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청죽재

마드라드의 나비는 폭풍을 부른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아라운
작품등록일 :
2019.06.28 09:02
최근연재일 :
2020.08.12 10:30
연재수 :
276 회
조회수 :
21,330
추천수 :
410
글자수 :
1,705,606

작성
20.06.01 14:25
조회
24
추천
0
글자
13쪽

239화. 이스윈의 그녀는 울부짖노라(3)

DUMMY

"추워졌다."


이것이 어머니 나무가 요동친 이후 현우가 가장 먼저 느낀 감정이었다.

대지에 내려 쬐는 햇살의 축복마저도 자신의 품 안에서는 단지 하나의 기상에 불과하다는 듯, 어머니 나무는 엘리안의 이름이 미치는 곳에서는 가을을 넘어 겨울의 것으로 쇠락해가는 따스함을 여름의 것으로 되돌렸다.

그렇기 때문에 엘리안과 이스윈은 영원한 여름철의 숲을 유지할 수 있었으며, 이는 풍부한 일조량과 더불어 나라의 대부분이 숲으로 둘러싸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엘리안이 타국으로 곡물을 수출할 수 있을 정도로 식량을 생산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런 푸른 젊음과 풍요로운 환경에는 종지부가 찍혔다.

어머니 나무는 마지막의 비명을 끝으로 더 이상의 반응이 없었다.

모든 세상이 무너질 것만 같았던 거대한 진동이 멈췄다.

현우와 미아, 그리고 아직도 정신이 나간 듯 좀처럼 일어서지 못하는 경비병은 눈만 끔뻑거리며 혹여 다시 지진이 일어날 것에 대해 몸을 바짝 움츠렸다.


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렀을까. 가장 먼저 행동을 개시한 것은 엘프 경비병이었다.

그 긴 귀를 쫑긋거리며 그는 어머니 나무의 목소리를 듣고자 했다.

하지만 어머니 나무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아무리 경비병이 애타게 그녀를 찾아 목을 찢어라 불러 보아도, 이미 큰 내상 때문에 자가치유의 면모로 접어든 어머니 나무는 자식의 소리를 듣지 않았다.

아니, 듣지 못했다고 하는 것이 적절한 판단이리라.


"너, 이 자식들..."


모든 엘프들의 근원이라 칭해지는 세계수를 잃은 데에서 비롯되는 분노.

끝없이 가슴 언저리에서 타올라, 마침내 전신을 불태울 그 분노를 어찌 해소할 수 있을까.

이성적인 사고를 즐기는 숲지기들이라 할지언정, 이미 머리가 판단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기에 경비병은 단 하나의 선택에 모든 것을 걸었다.

경비병은 자신의 앞에 놓여있는, 이 사태를 일으킨 주범이라 확신하는 두 명의 인물을 향해 그 분노를 표출했다.

다시 한번 칼을 빼어 든 그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어머니 나무를 원래대로 되돌리거라."

"저희가 한 것이 아니라고 몇 번이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 입이 너무 건방지다!"


결국 손을 먼저 휘두른 것은 어머니 나무를 모시는 성소의 경비병 쪽이었으며,


"그만 두게!"


갑작스레 모습을 드러낸 멧돼지 모습의 정령에 공격이 막힌 쪽 또한 경비병이었다.

구릿빛의 억센 털을 뽐내는 멧돼지는 그 엄니를 한차례 올려 경비병을 멀찍이 던져 버렸고, 정령이 모습을 감춘 후에 곧이어 사내의 목소리가 다시 공간을 울렸다.


"미아, 내 딸아. 어디 다치지는 않았니?"

"언제 여기까지 오신 거에요?"


수척한 모습의 노인들 몇 명과 나타난 라이던은 곧바로 미아에게 달려가, 그녀의 이마나 어깨를 짚으며 어딘가 다치지는 않았는지를 살펴보았다.

그 사이에 라이던과 같이 온 노인들은 어머니 나무의 변해버린 모습에 고개를 팍 숙이거나 눈을 감으며 침통함을 감추지 못했다.


"이런... 내 생애에 이런 일을 다시 또 볼 줄은 모르게 되었어."

"에반,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나? 나 역시 어머니 나무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은 두렵지 않으나, 먼저 이 세상을 뜬 동료들에게 무어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네."

"그렇게나 나이를 처먹은 게 자랑이면 말해보십쇼, 어르신들!"


