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다른 세상에서 온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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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다른 세상에서 온 남자
흑염소 어머니가 차 대장을 만난 건 십오 년 전이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가을날, 늦게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집 근처 큰길에서 골목길로 들어서려는 순간 한 사내가 갑자기 나타나 앞쪽 범퍼에 부딪혔다. 급브레이크를 밟지 않았다면 그대로 치고 지나갈 뻔한 아찔한 순간이었다.
“안 다쳤어요?”
부교주가 차에서 내려 사내의 몸 상태를 확인했다.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걸었다. 왼쪽 허벅지가 안 좋은지 다리를 절었다.
“다리가 불편하면 병원으로 가요. 치료비는 내가 낼게요.”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괜찮긴요. 다리가 많이 불편해 보이는데요.”
“걷는 데는 지장이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가 어디죠?”
“여기가 어디라니요? 여기가 어딘지 모르세요?”
“모르겠어요.”
사내 표정을 보니 정말로 이곳이 어디인지 모르는 것 같았다.
“그러지 말고 내 차에 타요. 비에 옷이 젖으면 안 되잖아요.”
사내는 검은색 가죽점퍼와 청바지를 입었다. 비를 맞고 뛰어온 사람치고는 옷이 거의 젖지 않고 말끔했다. 건물 안에 있다가 막 밖으로 나온 사람 같았다.
“그럼 잠깐 신세 좀 지겠습니다.”
사내가 다리를 절며 차에 탔다. 부교주도 운전석에 앉아 문을 닫았다. 차에서 더운 공기가 뿜어져 나와 따뜻했다.
“갑자기 나타나 차에 부딪히던데, 달려왔나 봐요?”
“쫓기고 있었거든요.”
“쫓기고 있었다고요? 누구한테요?”
“내가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래서 놈들이 나를 잡으려고 쫓아왔습니다.”
“사람을 죽였다고요?”
부교주가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물었다.
“누군가가 돈을 주고 죽여달라고 했습니다. 제가 하는 일이 그거니까요.”
“본인 하는 일이 돈을 받고 사람을 죽이는 일이라는 거네요?”
“킬러라고도 하고, 전문 청부살인업자라고도 하죠.”
“그러니까 돈만 주면 누구나 죽이는군요?”
부교주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바라보았다.
“저는 사람을 가리지 않습니다.”
“자기 직업을 아주 쉽게 말하는군요?”
“저는 제가 하는 일에 만족합니다.”
“돈 받고 사람을 죽이면 죄책감은 안 드나요?”
“그걸 느끼면 일을 못 하죠.”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제가 살던 세상에서는 가능합니다.”
“그쪽이 살던 세상이 어딘데요?”
“이쪽 세상과 반대편에 있는 곳입니다. 하지만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는 모릅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그쪽이 살던 세상과 이곳 세상이 다르다는 거잖아요?”
“높은 건물이 보이고 차들이 쌩쌩 달리는 건 똑같습니다. 사람들 모습도 똑같고요. 하지만 이곳은 내가 살던 세상이 아닙니다.”
“근거는요? 무슨 근거로 이곳이 그쪽이 살던 세상이 아니라는 거죠?”
“저는 분명히 누군가에게 쫓겨 달아나는 중이었어요.”
사내가 사람을 전문적으로 죽이는 킬러라는 걸 알고 경찰이 그를 추적했다. 그날 경찰이 그를 잡으려고 집 근처에 매복해 있었다. 사내가 집 근처에 이르러, 낌새가 이상해 주위를 살폈다. 그때 어둠 속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경찰이라는 걸 알고 뒤돌아서서 달렸다. 어둠 속에 숨은 경찰 세 명이 뛰쳐나와 그를 쫓았다. 뒤에서 멈추라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쉬지 않고 계속 달렸다. 골목을 빠져나와 큰길로 들어서려는 순간 몸이 공중으로 붕 떴다. 그는 균형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다. 갑자기 빗방울이 얼굴에 떨어졌다. 뒤쫓던 경찰은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건 차에서 내린 중년의 여자였다. 그는 본능적으로 다른 세상으로 들어왔다는 걸 알았다.
