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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별의 서재.

내가 어떻게 로맨스를 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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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밝은스텔라
작품등록일 :
2015.03.18 10:32
최근연재일 :
2015.08.07 17:27
연재수 :
1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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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71
추천수 :
235
글자수 :
86,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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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8.07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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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9쪽

10화. 조율자 윤건우

DUMMY

- 긁적 긁적.


그 시각, 정유나는 점심을 마치고 다시 책장 사이를 누비며 반납 도서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투덜투덜.


“아 진짜! 내가 2주 전에 찜 해놓은 건데! 아직까지 비어 있냐! 왜 아직까지 안 가지고 오는 거야!”


지난달에 A.J. 크로닌의 [천국의 열쇠]를 보고 감동의 츠나미에 휘말려 그 작가의 [성채]라는 다른 작품을 읽으려고 그렇게 노렸건만! 어학서적 에리어를 정리하고 돌아오니 그 사이에 책장에서 사라진 책! 1, 2권 한 쌍이 다 사라져서 2주나 기다렸는데, 이러다가 빌려간 사람이 연장신청까지 하면 도대체 얼마나 기다리게 되는 거냐고!


“이렇게 큰 도서관이잖아! 다른 책들은 같은 작품을 세 권이나 비치해 두면서 그런 양서는 왜 한 쌍 밖에 없냐고! 어떤 놈인지, 읽지도 않을 거면서 가져가서 수면 치료용으로나 라면 받침으로 쓰고 있는 거 아니야?!”


- 흐에취!!


역시… 아직은 반팔을 입을 때가 아닌가?

군만두를 씹으며 다시 소설 속으로 몰입해 가던 사장 서민용은 재채기를 하는 것이었다.


배달 음식으로 점심을 때운 서민용 사장은 다시 열심히 업무에 임했지만, 머릿속은 자꾸만 나래와 도서관이 번갈아 떠올랐다. 도서관이 떠올랐고, 유나 고모가 떠올랐고, 나래가 떠올랐다.


사실, ‘그 날’. 나래의 양친을 찾아가 감사의 뜻을 전한 날. 나래의 양친은 모두 나래를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봐도 된다는 뜻을 밝혔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나래가 스스로 그럴 마음이 있을 때. 말이다.


그 날 이후, 아직 나래에게 전화가 온 적은 없었다. 적당한 시기를 보아서 딸에게 최대한 완곡히 이야기를 전해 놓겠다는 말은 했지만, 그 적당한 시기가 아직 오지 않아 나래가 모르고 있을 경우도 있겠지. 서민용은 하루하루가 가면서 점점 조바심과 조심스러운 욕심이 났다.


지금의 부모에게서 떨어뜨려놓겠다는 것은 아니다. 그저, 보고 싶다는 마음. 순수하게 핏줄이 당기는 마음 때문이었다. 만약 나래가 스스로 연락을 취해 온다면 사실 도서관은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유나 고모라는 존재는 나래와 자신을 이어줄 징검다리로 중요하지 않겠는가….


***


그 시각.

나래의 엄마 이숙희는 오랫동안의 고민 끝에, 아직 하교 전인 아이의 책상 위에 작은 상자와 메모지를 놓고 장을 보러 나갔다.


그 상자는 아키다의 생모가 일전에 보내 왔던 세일러 금촉 만년필이었고, 메모는 그 선물의 출처와 엄마 이숙희의 딸에게의 짧은 편지와 함께 써 둔 서민용 사장의 전화번호였다.


지난밤에 아이 아빠와 꽤 오랫동안 의논을 거친 후 내린 결정이었다. 생모의 경우는 어쩔 수 없다 해도 생부는 같은 서울에 살고 있는데…. 자신들이 키운 정이 어느 누구에게도 꿇리지 않을 만큼 강렬한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생부의 사이를 가로막고 서서 생이별을 강요하는 것은 또 사람의 할 짓이 아니라 여겼기 때문이다.


