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 장생(長生)에서 운장(雲長)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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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생(長生)에서 운장(雲長)으로
하동(河東) 해현(解縣) 해지(解池).
염호(塩湖)로 향하는 길목에서 구 척 장신의 사내가 족히 사십은 되어 보이는 관군과 관리, 염상(塩商)의 무리를 대적하고 있었다.
사내의 성은 관(關), 명은 우(羽), 자는 장생(長生)이었다. 무인의 정장 차림은 아니었으나 한 손에는 창을 들고 있었다.
관군을 이끌고 온 현위(縣尉)가 관우를 향해 소리쳤다.
“해지는 한(漢)의 것이다. 당장 물러서지 않으면 목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현위와 현리(縣吏) 둘, 염상 넷을 제외한 관군의 손에 들린 삼십여 개의 창이 관우를 겨누고 있었다.
관우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창을 잡지 않은 다른 한 손으로 가슴까지 내려오는 긴 수염을 쓸고 있을 뿐이었다.
무겁게 내리깐 눈은 감은 것인지 뜬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동자와 흰자위는 보이지 않았으나 그 안광은 여명보다 강한 기운을 가지고 있었다.
염상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관우를 향해 걸어 나갔다.
“이보게, 장생. 이제 물러나시게. 섭섭하지 않게 챙겨준다 하지 않았나.”
“두 시진 전에 취해간 소금을 다시 돌려준다면 물러나겠다.”
염상이 한숨을 내쉬며 이야기를 이었다.
“그 소금은 자네가 임의로 민가에 나누어준 것이 아닌가. 민가에서 밀매가 횡행하면 현에서도 손을 쓸 수 없다는 것을 자네도 잘 알고 있지 않나.”
“염상의 밀매와 민가의 밀매를 구별하지 않는다. 군현 관리의 밀매와 백성의 밀매를 구별하지 않는다.”
“이보게, 장생!”
“돌려주지 않는다면 물러서지 않겠다.”
염상이 물었다.
“자네가 이렇게 나온다면 도적떼인 황건적(黃巾賊)과 다를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관우가 대답했다.
“밀매로 치부하는 염상과 현의 관리 역시 황건적과 다르지 않다. 돌려주지 않으면 물러서지 않는다 했다.”
염상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무리 안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현위에게 이야기했다.
“삼십 정예병이라 해도 당해내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현위도 이미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관군을 향해 소리쳤다.
“당장 저 자의 목을 베도록 하라!”
무리 앞에 선 관군 몇이 관우를 향해 달려들었다. 수염 쓸기를 멈춘 관우는 달려드는 관군을 차례대로 상대하기 시작했다.
단병접전. 관우가 치켜든 창은 허공을 가르는 듯 했으나 가장 먼저 달려든 관군의 목이 그 창끝에서 순식간에 잘려나갔다. 그 몇 보 뒤에서 머뭇거리던 서너 명의 관군 역시 관우가 들이민 창에 배와 가슴을 관통당하며 차례대로 고꾸라졌다.
눈 깜짝할 사이에 찌르고 베기가 반복되었고, 일 합을 넘기지 못하고 쓰러진 관군이 대여섯에 이르렀다.
남은 관군이 달려들기를 멈추었다. 절반은 이미 겁을 먹고 있었다.
현위는 당황했으나 이내 칼을 빼들었다.
“모두 일제히 달려들도록 하라! 저 자의 수급을 반드시 베어야 한다! 물러서는 자는 내 칼에 죽을 것이다!”
관군은 전방과 좌우 측방에서 동시에 달려들었다.
차륜전. 관우는 찌르고 베기를 멈추었다. 대신 창간(槍杆)을 병기 삼아 둔기처럼 휘두르며 눈앞의 관군을 닥치는 대로 때리고 쳐 쓰러뜨렸다.
철창은 아니었으나 빠르고 거세게 휘두르는 창은 대숲에 이는 바람 소리를 내며 관군의 창날을 댓잎처럼 날려버렸다.
관군은 순식간에 모두 무장이 해제되었고, 관우가 맞받아내야 할 창은 더 이상 없었다.
