었다.

제레샤에게 반말을 한 사내는 나이가 그보다도 더 있었고. 겉으로 보이는 모습도 그만한 나이에 어울린다. 희끗한 머리카락이 보이는. 암청색 머리칼의. 수염이 조금 난 사내였다.

주름진 얼굴에, 장년을 넘어 초로의 때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체격이 탄탄하고 눈빛에 정광이 돌아, 얼핏 보면 인상 자체는 젊게도 느껴진다.


알사드 대공의 친척이기도 한 사내로. 대공의 마음에 들어 곁에서 일을 하고 있는 입장이었다. 멀린 혼자로도 뛰어난 경지를 실현한 기사였지만. 그가 처음부터 이런 경지였던 것도 아니고.


무엇이든 혼자 할 수 있는 일보다는, 그래도 서로의 도움을 빌려 해낼 수 있는 일이 훨씬 규모가 큰 법이었다.


멀린 스타본. 알사드 가문의 방계로서 다른 성을 갖고 있었지만. 분명 이전에 갈라졌을 뿐 같은 피가 흐르는 혈통의 사내였다.


남녀는 어두운 실내에 있었다.


내부 공간은 제법 큰 편이고. 다양한 기구들 따위로 채워진 곳이다.


그네들이 앞에 두고 있는 건.


‘사르삿’의 실드를 조작하는 장치였다.


왕도 사르삿의 외곽 지역, 군사 건물 내부에 있는 방이었고.


다양한 절차를 거치지 않으면 아무리 고위자라 할 지라도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곳이었지만. 지금 왕도를 비롯해 산슈카 전체는 시끄럽고, 어지러운 상황이었다.


사람들의 이목이 당장 벌어지고 있는 전쟁에 쏠려 있었고.

더욱이 그들은 지금의 움직임을 위해. 구태여 왕도에 숨어 있다가 잽싸게 행동을 한 참이었다.


엄격하게 관리되는 시설이지만. 결국 일반적인 병사들이 지키고 있었고. 관리자로 있는 기사 하나와 왕실 소속 워메이지 하나는, 입도 제대로 뻥끗하지 못한 채 두 사람에 의해 암살을 당했다.


관리 시설 외부 한 구석에는, 그네들이 처리한 NPC들의 시신이 오브제처럼 쌓여 있었다. 그대로 두지는 않았고. 담벼락으로 바깥에 보이지 않을만하게 둔 다음 원소 스킬로 위를 가릴만한 것을 만들어 덮어 둔 상황이었다.


본디 이런 시설은 관리가 치밀하고. 일정 시간마다 교대자가 온다거나, 혹은 연락을 통해서 상황보고를 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지만.

말했듯 지금은 국내 전체의 이목이 왕도와 대공령 사이 평야에 쏠려 있는 시점이었다. 평소보다 더 시간을 벌었다고 할 수 있었고.


사실 그러지 않았다고 해도, 그리 오래 걸리는 일은 아니었다.


허리 즈음 오는 높이의 특이한 장치를 앞에 두고 있는 것이 멀린이다.


그는 대공에게 하사받은 소모용의 아티팩트들을 갖고 있었다. 사용하는 것 자체는 크게 어려움이 없는데. 혹시나 모를 사태에 대비해서 제레샤가 따라왔다.


아무래도 아티팩트Artifact라는 게 그렇다. 현대적, 혹은 고대의 초월적인 기술이 들어간 복잡한 기계장치였다. 따지고 보면. MP를 동력으로 사용하고 있었고. 기사 역시 기력술의 전문가들이며. MP가 움직이는 원리에 대해 치열하게 고찰하고 사는 종자들이기는 했지만.


초상술사들이 전문적으로 발달시켜놓은 온갖 초상학적 원리들에 대해 다 꿰고 있지는 못하다. 당연하게도.


초상술사들 중에서도 수준이 높은 자들이 다루는 아티팩트는, 다른 술사들이 감히 건드리지 못할 때가 많았다.