행여 나래도 생부에 대한 그리움이 한 조각 있을지도 모르건만, 그걸 엄마아빠 눈치에 꾹꾹 누르고 있을 어린 가슴을 생각하면 어찌 속이 미어지지 않는가. 그래서 그냥 나래의 자유에 모든 걸 다 맡기기로 했다. 아이가 생부를 만나고 싶으면 만나고, 생모를 만나고 싶다면 그 또한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그래도 아이는 자신들을 떠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조치였는지도 모르겠지만….


엄마 이숙희는 차라리 잘 된 거라는 마음이 되어 홀가분하게 장을 보러 나갈 수 있었다. 지금의 나래는 아직 17살 소녀일 뿐이지만, 어떤 어른들 보다 현명하게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아이라고 일말의 의심 없이 믿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녀가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엄마와 아빠는 다 따르리라….


***


그리고 같은 시각.

일본에서 국제 특급 편으로 도착한 서류들을 정리하며 한 남자는 조용히 한숨을 내 쉬고 있었다.


이름은 윤건우.

나이는 33살인 ‘조율자’ 계보의 3남이다.

사람들은 곧잘 조폭으로 착각을 하지만, 그만치 극비리에 보호되고 있는 조직이기에 그러려니 한다.


‘조율자’들은 이 나라의 빛과 어둠. 그 사이에 자리하며 밸런스를 맞추는 역할을 한다. 여러 가지 사업을 동시에 맡아서 하지만, 그나마 일반인들이 접하면서 그 역할을 볼 수 있는 분야라면 [경호]의 업무 정도일까? 대통령 경호와 귀빈경호 바닥은 일단 이 조율자들이 옛날부터 잡아왔던 고유한 영역이다.


그들은 조폭들보다 강하며 정치계나 경제계도 함부로 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앞으로 나서지는 않는다. 천칭의 추 역할을 할 뿐이지….

어둠의 세력이 도를 지나친다 싶으면 응징한다. 또, 빛의 세력이 너무 선을 넘어올 경우엔 그 또한 정리를 한다.


그런 조직이며, 그들은 맡은 일에 관한 모든 정보는 의뢰 받은 자 고유의 영역으로 완전히 보안을 지킨다. 그들은 비밀을 지키다가 죽어가는 것을 최대의 영광으로 알 정도로 철저한 비밀보장 집단이기 때문에, 빛과 어둠의 모든 비밀스러운 의뢰를 맡는 것 또한 그들의 일이었다.


그런 조율자인 윤건우. 그는 잠시 자신의 사무실 천정을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하고 들썩였다.


현재 그가 맡은 일은 유성 그룹의 5남 서민용. 유성 블루 사파이어 호텔 사장의 의뢰였다. 그리고 그간 신속하게 조사한 결과, 야마베 유키에라는 여자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알아내었다. 서민용 사장이 의뢰한 것은 오직 ‘그녀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느냐.’ 뿐이었지만, 조사라는 것이 하다 보면 뜻하지 않게 보다 과거 까지 들여다 볼 수도 있는지라….


야마베 유키에. (44세) 현재 일본 아키다현 후나코시 우에노다이에서 소박한 규모의 센토(목욕탕)를 운영하고 있다.

남편은 야마베 토시오.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덴노 역전에서 허름하지만 제법 평이 좋은 3대째의 도시락 집을 운영하고 있다. 그리고 야마베 신이치와 야마베 마루오. 야마베 치요. 이렇게 2남 1녀를 두고 살고 있다. 큰 아들인 야마베 신이치는 토시오의 전 처 아들이고, 나머지 두 아이들은 유키에의 아이들이었다. 그 모두, 현재는 먹고 사는데 큰 불편이 없는 상황이다.


자기 집도 있고, 아이들도 건강하게 학교에 잘 다니고 있다.

모두들 최근까지 이렇다 할 병원 출입기록도 없다. 작년에 큰 아들이 수학여행으로 부산에 다녀온 것 외에는 한국과의 연관도 없다.


“…….”


