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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ya 님의 서재입니다.

촉법소년은 보호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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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ya
작품등록일 :
2023.12.25 04:33
최근연재일 :
2024.06.27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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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24.03.12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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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화. 목숨은 하나

DUMMY

교장은 천선을 자리로 안내했다.

심지어 먼저 앉는 모습을 본 후, 자신도 착석할 정도다.


“학교의 입장이라면···.”

“하고 싶은 말이 없으신가요?”


천선은 기회를 준다는 듯이 손짓해 보였다.

언뜻 보기에는 정말 자비로워 보이기도 했다.

모든 걸 용서라도 해줄 듯했다.

물론, 실제로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예, 저희 역시도 사태를 수습하느라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우선, 언론에 사건과 관계된 아이들을 최대한 보호하는 중입니다.”

“보호라···.”

“가장 위험한 칼날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모든 정보를 숨기는 이유는 테이 때문이기도 합니다. 혹여 꼬리라도 밟혔다간, 줄줄이 정보가 샐지도 모르니 말입니다.”


공손한 설명이다.

하지만 천선은 그에 조소 비슷한 것을 지었다.


“예, 들었어요. ‘선을 넘는 기자랑 민사소송까지 간다’고, 조례 때 학생들에게 공지했다죠? 괜히 휘말리지 않게 조심하라고요.”

“아직 절차를 밟고 있진 않지만, 혹여나 모를 일이니···.”

“네, 협박이죠. 괜히 빌미를 만들지 말라는 소리고요.”


정보를 틀어막는 방법쯤이야, 쉽게 알 수 있었다.

우선 학교에 있는 아이들 전부가 천선에게 호의적이다.

내부에서 무슨 일이 있는지 물어보면 경계심 없이 답해줄 정도로 말이다.


“우리 솔직해지죠? 조용히 넘어가고 싶은 건, 그냥 학교 측 희망 사항이잖아요?”


정답이다.

최대한 조용히 처리한다?

그건 언제나 책임자가 원하는 일이었다.

이는 해결이 아니라 은폐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학교의 입장은 잘 알겠네요. 그럼 저도 그렇게 알고 대응하도록 하죠.”

“자, 잠깐 기다려주십시오! 저희도 나설 수 있는 게 없어서 그럽니다! 학폭위가 소집된 것도 아닌데, 조치를 취할 수 없잖습니까!”


현실이 어쩔 수 없다는 말.

지금 상황에서는 그저 감정적으로 대꾸해도 물릴 수 있는 변명이다.

천선은 그만큼이나 높은 우위를 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방식은 도플갱어에게 맞지 않았다.


“그럼 경찰에 신고해야겠네요. 공론화해야 해결할 수 있다면.”


훨씬 논리 있고 합당한 방법을 선호했다.

이를테면, 본인이 말한 신념을 스스로 지게 한다든가 하는 식으로.


“아, 아니···. 그게···.”

“이것도 원하는 방식이 아닌가요?”

“···예. 죄송합니다. 그 대신 원하시는 조건이 있다면 최대한 맞춰드리겠습니다.”


천선은 그 말을 듣더니, 눈으로 보이도록 숨을 내쉬었다.


“대화가 길어질 것 같네요. 마실 음료 한 잔만 부탁드려도 될까요?”

“아, 예. 제가 미리 준비했어야 했는데, 생각이 짧았습니다.”


교장은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구석에 있는 문으로 향했다.

아마도 저곳이 탕비실이겠지.


“여름이니 시원한 음료로 내어드리면 되겠습니까?”

“네, 부탁드릴게요.”


부산을 떨며 찬장을 뒤적였다.

타인에게 직접 음료를 대접한다니, 해본 적도 없는 일이겠지.

그래서인지 아이스티를 찾아내고도 한참을 헤맨다.


“그···, 제가 어떻게든 해결해보겠습니다. 우선, 가해 학생 모두 징계 후 퇴학이나 전학 수속을 밟도록 하겠습니다. 현재 상황을 고려해보면 충분히 가능한 조치입니다.”

“뭘 위해서요?”

“예? 당연히 테이 학생을 위해서···. 피해자를 위해서라도 가해자를 처벌하는 게 당연하지 않습니까?”


상식.

도플갱어가 지긋지긋할 정도로 증오하는 대상이기도 했다.


“변호사를 만나 학교의 명예 훼손 여부도 검토해보겠습니다.”

“계획은 알겠네요. 그나저나 교장 선생님도 세종대왕님은 존경하시죠?”

“예. 한국 사람이라면 당연히 존경하지 않겠습니까?”

“천재이기도 하시지만 신념도 올곧으신 분이죠. 아, 혹시 그 얘기 아시나요? 평소엔 인자하시지만, 한글을 반포하실 때 드물게도 화를 내셨던 일화요.”

