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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별의 서재.

내가 어떻게 로맨스를 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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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밝은스텔라
작품등록일 :
2015.03.18 10:32
최근연재일 :
2015.08.07 17:27
연재수 :
1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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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86,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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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8.03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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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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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글자
19쪽

2화. 하늘이 내린 루저들

DUMMY

유나의 쌍둥이 동생 예나는 양성애자였다. 몸을 굴리는데 있어 남자 여자를 가리지 않았고, 레즈 플레이를 할 적에는 주도하는 남자 역할을 맡았다.


그런 예나는 나이 서른에 유명한 외국계 제약회사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 해가 가기 전에 그 거대 제약회사의 오너 손자와 결혼 했다. 유나가 아는 것만으로도 두 번이나 낙태한 예나가, 얼마나 조신한 척 하고 주판알 튕겨가며 꼬리를 쳤기에. 남편이라는 사람은 예나가 첫사랑이었고 첫 경험이었다. 완전 순정남도 그런 순정남이 없었다. 돈도 잘 벌고 유학파에 두뇌도 좋고, 외모도 배우 뺨치고 기럭지도 착하고. 성격도 좋은데다가 일편단심 예나밖에 모르는 그런 사기 캐릭터였다. 그런 남자가 걸레처럼 몸을 굴리던 예나에게 허락되었다.


그리고 예나는 지금 말도 안 되게 귀여운 ‘일란성 쌍둥이’의 엄마가 되었다. 쌍둥이들은 청담동에서 알아준다는 유모 도우미에게 맡겨 키웠고, 예나는 곧장 호화로운 피부미용이다 귀족헬스다 하면서 법석을 피웠다. 그렇게 가꾼 몸은 누가 봐도 쌍둥이 엄마로 보이지 않는다.


그 모든 사회적 즐거움, 재물의 즐거움, 성적 즐거움, 가정의 즐거움. 그 모든 축복이 오직 예나에게만 허락 되었고, 부모님의 사랑 또한 예나만이 독차지 했을 뿐이다. 그리고 예나는 지금 급상승하여 상류층. 갑계(甲界)에 등극해 있다. 간혹 그녀의 블로그에 들어가면 이집트다 노르웨이다 뉴욕이다 하와이다. 호화여행을 다니며 찍어놓은 자랑 사진들이 잔뜩 올라가 있다.


하지만 쌍둥이 언니 유나는 파주의 어디 창고에서 명절용 한과 박스를 조립하는 아르바이트로 연명하고 있었다. 시즌마다 조립해야 하는 박스는 다 다르지만, 노동량에 비해 보수는 턱없이 짜다.


뭐, 학생 시절부터 공부를 안 한 탓은 있었겠지. 그래도 4년제 지잡대는 나왔다. 여기저기 이름 있는 회사도 몇 군데 다녀봤다. 하지만 하나같이 남자 직원들이 예쁜 외모의 유나에게 너무 들이대거나 상사들이 은근하게 증거가 남지 않을 정도만의 추잡한 성적 접촉으로 슬금슬금 다가오는 것이 피곤해서 다 관뒀다.


유나는 남자들의 모공에 맺힌 개기름들만 봐도 속이 울렁거렸다. 어렸을 적부터 예나의 지저분한 성 편력 때문에 트라우마를 얻은 유나는 아무 죄 없이 이성을 향한 모든 관점이 다 뒤틀려 버린 것이다. 청춘도, 남자도, 행운도, 돈도, 부모님의 사랑도.

모든 건 예나가 다 가져갔다…….


“세상에는 정의도 신도 없어. 예나 년은 저렇게 잘 돼서 떵떵거리고 사는데 우린 뭐냐?”


- 꿀꺽꿀꺽


“뭐긴. 사회의 찌끄래기 루저지. 그것도 상루저.”


유나는 한과 박스 조립 알바. 한글고은은 쇼핑몰 댓글알바와 편의점 알바. 한심한 두 처녀는 한숨을 푹 쉬었다.


“남자랑 손이라도 잡아 봤어야 로맨스를 상상이라도 해 보지.”


