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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권 님의 서재입니다.

제국 사냥꾼은 총을 두 번 쏜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심권
그림/삽화
메이산
작품등록일 :
2022.06.02 01:20
최근연재일 :
2022.12.03 23:30
연재수 :
142 회
조회수 :
9,270
추천수 :
927
글자수 :
790,487

작성
22.09.13 18:30
조회
43
추천
4
글자
12쪽

장대비

DUMMY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걸까요, 하여튼 어른들이란."

"원래 부모는 자기가 선택할 수 없는 거예요."

"선생님 어머니는 아레인스터 학장이잖아요."


나는 아까 시칼트라 씨가 그랬던 것처럼, 의자를 천천히 돌렸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연구실 풍경. 이런 연구실이 집 안에 있다니, 엄청나게 좋은 환경이잖아.


"그래요. 제가 태어나기 전에 아레인스터 학장 밑에서 태어나게 해 달라고 고른 게 아니지만 말이죠."

"저도 제국 사냥꾼 밑에서 태어나게 해 달라고 고르지 않았어요."


시칼트라 씨는 턱을 괴고 내 쪽을 바라보았다. 부드러운 장갑을 낀 손이 눈에 들어왔다. 왜 항상 장갑을 끼고 있는 걸까? 실험 같은 걸 많이 하는 사람이라서 그런 거겠지.


"그러면, 알첸브라임 양. 부모를 직접 고를 수 있었다면 어떤 사람들을 골랐을 것 같아요?"


어렸을 때부터 수도 없이 해 본 생각이었다. 내가 만약 다른 사람들 밑에서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내 부모가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극장의 티켓 판매원이나, 시장에서 과일가게를 하는 사람이나, 조금 욕심을 부린다면 영화배우 같은 사람.


영화배우는 평범한 사람이 아닌가? 하지만 제국 사냥꾼보다는 평범할걸.


"신이 되려고 하지 않는 사람이요. 그냥 인간으로 살아가려고 하는 사람."


시칼트라 씨가 한쪽 눈썹을 슬쩍 들어 올렸다. 이엘한테도 이 비슷한 버릇이 있었는데. 그러고 보니, 두 사람에게서 왠지 비슷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대체 왜일까. 괴상한 선글라스 같은 걸 끼고 다니는 사람들이라 그런가.


"엄마는 제가 열두 살 때 집을 나갔거든요. 신을 찾으러 가겠다는 메모 한 줄만 남기고. 혹시 선생님은 신을 믿으세요?"

"종교는 없지만, 신의 존재가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을 믿어요."

"그거 왠지 멋있어 보이는 말이네요. 나중에 써먹어야지."


누군가 연구실 문을 두 번 두드렸다. 이 시간에 문을 두드리는 건 파리스 씨, 학장의 아들이자 비서다. 그 사람은 매일같이 시원한 음료를 가지고 찾아왔다. 아. 그리고 파리스 씨는 굉장한 미남이었다. 처음 봤을 때는 나도 모르게 당황할 정도였으니까.


파리스 씨는 시칼트라 씨의 동생인데, 두 사람은 아버지가 다르다고 했다. 하지만 두 사람 다 저렇게 예쁘고 잘생긴 걸 보면, 시칼트라 학장은 분명 남자의 외모를 굉장히 많이 보는 사람일 거야.


"들어와."


파리스 씨가 책상 위에 쟁반을 내려놓았다. 그래도 서비와 다른 일행이 여기를 떠나고 나서는 좀 여유로워 보인다. 손님이 많을수록 바빠지는 게 잡부의 운명이니까. 잡부라는 건 파리스 씨가 직접 한 말이다. 자기는 말이 비서지 사실상 잡부라고 그랬었지.


"내가 신을 믿지 않는다고 해도, 누군가는 신을 믿어요. 그리고 신을 믿음으로써 어떤 행동을 하거나 하지 않죠. 이 세계는 그런 수많은 작위나 부작위의 영향을 받잖아요."