“아···. 들어본 것 같기도 합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제대로 집중하지 못했다.

커피포트에 물을 올렸다가, 컵에 차가운 물을 붓고선 당황한 표정을 짓는다.

그러다 에라 모르겠다는 듯이 잔에 아이스티 가루를 들이붓기 시작했다.


“그럴 만했어요. 신하가 그랬거든요. 한글을 널리 퍼뜨려봤자 의미 없다고. 사람의 천품은 교육으로 고쳐질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예···. 그것 참 괘씸한 사람입니다.”


그렇게 마구잡이로 탄 아이스티는 생각보다 멀쩡했다.

원래 차가운 물에 녹여서 마시는 음료이기 때문이다.

교장은 이제 잔에 얼음을 꺼내 붓고선 천선에게로 향했다.


“요즘 그런 어른이 많아요. 사람 고쳐 쓰는 거 아니라고 하는.”

“씁쓸한 일입니다.”

“네, 부끄러운 소리죠. 부모는 물론, 얼마나 많은 위인과 은사님을 거쳐 갔을까요? 그렇게 자라나서 한다는 말이 고작 ‘사람 고쳐 쓰는 거 아니다’라니.”


자리에 앉아마자 들은 말, 그건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 한다는 얘기였다.

아니, 그보다 더 심할지도 모르겠다.

부모와 스승, 조상님 얼굴에 먹칠하냐는 말도 은연중에 담겨 있었으니.


“그래서 저는 애들한테만 징계 내리는 걸 반대해요. 책임 회피잖아요?”

“···예?”

“애들을 혼자 두면 돋보기로 개미 태워죽이면서 놀 수도 있죠. 나쁜 짓이지만 자연스럽기도 하잖아요? 그걸 교정하는 건 부모랑 학교의 역할이고요.”

“아···.”

“근데 다들 꾸역꾸역 모른 척하는 거, 너무 역겹지 않나요?”

“진정하십시오, 삼촌분. 갑자기 그게 무슨···. 아무리 화가 나셔도 이렇게 마구잡이는 아니지 않습니까? 저희도 최선을 다해 교육하지만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생기는 법인데···.”


교장은 주저리주저리 변명을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눈앞에 아이스티를 타느라 동의했던 얘기를, 그건 좀 아니지 않냐며 둘러대는 소리였다.

천선이 그 말을 들으며 무슨 생각을 할지는 뻔하겠지.

도플갱어는 그런 논리 없는 변명을 지극히 싫어하니까.


“‘자네가 감히 백성을 능멸하는가.’”

“삼촌분?”

“‘백성의 천품이 교화될 수 없다면, 무얼 위해 정치를 하는가. 오직 군림하며 권세를 누리기 위함인가.’”


그런 교장을 향해 누군가의 말을 인용했다.


“세종대왕님이 하셨던 말이에요.”

“네, 압니다. 하지만···”

“학생을 지도한다고 올바르게 이끌 수 없다고요? 그럼 무얼 위해 교육을 하죠? 오직 군림하면서 존경을 누리기 위해서인가요?”

“모함하지 마십시오.”

“교육자가 교육을 멸시하면서도 그 자리에 있다? 이유는 하나겠네요. 권력이요. 동시에 당신은 감히 학생을 능멸하는 중이시고요.”


천선은 크게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오로지 상대만을 압박하며 책임을 물을 뿐이었다.

가느다란 손은 차가운 컵을 쥐었고, 불편한 침묵이 잠시 교장실에 내려앉았다.


“맛있네요, 아이스티.”


평범하게만 들리는 말이 잠시 끼어들었다.


“다시 언급하지만, 조건만 말씀하십시오. 수용할 수 있는 만큼은 받아들이겠습니다.”

“한국에선 문제가 터지면, 교사랑 학생은 책임을 지고 쫓겨나죠. 직위 해제와 전학이라는 이름으로요. 죄가 있든 없든, 재판장에 가기도 전에 벌을 받아요.”

“그만하십시오. 부당한 이익을 원해서 그런 말을 꺼냈다면, 더는 존중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책임자라는 인간들은 왜 책임 운영이라는 말로 자리를 보존하고 계시나요? 학교와 교육청은 학생과 교사를 보호해야죠. 이 외에 더 급한 일이 있나요?”


교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는 들을 것도 없다는 듯한 태도다.


“배웅하겠습니다.”

“앉으세요.”

“배려는 끝입니다.”

“정말, 그래도 되겠어요?”


천선이 고개를 똑바로 들었다.

그다음 아이스티를 흔들어 보였다.


“배려 없이, 누가 갑인지 따져볼까요?”


아이스티.

권력 우위를 은연중에 경고한 것이었다.

하긴, 이런 상황에서 도플갱어가 뜬금없이 말을 낭비할 리 없었다.