윤건우는 조사하다가 걸려 나온 그녀의 자투리 과거에 관한 자료들은 따로 접어서 파쇄지에 넣은 다음, 갈려져 나온 종이를 금속 냄비에 넣고 불을 붙였다.


조율자는 보통 팀플레이 인지라 그 조사는 모두 ‘검진’이 직접 현지에 가서 정보를 모았다. 3남 윤건우의 팀은 ‘검’이다. 상위 팀원은 10명인데 모두 이름에 ‘검’자를 넣는다. 그리하여 검수, 검진, 검명, 검호, 검준 등등으로 나뉘는데….


일전에 곤란에 처한 글고은과 나래를 구해 준 해병대 머리에 선글라스 남자는 ‘검수’였다.


“수. 내일 유성 블루 사파이어 호텔의 서민용 사장이랑 저녁에 약속 잡아봐. 부탁하신 일 다 했다고.”

“네. 형님.”

“그 형님 소리 좀 안 하면 안 될까? 사람들이 조폭으로 보잖아.”

“그럼…….”

“음…, 팀장님 어때? 실제로도 ‘검’의 팀장이니까.”

“어색하지만….”


건우는 실제로 준 보다 형이었기 때문에 그간 형님으로 불리는 게 당연했지만, 일전에 길에서 구해 준 여자 둘이 자신들을 보며 벌벌 떠는 모습이 계속 마음에 걸려 다른 호칭으로 불리길 원했다.


‘그나저나 그 용감했던 아가씨는 이제 다 나았나 몰라? 뭐, 사실 상처는 그 고모란 사람이 더 크게 받았겠지만…. 나 원 참. 꼭 겉도 속도 그지 같이 생긴 것들이 생긴 거 타령을 한단 말이지. 껍데기 밖에 볼 줄 모르는 하찮은 것들 같으니라고!’


건우는 그 날의 상황을 다시 떠올리며 새삼 열이 올랐다.

조율자는 어느 누구도 사람을 결코 돈이나 외모로 판단하지 않기 때문이다. 일을 받을 때도 결코 돈의 액수로 일을 받지 않는다. 한 푼도 못 받는 일이라도 맡을 때가 있고, 때로는 돈이 안 되는 일임에도 비밀을 지켜주다가 목숨을 버린 사람도 많았다.


조율자는 사람을 보는 눈과 기준이 보통 사람들과 완전히 달랐기 때문에…, 그래서 며칠이 지나도 건우는 자꾸만 그 ‘고모’라는 작은 여자가 마음에 걸렸다. 그런 부당한 경우를 만나고서도 그토록 당연하게 비굴할 수 있었다는 것은 평생 그래야만 하는, 그럴 수밖에 없는 삶을 살았기 때문인 것이다. 너무 익숙해져 버린 자존감의 포기. 그게 단지 얼굴 생김새 때문이라면, 지금의 세상은 정말 미쳐도 단단히 미쳐 돌아가고 있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평생 얼마나 많은 상처를 받으며 살아왔을까.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을까. 조율자인 윤건우가 잠시 잠깐 스쳐 본 사람. 두려움에 떨고 있는 그녀의 얼굴 속엔 울고 있는 어린 아이가 있었다. 아무도 손잡아 주지 않는 아이. 어두워진 골목길에 홀로 버려진, 누구의 관심도 바랄 수 없음을 알고 홀로 모든 걸 체념해 버린 아이의 눈물.


윤건우는 그게 영 신경이 쓰였다.


그녀의 내면의 아이는 앞으로도 언제까지나, 죽을 때까지 그렇게 버려진 채 울고 있을 것이다. 건우에게는 그것이 보였기에 때로는 조율자의 눈을 가진 것이 세상을 사는데 참 피곤한 일이다 싶었다.


문제는 정말 집 밖에 나가는 것도 피해야 할 만치 아주 못 생긴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세상을 향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외모 때문이라는 생각이 그녀의 내면에서 완전히 굳어져 있기 때문에 그런 모욕적인 말을 들어도 너무 당연하게 비굴할 수가 있는 것이다. 물론 옆에 지켜야 할 조카가 있으니 어쩔 수는 없었겠지만, 당시 그녀의 얼굴에는 일말의 반발도 스치지 않았었다.