그런 그녀들은 여전히 [노벨클럽]멤버였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소설가의 꿈은 계속 품고 있었고, 실제로도 쓰고 투고하고 떨어지고를 줄창나게 반복하는 매일을 지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유나의 주 종목은 역사 판타지였다. 부 종목은 오컬트 미스터리.

한글고은의 주 종목은 스릴러 미스터리. 부 종목은 역사 판타지.


둘 다 평범한 삶을 살지 못 했던 탓에, 어두침침하고 소수 매니아들이 즐길만한 장르에 숨어들었고 그대로 고착이 되어 버렸다. 진짜 잘 나간다는 로맨스 장르에 도전해 보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잘 나간다는’ 주류에 한 번 섞여 보고 싶은 마음이었지 정말로 로맨스 소설을 쓰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은 아닌지도 모른다. 지금의 유나나 글고은에게 남자와의 따뜻한 분위기를 쓴다는 것은 경복궁 지하에서 잠들어 있던 황룡이 긴 잠에서 깨어나 눈을 부릎 뜨는 짜릿한 씬 보다도 더 강력한 상상력을 요하는 일이었다.


“그래도 미련은 남는다 이거지. 산타는 사람들도 그렇잖아. 기껏 설악산 빙벽 좀 타 봤다고, 언젠가는 K2를 정복하고 싶은 마음 말이야.”

“글고은아. 우린 그 설악산, 빙벽은커녕 국립공원 입장권도 못 사 본 것 같단 말이지.”

“너는 그 입장권을 그냥 줘도 안 가진 거잖아 인간아! 몇 번을 말해. 몇 번이나 내 입으로 말해야 하느냐고! 나는 이 꼴이라서 무리라고! 하지만 넌 지금이라도 가능해! 너라도 좀 경험해 봐 로맨스! 니가 경험해보고 내게 말 좀 해 줘! 뭐가 어떻게 짜릿했는지!”

“시발 왜 맥주 한 캔으로 왜 나한테 꼬장질이야! 내 얘기 기다리지 말고 그렇게 궁금하면 이것들을 보라고! 어렵게 구해다 줬잖아!”


유나는 글고은에게 할리퀸 문고본을 냅다 집어 던졌다. 제목은 [보스의 여동생]


“이런 건 그냥 판타지잖아!”

“판타지라서 인기 있는 거잖아! 현실에 없는 남자들이 나오니까! 현실에 있는 남자들로 이런 글 쓰면 누가 보냐!? 암 걸리게!”

“꼭 남자랑 살아본 것처럼 얘기 하냐. ‘ㅈ’도 모르는 게!”

“생각해 봐. 툭눈이에 비계 잡힌 배. 짧은 목. 작은 키에 여드름 얼굴.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개기름 번질번질. 사는 곳은 곰팡이 핀 반 지하방. 이런 남자가 나와서 수줍게 꽃다발을 준다고 생각해봐.”

“으어어어!!!”


그런 상황을 떠올리며 비명 지를 처지는 아니지만, 글고은은 소름끼친다며 어깨를 움츠렸다. 그녀들은 어째서인지 ‘최악의 수’는 잘 떠오르는데 ‘최상의 수’는 전혀 상상이 안 되었다. 그래서 보는 게 할리퀸인데…. 그녀들은 여전히 로맨스 장르소설을 펼치기 전에는 고추장 튜브나 팔팔 끓인 김치찌개를 옆에 가져다 놓아야 했다. 그러고도 끝까지 읽지도 못 했다. 오그라드는 씬이 이제 막 시작되면 탁! 덮고, 휴! 다 봤다! 만 반복할 뿐.


그래서 이 두 처녀는 발전이 없었다.


***


‘미친년들…….’


그런 ‘고모들’을 바라보며 원룸 문가에 선 한나래.


얼마 전에 중학교를 졸업했다. 이제 지옥의 출입구인 고등학교 생활을 앞두고, 엄마의 심부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고모의 원룸에 발걸음을 했다.


