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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길동 님의 서재입니다.

죽은 줄 알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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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길동
작품등록일 :
2023.06.10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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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08 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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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도버의 봄 (5)

DUMMY

166화


“본체야, 삼백다섯 구 다 정리했다. 감시탑에 깔렸던 것들이 몇 있긴 한데, 식별이 안 될 만큼 손상된 건 하나도 없으니 걱정하지 마라.”

“걱정은 무슨... 야, 그럼 내려가서, 출발 준비나 시켜 둬라. 난 남은 것 마저 부술 테니까.”

“수고.”


파무어 마을 외곽에서 대기 중이던 일행 앞으로 복제 인간 열여섯이 내려와 고함을 쳤다.


“그만 자빠져 있고, 일어서서 갈 준비해라. 본체가 저 언덕만 치워 버리고 내려온다더라. 꾸물거리다 저 새끼 성질 건드리지 말고, 얼른얼른 움직여라.”

“예...”

“예? 뭐, 뭐라... 아... 가야지...”


하지운과 복제 인간들을 제외한 백구십여 명의 왕성 원정대와 팔백 명에 가까운 포로들이, 사지를 허우적거리며, 똑바로 서기 위해 안간힘을 써 댔다.

인간이 살면서 좀처럼 보기 힘든 광경을 봐 버리고는, 그 자리에서 침을 질질 흘리며, 주저앉아 버린 천여 명의 인원들이 제정신을 차리기 위해 젖 먹던 힘까지 다 쥐어짜 내고 있는 것이다.


혼자서 공성전을 한다기에 의구심 반 염려 반의 심정으로 지켜봤는데, 안 봤으면 좋았을 것을 굳이 봐 버리고 만 것이다.


특히 소피아가 받은 충격량은 어마무시했다.

하지운이 잡아 줬었던 여우머리가 흙 마법을 쓰던 놈이었다.

당연히 소피아가 익힌 마법도 흙 마법이다.


그래도 드레이시의 핏줄이라고 열흘도 안 돼서 그럴듯한 흙 마법을 시전한 그녀다.

그리고 한 달이 다 되어 가는 지금은, 비록 코피를 질질 흘려 대기는 하지만, 순식간에 김칫독 하나 정도는 거뜬하게 묻어 버릴 수 있는 흙의 대마법사가 된 것이다.


그런 그녀가 방금, 천지가 뒤집히는 듯한, 쇼킹한 경험을 사전 경고도 받지 못하고 해 버렸다.

마법이 점점 능숙해져 가는 것에 고무된 그녀는 슬슬 자만심이 솟구쳐 오르는 시기에 접어들고 있었다.


아무리 신장이 이 미터가 넘는 거인이 되었다 해도 애는 애다.

이제 곧 열다섯이 되는 그녀는, 지구로 치면, 한창 말 안 들을 시기인 사춘기를 거치고 있는 중이다.

그동안 특수 상황 때문에 잠잠했던 것이지, 말도 못하게 안전해진 지금은 서서히 지랄병이 도질 때가 되었다는 얘기다.


그런데 의도치 않은 충격 요법으로 완치에 가까운 상태에 강제로 이르게 돼 버렸다.

궤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고 멸문 직전에 이른 드레이시 가문에, 천우신조와 같은, 복스러운 이벤트가 발생한 것이다.


“이, 이런 걸... 어떻게 따라 해요...”


흙바닥에 주저앉아, 게슴츠레한 눈으로, 사라져 가는 언덕을 바라보며 소피아는 절망스러운 질문을 나지막이 웅얼거렸다.

그녀의 오라비가 마을로 들어서기 전, 잠시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며 남긴 이야기가 있었다.


“오라비가 시범을 보일 테니, 잘 보고 그대로 따라 할 수 있도록 성심을 다해서 노력하거라.”


땅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얼음 같은 시숙 컬버트가 한숨과 함께 비통한 한마디를 내뱉고 말았다.


“완전히 미친놈...”


하지운 같은 놈이 남을 가르치는 일을 맡으면 대체로 망한다, 가르치는 본인도 그리고 배우는 애들도.

‘이게 어려워?’ 하면서 말 같지도 않은 걸 보여 주고 그대로 따라 하면 된다고 하니까, 애들이 느는 건 없고 반발심만 커지는 거다.


그래서 지금 하지운이 말 같지도 않은 걸 보여 주고 가까운 시일 내에 숲 너머로 떠나가 버리는 것이 소피아에게 말 그대로 천우신조인 것이다.