"작위나 부작위가 무슨 뜻이에요?"


오늘의 음료는 차가운 유자차. 시칼트라 씨는 잔을 들고는 한 번에 반 넘게 마셔 버린다. 나는 언제나 그 기세 좋은 모습을 구경하면서 조금씩 홀짝거린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는 걸 작위라고 하죠. 해야 할 걸 하지 않는 걸 부작위라고 하고."

"그렇구나."


크, 시원하다. 안타레스는 꽤 더운 곳이었다. 나 같으면 시칼트라 씨나 파리스 씨처럼 긴소매 옷은 입지 않을 텐데. 이 건물은 마법으로 냉방을 해서인지 꽤 쾌적한 편이었다. 냉방을 조금 덜 하고 반소매 옷을 입으면 안 되나?


"내가 신을 믿지 않는다고 해서, 신을 믿는 사람들의 행동을 무작정 외면하고 무시할 수는 없다는 거예요."

"예를 들면요?"


"그러니까, 이런 거죠. 제국 남부에서는 엘하자르의 교세가 강하다고 해요. 오후 4시만 되면 안타레스에 있는 모든 엘하자르의 신도들이 거리로 나와서 기도를 올린다고 가정해 봐요. 나는 신을 믿지 않지만, 오후 4시가 되면 그 신을 믿는 사람들이 길을 막는다는 걸 알죠. 그 사실을 없는 걸로 치부하고 편안하게 도로를 걸을 수는 없어요."


과연 시칼트라 씨는 누군가를 가르치는 데 소질이 있는 것 같아. 나 같은 사람도 쉽게 이해할 만한 설명을 할 수 있다니. 얌전히 대화를 듣고 있던 파리스 씨가 손으로 창밖을 가리켰다.


"실제로 아레인스터에도 있어. 엘하자르 신도 소모임."

"오후 4시에 길만 안 막으면 돼."


파리스 씨는 하하, 웃고는 자리를 떴다. 어떻게 저렇게 잘생겼지? 파리스 씨도 선생님을 해야 했는데. 그랬다면 여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지 않았을까?


"그래서, 아까 했던 말은 무슨 뜻이에요?"

"무슨 이야기 하고 있었죠?"

"부모를 선택할 수 있다면, 신이 되려고 하지 않는 사람을 선택할 거라면서요."


아, 그 이야기였지. 문득 큰 소리가 들려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잠시 후 번개가 내리쳤다. 여기는 비가 너무 많이 온다니까. 그리 살기 좋은 곳은 아니야.


"제국 사냥꾼에게 계시를 내리는 신이 있어요. 제국 사냥꾼이 되려면, 최북단에 있는 사냥의 숲에서 계시를 받으면 돼요. 황제와 사제, 그리고 계시를 받을 당사자. 이렇게 세 명이 신전에 들어가죠."

"처음 듣는 이야기네요."


나는 분명 신전에서 그 계시를 들었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그게 신이 내린 거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냥 막연하게, 사냥의 숲에 있는 신전에 가면 계시가 온다. 그렇게만 알고 있었을 뿐이다.


"저는 그 신이 아주 추상적인 존재라고 생각했거든요. 하지만 그게 아무래도 실존하는 모양이더라고요."

"그래요?"


"일곱 개의 성물, 그리고 신의 그릇이 될 인간이 있으면 신이 이 땅에 강림한대요."

"어머, 무슨 신이요? 사냥의 신?"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시칼트라 씨에게 아는 척 떠들 수 있는 주제도 있구나.


"그리고 저는 그 신의 그릇이 될 수 있대요. 신기하죠?"

"신의 그릇이라는 게 뭔데요?"


"아이니, 그러니까 사냥의 신의 그릇은 말이죠. 강신 의식을 치르면 그 신 자체가 된대요. 제가 신의 그릇으로서 의식을 치르면 제가 곧 신이 되는 거죠."