‘아 씨, 오늘 현이랑 놀기로 했는데!’


완전 짜증이었다. 가난뱅이 노처녀 고모의 술판이라니, 그래도 엄마가 오늘 고모 생일이니까 케이크랑 금일봉 전달은 하고 오라고 해서….

그런데 초인종은 고장 났고 현관문은 잠겨있지 않기에 그냥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고모랑 고모선배라는 또 다른 노처녀가 맥주 캔을 움켜쥐고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자, 받아써! 부잣집 아들! 오픈형 외제 스포츠카! 180cm가 넘는 키에 완전 준수한 외모! 도자기 피부에 왕자님 얼굴! 귀족적 마인드에 깍듯한 매너! 온갖 여자들이 다 꼬리쳐도 내 여자한테만 일편단심인 순정남! 유학파에 상류층 도련님!”

“오케! 10대에서 이제 막 20살이 된 거야!”

“상대가 될 여자는 옥탑방에 살고 있는 거지!”

“여자는 아직 18살이야!”

“남자가 뭔지 몰라. 남자 주인공도 여자가 뭔지 몰라!”

“둘은 하늘이 맺어준 운명을 느꼈어!”


“저…, 고모.”


“편의점 알바를 하다가 남자를 만나게 돼.”

“안 돼! 그런 남자는 편의점 안 가! 그의 비서 같은 사람이 편의점에 들어가고, 그는 고급 외제차 뒷자리에서 차창을 내리고 편의점 안을 바라보는 거지.”

“오 잘 풀려간다. 좀 더 해 봐!”


“고! 모!!!”


“어!”

“아!”


- 카톡. (엇. 현이다!)


“어… 나래야. 언제 왔니? 전화라도 하지 그랬어.”

“엄마가 이거 갖다 드리래요. 심부름 때문에 왔어. 초인종 고장 나 있더라고요.”

“아…. 고마워! 암튼 올라와. 주스라도 한 잔 마시고 가.”

“아니 됐어. 고모, 난 그럼 나가볼게요.”

“에? 벌써?”

“응. 나 약속 있어서….”

“음…, 그럼 잠깐만. 고모가 용돈이라도 줄…”

“아니 됐어요. 나 있어. 고모 생일 축하해요. 그럼 전 진짜 가 볼게요.”

“어우…. 미안하고 섭섭하다 얘~.”

“저번에 졸업식 때 와 줬잖아.”


휴…….

나래는 행여 잡힐까 두려워 뒤도 안 보고 후다닥 계단을 빠져나왔다. 오늘 현이와 평화공원에서 보기로 했던 걸 어찌 저찌 늦지 않게 나갈 수 있을 것 같아서 가슴을 쓸어 내렸다.


하지만, ‘으휴! 소름끼쳐!’


나래는 고모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움찔움찔 놀라게 된다. 사실 나래의 아빠도 얼굴은 영 별로다. 그런 아빠를 선택한 엄마도 뭐 비등비등하다. 그럼에도 나래는 어떻게 누구도 닮지 않고 무사히 예쁜 얼굴로 태어나고 자라고 있음이 아름다운 기적이라 여겼다.


나래는 어떤 면 고모가 존경스럽기도 했다. 자신이라면 그런 얼굴로 그 나이 때 까지 살아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안 살면 안 살았지. 저런 모습으로 서른까지 살고 싶지는 않다. 그런데 고모는 무려 마흔을 목표로 생존해 있는 것이다. 나래는 그 멘탈에 경의를 표했다.


그리고는 씩씩하게, 180 넘는 키에 킹카로서 갖춰야 할 마땅한 외모를 갖춘 남자. 좋은 집안의 도련님으로 자신의 짝이 된 박 현의 카톡에 답을 보냈다.


- 지금 막 심부름 택배 마치고 고모집 나왔음.

- ㅇㅇ


졸업시즌이니 날씨는 여전히 쌀쌀했지만, 현이와 함께 평화공원 데이트라니. 나래는 핑크빛 상상의 나래를 펴며 콩닥 거리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오늘은 어디까지 진도가 나갈까?’


