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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별의 서재.

내가 어떻게 로맨스를 써

웹소설 > 작가연재 > 일반소설, 드라마

완결

밝은스텔라
작품등록일 :
2015.03.18 10:32
최근연재일 :
2015.08.07 17:27
연재수 :
1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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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68
추천수 :
235
글자수 :
86,352

작성
15.08.05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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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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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1쪽

7화. 필요하다면 흐트러지세요

DUMMY

그런 모습을 맞은편에서 바라보는 유나는 마음 한 켠에 따뜻한 감동을 느꼈다. 하지만 그 감동도 한 순간에 훅- 날아갈 줄이야….


- 세월아 비켜~라~ 내 나이가 어때~서~~ 사랑하기 딱! 좋은~ 나인~데에에~~♪


그 우아한 장소. 그 교양 넘치는 손님들 사이에서 우렁차게 터져 나온 유나의 핸드폰 벨 소리…. 다시금 모두의 시선이 쏟아지는 걸 보며 유나는 움찔! 했다.


“으, 내 벨 소리 어때서~. 전화 받기 딱! 좋은~ 소린데~”

“참… 언니 너는 오늘따라 지랄이 풍년이네. 아주 가지가지 한다.”


따뜻한 감동의 포옹을 푼 조카와 고모가 똑같이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유나를 바라보며 혀를 찼다.


그러다간 동시에 쿡! 하고, 웃음을 빵 터트렸다. 둘이 그러던 말던 유나는 제주도에서 걸려온 어머니의 전화를 받느라 진땀을 흘렸고, 한글고은과 한나래 둘은 배를 잡고 꼬로록 넘어가는 모습….


런너 바가 있는 홀의 한 층 위에 있는 테라스식 카페 난간에서 서민용은 그런 나래를 가만히 내려다보며 짧은 한숨을 토했다.


“사장님. 내일 10시 제주도행 비행기는 정상 취소되었습니다.”

“수고했습니다. 그리고 레이디스 골프대회도 불참합니다. 그 건도 처리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한 번에 이야기 하지 못 하고 귀찮게 해서 미안합니다.”

“아닙니다 사장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그런 곁에서 그의 수행비서가 낮은 목소리로 그와 대화를 나누었다. 사실 내일 오후 2시에 유성 호텔 주최의 제주도 레이디스 골프대회가 있을 예정이다. 사장인 서민용이 나가서 갑계의 사모님들 앞에서 인사도 하고 대회 오픈 기념 티샷도 날려야 하는데, 이유도 알려주지 않고 갑자기 그 일정을 다 취소해 버린 것이었다.


사모님들 중에는 내심 서민용 사장을 한 번 보기 위해 대회에 참석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고, 그것을 그 또한 모르지 않았기에 파장이 일 것은 예상이 된다. 하지만 그런 일정을 일방적으로 취소함에도, 수행비서며 그 외 관련된 모든 직원들은 사장에게 이유를 따지거나 묻거나 곤란한 티를 내지 않는다.


“일신상의 문제라고 해 두십시오.”

“네. 그리 하겠습니다.”

“제주도 지사에는 심심한 사과의 뜻을 전해주시고요.”

“네.”

“…….”


서민용은 다시 아래층을 내려다보았다.

나래는 아직도 웃고 있었다. 이젠 무엇 때문에 웃는지도 모를 것이다. 그냥 웃고 있었다. 하지만 터지는 울음을 대신했을 큰 웃음 소리였기에 주변의 ‘우아한’ 고객들이 모두 날카롭게 흘끔흘끔 돌아보며 눈치를 주고 있었다.


송진경….

그는 어느 옛날 자신보다 세 살이 많았던 그녀가 웃음을 터트리던 모습을 떠올렸다. 지금, 저 아래에선 그때의 그녀와 완전히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나래가 웃고 있었다.


“…….”


서민용은 돌아섰다.

저 어린 아가씨인 한나래가 한 말을 믿기란 사실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그럼에도 일단 그녀들이 체크아웃을 할 내일까지는 그 문제를 가슴 속에서 천천히 분해해 볼 참이었다.


특급 호텔의 사장으로서 지금 그가 처리해야 할 일들은 사방에 산적해 있다. 하지만 어느 옛날, 떠난다는 말도 없이 사라진 그의 유일했던 사랑이 세월이 흘러 자신의 눈앞에 스스로 찾아온 것이다. 저렇게 밝고 씩씩한 한나래의 모습이 되어…. 그런 그에게 지금 그 이상 무엇이 더 중요한 일이란 말인가.