“이곳이 제가 살던 곳이라면 나는 뒤쫓아오는 자들에게 붙잡혔을 겁니다. 그리고 달려올 때만 해도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 좋은 날씨였어요. 그런데 이렇게 비가 내리고 있지 않습니까.”
“그쪽에 살던 세상에는 지금 비가 내리지 않는다는 말이잖아요?”
“보시면 알겠지만, 제 옷이 거의 젖지 않았잖아요. 뛰어오는 동안 비를 맞았다면 옷이 흠뻑 젖었을 겁니다. 머리도 전혀 젖지 않았고요.”
“그건 사실이에요. 비를 맞고 달려온 사람치고는 너무나 말끔하니까요.”
“그럼 이제 믿으시겠습니까? 제가 다른 세상에서 왔다는 사실을요.”
“방금 누군가에서 쫓기는 중이라고 했잖아요. 그들이 누구죠?”
“경찰입니다. 경찰이 내가 킬러라는 걸 알고 집 근처에 매복해 있었습니다.”
“경찰이 어떻게 알았을까요?”
“그것까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누군가 말해줬던가, 경찰 스스로 알아냈겠죠.”
“이제 어쩌실 거죠? 그쪽 말이 사실이라면, 다시 그쪽이 살던 곳으로 돌아가야겠군요?”
“그래야 하는데, 돌아갈 방법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돌아갈 방법을 모른다는 거잖아요?”
“모릅니다.”
“그럼 당분간은 이곳에서 살아야겠군요?”
“돌아갈 방법을 찾을 때까지는 그래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돌아갈 방법을 찾지 못하면 이곳에서 영원히 살아야 할지도 모르고요?”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사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당장 살 곳부터 마련해야 할 것 같은데요?”
“그래야 하는데, 제가 가지고 있는 돈이 없습니다. 돈은 전부 내가 살던 곳에 두고 왔으니까요.”
“내가 살 곳을 마련해줄 테니, 당분간 그곳에서 살아요. 그쪽을 다치게 한 건 나니까요.”
그날 부교주가 가까운 호텔로 전화를 걸어 방을 하나 예약했다. 사내를 호텔 방에 데려다주고 자신의 연락처를 쪽지에 적어 건넸다. 사내가 쪽지를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필요한 거 있으면 이쪽으로 연락해요.”
“고맙습니다.”
사내가 쪽지를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저쪽 세상에서 사람 죽이는 일을 했다고 했잖아요.”
“그렇습니다.”
“혹시 이곳 세상에서도 똑같은 일을 할 생각이 있으신지요?”
“저보고 누군가를 죽여달라는 말씀이군요?”
“그쪽 하는 일이 그거라면서요? 못 하겠으면 그만두고요.”
“돈만 주시면 할 수 있습니다.”
“돈은 그쪽이 원하는 만큼 드릴게요.”
“지금 당장 가서 죽여야 합니까?”
“그건 아니에요. 자세한 건 다음에 만나서 이야기해요. 저도 빨리 집에 들어가 봐야 하거든요.”
“저 때문에 시간을 뺏겨 죄송합니다.”
“죄송할 것까지는 없고요. 당분간 밖에 나가지 말고 호텔 방에 있어요.”
부교주는 다음날 출근해 교주에게 전날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다른 세상에서 왔다는 말을 듣고 교주가 흥미를 보였다.
“당장 가서 데려오게.”
“데려오면 어쩌시려고요?”
“그것까지는 알 것 없고.”
부교주가 사무실 직원에게 호텔 위치를 알려주고, 사내를 차에 태워 데려오라고 시켰다. 사무실 직원이 찾아갔을 때, 사내는 이미 밖에 나가고 없었다. 호텔 로비에서 물으니 사내가 밖으로 나간 지 두 시간이 넘었다고 했다. 사무실 직원이 알았다고 말하고 곧장 부교주에게 전화를 걸어 사내가 없어진 사실을 알렸다. 부교주가 이야기를 듣고 늦게라도 들어올지 모르니 기다려보라고 했다. 하지만 사내는 아무리 기다려도 날이 저물 때까지 돌아올 생각을 안 했다.