오후 4시 20분. 중학교 2학년 때 처음으로 사귀게 된 낭군 현이와 평화공원의 연못가에서 만났다. 고등학생이 되면 서로 다른 학교에 배치되었기에 자주 보지 못 할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나래는 그래도 변심하지 않을 거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흥! 그건 너희 루저들 이야기고!’


나래는 간간히 집에서 뿌렸던 향수냄새가 잘 나고 있는지를 확인했다. 행여나 그 칙칙한 노친네들의 술 냄새가 묻어난다면 오늘의 데이트는 대 실패! 다행이,


“오늘도 그거 뿌렸네?”

하고 허리를 감는 현이의 팔은 모든 걱정을 다 놓게 해 주었다.


나래는 추운 날임에도 불구하고 일부로 춥게 입었다. 추워서 웅크린 어깨를 현이에게 맡기고 싶어서였다. 의자에 앉을 때 현이의 손수건을 깔고 앉고 싶었다. 또 미니스커트를 가려주는 메너남 현이의 무릎커버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엄동설한에도 작정하고 똥꼬 스커트를 입고 나왔다.


그런데 무슨 일이지?

“오늘도 그거 뿌렸네?” 이후로 현이는 별 말이 없다.


“현아…. 오늘은 무슨 영화 볼 거야?”

“나래, 넌 나만 보면 영화 볼 생각 밖에 안 하냐?”

“어?”


어!? 뭐? 뭐라고!? 나래는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지금 무슨 소릴 들은 거지?


“어? … 현이 너도 영화 좋아하잖아.”

“좋아한 척 한 거지. 니가 하도 영화영화 거리니까.”


‘헐!’


“오, 오늘 무슨 일 있었니? 현이 너 기분이 별로 같다?”

“왜? 내가 뭘? 그냥 너가 날 보면서 영화 말고는 뭐 생각나는 거 없냐고. 하긴~ 패밀리 레스토랑 어디에서 뭐가 언제까지 할인중이다. 뭐 그런 소리도 하겠지?”

“어, 너 오늘 왜 이래?”

“내가 뭘?”

“평소랑 다르잖아. 너 이렇게 가시 돋친 이야기 하는 애 아니었잖아.”


나래는 추워서인지 화가 나서인지 모르게 온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춥냐?”

“어? 어…….”

“그러게 이 얼어 죽을 날씨에 그렇게 헐벗고 나오냐?”


‘뭐지!? 더, 더는 듣고 싶지 않아!’


너무 갑작스럽게 ‘나쁜 남자’가 되어 버린 현이의 변화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래는 그제야 정말 추위가 무엇인지 제대로 깨달은 기분으로 온 몸을 떨었다.


“뭐, 그래도 놀겠다고 나왔으니 놀자. 니가 추운거지 내가 추운 거 아니니까.”

“야!!!!”


나래는 지나가는 사람들이 한 번씩 흘끔거릴 정도로 큰 소리로 고함을 빽 질렀다.


“참는 것도 한계가 있어! 더는 못 참아 이런 모욕! 너 도대체 오늘 왜 이러는데! 이유나 알고 당하자! 졸업식 하고 처음으로 만나는 거잖아! 그런 내게 네가 이렇게까지 할 이유란 거, 있는 거니!?”

“왜. 열 받아? 참기 힘드냐? 나는 언제나, 늘 참았는데.”

“뭘! 네가 나의 뭘 참았다고 그래! 그래서 그 복수냐?!”

“복수는 개뿔이.”

“그럼 왜 이러는 건데!”

“너랑은 이제 다 놀았으니까. 더는 네 징징거림을 들어 줄 필요도 없고, 영화타령 들어 줄 필요도 없고, 맛대가리 없는 비싼 커피 사 줄 필요도 없고. 그 모든 걸 웃는 얼굴로 참아줄 필요도 없거든. 이제 너랑은 다 놀았으니까.”


‘뭐? 뭐라고!?’


하! 나래는 핑- 도는 어지러움을 느꼈다.