라이던이 고함을 질렀다.


"거진 사백 살이 넘도록 살아왔으면 알 것 아닙니까! 말해보십쇼! 왜 어머니 나무가 이 꼴이 되었는지를!"

"엘리안의 손자야, 네 할아버지와 같이 전장을 누비던 우리에게 너무 심한 소리가 아니냐?"

"맞아. 어머니 나무의 축복이 그 끝을 다하여 갑작스럽게 육신마저 늙어버린 우리를 조금만 더 존중해주게."

"그래서 뭐, 할아버지 대접이라도 해주길 바라십니까? 젠장, 어째서 내 딸이 성인으로 인정받아야 하는 자리에 갑자기..."


이윽고 그는 현우를 향해 눈을 흘겨보았다. 갑작스레 자신에게 튀는 불똥에 현우는 눈썹을 크게 위로 올리며 화들짝 놀라는 자세를 취했다.

이성적으로는 전혀 현우와 상관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감정적으로는 저 평지사람 한 명 때문에 이 사단이 난 것이 아닐까도 싶었다.

하지만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에, 라이던은 한숨과 함께 자신의 화를 다스렸다.


"금새 들끓고 사그라지는 건 엘리안을 닮은 것 같긴 해."

"그렇지? 하기야 그러니 엘리안이 우리를 이끌고 전쟁에 나선 것이 아니겠나. 창대나 활대도 누군가 먼저 붙잡는 사람이 있어야 잡는 법이니."

"...이제 화를 내지 않겠습니다. 그러니 말해보시죠, 어르신들."


결국 라이던의 승낙 아닌 승낙이 떨어졌다.

늙은 엘프들은 서로 수군대기를 몇 초간 하더니, 그 중 그나마 이가 덜 빠져 발음이 가장 정확하고 말을 빨리 할 수 있는 노인이 한 걸음 앞으로 나오며 입을 열었다.


"어머니 나무께서는 우리가 생각하던 그 상상 이상으로 예전부터 이곳에 뿌리를 내리셨다. 그것 정도는 이스윈에서 도망친 너도 알고 있을 거다."

"예."

"그리고 그분의 주된 일 중 하나는 우리를 저기 마수의 숲으로부터 보호하는 일이었지. 예나 지금이나, 마수림에 거하는 불청객은 우리의 풍요를 노리고 있나니."


현우는 새삼 고서에서나 볼 법한 이야기가 직접 사람의 입에서 입으로 흐름에 놀람을 금치 못했다.

레이야마에서 보았던 황 노인도 그렇고, 백여 년은 우습게 살아가는 이들이 이리도 많을 줄이야.

그의 삶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들이 이 대륙의 곳곳에서는 버젓이 일어나고 있었다.

하프엘프인 황 노인 마저 대략 이백 세의 나이로도 청년의 모습을 유지한다면, 미아 역시 세월이 흐른 뒤에도 푸르른 젊음을 유지할 것이라.

하지만 그 때 자신은 어떠할 것인가. 현우는 상상해 보았다.

수십여 년 후, 주름진 피부와 희멀건 머리카락을 가진 자신이 여전히 탄력 있는 젊음을 유지하는 미아와 만나게 되었을 때를.

문득, 날개의 마법사는 두려움을 느꼈다.


"뭐해?"

"아, 아냐. 그냥 잠깐 뭐 좀 생각하느라."


이내 부르르 오한을 띠며 고개를 빠르게 저은 현우는 머리를 비웠다.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라, 저 엘프 노인이 말하는 진실에 관하여 집중할 때였다.


"어째서 마수의 숲이란 이름을 붙였겠나. 우리가 상상도 하지 못할 무서운 괴물들이 봉인되어 있거나 얌전히 잠을 자고 있는 위험한 곳이기 때문이네."

"그래서, 어머니 나무에 위협이 될 만한 것들도 거기에 있단 말씀이오?"

"그렇지. 그 중에서도 우리가 마주했던 이는 바로..."


풀썩.


"피리타!"


조금 전만 하여도 생생히 라이던과 그가 데려온 일행들에게 이야기를 전해주던 노인이 쓰러졌다.

그녀의 동료였던, 그리고 얼마 남지 않은 찬란한 삶의 끝에서도 영원히 동료일 다른 노인들이 황급히 옆으로 다가와 그녀를 부축했다.


"...아직 어머니 나무의 품으로 돌아갈 때는 아니네. 걱정 말아, 에반."