"그 말은 알첸브라임 양이 신이 될 수도 있다는 뜻인가요?"


여기서는 좀 더 멋있게 보일 수 없을까? 잠깐 고민했지만, 딱히 더 멋있어 보일 방법 같은 건 떠오르지 않았다. 신이 될 수도 있는 사람, 이라고 말하면 정말 대단한 존재 같은데 말이지.


"따지자면 그렇죠. 선생님이 아레인스터의 학장이 될 수도 있는 거랑 마찬가지 아닐까요?"


아레인스터의 지금 학장은 학장이 된 지 30년이 넘었다고 한다. 아무리 나라도 그게 보통 일이 아니라는 건 안다. 잘 생각해 보면, 처음 학장이 되었을 때는 말도 안 되게 젊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래도 30년이 넘었으니, 슬슬 후임자를 뽑아야 할 때가 온 건 아닐까?


"아레인스터의 학장은 말이죠. 지원자 중 가장 유능한 사람을 뽑는답니다. 임기가 끝날 때마다."

"그러면 지금 학장님은 계속 뽑히고 있다는 건가요?"


"따지자면 그렇죠. 이사회가 바보는 아니거든요."

"후계자한테 물려주고, 뭐 그런 게 아닌가 보구나."


시칼트라 씨는 간신히 웃음을 참는 표정이었다. 아무래도 내가 바보 같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아니면 어려서 철이 없다고 생각하거나. 뭐, 둘 다 그리 틀린 이야기는 아니니까 기분이 나쁜 건 아니지만.


"제국 사냥꾼도 후계자에게 물려 주지는 않잖아요."

"그건 그렇죠. 하지만 사냥의 신 자리 정도 되면 후계자에게 물려줄 수 있을지도 몰라요. 저도 신이 되어본 건 아니니까 정확히는 모르지만."


다시 꽝, 하고 천둥 치는 소리. 마치 누군가가 피아노 건반을 아주 세게 내리치는 소리 같았다. 실제로 피아노를 그렇게 쳤다가는 금방 망가지겠지.


"그래서, 신이 되고 싶다는 생각은 해본 적 있어요?"

"그럴 리가요. 아까도 말했잖아요, 신이 되려는 사람 밑에서 태어나고 싶지 않다고. 신이 되고 싶다거나, 뭐 그런 거 바보짓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엄마는 왜 신이 되려고 한 걸까. 당연히 내가 그 이유를 전부 이해할 수는 없겠지. 그런데, 내가 꼭 그걸 이해해야 하나?


나는 책상에 턱을 괸 채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장대비가 바닥을 세차게 때렸다. 마시다 만 음료 잔 표면에는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선생님. 무슨 일을 해서라도 이루고 싶은 목표 같은 게 있었어요?"

"있었죠."

"그게 뭐였는데요?"


조금 의외다. 시칼트라 씨는 왠지 갖고 싶은 걸 쉽게 얻었을 것 같은 느낌인데. 이런 생각은 실례일지도 모르지만, 미인에다가 똑똑하고, 어머니가 높은 사람이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결혼하는 거요."


당연히 농담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칼트라 씨는 딱히 농담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현모양처니, 뭐니 하는 말과 어울리는 느낌은 아닌데. 나도 참 편견투성이 인간이라니까. 사람을 이렇게 제멋대로 판단하다니.


"왜 그런 생각을 하셨던 거예요?"

"학장님에게는 남편이 여러 명이었거든요. 모르는 아저씨들을 만나야 하고, 아버지가 다른 형제들이 바글거리고. 그런 상황이 싫었단 말이죠, 어릴 때는."


"어릴 때라면 당연히 그럴 수 있죠."

"알첸브라임 양도 아직 어리답니다. 어쨌든 그래서 그런 생각을 한 거죠. 나는 나중에 크면 정말 사랑하는 사람 한 명과 결혼해서 평생을 같이 살아야지, 하고."