서민용은 조용히 양 주먹을 움켜쥐었다.

언제부터인가 손바닥에는 땀이 흥건하게 맺혀 있었다. 그런 지금의 그는 그저 유성 그룹의 막내 왕자이며 블루 사파이어 호텔의 사장일 뿐이다. 그 ‘간판’으로 존재하는 덩어리일 뿐이라는 것이다.


정작 [서민용]이라는 이름을 가진 남자. 한 사람은…, 저토록 밝게 웃을 수 있었던 그녀를 잃은 날부터 사라졌다. 뜨겁게 뛰는 심장도 잃었고, 희망을 꿈꾸는 마음도 잃었다. 그는 그녀가 사라진 후 이 세상에서 없어졌다.


그런데 지금. 지금…….

그는 다시금 뒤돌아보았다. 두 고모들 틈에서 실컷 웃어 웃음의 눈물을 찍으며 얼굴이 빨갛게 피어난 나래의 모습. 봐도 또 봐도 더 보고 싶어질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일단 돌아선다.


십 년도 넘게 죽어 있던 로봇 인형에 막 새로 교체한 건전지의 전기가 돌기 시작하는 기묘한 스파크 같은 것이 온 몸의 혈관을 타고 짜르르- 흐르는 기분이었다.


가슴이 울렁거렸다. 뭔가가 터져 나올 것만 같은데 그게 뭔지는 모르겠다. 서민용은 어지러움을 느끼며 그 자리를 떴다. 인간의 감정을 잃은 지 사실 너무 오래 되었다. 다시 돌이킬 수 있을까?


‘내가 외로운 존재가 아니라고….’


외로웠던가? 외로움이 무엇인지도 잊어버렸다.

그런데 이제 와서 송진경. 그녀가 나래를 통해 그런 메시지를 전하려면, 나래가 서민용 자신과 어떻게든 관련이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무슨 관계?


서민용은 바보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지금의 혼란을 어찌 달래야 할 지 몰라 괴로워하고 있는 것이었다. 눈물이 앞을 가릴 것만 같았다.


누님들이 가서 애를 때고 화려하고 신나는 삶을 살라고. 평생 먹고 살 걱정 없도록 두둑하게 돈 봉투를 쥐어 주었다고 했다. 그랬더니 이게 웬 떡인가! 하며 덥석 집어 들고는 유유히 사라졌다고 했다. 무슨 막장 드라마도 아니고…. 말도 안 되는 소리기에 믿지 않았지만, 믿고 안 믿고를 떠나 다 소용없는 일이 되어 버렸다. 그는 송진경이 자신 보다 돈을 선택해도 상관이 없었다. 그저 존재하기만 해 준다면. 하지만 사라졌다. 그냥, 사라졌다….


그런데, 일본 아줌마가 되었다고?


서민용. 그는 그 잘난 특급호텔의 사장일지는 몰라도 어쩌면 저 어린 나래보다 더 나약한 어른이었다. 지금은 현실을 받아들일 자신이 없었다. 그럼에도, 그녀가 사라진 후로는 단 한 번도 뛴 적이 없다 여겼던 심장이 쿵쿵쿵…. 가슴을 두드리고 있었다. 나래를 본 순간부터 쿵! 쿵! 쿵! 하고 온 몸이 뒤흔들리도록 달리기 시작했다.


그는 그 울림이 두려웠다.


***


“그 때 왜 당신이 그…, 생부라는 말을 안 한 거야?”


조심성 없는 유나가 나래에게 그리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나래는 온수풀의 거품방울을 바라보며 그냥 어깨를 한 번 으쓱- 해 보일 뿐이었다.


“말 해 보고 싶었어요 솔직히. 그런데 입이 딱 다물려서 그 말 만큼은 안 나오더라고요. 게다가 저도 아직 그 ‘아줌마’의 말을 완전히 믿지 못 하고 있으니까요. 그런 말은 한 번 뱉으면 정말 주워 담을 수 없는 무서운 말이니까. 겁이 났는지도 모르죠 뭐.”

“그래도 어느 정도 묘한 감은 왔을 거야. 사장 정도 되는 인물이니까 바보는 아니겠지. 못해도 우리 보단 두뇌회전이 나을 테니까.”