그녀는 분명 예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는 못 생겼어. 나는 추해. 나 같은 게 어떻게 세상을 다녀….’ 이런 자기최면을 걸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너무나 오랜 세월 스스로가 자신을 그렇게 만들었다. 그래야 외모로 인해 겪어야 할 많은 부당한 일들과 하나하나 싸울 필요가 없으니까. 그 당장이 편할테니까….


“형님.”

“팀장님이라고.”

“팀장님. 여의도 최 의원 건은 어쩌죠?”

“폐기해. 우리한테 의뢰해놓고 조폭 찾아가는 사람이랑은 앞으로도 일 없어.”

“홍 닥터 문제는요?”

“그건 진이 제 판단에 맡겨. 우리는 모른 척 해줘. 의뢰인 변덕 때문에 ‘관’팀에서 맡았던 일을 어거지로 패스 받아버려서 얼마나 곤란하겠어.”


그 날도 조율자들은 바삐 움직였고, 세상은 나름의 밸런스를 맞추며 돌아가고 있었다.


***


그리고 남산 도서관은….


반납일인 다음날은 유성 백화점 사장인 둘째 누님과의 오찬과, 유성 그룹의 법조팀 회합과 조율자와의 약속도 잡혀 있는지라 몹시 바쁠 듯하여. 전 날에 도서 반납을 위해 도서관을 찾아 막 출입구를 들어서는 서민용 사장의 귀에,


- 사랑하기 딱! 좋은~ 나인~데에에~~~


낯설지 않은 어르신용 벨 소리가 들려 재빨리 고개를 돌리니,


“어! 나래야. 왜? 뭐? 이번 토요일 일요일 비울 수 있냐고오오어어어!!”

“!!!”


뭐지? 그동안은 그렇게 찾아도(?) 볼 수 없었던 유나고모가, 지금은 너무 간단하게 나래의 전화를 받은 모습으로 서민용과 눈이 마주쳤다.


“어! 어? 어… 아…… 니, 그게……. 지금 호텔 사장…님이…….”


눈이 마주친 서민용 사장을 보며 심장 떨어져라 놀란 유나는 뻐끔거리며 자신이 깜짝 놀란 이유를 나래에게 설명하려 애쓰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서민용이 들고 있던 책을 보더니 한층 더 놀란 듯 숨을 들이켰다.


“어! 젠장! 나 저 책 엄청 기다렸는데! 아, 아니 나래야. 미안 뭐라고?”

“…….”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어……음…….”

“…….”


타인의 통화내용을 엿듣는 것에 취미는 없었지만 서민용 사장은 저도 모르게 발걸음이 멈춰져서 유나와 나래의 통화를 멍하니 바라보게 되었다. 그 때문에 유나는 할 말을 못하고 얼어붙은 듯 어버버 거리고만 있었다. 결국,


“나래야. 그냥 사장님 바꿔 드릴게. 또 걸 필요 없잖아 그럼.”


어? 뭐?

놀란 서민용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하지만 유나는 제 전화기를 들고 성큼성큼 다가오는데, 저 너머에 나래가 있는데…. 너무 갑작스러워서 마음의 준비가…….


“사장님?”


하지만 얼떨떨하게 유나의 알뜰폰을 드니 벌써 나래의 또롱또롱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렇게 우연히. 그리고 너무나 뜬금없이 잡힌,

[토-일 노벨클럽 로맨스 소설 연구에 관한 긴급회동]


주최자는 한나래. 장소는 유성 블루 사파이어 호텔의, 사장이 내어 줄 스위트 제외 아무거나 룸. (아직 예약도 안 했고, 방 잡을 돈도 없음.)


준비물은 정유나는 남산 도서관에서 빌려올 수 있는 만큼의 베스트 로맨스 소설. 한글고은은 옛날 할리퀸 소설. 한나래는 요즘 잘 나가고 있는, 종이책으로 발간된 로맨스 웹소설. 친구들에게 빌려 둔 것들.