‘뭐니 이거. 나 지금 차이는 거니?’


누가 누굴 차! 니가 날 차!? 하 참내! 어이가 없어서!


“그럼 말하지 그랬니. 사실은 영화 보기 싫다고, 사실은 비싼 커피 마시기 싫다고. 사실은 내가 징징거리는 거 듣기 싫다고. 말하지 그랬니. 한 번도 티도 안 내 놓고, 이제 와서 이렇게 비수를 들이대?”

“말했으면, 뭐 달라져? 주절주절 말만 많아질 뿐이지. 여성혐오 있냐고. 날 된장녀 취급 하냐고. 따불따불 따져들었겠지.”

“그, 그만해. 됐어.”

“뭘? 뭐가 됐고, 뭘 그만해?”

“이제 나랑 다 놀았다며. 그럼 닥치고 끝내자고. 지저분하게 뭐 하는 거니 이거.”

“왜. 따져드는 건 여자들만 하고 남자는 하면 안 되냐? 내가 이러니까 되게 짜증나지? 존나 찌질해 보이지? 그런데 넌 맨날 이랬거든. 그래. 끝내야지. 안 그래도 끝내려고 나온 거야 나. 너 때문에 존나 피곤했다고 말 해주고 끝내려고.”


얇게 입고 짧게 입어 바들바들 떨리는 나래는 두 주먹을 움켜쥐고 눈물을 뚝뚝 흘렸다. 더러웠다. 이렇게 끝내는 거….


“왜? 억울해? 황당하기만 하지? 니가 뭘 잘 못했는지 모르겠지?”


나래는 더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냥 뒤돌아섰다. 그리고 이를 갈며 걸었다.


“이야!!!! 으야!!! 히야~~~!!!!!!!!!!! 잇 히!!!”


그러자, 갑자기 등 뒤에서 현이의 다양한 고함소리가 들렸다. 아니, 그것은 함성이었다. 뭔가 기어코 해냈다는 성취감에서 터져 나오는 신나는 해방의 목소리.


“신발, 개 새끼…….”


나래의 첫사랑은 그렇게 산산조각이 났다.

나래는 그녀 스스로 그랬듯, 첫사랑을 이루지 못 한 루저가 되었다.


***


나래는 일단 북가좌동까지는 버스를 탔지만, 그 다음 부터는 엄동설한에 스타킹도 신지 않은 맨다리로 똥꼬치마를 입고는 허우적허우적 헤매 다녔다. 온 몸이 얼어 파래지도록 혼자 어디랄 곳 없는 어디를 헤매 다녔다.


오래 살아본 건 아니지만, 벌써부터 인생의 ‘더러운 맛’을 느껴버린 기분이었고, 아까 현이 앞에서 보란 듯이 살얼음 내려앉은 연못에 풍덩 뛰어내리지 않은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네가 얼마나 나쁜 놈인지, 잔인한 놈인지. 이것 보라고. 결국 사람 하나를 웃으면서 얼려 죽이는 놈이라고. 온 몸으로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하지만 문득 키 작고 못 생긴 서른여덟 살의 노처녀 고모가 떠오른 것이었다. 언젠가 나래가 남자친구가 생겼다는 말을 듣고 고모가 그랬다. 세상에 반은 남자라고. 예쁜 여자라면 반을 지배하는 지혜를 가져야 한다고. 자신은 그럴 수 없었지만, 예쁜 나래는 그럴 수 있을 거라고. 하나에 목숨 걸지 말고, 세상을 손바닥에 놓고 저 위에서 내려다보라고.


그 말이 떠올라 나래는 물에 뛰어내리지 않았던 건지도 모른다. 사실, 세상의 반은 여자고 그 반 중에서도 나래의 외모는 솔직히 중상위권에 속할까? 자신은 없다. 그럼에도 아빠와 고모의 외모를 떠올리면 미스코리아 급의 변종이라고 생각하며 뿌듯해 했었던 어린 마음이었다.


“얼굴은 답이 아니었어!”