왕도를 수호하는 결계라고 할 수 있는 아티팩트의 본체가, 그들 눈 앞에 있는 것이었는데.


그 즈음되면 분명 어지간한 초상술사는 건드릴 엄두도 내지 못하는 종류가 맞았다.


기력술사라고 하더라도 마찬가지이다. 무식하게 검기劍氣를 발현해서 때려 부쉈다가는. 그대로 MP가 뒤틀리고 초작용을 일으켜서 거대한 폭발이라도 일어날지 모르는 일이다.

분명 강력한 위력을 자랑하는 물건들이었지만. 약점을 찌르면 섬세한 기계장치라 어떻게 이상 작동을 할지 몰랐다.


만일의 사태에 대처하기 위해서 제레샤가 따라왔다.


어둔 방 안에서, 남녀는 서로의 얼굴조차 제대로 확인하지 못한다. 아주 희미한 빛이 들어오는 공간이었다.


바깥, 사르삿 왕도는 제법 시끄러운 듯 했으나. 내부 밀실까지 소리가 다 들어오지는 않았다. 물론 제레샤는 주변을 탐색하기 위한 스킬들을 깔아두었으므로 실시간으로 확인을 할 수는 있었다.


멀린은 자신의 앞에 있는 아티팩트에 집중을 한다.


언뜻 보기에는 철로 이루어진 물건같았다.


단련된 기력술사의 오감은 일반적인 수준을 훨씬 상회한다. 희미한 불빛으로도 멀린은 그것의 상세한 생김새를 볼 수 있었다.


굳이 빛이 많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아티팩트를 사용하는데 많은 걸 확인할 필요는 없었으니. 절차적으로.


멀린의 지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복잡성의 물건이 앞에 있는 그것이었다.


네모낳고, 그 위에 올라가 편하게 앉을 수 있을 정도의 크기였다. 음식들을 늘어놓고 밥을 먹을 수 있을 정도의 크기. 높이는 말했듯 멀린의 허리 즈음에 온다.


전체적인 구조는 육면체의 사각형이었고. 각 면에 복잡한 내부 장비들이 튀어나와 있었다. 버튼이 여러개 달린 듯도 같았고. 조작용의 패널이 그가 서 있는 정면에서 바로 보이는 위에 붙어 있었다.


멀린 스타본. 그는 긴장된 표정으로 아티팩트를 사용한다.


가져온 물건들을 거대한 기기에 설치했다. 설치해야 하는 장소는 대강 알고 있었다. 골고루. 맨 위엣 면의 전반부에 하나. 후반부에 하나.


양 옆 면에 한 개씩.


정면의 가운데에 하나.


마지막으로 조작용 패널에 하나.


툭, 건드려서 기기에 부착시키면 그대로 붙는 아티팩트들이었다. 주먹만한 크기의, 마찬가지로 복잡한 기기였고.


초상력학. 초상공학. 계속해서 문화와 기술이 발전하면서 알 수 없는 물건들이 많이 쏟아져나오고 있었다. 멀린은 이미 예전에 그것들에 대해 알기를 포기한지 오래였다.


물건의 원리를 몰라도 사용은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들을 만드는 부류의 사람들과 친하게 어울리면 될 일이다. 그 자신이 모든 걸 알 필요는 없었다.


맞는 말이었다. 제레샤는 어둔 그늘 속에서, 어둠 속에서 멀린이 움직이는 양을 지켜보고 있다. 그가 혹시나 일을 그르치지 않을까 보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멀린은 전달받은 정보대로 기기를 부착했고. 각 부위에 붙어 있는 아티팩트들이 곧 빛을 내며 진동을 하기 시작한다.


“움직여라.”


시동어는 아주 단순한 것이었다. 산슈카 어를 안다면. 중남부 대륙어를 안다면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다. 그것을 사용하는데 약간의 MP가 필요하기는 하다.