회동의 이유는,

1. 그간 나래가 살펴 본 결과. 한글고은의 집필중인 로맨스 소설이 너무 ‘아니다.’


2. 이대로는 아까운 시간만 버릴 뿐이지 죽도 밥도 안 된다. 한글고은과 정유나까지. 로맨스 장르의 기본적인 틀을 본격적으로 다시 다져야 한다. 아니면 이번에 제대로 절망을 느끼고 그냥 로맨스는 포기 하시든지.


3. 그 핑계로 고모들을 모아, 고모들은 방구석에 쳐 박아놓고 나래는 생부인 서민용 사장을 만나 보련다.


통화를 마치고 얼떨떨하게 전화기를 돌려주는 서민용 사장과 정유나는 서로를 바라보며 뭐가뭔지…. 하는 얼굴이 되어 있었다.

노벨클럽 회동에 대한 이야기는 유나가 들었지만, 방 잡아 달라는 이야기는 서민용이 들었다. 서로 전화기를 주거니 받거니 하며 나래의 지령(?)을 받았던 것이었다.


“나래가 좀… 다, 당당하죠?”

“하하…. 저는 그게 도리어 기쁘네요.”

“꼼짝도 못 하고 쥐어 살아요 저희는. 크크.”


아 어색해…….

서민용은 유나가 자신과 나래의 관계에 대해서 얼마나 자세히 알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나래와 그토록 친하게 지내는 사이이니 아마 모든 걸 다 알지 않았을까 싶었다. 그래서 나름 자연스럽게 대응하려 했지만 그게 또 말처럼 쉽지는 않은 것이어서….


“그…….”

“네?”

“그 책…, 사장님이 빌려 가셨던 건가요?”


유나가 소심하게 뻗은 검지로 [성채] 1, 2권을 가리켰다.


“앗. 네. 오늘 반납하러…….”

“제가 처리 해 놓을게요. 저 요즘 여기 알바 뛰거든요.”


유나는 어차피 내일인 토-일 회동에 쓰일 로맨스를 빌려야 하므로 그 책은 또 다음 기회가 되는구나…. 하고 반납도서를 받았다.


“사장님 정도라면 책이라는 건 경영 관련이나 자기계발서 쪽이나 영어원서나, 그런 것만 보실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책 같은 건 그냥 사서 보시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소설을 읽으실 줄이야….”

“본래… 제가 경영이나 경제 쪽으로는 취미가 없습니다. 이과 쪽으로는 머리가 잘 돌지를 않아서….”

“에? 하지만 그런 쪽으로 일 하고 계시잖아요.”

“먹고 사는 일인데, 누가 자기 하고 싶은 일만 하나요.”


지금 뭔 소릴 들은 거지? 하는 표정이 된 유나를 보며 서민용은 무심결에 뱉은 실수 같아서 서둘러 말을 정정해 보려고 하지만 딱히 다른 이야기는 또 떠오르지가 않았다. 천하의 유성 그룹의 로열 패밀리가, 지금 도서관 알바를 하고 있는 사람 앞에서 먹고 사는 일을 운운하다니….


“헤에…….”


날이 포근해 진 탓인지 서민용은 땀이 났다. 자신을 신기한 외계인 보듯 빤히 쳐다보는 정유나의 눈빛도 영 부담스럽고….


“아무튼 여기서 일하시는군요. 이렇게 우연히 만나 뵈어서 나래의 목소리까지 듣게 되고. 정말 기뻤습니다. 그, 그럼. 책은 제 때에 반납했으니 처리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네. 아, 그런데 사장님!”


아오! 그 ‘사장’이란 말 좀 안 하면 안 될까!?


“네?”

“저, 저희가 정말 이렇게 또 민폐를 끼쳐도 정말 괜찮은 걸까요?”