창 휘두르기를 멈춘 관우는 아비규환이 된 관군 무리를 향해 거칠게 창을 꽂아 넣기 시작했다. 지쳐 엎어진 자의 등을 찔렀고, 지쳐 나자빠진 자의 뱃가죽을 뚫었으며, 지쳐 뒤로 물러선 자의 목을 베었다.
전투도 아니고 교전도 아니었다. 격투도 아니고 대결도 아니었다.
살육이었다.
도륙이었다.
남은 자는 이제 현위, 현리 둘, 염상 넷뿐이었다. 관우는 숨을 고르며 수염을 쓸었다. 현위가 엎드렸고 뒤이어 현리와 염상도 모두 엎드렸다.
“너희를 살려두지 않을 것이다.”
수염 쓸기를 멈춘 관우는 아무 표정 없이 엎드린 현위와 현리, 염상의 등을 차례대로 찔러 죽였다. 창이 등 뚫는 소리와 숨 끊어지는 자의 외마디 비명은 오히려 적막에 가까웠다.
마지막 한 명의 염상이 남았을 때 관우가 창을 거두었다.
“나는 이곳을 떠날 것이나 너는 취해간 소금을 민가에 모두 돌려주어야 한다.”
살아남은 염상은 대답도 하지 못하고 엎드린 채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관우가 이야기를 이었다.
“현의 것이 불가하다면 염상의 것을 풀어야 한다.”
관우의 오른쪽 소맷자락에서 피가 흘렀다. 검붉게 젖어있는 오른쪽 어깨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그 피는 손에 쥔 창을 타고 쏟아지듯 흘러내려 바닥에 고이기 시작했다.
“다시 돌아와 확인할 것이다. 반드시 돌려주어야 한다.”
관우는 피범벅이 된 창을 내던지고 돌아섰고, 살아남은 염상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달았다. 그때였다.
“이보시게.”
언제부터 와 있었던 것인지 수염과 눈썹까지 흰 백발의 노인이 관우를 불렀다.
“내 그 상처를 치료해줄 것이니 잠시 시간을 내주시오.”
“뉘시오.”
노인이 웃으며 대답했다.
“세간에서는 화타(華佗)라 부르고 있고 사백 년 전에는 상산사호(商山四晧) 중 하황공(夏黃公)이라 불린 최광(崔廣) 소통(小通)이라 하오.”
‘너무 많은 피를 흘린 것인가. 화타에 사백 년 전의 상산사호라니···. 하지만 지금은 이 노인에게 의지하지 않을 수 없구나.’
과다한 출혈로 정신이 혼미해진 관우는 쓰러지듯 주저앉았고, 화타는 관우의 오른쪽 어깨를 살피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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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혈을 마친 후 화타인 하황공이 관우에게 물었다.
“귀공은 불사의 육신과 불패의 무용 중 하나를 얻을 수 있다면 무엇을 택하겠소.”
관우가 대답했다.
“지지 않으면 죽지 않는 것이니 불패의 무용을 택할 것입니다.”
화타인 하황공이 관우의 대답을 이었다.
“불사와 불패는 분리되는 것이 아니나 엄연히 구별되는 것이오.”
관우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대답했다.
“죽을지언정 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화타인 하황공이 관우의 대답을 이었다.
“자가 장생(長生)이라 했소? 불패의 무용을 향한 귀공의 뜻이 구름처럼 높고 넓으니 이제부터는 운장(雲長)이라 해도 될 것이오.”
“운장이라···.”
“귀공이 오른쪽 어깨를 다시 쓰는 순간부터 불패의 무용을 발휘하며 천하를 호령하게 될 것이오.”
관우가 웃으며 화타인 하황공의 이야기를 받았다.
“그것이 주어지는 것이라면 받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화타인 하황공이 이야기했다.
“내가 준 것이 아니라 귀공이 이미 가진 것이며, 조금 전에 선택한 것이오.”
“많은 피를 흘려 정신이 혼미하니 한두 시진 후에 다시 가르침을 주십시오.”
“한두 시진 후면 나는 떠나고 없을 것이나 귀공이 얻을 것 역시 바뀌지 않을 것이오.”
관우는 앉은 채로 잠들었고, 화타인 하황공은 자리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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