미친 오라비가 자만심만 개박살 내 주고 떠나 버리면, 어린 남편이 치어리더 노릇을 해 주고, 가정 교사 노릇은 비슷한 정도의 재능을 가진 시숙이 해 줄 테니 말이다.

그녀의 입장에서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는 상황인 것이다.


또다시 드레이시 가문에 의도치 않은 큰 기여를 한 하지운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일행을 향해 다가왔다.

그런 그의 등 뒤로 휑한 황무지만이 어색한 광경을 자랑하고 있었다.

마치 처음부터 성은 둘째 치고 언덕조차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 와중에 마을은 또 멀쩡히 남아 있어 한층 더 기괴함이 증폭되었다.


“야, 출발 준비 시켜 놓으라고 했잖아. 왜 얘들이 아직도 자빠져 있는 거야? 여기서 한숨 자고 내일 가자는 거야?”


언덕을 하나 통째로 철거해 놓고도 먼지 하나 뒤집어쓰지 않은 깔끔한 하지운이 복제 인간들에게 짜증을 냈다.


“본체야, 아직 해 떨어지려면 두어 시간은 남았다. 뭐가 그렇게 급하냐? 고작 그거 했다고 벌써 배가 고프냐?”

“아니, 배가 고픈 게 아니라. 이거 봐. 애들이 거지도 아니고, 길바닥에 드러누워 있잖아. 그러니까 물어보는 거지.”

“얘들이 신기한 걸 보고 적잖이 놀란 모양이다. 네가 이해해라. 갓 태어난 고라니처럼 제대로 일어서지를 못하는데, 우리라고 뭐 어쩌겠냐?”

“본체야, 정 급하면 얘들을 염동력으로 운반이라도 할까? 각자 육십 명씩 운반하면 되겠네.”

“그러네, 그러면 되겠네. 야, 그냥 우리가 들자. 저 새끼 더 지랄하기 전에.”

“야, 그럼 말이랑 마차는?”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쉰 하지운이 마지못해 고함을 빽 질러 버렸다.


“십 분간 휴식!”


짜증을 내는 하지운을 보고, 똑바로 서기 위해, 미친 듯이 허벅지를 주무르던 천 명에 가까운 인원들이 다리에 이어 눈까지 풀린 채로 안도의 숨을 내뱉었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진정을 시켜 가고 있는 그들을 향해 이번에는 수백 명의 기마대가 맹렬한 기세로 접근해 왔다.

그것도 각기 다른 방향에서 두 무리가 동시에 말이다.


그럼에도 일행 중에 딱히 동요하는 이가 없었다.

심지어 포로들까지도 다 죽어 가는 표정으로 헛된 희망을 품으려 하지 않았다.


방금 전 하지운의 진면목을 단편적으로라도 엿본 이들의 입장에서 엘리트 전사가 수백이 몰려오든 수천이 몰려오든, 그게 다 무슨 의미가 있겠냐는, 심드렁한 반응이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두 무리의 병력이 나타난 방향도 왕성 쪽이 아니었다.

험프리의 병력이 아닐 가능성이 더 큰 상황이라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두 무리 중 먼저 도착한 무리의 리더들이 행렬과 약간 떨어진 곳에서 말을 멈추고는 부리나케 걸어와 하지운을 질책했다.


“로저 공, 왕성으로 가는 길에 우리도 불러 달라 하지 않았소! 어찌 연락조차 없이 먼저 가 버린 것이오?”

“그렇소, 로저 공! 이번에야말로 우리가 솔선수범해 선봉을 맡겠다고 하지 않았소!”


서부 변경의 대영주들이 각자 대여섯 명의 수행원들만 거느리고는 잠시도 쉬지 않고 쫓아온 것이다.

변경의 영주들이, 소머리 괴물들을 내버려 두고, 대규모 병력을 장기간 움직이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거기다 하지운이 연락도 없이 먼저 가 버리는 바람에, 최소한의 인원만 거느리고 헐레벌떡 말을 달려야만 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스무 개가 넘는 집안이 오는 길에 계속 합류하다 보니, 결과적으로 무려 백오십이 넘는 인원이 이곳에 당도해 있는 상황이다.


“하아, 그냥 기다리다가 부르면 오라니까. 이 아저씨들이 왜 이렇게 말을 안 들어, 피곤하게.”

“본체야, 먼틸리하고 로먼트도 온 모양이다. 저기 뒤에 오는 놈들은 북부 놈들이다.”

