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SYNA의 서재

탐정이라는 거짓말

웹소설 > 일반연재 > 라이트노벨, 추리

SYNA시나
작품등록일 :
2019.07.19 12:50
최근연재일 :
2021.02.05 00:57
연재수 :
57 회
조회수 :
2,025
추천수 :
37
글자수 :
251,734

작성
20.05.11 00:39
조회
22
추천
0
글자
9쪽

5. 탐정은 의뢰인이 필요하다 (1)

DUMMY

“일어날 시간이다.”


눈을 채 뜨기도 전에 듬직한 팔이 나를 안아들어 침대에서 빼냈다. 하품을 눌러삼키며 겨우겨우 눈꺼풀을 든다. 환한 금발의 남자가 물끄러미 품 안의 나와 시선을 맞춘다. 나는 손을 들어 애완동물에게 하듯 로레인의 머리를 토닥거렸다. 잘했어, 잘했어. 로레인은 목을 움츠리곤 고양이처럼 내 손에 이마며 뺨을 부빈다. 그 익숙한 비현실을 응시하는 동안 잠이 씻긴 듯 달아난다.

내가 충분히 정신을 차린 것 같다고 판단한 로레인은 조심스레 나를 소파에 내려놓았다. 문자 그대로 눈이 확 떠지는 이 미남의 이름은 로레인 엔젤크리엇, 내 조수다. 내가 탐정 업무를 하는 데 필요한 부수적인 업무를 처리해주고, 정보도 수집하고, 집안일도 하고, 아무튼 시키면 뭐든 군말없이 척척이다. 시키지 않아도 필요한 걸 알아서 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내가 일어나면 곧장 먹을 수 있도록 미리 아침을 지어두는 것. 지금도 이미 집 안은 갓 만든 음식의 따듯한 향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 때문에 조리대 앞을 오가는 늘씬한 뒷모습을 지켜볼 수 없는 건 약간 아쉽다고 생각하지만.

아무튼 로레인은 훌륭한 조수이고 흠잡을 데 없는 동거인이다.

단 한가지만 제외하면.

로레인이 소파 아래에 정중하게 무릎꿇고 앉는다. 곧은 손가락들이 얽혀든다. 나는 그가 손깍지를 얼굴 앞으로 끌어당기는 것을 내려다본다.


“나의 종언을 들어 주겠나, 마녀여.”

“아라.”

“마녀의 이름을 호명하는 무례를 저지르고 싶지 않다.”

“아라.”

“······나의 종언을 들어 줘, 아라.”

“말해.”


마녀도 아라도 둘 다 사실이 아니지만 기왕이면 좀 더 이름같은 쪽으로 불리고 싶다. 로레인은 사뭇 경건하게 눈을 내리감는다. 모양좋은 입술이 열린다.


“악마는, 결핍하는 자. 이미 태어났지만 미처 태어나지 못한 자. 악마의 이름에는 천사가 들어간다. 우연은 반드시 필연에 살해당한다. 그러니 내일은 완전해질 수 있기를. 이물질은 불타올라 홍염으로. 죽음을. 날개를. 크리엇을.”


로레인은 망상장애를 앓고 있다. 기본 설정은 이렇다. 자신은 악마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 자신을 위한 자리는 준비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자신과 짝지어진 천사를 찾아 죽이고 그의 자리를 빼앗거나, 혹은 그에게 죽어야 한다. 그 천사의 이름은 크리엇이다. 우연히 내 거짓말 탐지 능력을 알게 된 로레인은 나에게도 멋대로 설정을 붙여 자신의 세계에 끼워넣었다. 나는 죽음을 관장하는 극서의 마녀, 아라. 죽음의 순간에는 모든 거짓은 걷히고 진실만이 낱낱이 드러나는 법이니, 나의 권능은 거짓말을 알아보는 것. 죽음을 관장하는 아라는 악마에게도 마땅한 죽음을 내려 제대로 태어나게 해줄 존재. 그래서 그는 내 발밑에 엎드려 ‘종언’, 크리엇을 찾아내게 도와달라는 기도를 올린다······.

사춘기에 하기에도 부끄러운 망상이지만 나는 로레인이 좋으니까 맞춰 준다. 이런 흠결이 없다면 이런 근사한 남자가 나와 어울려줄 리 없다는 현실적인 주제파악의 결과기도 하다.

어느새 몸을 일으킨 로레인이 아침을 날라 왔다. 소파 앞의 낮은 탁자에 정갈한 음식이 차려진다. 로레인은 요리도 나쁘지 않게 했다. 조금 복잡한 요리는 하지 못했지만 그런 건 내가 하면 되니까. 바닥으로 미끄러져 내려가 천천히 음식을 들었다. 로레인은 나와 속도를 맞춘다. 모든 것은 물 흐르듯 자연스럽다.