“···공론화하면 못 막을 것 같습니까? 터뜨려봤자, 학교 폭력 사건 하나입니다.”


교장은 밀리지 않겠다는 듯이 눈을 내리깔며 답했다.

어차피 비슷한 이슈는 많다는 소리다.

대충 어영부영 시간만 끌면, 없던 일로 만들 수 있다는 뜻이다.

지금껏 그래왔듯이 말이다.


“못 막던데요? 터뜨려서, 아직 새 건물 못 지었잖아요.”

“그게 무슨···, 설마?”


하지만 천선은 여상스레 대꾸했다.

은근하게 전하는 협박이기도 했다.


“그런 사건도 있었다는 얘기죠. 정말 최근에.”

“설마 진짜 배후가···.”

“또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이에요. 혹여 누군가는 미친 짓을 할 수 있는 것 아니겠어요? 테이가 괴롭힘당한 일은 아직 해결이 안 됐으니까요.”


교장은 완전히 굳어버렸다.

이런 형태의 말이 나올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조심하자는 얘기예요. 누구나 목숨은 하나잖아요?”


숨을 멈추고 머릿속에서 고민할 찰나였다.

연이어 나온 말이 아니었더라면, 분명 그랬을 테지.


“그리고 목숨은 하나라서, 누군가는 숯 더미가 돼서 병원 신세를 지고 있죠. 죽지도 못하고요.”


‘목숨은 하나’.

이건 죽기 싫으면 따르라는 소리가 아니었다.

도플갱어 자신이 유의하고 있는 사항이니, 쉽게 죽을 수조차 없을 거라는 뜻이다.

방화 사건에서 목숨만 건진 인질처럼.


교장도 이제는 자존심을 세울 수 없었다.

말한 대로, 목숨은 하나였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 예시로 나온 사람은 자신과 가까우면서도, 자신보다 높았을 이였다.


“···시키는 건 뭐든지 하겠습니다!”


당장 머리를 숙인 채, 무릎 먼저 꿇었다.

증거는 없지만, 심증은 많다.

그렇기에 망설임은 길지 않았다.


“믿어도 될까요?”

“예! 다만, 제 생존권만 보장해주십시오!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수족처럼 일하겠습니다!”


당장 누구든 지옥 밑바닥에 쑤셔 박을 수 있는 사람이다.

젊어 보인다고 함부로 대항해서는 안 됐다.


“그렇게 겁먹지 않아도 돼요. 아무리 거슬려도 유용한 패를 버릴 필요는 없으니까요.”

“···감사합니다!”

“우선, 휴대폰을 먼저 주시겠어요?”


교장은 퍼뜩 놀란 표정을 지었다.

꼭 뭔가를 들키기라도 한 기색이다.

하지만 반항할 수도 없는 노릇이겠지.

떨리는 손으로 곧장 천선에게 휴대폰을 건넨다.


“녹음이라···.”


혹시나 하는 상황을 대비하기 위해서일까?

미리 음성 녹음을 켜둔 모양이다.

두려움을 느낀 이유도 이 때문이겠지.


“좋아요. 안 그래도 주머니를 다 털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

“아무래도 괜찮다는 뜻이에요. 다음에 들키면 곤란하겠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천선은 오히려 안심했다.

이런 수작질 정도는 예상했던 모양이다.


“그럼 첫 번째 지시를 내릴게요.”

“예!”

“등교는 앞으로도 똑같이 할 거예요. 그리고 야간 자율 학습 없이 바로 하교할 거고요.”

“그럼 미리 조치를 취하면 되겠습니까? 다른 학생들이 위화감을 못 느끼도록?”

“잘 아시네요.”


천선은 편안히 원하는 바를 요구했다.

아니, 앞으로도 그럴 테지.


작가의말

권력은 중력과도 같습니다.

임계점이 넘으면 어떤 대가도 치르지 않고 더 많은 권력을 끌어모을 수 있게 되죠.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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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86화. 도마 위 24.04.04 10 0 12쪽
85 85화. 보호받아야 할 24.04.03 8 0 12쪽
84 84화. 개판 24.04.01 12 0 12쪽
83 83화. 외모라는 컨텐츠 24.03.30 14 0 12쪽
82 82화. 오소서, 주 예수여 24.03.28 9 0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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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75화. 안녕하세요 24.03.15 14 0 12쪽
» 74화. 목숨은 하나 24.03.12 12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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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69화. 범죄자 옹호 24.03.04 12 0 12쪽
68 68화. 좋은 책임자 24.03.03 13 0 12쪽
67 67화. 참교육? 24.03.03 19 0 12쪽
66 66화. DJ뭐야 24.03.02 23 0 12쪽
65 65화. 달란트 24.03.02 22 0 12쪽
64 64화. 탈출 24.03.02 18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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