“어떻게 할까요?”
“어떻게 하긴. 그냥 돌아와야지. 거기서 마냥 기다릴 수는 없잖아.”
부교주한테 전화가 걸려온 건 그날 밤이었다. 퇴근하고 막 집에 들어선 순간 전화벨이 울렸다. 목소리를 들으니 전날 봤던 사내였다.
“어떻게 된 일이에요?”
“길을 잃고 헤매다 주머니에 든 쪽지를 보고 전화했습니다.”
“밖에 나가지 말고 호텔 방에 있으라고 했잖아요?”
“내가 살던 세상과 어떻게 다른지 궁금해 나가봤습니다. 그러다 호텔로 돌아오는 길을 잃고 말았습니다.”
“나가서 보니까 어떻던가요? 그쪽이 살던 세상과 뭐가 다르던가요?”
“이쪽이 더 비현실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이쪽 세상이 현실적이지 못하다는 말이군요?”
“누군가에게 조종당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조종당하다니, 그게 무슨 뜻이죠?” “무언가를 하더라도 내 의지대로 하는 게 아니라, 누군가 시켜서 한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그쪽을 좌지우지한다는 말이군요?”
“그렇습니다. 지금도 누군가가 나를 가지고 논다는 느낌이 듭니다.”
“지금 어디에 있는데요?”
“모르겠습니다. 큰 건물이 보이는데, 호텔이 어느 쪽에 있는지는 생각이 안 납니다.”
“큰 건물 이름을 말해 봐요. 내가 지금 그쪽으로 갈 테니까요.”
사내가 큰 건물 이름을 말하자, 부교주가 어디 가지 말고 그대로 있으라고 말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사내는 부교주가 시킨 대로 한 발짝도 안 움직이고 서서 부교주를 기다렸다. 부교주가 도롯가에 서 있는 사내를 차에 태워 전날 묵은 호텔로 데려갔다.
“내일 아침 일찍 데리러 올 테니까, 어디 가지 말고 그대로 있어요. 알겠어요?”
“저를 어디로 데려가시려고요?”
“그쪽을 한번 봤으면 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이 누군데요?”
“그건 내일 가서 보면 알아요.”
다음날 부교주가 호텔로 가서 사내를 차에 태웠다. 교주한테 미리 전화를 걸어 아침 일찍 데려가겠다고 말해놓았다.
“당신의 실력을 보여주겠소?”
부교주와 함께 사내가 들어서자, 교주가 실력을 봤으면 했다.
“말씀만 하십시오. 깔끔하게 처리하겠습니다.”
당시 교주한테는 눈엣가시 같은 자들이 많았다. 사이비 종교단체라는 이유로 하나교를 음해하고 비난하고 다니는 자들이었다. 교주는 그런 자들을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애고 싶었다. 그중에 가장 눈에 거슬리는 자를 한 명 찍어 사내에게 알려줬다. 사내는 교주의 지시를 받고 삼 일째 되는 날 그자를 죽여없앴다. 그자를 죽일 때 길거리에 오가는 사람이 많았다. 갑자기 쓰러져 죽었기 때문에 누가 죽였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바닥에 쓰러진 사람이 숨을 거두었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알아차렸을 때, 사내는 이미 현장을 떠나고 없었다. 그 뒤로 사내는 열두 명이 넘는 사람을 그런 식으로 한 명 한 명 없앴다. 한 번 지시하면 실수하는 법이 없는 그러한 사내의 행동에 교주가 몹시 흡족해했다. 그 모든 장면을 뒤에서 묵묵히 지켜본 부교주 눈에 사내는 보통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한마디로 말해 사내는 사람이 아니라 냉혈동물이었다.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어떻게 사람을 저리도 쉽게 죽일 수 있지? 저자는 사람이 아니라 냉혈동물이야.’
