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 (8)
80화
한쪽 벽이 뻥 뚫린, 전망이 죽여주는, 넓은 방 안에서 두 여인이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하지운은 두 여인을 내팽개쳐 놓고, 현재 아성 안을 물청소 중이라 정신이 없었다.
그 틈에 도망칠 시도를 해 볼 법도 한 그녀들이었지만, 둘 중 누구도, 도망치자는 말을 먼저 꺼내는 이가 없었다.
도전해서 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절실히 느꼈기 때문이다.
어설프기 짝이 없는 정보만 믿고, 말도 안 되는 끔찍한 괴물에게 선제 타격을 해 버렸다.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끌어와도 시원찮을 판에, 말 같지도 않은 장난질을 해 버린 꼴이었다.
양 발목이 잘렸던 쌍검녀는 지금 두 다리가 도로 붙어 있는 상태다.
잘려 나가서 바닥을 뒹굴고 있던 발들을 가져다가, 치료 마법으로 붙인 것이다.
뭔가 절단면이 완벽하게 이가 맞는 것 같지도 않았고, 좌우 균형이 이상하게 비틀어진 느낌이 계속 들었다.
하지만 두 여인은 그것을 지적할 기력이 없었다.
브리갠트의 치료술사 중, 잘려 나간 신체 부위를 제자리에 도로 갖다 붙일 수 있을 만큼, 뛰어난 치료 능력을 지닌 이가 다섯이 있다.
수백 명의 마법사 중 단 다섯 명만이 보여 줄 수 있는 곡예에 가까운 행위 예술이다.
그런 이적을 그녀들의 눈앞에서, 미친 살육마가 보여 준 것이다.
그러고 난 후 물 마법과 바람 마법을 시전하여, 피범벅이 되어 있던 침실 바닥을 청소하였다.
그런 후 불 마법으로 물기까지 말렸다.
입을 꼭 다물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두 여인이 사는 것을 포기했다.
그저 궁금하시다는 것들을 어서 물어보시고, 고통 없이 보내 주시기만을 간절히 소망하고 있었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들어서는 하지운을 보고, 두 여인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아무리 죽음을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다 해도, 저승사자의 면상을 실물로 영접해 버리니, 눈물이 안 나올 수가 없었다.
“오래 기다렸어? 내가 냄새에 좀 민감해. 벌써 해도 지려고 하는데, 후딱 하고 끝내자. 오래 해서 좋을 사람은 나밖에 없잖아. 고문 말이야.”
두 여인의 입에서 곡소리가 터져 나왔다.
“조용히 좀 하자. 사실 의사소통은 필담으로도 가능해. 굳이 혀가 없어도 된다는 얘기지.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이해가 가?”
이해가 가는 모양이었다.
입을 꼭 다문 채 끅끅거리는 소리만 침실 안에 가득했다.
“혼자서 나와 대화를 나누다가, 혹시 네가 미쳐 버릴 수도 있잖아. 그래서 네 졸개를 살려 뒀어. 서로 의지하라고. 물론 널 버리고 도망쳤던 년이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낫잖아? 그러니까 정신 차리고, 묻는 말에 또박또박 대답해. 그게 너 자신을 위한 최선의 행동이야.”
안 해도 되는 이야기를 굳이 덧붙였다.
하지운은 지금 미오가 얼마나 솔직해지고 싶은지를 잘 모르고 있다.
하지운이 뭘 궁금해하고 있는지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지만, 미오는 그냥 자신에 대해 있는 대로 다 읊어 줄 생각이다.
심문이 끝나면 남는 것은 자신의 죽음뿐이다.
차라리 말이라도 속 시원히 다 하고 죽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막상 입을 떼려고 하자, 그녀의 눈에서 서러운 눈물이 멈추지를 않고 쏟아져 나왔다.
전생의 그녀는 못생겼었다.
정말 말 그대로 누가 봐도 못생겼었다.