글고은도 대화에 참여하기로 한 모양이었다.


“그런 감이 왔으면 그래도 한 번 더 찾아오지 않을까? 정말 나래가 자기 딸이라는 마음이 생겼다면…. 생각해 보니 궁금하네. 그런 사람들은 어떨까? 좋을까? 놀랐을까? 무서울까? 이런 경우에 드라마 같은 데서는 두 갈래로 나뉘잖아. 자기의 사회적 명예가 실추 될까봐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고 그런 거 상관없이 너무 좋아하고 집착하게 되는 경우가 있고.”

“언니야. 기승전드라마는 좀 그렇잖아? 왜 매사를 그런 드라마들과 비교를 하는 거냐? 이건 현실이야. 현실.”

“글고은. 맞아 현실. 그런데 봐. 지금 나래에게 닥친 현실은 막장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은 경우잖아. 우리가 평생 살면서 그런 드라마를 접하는 외에, 언제 이런 상황이 현실이 될 거라 상상이나 해 봤냐? 결국 비교할 건 그런 드라마들뿐이야. 아까 디너 정찬 봤어? 우리 같이 공짜 손님들이 감히 그런 으리으리한 음식을 먹었어. 야…. 나 벌써 배 꺼진 거 있지. 그렇게 양 조금에 엄청 비싼 음식들은 앞으로의 평생에도 구경 못 할 것 같아. 게다가 좀 있으면 스카이라운지도 갈 거잖아. 거기 가면 또 얼마나 근사한 문화적 충격을 받겠니? 드라마 보다 더 드라마 같아. 그런데 이런 곳의 주인이 나래의 생부라니까? 그런 생부가 나래가 친자라는 걸 알면 정말 어떻게 생각할까?”

“음…….”


글고은은 보글보글한 거품방울 수면에 얼굴을 반쯤 가라앉히곤 복잡한 마음을 가라앉혀 보려고 했다.


정말 사장이 자신의 딸로 나래를 찾아가고자 한다면 나래는 어떨까? 지금처럼 자신의 오빠부부 밑에서 사는 삶을 고수 할 수 있을까? 이런 호화로운 곳의 주인인 생부에게, 혹은 용돈 걱정 없이 좋은 교육 마음껏 받을 수 있는 상류층의 삶에 끌리지는 않을까? 사실 그렇게 된다 해도 글고은은 나래가 무슨 선택을 해도 개입할 수는 없겠지만….


“만약, 저 사장 아저씨가 나래를 정말 딸로 갖고 싶어지면 어쩌지?”


온수풀에 띄워둔 나래의 러버덕 인형이 둥둥 점점 떠내려가서 나래가 그걸 주우러 가는 동안 유나가 글고은에게 그리 속삭였다.


“친부인 사장이 자신의 딸로 갖기를 원하고, 나래도 이끌림을 느낀다면 어쩌지?”

“…… 몰라. 어떻게 되든 나래의 선택이 가장 우선이겠지. 하지만 오빠네 집을 떠나길 원할 것 같지는 않아. 뭐, 그건 내 생각이고 믿음이겠지만. 무튼 지금 이 상황을 오빠네가 전혀 모르고 있을 거라서 그게 좀 마음에 아프네. 저렇게 예쁘게 키운 딸이 만약 자기가 원해서 이곳의 딸이 되려고 한다면 사실 막을 방법이 없을 거야. 오빠네는 심장 부서지겠지. 그래도 떠나겠다면 보내 주겠지. 여기 사장만큼 좋은 환경으로 키워줄 수는 없으니까.”

“나래가 초반에 밝혔던 다짐 하나에 기대는 수밖에 없겠네. 하지만 아이가 잘 자라는 조건이 아마 환경이 전부는 아닐 거야. 안 낳고 안 키워봐서 모르겠지만. 그럴 것 같아.”


“고모! 나 얘 하나 더 사줘요. 하나는 외로워 보여.”


저 멀리로 도망치던 러버덕을 수거한 나래가 그리 말하는 걸 들으며 유나는 문득, 사장 양반이라면 저런 오리 인형 같은 건 제 딸을 위해 저 풀장이 가득 차도록 잔뜩 사 줄 수 있을 텐데. 싶었다.


***


밤 9시.