나래는 오늘 처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남자와 여자는 얼굴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성격]이 맞아야 한다는 어른들 말씀이 정말이구나. 라는 걸 깨달았다. 그렇게 잘생긴 현이가, 멋있었던 현이가. 말도 안 되는 모습을 보였다. 사실은 정말 그런 놈이었는지도 모른다. 진도가 더 나갔더라면 나래는 정말, 놀아나다가 버려지는 비참한 꼴이었을지도 모른다. 이 정도로 끝난 게 다행이었다.


잘 생긴 얼굴은 함정이었다.


그래도 속이 상했다. 나래는 눈물 없이 흐느끼며 DMC역에서 멀지 않았던 고모의 원룸으로 향했다. 도저히 더는, 집까지 걸어갈 수도 없이 온 몸이 꽁꽁 얼어붙어 있었기에 몸을 좀 녹이고 싶었다.


현관문은 여전히 열려 있는 채였다. 두 노처녀는 여전히 뭔가에 몰두해 있었다.


“하지만 그 회장 손자가 좋아한다는 여자를, 라이벌 회사 손녀가 손 봐 주려고 깡패들을 보낸거야! 옥탑방 가난뱅이 여자한테만 정신이 팔려서 출생 전부터 어른들에 의해 약혼관계였던 자신은 완전히 뒷전이었거든!”

“상류층 여자들이 자존심에 금이 가면 무서워지지!”

“그래! 그래서 조폭들을 시켜서 그 여자를 여자구실 못 하게 만들려고.”

“그런데 그 회장손자가 그 여자를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 달려드는 거지! 조폭들은 그 남자가 회장손자인줄 몰라.”


주거니 받거니 하다가 결국 글고은 고모가 마침표를 찍어 본다.


“회장 손자는 조폭들한테 맞아 죽어. 딱 한 방에 그냥 가는 거야.”

“야. 그건 갑자기 막장 드라마잖아.”

“아 좀 들어봐. 일단 죽어. 그리고 여자는 조폭들에게 끌려가. 그런데 분명 죽은 그 남자가 다시 눈을 떠. 그리고 눈이 파랗게 귀기의 빛을 발하지.”

“야. 죽는 꼴은 압구정 백야고, 눈알 파래지는 건 M이잖아!!!”(M : 과거 MBC에서 했던 납량특집 드라마)

“이상해? 난 눈 파래지는 신기생뎐 아수라 백작 떠올렸는데.”

“그게 뭐야! 로맨스로 시작해서 미스터리로 가는데! 기승전미스터리냐!”

“언니, 잠깐만. 그래서 일단 여자는 끌려가. 그런데 그 조폭 두목이 지금 암 투병중이라 아들이 조폭을 이끌고 있거든? 근데 그 아들이 여자를 보고 반하는 거야.”

“아이구 점점……. 왜. 그럼 그 아수라 백작은 눈 밑에 점 하나 찍고 컴백하고?”

“어! 그런 식. 복수를 위해서 미지의 힘을 끌어오는 거지!”

“잠깐만, 글고은. 가만 생각해봐. 로맨스냐 그거?”


멍하니 현관 앞에 서 있는 나래의 기척을 알아채는 이가 아무도 없을 정도로 몰두 해 있는 두 노처녀.


하지만 나래는 천천히 추위가 가시면서 그 ‘이야기’가 제법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기업 회장 손녀에게 일을 의뢰받은 조폭의 보스의 아들이 반한다는 거잖아. 위험한 사랑…. 그런 거 매력적이지 않나? 뭐, 모티브는 매력적이지만 저 고모들이 쓰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되어버릴지도 모른다. 조폭들이 장풍을 쏜다거나, 회장 손자가 사실은 서클 6의 마법사라던가.


“어? 한나래!?”

퍽이나 일찍도 알아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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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5화. 가자~! 사고치러~!! 15.08.04 540 3 19쪽
4 4화. 국제전화 15.08.04 441 2 20쪽
3 3화. 출생의 비밀? 하! 그게 뭐? 어쩌라고? 15.08.03 610 3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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