멀린은 조작 패널에 붙인 아티팩트. 반구형으로 생겼고, 겉면에 사각형의 돌기 따위들이 튀어나와 있는 물건을 붙잡고 기력을 불어넣었다.

기氣이던 초상술사들이 쓰는 힘이던, 똑같이 MP였다. ‘기’라는 건 MP의 한 갈래를 의미하는 말이었고.


기력술사들도, 이 정도의 아티팩트 발동 정도는 충분히 시킬 수 있다는 말이었다.


멀린은 자신이 가져와 부착한 아티팩트에 MP를 불어넣으며 본격적으로 가동을 시켰다.


이게 과연 맞는 일일까.


주름진 안색. 푸른 눈동자를 가진 멀린은 생각을 한 번 해보았다.


나이를 많이 먹었다는 건. 오래도록 살아남았다는 의미였다. 그가 오래도록 살아남기 위해서 가져온 신념이나, 노하우들 따위가 여럿 있었다.

어지간해서는 한 번에 행동하지 말고, 여러번 생각을 한 뒤에 행동하는 것이 옳았다.


그리고 자신의 행동이 추후 어떤 결과를 불러 일으킬지도, 머릿속으로 한 번씩 셈을 해보는 것이 타당한 일이었다.


멀린 스타본은, 알사드 대공가에 충성을 바치고 있었고. 깨나 젊은 시절부터 많은 녹봉을 받아왔고. 상당한 부를 축적한 상태였다.


평범한 대공가의 재산이었다면 그만한 부를 줄 수 있었을까, 싶기도 하다. 멀린 혼자만을 고용한다면 아마 가능했으리라.

산슈카 최고의 귀족 가문이라는 게 가벼운 이름이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세르게이 알사드, 그의 친척은 수 만 단위의 본격적인 사병단을 운영하고 있었고.


동시에 무수한 공작 요원들 따위를 양성하고 거느리면서 산슈카 국내외, 이 주변 국가들의 일에 모조리 개입을 하고 있었다.


거기에 초상술과 기력술을 사용하는 초인 병력 역시, 국가적인 수준으로 키워서 사용하고 있었고.


일개 공작가가 가질 수 있는 영향력이나 힘은 확실히 아니었다.

세르게이 알사드는 머리가 좋은 인간이었고, 예리하고 교활하며 무엇보다 참을성이 좋았다. 그는 자신이 모든 일을 해낼 수 있을 때까지, 충분히 기다리며 준비를 했고. 과감하게 움직였다.


산슈카와 주변 나라들에 존재하는, 암시장의 물류를 일정 부분 책임지고 있을 정도로 그의 영향력이 막대했다.

범죄자들, 갈 곳 없는 인간들. 정부의 행정력으로부터 소외받은 자들에게 세르게이 알사드는 거침없이 손을 내밀었고. 곧 그들의 주군이 되었다.


세르게이는 겉으로는 별다른 티를 내지 않지만, 아주 야만적인 독재자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무수한 범죄자들을 거느리면서 동시에 통솔할 수 있는 것이다.


통솔된 범죄자라는 건, 사실 다루기에 따라서 무엇보다도 좋은 도구가 되기도 한다. 특히 그것을 다루고 있는 이가 산슈카의 고위 공직자라고 한다면 말이다.


대공이라는 건, 정식으로 정치 활동을 하는 왕자들, 왕위 계승권자와 맞먹는 위치였다. 그건 곧 산슈카에서 무소불위에 가까운 권력을 의미하기도 했고. 거기에 행정에 관한 막대한 실권을 가지고 있음을 뜻하기도 했다.


게으른 대공이었기에 겉으로는 일을 하지 않았지만. 그의 충직한 부하들은 늘 사르삿의 왕실에서 인정을 받는 일꾼들이 될 수 있었다.


산슈카에 문제를 일삼는 온갖 인간군상들과 협응하는 관계였으니 말이다.


적절한 문제를 일으켜서 왕실의 시선을 돌리기도 하고. 또 그들이 직접 해결을 하면서 공을 쌓기도 했다.