황석모 총지배인은 그 날 있었던 일들을 모두 정리하고 비상계단 CCTV에 찍혀 있던 ‘세 아가씨’의 모습을 가만히 떠올려보고 있었다. 그들의 소동은 아무리 봐도 미리 계획된 것이었다. 셋이 시간을 보고 옥신각신 하던 모습이 그대로 찍혀 있었으니까. 그 영상을 아까 낮에는 사장 서민용도 확인해 보았었다. 그 이후로 들어온 보고라면, 런너 바를 즐기는 아가씨들에게 사장이 직접 찾아갔다는 소식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그 직후 내일 있을 사장의 모든 일정이 취소되었다. 그러고 사장은 지금껏 자신의 프라이베이트 룸에 처박혀 밖으로 한 발짝도 나오지 않았다고 하니….


그 문제로 제주도 지사장의 우는 소리는 자신이 다 들어야 했던 총지배인은 안 그래도 3월에 예약된 여성인권대회 일정과 4월에 예약된 해양 국제포럼 문제로 오늘 안에 처리해야 할 서류들이 있어, 그것들을 들고 사장을 찾아가기로 했다.


한 번도 사적인 문제로 공적인 일정을 취소한 적이 없는 사장이었는데…, 황석모는 직원 전용 엘리베이터의 마스터 에리어 커버를 열고 자신의 마스터 키 카드를 긁은 후 층수가 쓰여 있지 않은 사장의 프라이베이트 룸 버튼. 그 화려한 황금 독수리 문장의 버튼을 눌렀다.


본인이 먼저 밝혀 오면 이야기가 편할텐데…. 총지배인 황석모는 사장의 사사로운 비밀을 지켜 주는 것은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이상 상황을 지켜보며 아무것도 모른 척 하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


결국 나래의 문제로는 런너 바에서의 일 이후로는 아무 일도 없었다. 세 처녀는 새벽 4시까지 수다를 떨다가 하나 둘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곤 눈 감고 자면서도 야경을 감상하겠다고 열어 두었던 커튼 때문에 아침부터 거침없이 쏟아져 내린 햇빛을 맞으며 부스스하게 눈을 떴다.


전 날에 호화 디너를 마친 후에는 올리브오일 마사지를 받고, 밤에는 따뜻한 온수풀에서 둥둥 떠다니고. 밤늦게 까지는 스카이 라운지에서 프리로 즐기는 칵테일을 마시고….


“아~ 정말 꿈 꾼 거 같다! 흐아암~ 너무 행복하긴 했는데, 난 이런 생활 이틀만 더 하면 사람 병신 될 것 같아.”

“언니야. 넌 이미 충분히….”

“됐어. 거기까지.”

“그나저나 우리 공주님은 일어났나 몰라? 아침 뷔페 먹으러 가야되는데~.”


*


그 시각.

사장 서민용은 부르르 떨리는 손에 쥐어진 작은 밀봉 비닐봉투를 들고 1층 홀. 대리석 미니 분수대 앞에서 다시금 굳어져 있었다.


도무지 밤새도록 잠이 오지 않아서 호텔 밖의 정원을 하염없이 돌며 지새운 밤이었다. 그런데 새벽 6시쯤엔가? 호텔 밖 테니스장 부근에서 나래와 마주친 것이었다. 그녀 또한 잠이 오지 않아 고모들 몰래 밖으로 나와 하염없이 해매고 있었던 것이다.


“…….”

“…….”


둘은 한참을 서로 바라보기만 하며 어쩔 바를 몰라 했다.

하지만 그 때는 용감한 나래가 아니라 서민용이 먼저 입을 열었다.


“송진경이라는 분을…, 어떻게 안… 거니?”


최대한 침착하게 보이고 싶어 노력은 했지만, 어스름한 새벽 공기 속에서도 그가 떨고 있음이 나래의 눈에는 너무 잘 보였다.


“… 2주 전 쯤에 전화가 왔어요. 저희 부모님은 완전 무시하려고 하셨죠. 하지만 제가 전화기에 찍혀 있던 번호를 보고 걸었어요. 그동안 아무것도 모르고 철없이 잘만 살아왔었는데, 제가 입양아라는 걸 그 시기에 알게 되었거든요……. 부모님은 제게 끝까지 비밀로 하고 싶으셨을 텐데. 뭐, 제가 들어 버렸으니까요….”


‘입양아’라는 단어에 사장은 순간 컥! 하고 숨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다신 ‘아저씨’를 만날 수 없을 줄 알았는데….”