사람마다 생각하는 게 다르구나. 내가 시칼트라 씨 같은 환경에서 자랐다면, 난 결혼 같은 건 하지 않을 거라고 마음먹었을 텐데. 결혼이니, 가족이니. 그런 건 지긋지긋하게 느껴질 법도 하니까.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나요?"

"생각이 달라졌다기보다는, 평생을 함께할 정도로 사랑하는 사람이 없었던 것 같아요. 그런 사람을 찾지 못해서 그냥 있는 대로 살아온 거죠."


"그러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평생 둘이 살겠다는 꿈이 사라진 건 아니네요?"

"사라진 건 아니죠, 희미해졌지만?"


우리는 한동안 비 내리는 바깥을 바라보았다. 잔디밭에 빗방울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가서 저기를 뛰어다니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이렇게 답답한 걸까. 뭔가 해소되지 않은 게 있는 것처럼.


"저는 그런 게 없었거든요. 과거형으로 말하니까 이상하네, 지금도 없는데. 꿈 같은 것도 없고, 당연히 장래 희망도 없고, 어떤 직업을 갖고 싶다, 그런 생각도 없고."

"그럴 수도 있죠."


"그런가요, 어른들은 대체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던데. 이런 말을 하면 잔소리를 엄청나게 듣거든요. 고모도 그랬고."


시칼트라 씨는 음료 잔을 들고, 나머지 반을 다시 한 번에 쭉 마셨다. 보통 이렇게 마시는 것 같았다. 두 번에 걸쳐, 딱 반씩.


"어른들이 그런 잔소리를 하는 건 당연한 일인지도 몰라요. 나중에 후회할지도 모른다는 걸 아니까. 하지만 그런 마음은 남의 말 좀 듣는다고 바뀌는 게 아니랍니다."


"그래서 젠과 서비를 만났을 때 그런 생각을 했어요. 이 사람들은 꼭 이루고 싶다고 생각하는 일이 있구나. 나는 어차피 아무런 목표도 없으니까, 이 사람들을 좀 도와줘도 되지 않을까?"


굳이 따지자면 숲에서 내 목숨을 구해 준 것도 있긴 하지만.


"그런데 지금은 잘 모르겠어요. 강신이라는 건 얼핏 생각해도 그리 간단하거나 가벼운 일은 아니거든요. 어쩌면 세상이 바뀔지도 모르잖아요. 그런 일을 그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해도 되는 걸까."


"가벼운 마음으로 세상을 뒤흔들어 놓을 수 있다니, 그건 멋지긴 하네요."

잔은 물방울 때문에 자꾸 손에서 미끄러지려고 했다. 나는 남은 음료를 다 마셔 버렸다.


"하지만 너무 많이 흔들려 버리면 어쩌죠? 모든 게 돌이킬 수 없어진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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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진실 +2 22.08.31 35 4 13쪽
99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 +1 22.08.30 31 4 13쪽
98 적격 심사 +1 22.08.29 39 4 13쪽
97 안부 인사 22.08.28 25 4 13쪽
96 뜻밖의 조력자 22.08.27 29 4 13쪽
95 낯선 도시에서 22.08.26 27 5 12쪽
94 별의 뒷면 22.08.25 27 3 13쪽
93 허용되지 않은 것 22.08.24 29 4 13쪽
92 균열 +1 22.08.23 33 4 13쪽
91 혼돈의 꽃 +1 22.08.22 30 4 12쪽
90 신에게 가까워지는 이들 +1 22.08.17 25 4 13쪽
89 망가진 자물쇠 22.08.16 28 4 13쪽
88 시체와 꽃 +1 22.08.15 28 4 13쪽
87 가장 깊은 곳에서 발견한 것 22.08.14 30 4 13쪽
86 밤의 숲, 제단의 아래로 22.08.13 30 4 12쪽
85 천재 비서의 하루 +1 22.08.12 32 4 13쪽
84 바꿀 수 없어 받아들이는 것 22.08.11 30 5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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