중앙 권력이 눈에 닿지 않는 세계는 모두 대공의 것이었다고 해도 좋으리라.


대도시나, 적어도 어느 정도의 치안을 갖춘 곳이 아니라고 한다면 세르게이 알사드의 마수가 미치지 않는 데가 없었다.


세르게이 알사드는 인간이었으나 마물들을 조종하다시피 하는 인물들이었고.

그의 휘하에 여러 명의 초상술사와 기사들이 있다고 한다면, 그건 실로 가능한 일이었다.


적당한 몬스터들을 이끌어서 외지에 있는 작은 마을들을 파괴하고. 쓸만한 인간들을 자원으로 보고 팔아 넘기기도 하고.

적당히 재능이 있는 아이들의 경우에는 어린 나이에 끌어들여 세뇌를 시키고, 잘 길러내서 다시 자신의 병사로 사용하는 것이 주로 세르게이가 하는 일이었다.


산슈카에서만이 아니라 국경 지대 근처의 여러 곳에서 그러한 짓을 반복하고 있었고. 다만 대장군이나 변경백 따위가 있는. 특별히 왕실과 공고한 협력 관계에 있는 귀족들의 영지에서는 그러지 못했다.


그런 이들의 시야가 닿지 않는 모든 곳에서는 자행한 범죄이기도 하다.


세르게이 알사드의 손에 의해서. 간접적으로 살해당한 이들의 수는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 거대하고 어지러운 범죄 행위를 전부 알고 있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극소수’라고 할만한 이들도. 정말 모든 정보를 갖고 있지는 않았다.


대체적으로, 그들이 전체 상황을 조율하고 움직이는 관리직에 있으니 어느 정도 알게 되고. 또 추론하기가 쉬울 뿐이었다.


일례로 청색 늑대단의 단장인 그 역시, 필요한 때가 오면 단원들을 세르게이의 범죄 행위를 돕게끔 하면서 산슈카 국내에 있는 여러 작전 지역들에 대해서 알고 있었으나. 국경을 넘어가는 일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그건 본격적으로 검은 늑대단에 속한 이들이나. 혹은 세르게이 알사드에게 충성을 다하는, 간접적인 조직원들을 다루는 이들이 아는 부분이다.


각 국가에서 살면서, 세르게이 알사드의 명령을 수행하는 이들이 있었고. 그런 작자들은 대공의 얼굴을 한 번 보지 못했으면서, 오로지 중간 연락책들의 말만을 듣고 충심을 다해 움직인다. 그 과정에서 약물을 사용하던, 정신 계통의 스킬을 장기간 사용하던. 혹은 그들의 욕망을 자극해서 돈이니, 하는 온갖 것들을 채워주면서 구슬리던.


세르게이 알사드는 다양한 방법을 시도했고.


놀랍게도 거대한 판을 짜고 세계를 움직이는 동안 한 번도 들키질 않았다.


그만한 일을 하면서. 오롯이 ‘게으른 대공’이라는 별칭 뒤에 숨어서. 아무런 해악도 끼치지 않는 선량한 존재로서 산슈카에서 군림을 한 것이다.


그가 그토록 열심히 계획을 짜고 말도 안될 정도로 거대한 조직을 컨트롤하고 있으니. 국정과 관련된 일에 조금이라도 손을 벌릴 여력이 없었으리라. 세르게이 알사드가 아무리 명민하고 뛰어난 인간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런 부분들을 도리어 역이용해서 사르삿에서 신망을 쌓고. 또 유능한 부하들을 길러내서 왕실의 첩보를 얻기도 하고.

아무튼 난 놈은 난 놈이었다. 쓰레기같은 성정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런 쓰레기의 휘하에서. 온갖 악행을 자행해 온 것이 그이기는 했는데.


했는데······.


‘흐음.’


이게 정말 맞는 일인가.