“……. 그… 그럼 너는…….”

“전… 지금의 부모님의 딸. 한나래에요. 그 뿐 이예요.”

“…….”

“하지만 어제 행여 일이 잘 풀리면 아저씨한테 이걸 주고 싶었어요. 그런데 마침 이렇게 또 만나게 되었으니까……. 인연은 인연인가 봐요.”


나래는 그렇게 말하면서 차갑게 얼어붙은 사장의 오른손에 ‘그것’을 쥐어 주었다.


“전 드렸으니까. 버리든 태우던. 아저씨가 알아서 하세요.”

“저… 나래양…….”

“여기 호텔 너무 좋아요. 정말 즐겁게 잘 지내다 가요. 아마 두고두고 좋은 추억이 될 거에요.”


“…….”


그렇게 한나래는 돌아서서 제 방으로 돌아갔고 서민용은 해가 뜰 때까지 그 곳에서 움직이지 못 했다. 그러다가 해가 떠서야 정신이 들어 1층 홀로 들어온 것이었다. 서민용은 다시금 움켜쥐었던 손바닥을 펼쳐 보았다. 작은 인형단추 몇 개가 들어갈 만한 밀봉 비닐 봉투 안에는 나래의 머리카락이 스무 가닥쯤….


***


그 날 이후로 시간은 흘렀다.


한글고은은 여전히 편의점 알바와 쇼핑몰 댓글알바를 하면서 말도 안 되는 로맨스 소설을 엮느라 머리를 쥐어뜯었고, 한나래는 차근차근 고등학교 진학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정유나는 명절이 끝나고 신학기를 앞둔지라 어린이 학습지 박스와 자신과는 아무 연관도 없는 화이트 데이 선물세트를 싸느라 정신이 없었다.


어느 하얀 꿈처럼. 그 날, 블루 사파이어 호텔에서의 기억은 점점 시간들에 밀려나고 있었다.


하지만 서민용 사장만은 그렇지 못했다.

그는 그 날부터 지금껏 거의 폐인이 되다시피 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겉으로는 멀쩡히 걸어 다니며 일도 하고 평소와 다를 바 없으려나? 하지만 그의 절망적인 변화를 지켜보는 총지배인은 속이 타들어가 죽을 것만 같았다.


차라리 확 터트리지. 저렇게 절제된 모습으로 자기 안에 갇혀 피가 졸아가고 있는 모습이라니…. 하루가 다르게 수척해지고 음식도 거의 입에 대지 않는 오너의 속 끓이는 사정이 뭔지. 그는 결국 2월의 마지막 주일. 큰 결심을 했다.


언제나 사장의 프라이베이트 룸에는 서류철이나 결제 판을 들고 방문했던 총지배인은 빈손으로 오너의 사적 공간을 침범했다. 그리곤 프라이베이트 룸 한 구석에 마련된, 쓰지도 않는 홈 바에 서서 직접 컵에 얼음을 넣고 제피로스 엑스트라 꼬냑을 붇고….


“총지배인님. 대체 무슨 일로 오셨기에….”


공무가 아닌 한 볼 일이 없는 자가 어째서 빈손으로 찾아들어 제 멋대로 술부터 찾는 것인가. 그것도 호텔이 가장 바쁠 주말의 오후 5시에…….


“사장님. 제가 그동안 좀 지켜 봐 왔습니다만 오늘은 꼭 해결해야 할 것 같아서 무례를 범하겠습니다.”


구김살 하나 없는 제복에 단정하게 손질 된 머리. 신사 중에 신사인 그가 그리 말하며, 사장이 앉아 있던 소파 앞 테이블에 알콜 도수 40%짜리 고급 꼬냑이 넘실거리는 잔을 두 개 내려놓았다.


“아직 근무 중이고 식전이지 않습니까.”

“아니요. 사장님은 요 며칠 동안 일다운 일도 하지 않으셨고 식사 다운 식사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런 시간에 이거 한 잔 마신다고 새삼 뭐가 문제겠습니까.”

“뭐가 문제입니까. 지금 제게 왜 이러시는 겁니까. 총지배인님.”

“그걸 지금 몰라서 물어 보신다는 게 문제입니다. 지금 제 앞에 앉아 계신 분은 누구십니까. 서민용 사장님 아니십니까? 그런데 제가 지금 왜 이러는지를 몰라서 물어 보시는 겁니까?”