“신났네. 신났어. 하긴 재미있기로는 싸움 구경만 한 게 없지.”

“네가 왕성을 때려 부수는 모습을 구경하고 가겠다고, 이들이 먼지를 잔뜩 뒤집어쓰고 달려왔겠느냐?”


겨우 제정신을 차린 롱그레이 옹이 수행원들의 부축을 받으며 다가와 한마디 했다.


“그냥 짜증 나서 하는 말이지. 청소 끝나면 부르겠다고 실컷 얘기해 두면 뭐 하냐고. 말을 들어먹지를 않는데.”

“네가 삼백육십 년이나 된 왕조를 무너뜨리려 하는 마당에, 머리가 있는 이들이면 무조건 네 옆에 서 있고 싶겠지. 그 역사적인 순간에 네 주변에 있어야, 빵 부스러기라도 받아먹고 사서에 이름이라도 한 줄 남기지.”

“숟가락으로 존나 패고 싶네.”

“응?”


롱그레이 영감과의 오붓한 대화는 금세 끊겨 버렸다.

이번에는 북부의 인간 삼백여 명이 들이닥쳤기 때문이다.

그들도 하지운의 결벽증은 익히 알고 있어, 약간 떨어진 곳에서 말을 세운 후 종종걸음으로 걸어와서는 몸뚱어리를 들이밀었다.


그들의 실질적인 리더이자 차기 왕으로 낙점된 먼틸리 놈이 약간 상기된 표정으로 앞으로 나서려다 하지운과 눈이 떡 마주치고 말았다.

아무리 낯가죽이 두꺼운 먼틸리라 해도 지은 죄가 있다 보니 움찔하지 않을 수 없었다.


놈이 잠깐 머뭇거리는 틈에 딱히 눈치 볼 것 없는 로먼트 공이 앞으로 나서, 간이 의자에 거만하게 널브러져 있는, 하지운에게 인사를 건넸다.


“이 징그러운 놈아, 그새 또 뭘 처먹고 그렇게 커졌느냐? 이제는 아예 인간이기를 포기한 게냐? 어... 어? 저, 저기 있어야 할 성이 어디 갔지?”

“너희 오기 전에 내가 싹 다 치웠어. 걸리적거려서.”

“......”


어지간한 강심장 유스터스 로먼트조차도 그 순간만은 악귀라도 본 듯한 눈으로 하지운을 응시하였다.


“눈 그렇게 뜨지 말라고 내가 몇 번을 얘기했냐? 제발 귀족답게 표정 관리 좀 하면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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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 웬도버의 봄 (6) 24.03.10 31 1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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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 웬도버의 봄 (4) +2 24.03.06 37 2 10쪽
165 웬도버의 봄 (3) 24.03.04 34 1 9쪽
164 웬도버의 봄 (2) 24.03.02 36 1 10쪽
163 웬도버의 봄 (1) 24.02.29 28 1 10쪽
162 청소하는 날 (17) 24.02.27 26 1 10쪽
161 청소하는 날 (16) 24.02.25 27 1 9쪽
160 청소하는 날 (15) 24.02.24 27 2 10쪽
159 청소하는 날 (14) 24.02.22 36 1 10쪽
158 청소하는 날 (13) 24.02.20 27 1 9쪽
157 청소하는 날 (12) 24.02.18 27 1 10쪽
156 청소하는 날 (11) 24.02.16 30 1 9쪽
155 청소하는 날 (10) 24.02.13 31 1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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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 청소하는 날 (8) 24.02.09 34 1 9쪽
152 청소하는 날 (7) 24.02.07 31 1 9쪽
151 청소하는 날 (6) 24.02.05 28 1 10쪽
150 청소하는 날 (5) 24.02.04 31 1 10쪽
149 청소하는 날 (4) 24.02.02 29 1 10쪽
148 청소하는 날 (3) 24.01.30 28 1 11쪽
147 청소하는 날 (2) 24.01.28 27 1 9쪽
146 청소하는 날 (1) 24.01.26 32 1 9쪽
145 겨울 여행 (12) 24.01.24 27 1 10쪽
144 겨울 여행 (11) 24.01.22 31 1 10쪽
143 겨울 여행 (10) 24.01.20 27 1 9쪽
142 겨울 여행 (9) 24.01.19 28 1 9쪽
141 겨울 여행 (8) 24.01.17 30 1 10쪽
140 겨울 여행 (7) 24.01.15 29 1 10쪽
139 겨울 여행 (6) 24.01.12 32 1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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