직접 행하고 있으면서도 의심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결국 세르게이 알사드의 야욕이, 산슈카를 집어 삼키는 데까지 이르리라고 이미 알고 있던 것이었는데.

직접 왕도의 문을 여는 역할을 하자니. 혹시나 일이 잘못 되었을 때, 씻을 수 없는 오명汚名을 역사에 남기고 대대손손이 욕을 처먹는 게 아닐까 싶은 것이다.


‘에라.’


멀린 스타본은 다시금 희미한 어둠 속에서 고개를 돌렸고.

아티팩트의 빛으로 인해 아까보단 밝아진 실내에서, 제레샤의 얼굴을 처다보았다.


미인, 청년의 얼굴을 하고 있는 제레샤는 붉은 낯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홍조가 올랐다기보다. 그만큼 젊고 어려보이는 외모라는 뜻이었다.

초상술사들은 온갖 기괴한 짓거리들을 벌이고는 했다. 학술회라고 하는 곳에 소속된 작자들도 이상하기는 다를 바가 없었고. 워메이지전단, 전술사단에 속한 작자들은 그런 특이함들이 직접적으로 보이는 작자들이었다.


하나같이 사이코들이다.


그런 말은, 결국 대공가를 섬기고 있는 기사단들에게도 해당이 되는 말이기는 하지만.


적색 늑대단과 청색 늑대단은. 그래도 대공가에서 굳이 꼽자면 정상적인 축에 속하는 분위기를 갖고 있기는 했다.


왜냐면 평소에 대공의 어둠에 깊이 공감하고 물들어 있다가. 외부 활동을 하게 되면 어쩔 수 없이 티가 나고, 쓸데없이 증거를 흘리게 되니까. 대공은 일부러 두 개 기사단을 내부적인, 어두운 임무들과 구분을 해서 바깥으로 돌렸다.


결국 대외적으로 사용해야 하는 대공가의 칼은 필요한 것이었고. 대공가가 공을 쌓고 왕실의 신임을 얻기 위해서 변명거리가 되어야 할 외부 홍보용의 전력이 있어야만 했다.


사나운 몬스터를 처리하고. 지방 외곽에 있는 변란을 잠재우는데. 기사가 없이 그럴 수는 없지 않겠는가. 아무리 대부분의 상황을 짜고 치는 사기마냥 저지른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이 납득할 수 있는 정도의 정보를 올려 보고해야 납득을 할 테였다.


단장 급 정도가 되면 적색이나 청색이나. 대개 대공이 하는 일을 모를 수가 없기는 하지만. 그래도 주로 쓴느 어둠의 칼은 검은 늑대단이었다.

대공이 그런 사소한 부분까지 신경을 쓰는 건. 확실히 오랜 시간 정체를 감추는 데 도움이 되는 디테일함이었다.


“에라.”

“그런 시동어는 없는데요.”

“다무시오.”


멀린 스타본은 조금 짜증스럽게 대꾸를 했다. 퉁명스러운 투였으나. 청색 늑대단의 단장직이라는 건 쉬운 자리가 아니었다. 워메이지전단의 부단장이라고 하더라도, 굳이 따지자면 기사단장급보단 조금 아래이다.


전술사단의 단장, 그리고 연구단의 단장 정도가 기사단장과 같은 급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거기에 나이도 그가 조금 더 많았고. 그에 따라 대공가에서 일을 해 온 전력도 그가 많았다.


제레샤 역시 별다른 불만을 표현하지는 않았다. 마음에 두는지 아닌지는 그녀만 아는 일이었지만.


멀린 스타본은, 결국 왕도의 방어막을 걷어내기로 했다.


아주 견고한 방패를 잃게 되는 셈이었다.


왕도 사르삿을 두르고 있는 거대한 장벽. 거기에 현대까지의 초상술사, 아티팩트 메이커들이 모두 달려들어 완성시킨 강대한 보호 스킬.


그것을 지나더라도 다시 왕궁에 보호막과 아티팩트들이 남기는 하지만. 왕도 대성벽의 보호막만 거두어지는 것만 해도. 충분히 대사건이었다.