식사를 마치고 간단히 외출 준비를 하는 동안 부엌 쪽에서는 그릇이 달각댔다. 내가 신발을 눌러신기 시작할 무렵, 로레인이 타이밍 맞게 현관으로 마중을 나왔다. 웃옷 앞자락이 세제 거품으로 젖어 있었다.


“새로운 신탁 요청이 있던가?”

“있지. 로레인이 전화 받아 줬었잖아.”

“······깜빡했군. 사과한다.”

“괜찮아. 마녀님이 바쁜 만큼 조수도 바쁘니까. 그럼 집 잘 보고 있어. 다녀오면 또 얘기해줄게.”


말과는 달리 나는 곧장 현관을 떠나지 않고 로레인을 향해 양 팔을 펼친다. 로레인은 저항 없이 상체를 숙여 포옹에 응한다. 몸이 단단히 겹치고, 가슴의 축축함이 옮는다. 그쯤은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로레인의 흠을 있는 힘껏 끌어안는다.

로레인의 망상과 함께 나의 일상은 굴러간다.


* * *


사락사락.

로레인의 머리카락은 잘 코팅된 햇빛처럼 매끄러웠다. 나는 손틈새로 몇 번이나 금빛을 흘려보낸다. 로레인의 모든 걸 좋아했지만 머리카락은 그 중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부분이었다. 로레인은 내가 한참이나 머릿결을 가지고 놀아도 아주 얌전히 내 옆에 누워 있기만 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내가 잠들 때까지 쿠션이 되라고 투정부렸기 때문이다.


“······저, 아라.”

“쿠션이 말도 하네.”

“······.”


로레인의 한숨은 내가 아니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미약했다. 그래서 나는 일부러 웃음을 터뜨렸다. 내 숨이 옆얼굴에 닿자 로레인은 이번에는 조금 덜 미약하게 뺨을 떨었다. 딱히 나한테 로레인을 괴롭히는 취미가 있는 건 아니다. 이렇게 반응이 귀여운 쪽이 나쁜 거다. 조금 더 얼굴에 숨을 불어대는 장난을 치며 파르르 떠는 눈꺼풀을 구경하다가, 적당히 만족해서 이제 말하는 쿠션이 되어도 좋다고 허락해줬다.


“오늘은 어떤 신탁을 내렸나, 아라.”

“아, 아직 얘기 안 했었지.”


보통 사건 얘긴 저녁 먹으면서 하는 편이지만 오늘 메뉴는 매운 전골이었다. 따라서 로레인은 식사 내내 곤란해졌다. 전골 한 입, 물 한 모금, 전골 한 입, 물 한 모금, 잠깐 쉬기, 맛없냐고 물으면 급히 다시 먹기. 별다른 이야기를 할 여유는 아무렴 없었다. 물론 나는 그 모습을 구경하기 위해 일부러 매운 요리를 만들었다.

어깻죽지에 닿는 긴 금색 머리칼을 쫑쫑 땋으면서 나는 오늘의 사건을 회고했다. 어떤 의뢰인이 찾아왔고, 무슨 문제를 가져왔는지부터 내가 문제에 접근한 방식, 그 과정에서 만난 사람들, 마침내 도달한 예상 밖의 진실까지 차근차근 되짚었다.


“그래서 추종자에게는 뭐라고 말해주었나.”

“당연하잖아. 추리한 장소에 찾아가면 그 사람과 재회할 수 있을 거라고 말했지. 당신에게 세계를 주려고 했던 거지 당신을 미워한 적은 없다고.”

“그대는 내일도 새로운 신탁을 내려야 하니, 그 예언을 이행하는지는 내가 지켜보겠다.”

“응. 부탁할게.”


탐정은 단순히 사건을 파헤치는 게 아니라 반드시 나은 미래에 도달하도록 도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상처를 만들어낼 뿐인 범인과 하나도 다르지 않으니까. 그게 내 탐정으로서의 지론이자 의뢰인이 끊기지 않고 찾아오는 차별점이었다. 과거를 바꾸어서 미래를 바꾸는 것이야말로 탐정의 일. ······? 문득 알 수 없는 위화감이 심장을 저몄다. 그 순간, 로레인이 내 목을 끌어당겨 안는 바람에 심장이 쿵 떨어졌다. 위화감은 빠르게 잊혀진다.

가까워진 얼굴은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슬슬 졸린 모양이었다. 대체로 표정이 없고 나에게 굉장히 조심스러운 로레인이지만 졸릴 때는 달랐다. 좀 더 한 껏 끌어안겨 눈 앞이 온통 매끄럽고 가느다란 햇빛으로 흘러넘쳤다. 그의 정수리에서는 흰 냄새가 났다.


“그대의 ······가 좋아.”


품으로 파고든 데다 졸음에 묻혀 있는 목소리는 중간이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들렸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건 없었다. 애시당초 ‘그대’가 지칭하는 것은 내가 아니니까. ······마음이 검어지기 전에 말을 돌렸다.