"장로라 칭할 수 있는 이들도 얼마 남지 않았어. 자네마저 가버리면 어쩌려고."

"하하... 이, 삼백 년을 넘게 살아온 애들을 보고 장로(長老)라 칭하지 않는 우리네 일족의 삶이 참 재미있군 그래."


그녀는 에반이라 불린 노인의 품 안에서 쌕쌕 숨을 쉬며 시선을 돌렸다.


"이미 라이던에게 이야기는 들었네, 구원자여."

"..."

"어머니 나무께서 온전하실 적 내렸던 예언이라면, 그리고 그분께서 이리 일이 벌어날 것을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다면, 우리 또한 그분의 선택을 믿고 따라야겠지."

"...갑자기 많은 짐이 제 등에 실리네요. 제 등은 그리 크지 않는데 말입니다."

"이미 수많은 이들의 운명을 뒤틀어, 수백이 넘는 목숨을 구해낸 이가 할 소리는 아니네. 더군다나 육신이 늙어서 그런지 이제야 냄새를 맡게 되었군."


피리타의 말에 라이던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급히 땅의 정령을 부른 이후로, 자신에게 남은 살짝 쿰쿰한 흙의 향내와 비슷한 것이 저 마법사에게서도 희미하게 느껴진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정령의 친구들 중 악한 이는 없네. 우리의 계약자이자 동료는 멍청하지 않지. 우리보다도 훨씬 더 긴 삶을 살아오면서, 가장 순수한 마력을 가진 그들이 그 맑은 눈으로 오히려 우리를 선택하는 게 옳은 표현이네."

"이것 참..."

"그리고 어머니 나무가 인도한 마법사에게 청이 하나 있네. 그대의 정령으로, 이스윈의 엘프들을 진정시켜 주지 않겠나?"


그게 무슨 소리냐 묻는 현우에게, 장로 피리타는 에반에게 자신을 부축해달라 부탁하여 다시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여기서 벗어난 다음에 말해주겠네. 자네도 보면 알 것이야."


* * *


바깥은 말 그대로 수많은 엘프들로 장관을 이뤘다.

이 도시에 얼마나 많은 숲지기들이 살아 숨쉬고 있는지를 알 수 있는 순간이기도 했다.

이미 성소 앞의 광장을 가득 메운 인파들을 보며 현우는 개망초 군락을 떠올렸다.

한 곳에서 피어나 작은 달걀을 닮은 꽃을 수없이 피워내는 가을꽃 무리처럼, 그들은 긴 귀가 인상적인 얼굴을 들이밀며 막 성소를 나오는 장로 무리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에반 장로!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설명해주셔야 할 겁니다!"

"피리타 님! 우리 어머니 나무에 무슨 큰 변이 닥친 건가요?"

"어째서 당신들이 있는데, 이스윈이 이 꼴로 몰락했단 말이오! 이러고도 당신들이 옛 적의 영웅들이라 스스로를 칭할 수 있는 거요!"


그러나 장로란 직책이 주는 권위가 어디로 가는 것은 아니었는지, 혹은 옛적에 벌어진 전쟁의 영웅이자 엘리안이란 나라를 만드는데 보탬이 된 개국공신의 후광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피리타가 손을 번쩍 들어 사람들에게 할 말이 있음을 고하자, 그 즉시 엘프들은 재잘대던 입을 다물어 그녀를 쳐다보았다.


"아직도 나를 비롯한 장로들을 믿고 따라주는 여러분들이 있어, 어머니 나무와 이스윈에게 무궁한 영광이 있기를 의심치 않네."

"핵심만 말하시오, 피리타 장로!"

"자네는 보이지 않는가? 어머니 나무가 모든 잎을 잃고 잠에 드신 것을?"


결코 앙상하다고는 볼 수 없는 우람한 가지들이었으나, 완연한 초록을 펼치며 항상 모두를 굽어살피던 어머니 나무였기에.

지금의 광경은 몰락이라 해도 이스윈에 사는 엘프들에게 있어선 결코 과언이 아니었다.


"예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는가!"

"이런 적은 없었지만, 이에 버금가는 일은 있었다네. 그건 바로..."

"나를 비롯한 그대들의 선조들이 함께 싸워, 마침내 패퇴시켰노라 선언했던 적들의 등장이지. 그것이 다시 도래했네."


현우는 이 다음의 반응이 눈에 훤했다.