이전 산슈카의 역사에서, 이 나라가 아무리 힘들어지는 상황에서도 여기까지 침범을 당한 기록은 없다.

제국이 무너졌을 때. 왕국이 쇠퇴하면서 영역이 계속해서 줄어들었을 때. 북부 아릿시안 제국의 침략으로 중남부의 나라들이 휘청거리고 고통 받았을 때도.


사르삿은 산슈카 역사 의식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공간이었고.


왕가王家로 향하기 위한 마지막 관문이다.


보호막이 사라지면, 내부적으로 궁정술사단이 배치해둔 임시의 보호 스킬들이 있기는 할 테지만. 결코 사르삿 전역을 막을 수 있는 규모는 아니었다.


사르삿이 워낙 요충지이다보니. 왕도 곳곳에 거하는 고위층들, 관료들 따위가 피할 수 있도록 쉘터를 나누어서 만들어둔 것에 불과할 것이다.


왕도가 무너지고 공격을 받으면 어마어마한 사상자가 나올 것이다.


그러나 세르게이 알사드 대공의 계획을 위해서. 이건 꼭 해야 하는 일이며···.


제레샤가 멀린을 처다보고 있기도 했다.


대공은 머리가 좋은 사이코패스였다. 자신의 친척이었지만. 아주 감탄을 할 정도의 개새끼라고 할 수 있었다.

그는 사람을 구슬리는 법을 알았고. 어떻게 잘 이용해먹을 수 있는지도 알았다. 사람들 간의 신뢰를 빼앗는 것이다. 전술사단은 전술사단끼리. 기사단은 기사단끼리. 그리고 심지어 그 내부에서도 어느 정도 갈등을 조장한다.


제레샤는 분명 뛰어난 워메이지였고. 천재적인 인물이었지만. 멀린에게 있어 완벽하게 믿을 수 있는 인물이지도 않다.


멀린이 대공의 대계를 망쳐놓는다면. 대공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멀린 스타본의 배에 칼날을 쑤셔넣을 작자였고. 그런 일을 할 대공의 수족이 제레샤가 될지 아닐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노릇이다.


한숨을 쉬듯 멀린이 아티팩트를 완벽하게 기동시키는데.


몇 가지 초상술적 언어를 뱉었고. 대공이 정한 암호어를 뱉으며 MP를 쏟아넣자.


아티팩트의 빛이 점차 강해졌다.


아주 어두웠고, 평범한 사람의 시야로는 옆 사람의 이목구비도 파악할 수 없을 정도의 광량이었지만.


각 주먹만한 아티팩트들이 공명이라도 하는듯 점차 밝은 빛을 내며 진동했다.


그것이 붙어 있는, 거대한 단상과 같은 기기 역시 서서히 떨어 울기 시작했다.


기력술사, 소드 마스터 중에서도 수준이 남다른 멀린의 눈에는 아티팩트의 MP 흐름이 선연하게 보였다.


달리 초상술 스킬을 익히지 않더라도. 기력술을 높은 수준으로 발전시키다 보면 얻게 되는 부수적인 여러 기능들이 있었고. 눈에 기력을 집중한 뒤 미세한 MP나 SP의 흐름을 관찰하는 것 역시 개중 하나였다.


폭발적으로 MP들이, 임시 아티팩트에서 쏟아져나왔다.


여러 개의 아티팩트는 내부를 뜯어보면 값비싼 보석들로 이루어져 있었고.


섬세하게 세공된 세밀한 보석들에는 하나하나 각인이 새겨져 있었다.


한 개의 보석을 통으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초상공학적 최첨단의 기술이 들어가서, 작은 보석 여러개를 사용해 MP 저장량과 반응성을 더욱 높였다.