심지어 부모조차도 그녀에게 평생 예쁘다는 말을 해 준 적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소심하고 어두운 성격으로 자라났고, 학교에서는 기분 나쁘게 만든다는 이유로 이지메를 당했다.
졸업만 하면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는 작은 희망을 가지고, 학창 시절은 어떻게 꾸역꾸역 버텨 냈다.
그리고 사회로 나와 취업을 한 후, 다시 그녀의 아픔이 반복되었다.
결국 올해 5월 10일 출근길에 철로에 뛰어듦으로써, 고통스러웠던 그녀의 인생을 마감했다.
이곳에서 부활한 후, 그녀는 전생과 완전히 정반대되는 삶을 경험하게 되었다.
고작 삼 개월도 안 되는 짧은 시간이었음에도, 전생에 느낀 긍정적인 감정 전체를 다 합친 것보다, 몇 배는 더 큰 행복감을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어떻게 얻은 행복인데... 고작 백 일도 못 채우고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다니... 너무 억울해... 죽고 싶지 않아! 제발! 제발, 죽이지 마! 나 같은 거 잠시 더 살려 둔다고, 결과가 달라질 리는 없잖아! 어차피 네가 다 죽이고 끝낼 게임이잖아! 제발... 살려 줘... 조금만... 조금만 더 살고 싶어... 제발...”
“살짝 미안한데, 그럴 생각은 쥐똥만큼도 없어. 조금이라도 그럴 의향이 있었다면, 너에게 그렇게 많은 것을 보여 주지는 않았겠지. 내가... 널 이미 죽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행동한다는 걸 못 느꼈어?”
“너... 너도 정상이 아니었지? 그러니 로저 같은 놈이랑 섞였지! 너, 전생에 미친놈이었지?”
“어.”
“......”
“맞아, 전생에도 내 본성은 이랬어. 이렇게 행동하면 안 되는 몸을 갖고 있어서, 얌전히 찌그러져 있었던 것뿐이지. 그런데... 질문은 내가 하는 거야. 한 번은 봐 줄 테니, 다시는 그러지 마. 네가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두 개야. 고통 없이 죽는 거. 통각의 한계를 보고 죽는 거. 다른 건 없어.”
손톱만큼의 희망도 주지 않는 하지운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던 미오가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급하게 입을 열었다.
“너 전생에 한국인이었지? 네가 아까 혼잣말하는 걸 들었어. 분명히 중간에 한국말이 섞여 있었어! 나 케이 팝 팬이야! 조금이지만, 한국말도 할 줄 알아!”
‘아... 씨발... 조심하기로 그렇게 다짐해 놓고, 또 실수했네...’
“그리고 나 CTX 팬이야! 너도 좋아하지?”
“CTX? 아... 폭탄소년단... 내가 소년단을 좋아하게 생겼냐? 걸 그룹도 아니고 소년으로 구성된 단체를?”
“아... 저기, 그러면 어떤 그룹 좋아해? 좋아하는 노래는 뭐야? 나 걸 그룹도 다 알아! 노래도 웬만한 건 다 알고 있어!”
‘얘가 진짜 죽기 싫구나. 뭐 죽고 싶은 인간이 어딨겠냐마는. 그래 봤자, 몇 분 더 사는 건데... 까짓 몇 분... 놀아 주지, 뭐.’
“내가 좋아하는 가수들은 네가 알기에는 연식이 좀 된 형님들인데.”
“얘길 해 봐! 내가 알고 있을지도 모르잖아! 가수 이름은 몰라도, 노래 제목은 들으면 알 수도 있어!”
“그래? 너 그럼 ‘맞아 죽는 밤에’랑 ‘다 불지만’이라고 들어 봤어? 리메이크곡으로 ‘고문의 끝은 어디인가요?’도 있어.”
“그게... 노래 제목이야? 너희 심의가 빡센 거 아니었어?”