당시 교주는 하나교를 지키는 별도의 조직을 만들고 별동대라고 이름 붙였다. 겉으로는 하나교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만들어졌지만, 실제로는 교주의 안위를 지키는 별도의 조직이었다. 조직원 수도 얼마 안 되었기 때문에 비서실에서 관리했다.
“지금부터 별동대는 자네가 맡게.”
교주가 별동대를 사내에게 맡기고 인원수도 배로 늘렸다. 그때부터 사내는 하나교에서 차 대장으로 불렸다.
“조금 전 차 대장이라는 자가 다른 세상에서 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어머니께서는 그 말을 믿습니까?”
흑염소가 이야길 조용히 듣고 있다가, 부교주가 이야길 마치자 입을 열었다.
“나도 처음에는 의심이 갔는데, 하는 모습을 보니까 그 말이 사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모습을 보셨는데요?”
“조금 전에도 말했듯이, 처음 그자를 보았을 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날씨가 아무리 흐려도 운전을 천천히 했기 때문에 뛰어오는 모습을 분명히 봤을 거야. 그런데 차에 부딪히기 전까지 전혀 보질 못했어. 갑자기 나타나 부딪혔다고나 할까?”
“처음 봤을 때 입은 옷이 거의 젖지 않았다면서요?”
“비가 막 떨어졌을 때 모습이었어. 뛰어오면서 계속 비를 맞았다면 그렇게 말끔하지는 못했을 거야.”
“그러니까 다른 세상에서 이곳 세상으로 들어선 순간 어머니와 마주쳤고, 날씨도 바뀌어 비가 내렸다는 거잖아요?”
“그건 사실이라고 본다.”
“또 어떤 모습을 보고 다른 세상에서 왔다고 느꼈는데요?”
“이쪽 세상에 뭐가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어. 어디로 가면 뭐가 있는지 일일이 가르쳐주기 전에는 아무것도 몰랐으니까.”
“그걸 어머니가 일일이 가르쳐줬다는 거네요?”
“이곳 세상에 적응하기까지 거의 한 달 넘게 걸렸어. 눈치가 빠르고 머리가 비상한 자라서 그 정도 걸렸지, 다른 사람 같았으면 몇 달은 더 걸렸을 거야.”
“그런데 왜 갑자기 하나교를 떠났을까요?”
“그건 교주님 때문이지 싶다. 자신을 받아준 교주가 살아 있을 때까지만 하나교에 남아 있겠다고 오래전부터 생각했겠지. 이번에 그걸 실천한 것이고.”
“교주님이 아직 숨을 거둔 건 아니잖아요?”
“이미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으니까. 교주도 다른 사람으로 바뀌고 하니까, 떠나기로 마음먹었겠지.”
“그자를 한번 만났으면 하는데요.”
“차 대장을 네가 만나겠다고? 만나서 뭐 하려고?”
“다른 세상에서 온 사람이라고 하니까 궁금해서요.”
“그자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위험한 사람이야.”
“그래서 만나지 말라는 거네요?”
“조금 전 말했잖니. 그자는 사람이 아니라 냉혈동물이라고.”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사는 곳을 알려줘요.”
“그 사람이 어디에 사는지는 나도 모른다.”
“알면서 일부러 모른 척하는 건 아니고요?”
“내가 뭐하러 모른 척하겠니. 차 대장 사는 곳은 하나교 사람 아무도 모를 게다. 못 믿겠으면 당장 나가서 아무나 붙잡고 물어보든가. 차 대장 사는 곳이 어딘지 아느냐고 말이야.”
“하나교에 그렇게 오랫동안 있었는데, 어떻게 사는 곳을 모를 수가 있죠?”
“차 대장 스스로 사는 곳을 안 알려주려고 했으니까.”
“별동대 대원들도 모를까요?”
“궁금하면 비서실장한테 물어보든가. 비서실장도 별동대에 있었으니까.”
린은 차 대장와 함께 하늘궁전에 들어왔다가, 새 교주 눈에 띄어 비서실장이 되었다. 별동대에서 겪은 일을 물으면 린이 달가워하지 않아, 가끔 만나 이야길 나누더라도 별동대 이야기는 일부러 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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