여러 개의 아티팩트가 호응을 하면서 시너지를 내는 건 익히 알고 있는 원리였는데. 아티팩트 메이커, 연구단의 술사들이. 반구형의 아티팩트를 한 개의 그것으로 만들지 않고. 내부에 들어가는 부품들 하나하나를 아티팩트마냥 심혈을 기울여 만든 뒤에. 다시 그것을 엮어서 하나의 큰 아티팩트로 만드는 따위의 일을 반복한 것이다.


그렇게 몇 중, 몇 겹으로 이루어진 MP의 구조체는 말못할 강력함으로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고.


곧 막대한 거력을 뿜어내면서,


왕도의 방호벽을 조절하는 메인 컨트롤 기기의 시스템을 마비시키기 시작했다.


단순하게 마비시키는 것만으로도 부족했고. 완벽하게 침투를 해서 시스템을 망가뜨리고 부수는 일이었다.


이것 역시 대대로 산슈카의 역사를 책임져온 천재적인 술사들, 직공들이 개입을 한 아티팩트였지만.


현대의 기술이라는 건 늘 발전을 하게 마련이었다. 그리고 대공이 이러한 파괴용 아티팩트들을 만들기 위해서 들인 시간과 온갖 자원들의 양은 상상을 초월하는 정도였고.


또한 대공가에서 얻어낼 수 있는, 제국기 시절의 고대 유물들 또한 그런 아티팩트를 만드는 기술 향상의 밑거름이 되어주었다.


고대의 물건이라는 건 효율이 나쁠 때도 있었지만. 그 고대도 시대 나름이었다. 지금보다도 융성했다고 일컫어지는 산슈카 제국기는, 여러 초상술사나 공학자들이 꿈에 그리는 시대이기도 했다.


기록이 거의 남지 않아서 자세하게 복원이 불가능할 뿐이었지. 유물 자체는 지금 시대에도 남아는 있었고. 그것들의 위력 역시 묘사된 바가 많이 있었다.


필요한 건 부서지거나 오작동을 일으키는 아티팩트들을 고치고 새로이 만들어내는 역량이었는데. 세르게이 알사드는 자신의 평생을 그에 바쳐서, 결국 이 시기에 이루어냈다.


끔찍한 집념이라고 할 수 있었고. 그런 점을 보면. 세르게이 알사드는 확실히 천재의 일종이기는 했다.


자신의 친척이라서가 아니라. 진지하게 대공이 어마어마한 능력을 가진 괴물이라는 걸 멀린은 알고 있었고. 어차피 가만히 있더라도 대공의 야욕에 자신도 영향을 받으리라 여겼다. 언젠가는 그가 산슈카를 뒤집어 엎을테니까.


결국 멀린 스타본은,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 더 안전할 것 같은 곳에 붙은 것이다.


우우우우웅.


기계가 떨리기 시작했다.


아티팩트들이 울었다. 진동이 격해진다. 두터운 격벽으로 폐쇄된 공간이었기에 내부의 소란이 바깥에 전달되지는 않으리라.


그러나 계속되는 아티팩트 해킹Hacking으로, 곧 왕도의 이상과 비상非常을 알아챈 이들이 나올 테였다.


찬란한 총천연색 불빛이 실내를 채운다.


어느덧 밝아진 실내에서 제레샤를 다시금 보았다. 그녀의 표정에는 떨림이 없었다.


그걸 보며 멀린은 과연, 미친 여자라고 생각을 했다.


지금 그들이 하고 있는 짓이 그렇지 않은가.


보호막이 해제되고, 대공은 고대의 병기들을 사용할 셈이었다.


완벽하게 다루지는 못해도, 거대한 에너지의 방향을 틀어 원하는 곳에 처박는 정도는 가능했다.


세르게이 알사드의 계획은 지금부터가 본격적인 부분이었고.


곧 무수한 인간들이 희생되리라.


멀린 스타본은, 조금 찜찜한 표정으로. 아티팩트의 기동을 끝까지 책임지고 지켜보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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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6 335. 전장의 한복판, 제냐 24.06.01 9 1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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