“나래가 원한 일인데요. 민폐라니 무슨 말씀을. 나래가 그토록 좋아하고 잘 따르는 고모님들인데, 오히려 제가 영광입니다.”

“…… 감사합니다. 이번에는 얌전히 있을게요.”

“하하하!!”


문제의 토요일이 다음날이었다.

너무 일방적인 통보에 멍해진 글고은은 얌전히 나래의 지시대로 할리퀸을 채운 가방을 쌌다. 가방을 싸면서도 ‘이게 뭐지?’라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나래는 조용히 책상 위에 놓인 만년필에는 잉크를 주입하고 엄마의 짧은 편지는 서랍에 깔끔히 정리해 넣었다.

생부를 만나도 된다고 하시지만 나래의 생활은 크게 달라질 것은 없다. 다만 한 번쯤, 자신의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생부로서 서민용 사장이 어떻게 대처하는지는 보고 싶었다.


그런데 우연히도 유나고모에게 전화를 걸었던 것으로 모든 일이 해결된 것이었다. 나래는 생모가 보내준 것이라는 만년필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생부가 어째서 그 시간에 도서관에 있었을까. 어떻게 유나고모의 전화기를 건네 받을만한 우연이 만들어 진 걸까. 세상에, 우연 이라는 게 그럴 수도 있는 건가? 하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


그리고 토요일.

총지배인 황석모는 일전에 사장에게 속 깊은 이야기를 들어놓은 터라, 미리 지시를 받아 둔 대로 두 말 없이 자신이 직접 글고은과 나래를 ‘모시고’ 디럭스 룸으로 정중히 안내를 했다.


하지만 그 시각에 서민용은 유성 백화점의 사장인 둘째 누님을 맞이해야 했기에, 그녀가 보는 앞에서는 나래를 위해서도 딸을 딸로서 맞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또한 상황은 간략히 전 날에 전해 들은지라 한나래는 깎듯이 대해주는 총지배인 아저씨에게 오히려 바쁘신 시간에 자신들이 괜히 귀찮게 해 드린다며 우아한 예의까지 차렸다.


그런 옆에서 글고은은 멍하니 가방에 싸온 할리퀸들을 꺼내어 열대과일들로 예쁘게 바구니가 꾸며진 탁자 위에 올렸다.


“아니, 너도 참 애가 당돌하다. 그렇다고 당장에 이렇게 무리한…”

“호텔 사장님 정도 되면 아마 그렇게 무리한 일 아닐걸요?”

“그래도 방이 너무 호화롭잖아. 평일도 아니고 이런 주말에 이런 방은 사실 엄청 장사가 될 텐데….”

“저는 분명 좋은 방 필요 없다고 말했어요. 지난번에 묵었던 방 정도가 좋다고.”

“우어… 너무 부담스러워서 고모는 막 걸어 다닐 수도 없어.”

“아마 괜찮아요. 우리한테 이렇게 해 주셔도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으니까 이렇게 대우 해 주시는 거겠지.”

“나래 넌 진짜. 무슨 애가 그리 용감하고 당찬지….”

“됐고. 얼른 이것부터 봐요. 내가 체크 한 원고. 완전 새빨개.”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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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화. 조율자 윤건우 15.08.07 648 5 19쪽
9 9화. 조폭(?). 그리고 호텔 사장님의 짬짜면 15.08.06 491 4 20쪽
8 8화. 서민용의 눈물 15.08.06 549 3 18쪽
7 7화. 필요하다면 흐트러지세요 15.08.05 507 3 21쪽
6 6화. 내 귀에 도청장치가 있다~~!!!! 15.08.05 486 3 19쪽
5 5화. 가자~! 사고치러~!! 15.08.04 540 3 19쪽
4 4화. 국제전화 15.08.04 441 2 20쪽
3 3화. 출생의 비밀? 하! 그게 뭐? 어쩌라고? 15.08.03 610 3 17쪽
2 2화. 하늘이 내린 루저들 15.08.03 844 3 19쪽
1 1화. 일란성 쌍둥이 15.08.03 1,268 14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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