“몰라? 그럼 ‘대화가 싫다.’, ‘패고 싶다.’ 그리고 ‘고문의 맛’이라는 노래도 있는데.”
“너... 설마... 북쪽... 사람이었니?”
“에미나이, 니 이제 알았니?”
미오 씨가, 발 앞에 갖다 둔 나무통에, 전날 먹은 음식물까지 다 게워 냈다.
‘얘들은 왜 이렇게 북한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지? 무엇보다, 이거 연변 사투리 아니었나?’
“아, 미안. 장난 한번 쳐 봤어. 남쪽이야.”
미오 씨가 옷소매로 입가를 닦으며, 싱긋 웃어 보였다.
“너 정말 짓궂구나. 장난을 참 좋아하나 보네.”
“아니, 그다지 안 좋아해. 너무 애쓰는 모습이 안돼 보여서, 슬슬 포기하고 싶게 만들려고. 이딴 식으로 연장시키는 삶에 무슨 의미가 있겠어? 이제 그만 마음 정리해.”
“못 해! 이곳에서의 시간은 일분일초가 소중해! 부탁이야... 더 짓궂게 해도 좋으니... 조금만 더...”
“그쯤 해. 들을 얘기도 많은데, 이러다 밤새겠다.”
“아악! 너무 억울해! 넌 나보다 한 달을 늦게 와 놓고! 어떻게 이렇게 강해질 수 있어? 아무리 로저의 몸이라고 해도, 이건 말이 안 되잖아! 너무 불공평해!”
“올림픽에 출전했냐? 살인 게임에 참가해 놓고, 뭘 바라는 거야? 공명정대한 살인 게임을 기대한 건가?”
“......”
“그리고 네 사랑들 중 한 놈. ‘기력 흡수’ 가지고 있던 놈 말야. 너보다 먼저 온 놈이지? 나보다 먼저 온 놈인 건 당연한 거고. 그런데 로저의 기억 속을 아무리 되짚어 봐도 말야. 기력을 빨아 먹고 다니는 놈에 대해서는, 어떤 보고도 받은 일이 없더라고.”
“......”
“그놈이 극도로 조심해서 움직여 왔다는 말밖에 안 되는 건데... 아까 보니, 그런 것치고 지나치게 질긴 생명력을 가지고 있었잖아. 어느 정도의 기간 동안 강박적으로 세심하게, 그러면서도 꽤 많은 수를, 잡아먹어 왔다는 거지.”
“......”
“그렇게 신중하게 행동한 놈의 말로가 네 꼭두각시였잖아. 억울하기는 그놈이 더할 거 같은데. 네 생각은 어때?”
“그, 그건...”
“이곳에 건너온 놈 중에, 사연 없는 놈이 있을 거 같냐? 뭐 내 추측일 뿐이지만, 아마 죄다 허무하게 혹은 억울하게 요절한 놈들일걸. 누릴 거 다 누리고 죽은 놈이 이런 위험하고 잔인한 게임을 굳이 하겠다고 했을까? 그리고 저승에서도 굳이 그런 놈에게 환생의 기회를 줬을까?”
“......”
“내가 도저히 알 수가 없는 의문점이 하나 있어. 그것 때문에 다른 참가자들 모두를 괴롭힐 수밖에 없는 안타까운 상황이야. 피곤하게 하지 말고, 협조해. 이제부터는 묻는 말에 대답만 해. 네 몸에 튀어나와 있는 건, 아무거나 잘라서 네 졸개에게 먹일 거야. 솔직히 그러려고 쟤를 살려 둔 거야.”
“미, 미친놈...”
“애초에 그 애 또래의 여자애를 고문하는 모습을 그 애에게 보여 주기 싫었어. 그래서 네 같잖은 능력에 당해 준 거야. 그 상태로 대화를 통해 이것저것 알아내려고. 네가 내 소중한 걸 덥석 잡지만 않았어도, 일이 깔끔하게 끝났겠지. 지금 상황은 네가 다 자초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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