미네바의 사람들이 어떻게 거리에 몰려나왔는지 이미 겪지 않았던가.

결집된 무리의 힘은 결코 적은 것이 아니었고, 쌓여진 분노가 어디로 표출될 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리고, 여기서 피리타는 현우에게 속삭였다.


"자네의 힘이 필요할 때네, 어머니의 구원자여. 그대의 마법이라면 능히 이들을 진정시킬 수 있을 걸세."

"그게 가능하리라고 보십니까? 저보다 훨씬 능력이 뛰어난 분들이시면서요?"

"시간이 지나면 모르되, 지금의 우리는 일반적인 평지사람들보다도 못한 존재이니 말이야."


숲지기들이 구사하는 대부분의 마법과 정령들과의 계약, 그 모든 것들의 중심에는 어머니 나무가 공고히 존재했다.

무릇 마법의 주문에는 절대적인 기준이 포함될 수록 그 영향이 더욱 커지는 법이었고, 세계수는 그 불변하는 존재로서 마법의 수준을 한 단계 더 끌어올렸다.

또한 정령들과의 계약 또한 어머니 나무의 이름 아래 이루어졌으니, 그 계약의 중재자가 힘을 쓰지 못하는 지금, 피리타와 에반을 비롯한 모든 엘프들은 적어도 지금은 미네바의 시민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저 분은요? 정령을 부르지 않았습니까."

"그건 내가 '일드'를 어머니 나무의 이름으로 묶어두지 않았으니까 가능한 것이다."


현우의 손가락이 향한 대상인 라이던은 손바닥을 들어 보이며 자랑스럽게 사실을 말했다.


"이스윈에서 도망친 셈인데, 무슨 낯짝으로 어머니 나무에게 촐랑촐랑 가겠다고? 이곳을 방문한 것도 다른 일이 아니었다면 결코 발걸음을 옮기지 않았을 것인데 말이야."

"결국 제가 힘을 써야 하는 게 맞군요."


현우는 남아있는 마력을 셈하며 한 발짝 앞으로 나왔다.

광장에 모여있는 엘프들은 물론, 제 집에서 나오지 않은 이들까지 합친다면 마법의 범위는 이스윈 전역으로 잡아야 할 것이었다.

어떤 수를 써서 진정을 시킬 것인가. 마법사의 머리가 방법을 골똘히 생각하는 가운데.


"이거라도 써."


미아는 현우에게 자신이 어머니 나무에게서 내려 받은 증표를 흔쾌히 꺼냈다.

적어도 이 자리에서, 유일하게 푸르름을 간직한 어머니 나무의 잎이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마드라드의 나비는 폭풍을 부른다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257 257화. 이스윈 공방전(3) 20.07.03 24 0 14쪽
256 256화. 이스윈 공방전(2) 20.06.30 23 0 14쪽
255 255화. 이스윈 공방전(1) 20.06.29 23 0 13쪽
254 254화. 펠리도르 정찰대(2) 20.06.26 21 0 14쪽
253 253화. 펠리도르 정찰대(1) 20.06.25 22 0 14쪽
252 252화. 아네모네(2) 20.06.24 23 0 13쪽
251 251화. 아네모네(1) 20.06.23 21 0 14쪽
250 250화. 결집의 깃발 아래(2) 20.06.19 23 0 14쪽
249 249화. 결집의 깃발 아래(1) 20.06.18 20 0 13쪽
248 248화. 퇴각과 희생(2) 20.06.15 23 0 14쪽
247 247화. 퇴각과 희생(1) 20.06.12 22 0 13쪽
246 246화. 어머니라 불리는 이유(4) 20.06.11 23 0 14쪽
245 245화. 어머니라 불리는 이유(3) 20.06.10 22 0 13쪽
244 244화. 어머니라 불리는 이유(2) 20.06.09 24 0 14쪽
243 243화. 어머니라 불리는 이유(1) 20.06.08 20 0 13쪽
242 242화. 아만 수성전(2) 20.06.05 22 0 14쪽
241 241화. 아만 수성전(1) 20.06.04 34 0 14쪽
240 240화. 이스윈의 그녀는 울부짖노라(4) 20.06.02 26 0 13쪽
» 239화. 이스윈의 그녀는 울부짖노라(3) 20.06.01 24 0 13쪽
238 238화. 이스윈의 그녀는 울부짖노라(2) 20.05.29 24 0 14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