“…….”


서민용은 그의 눈빛을 피했다. 더는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라는 것을 깨닫고는 고개도 숙였다.


“눈 피하지 마십시오.”

“잠시만….”

“‘잠시만’ 혼자 놔 드린 지 5일째입니다.”

“…….”

“무슨 일이 있어도 저는 사장님이 지켜주길 바라는 비밀들을 지킬 수 있습니다. 그러니 제게 뭐든 털어 놓으십시오. 그리고 가벼워지십시오. 이건 이 호텔을 걱정하는 저의 강제적 요구입니다. 제가 어떤 사람인지 사장님은 아십니다. 저는 비밀은 지킬 수 있으나, 그동안 그토록 섬세했던 사장님의 경영 스타일을 지금처럼 약에 취한 곰 마냥 놔 둘 수는 없는 사람입니다.”


- 꿀꺽 꿀꺽 꿀꺽….


서민용은 그 잔소리들에 점점 침착을 잃어갔다. 눈앞에 놓인 독주인 꼬냑 한 잔을 보리차 마시듯 한 번에 다 마셔버리곤 소파에 온 몸을 던지듯 묻혀 들었다.


“…….”


그리곤 자신을 노려보듯 바라보는 총지배인의 시선에 가슴이 갑갑해졌는지. 이번에는 총지배인의 잔에 있는 술마저 다 마셔 버리곤 어지러워지는 머리를 흩트렸다. 소박한 삼십 만 원 대의 손목시계를 풀어 버렸고 목을 죄던 넥타이도 풀어 헤쳐 버렸다. 그러다간 재킷도 벗고 셔츠도 팔꿈치까지 걷어 올렸다.


‘잘생겼다’라는 특징이 아니었으면 영락없이 회식 3차의 헤롱대는 부장님 꼴이었다. 하지만 총지배인은 놀라는 기색 없이 가만히 그 변신하는 꼴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간 너무나 완벽했던 존경스러운 남자. 하지만 한 번은 망가뜨릴 필요가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서민용은 어떤 일이 있어도 침착을 잃지 않았던 젊은 사장이었다.

그런데 사람 보는 눈만큼은 누구보다도 밝은 총지배인의 눈에, 그는 그렇게 살려고 죽도록 노력을 한 처절한 사내였다.


서민용. 이 사내는 일반인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압박과 고통 속에서 스스로를 억압하고 통제해 왔다. 명문그룹의 일원으로서, 또 특급호텔의 오너로서의 책임감 하나 때문에. 사람으로서, 피가 흐르는 인간으로서 가져 마땅한 모든 감정을 통제하고 억눌렀다.


“사장님. 저에게는 털어 놓으십시오. 제가 할 수 있는 건 뭐든 돕겠습니다. 이제는 아무리 그렇게 원해도, 더는 그 짐을 혼자 지고 갈 수 없을 것입니다. 당신은 그냥의 ‘인간’이거든요.”

“그냥의 인간…….”

“감정이 없는 기계나 로보트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차곡차곡 감정이라는 데이터를 칸칸에 칼 같이 정리해 놓고 살아갈 수 없는 존재라는 겁니다.”

“…….”

“필요하다면 흐트러지세요.”

“…….”

“그게 사장님 일가의 모두를 실망시키고 분노케 하는 일이더라도.”

“…….”

“어울리지 않는 희생자 연기는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총지배인님. 그럼 당신께서는 저의 편에 서 주시겠습니까?”

“저는 무조건 ‘네’는 아닙니다. 하지만 아마 ‘네.’ 라고 하고 싶어질 이야기가 나올 거라는 예상은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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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8화. 서민용의 눈물 15.08.06 549 3 18쪽
» 7화. 필요하다면 흐트러지세요 15.08.05 507 3 21쪽
6 6화. 내 귀에 도청장치가 있다~~!!!! 15.08.05 486 3 19쪽
5 5화. 가자~! 사고치러~!! 15.08.04 540 3 19쪽
4 4화. 국제전화 15.08.04 441 2 20쪽
3 3화. 출생의 비밀? 하! 그게 뭐? 어쩌라고? 15.08.03 610 3 17쪽
2 2화. 하늘이 내린 루저들 15.08.03 843 3 19쪽
1 1화. 일란성 쌍둥이 15.08.03 1,267 14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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