“로레인의 오늘은 어땠어?”

“크리엇을··· 만나지 못했······.”


당연한 말이었다. 존재하지 않는 거니까. 당연한데도 물어본 건 로레인이 나를 벗어날 수 없다는 걸 다시 확인하기 위해서. 그러는 동안 내 이야기는 전부 너의 세계가 되고, 나는 너의 일부가 되는 거야.

꾸역꾸역 뭔가 더 말하려는 눈치인 로레인의 등을 살살 쓸어주었다. 대답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사가 전해졌는지 곧 로레인의 몸이 규칙적으로 오르내렸다. 쿠션이 먼저 자네, 들리지 않을 말을 장난스레 중얼거리고 이불을 끌어올렸다.

완벽한 로레인에게는 망상장애라는 한 가지 흠이 있다. 하지만 사실, 나는 로레인이 망상장애기 때문에 좋아한다. 나의 거짓말 탐지는 말하는 사람이 믿고 있는지 아닌지에 반응한다. 망상하는 사람은 자신의 말을 언제나 믿는다. 불가능한 것마저도, 한 점 흔들림없이.

그러니 너는 결코 거짓말하지 않는 사람. 너는 내게만은 단 한 번도 거짓이었던 적 없다. 새빨간 세계에서 그게 얼마나 위안이 되는지는 영원토록 나만이 알 기쁨.


······잘 자. 내일 또 봐. 나의 악마.


작가의말

뒤지게 늦었네요........................ 그리고 또 뒤지게 이상한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아웃라인 다 짰으니까 다시 일주일 1편 업로드에 도전장 걸어두고 감.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탐정이라는 거짓말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57 6. 탐정은 계획을 망친다 (2) 21.02.05 18 0 12쪽
56 6. 탐정은 계획을 망친다 (1) 20.11.01 24 0 11쪽
55 5. 탐정은 의뢰인이 필요하다 (完) 20.09.09 23 0 14쪽
54 5. 탐정은 의뢰인이 필요하다 (7) 20.08.21 16 0 9쪽
53 5. 탐정은 의뢰인이 필요하다 (6) 20.07.29 20 0 11쪽
52 5. 탐정은 의뢰인이 필요하다 (5) 20.06.23 24 0 10쪽
51 5. 탐정은 의뢰인이 필요하다 (4) 20.06.07 21 0 11쪽
50 5. 탐정은 의뢰인이 필요하다 (3) 20.05.30 19 0 10쪽
49 5. 탐정은 의뢰인이 필요하다 (2) 20.05.20 20 0 10쪽
» 5. 탐정은 의뢰인이 필요하다 (1) 20.05.11 23 0 9쪽
47 4. 탐정은 범인을 맞닥뜨린다 (完) 20.03.30 26 0 9쪽
46 4. 탐정은 범인을 맞닥뜨린다 (13) 20.03.30 20 0 9쪽
45 4. 탐정은 범인을 맞닥뜨린다 (12) 20.03.23 18 0 12쪽
44 4. 탐정은 범인을 맞닥뜨린다 (11) 20.03.23 17 0 11쪽
43 4. 탐정은 범인을 맞닥뜨린다 (10) 20.03.03 33 0 10쪽
42 4. 탐정은 범인을 맞닥뜨린다 (9) 20.03.03 15 0 11쪽
41 4. 탐정은 범인을 맞닥뜨린다 (8) 20.02.25 22 0 11쪽
40 4. 탐정은 범인을 맞닥뜨린다 (7) 20.02.25 22 0 11쪽
39 4. 탐정은 범인을 맞닥뜨린다 (6) 20.02.15 24 0 9쪽
38 4. 탐정은 범인을 맞닥뜨린다 (5) 20.02.15 33 0 9쪽
37 4. 탐정은 범인을 맞닥뜨린다 (4) 20.02.11 26 0 11쪽
36 4. 탐정은 범인을 맞닥뜨린다 (3) 20.02.11 22 0 10쪽
35 4. 탐정은 범인을 맞닥뜨린다 (2) 20.02.04 27 1 10쪽
34 4. 탐정은 범인을 맞닥뜨린다 (1) 20.02.04 25 1 11쪽
33 3. 탐정은 과거를 바꾼다 (完) 20.01.16 29 1 8쪽
32 3. 탐정은 과거를 바꾼다 (8) 20.01.16 21 1 9쪽
31 3. 탐정은 과거를 바꾼다 (7) 20.01.07 28 1 9쪽
30 3. 탐정은 과거를 바꾼다 (6) 20.01.07 24 1 10쪽
29 3. 탐정은 과거를 바꾼다 (5) 20.01.07 31 1 10쪽
28 3. 탐정은 과거를 바꾼다 (4) 19.12.24 62 1 9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