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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권 님의 서재입니다.

제국 사냥꾼은 총을 두 번 쏜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심권
그림/삽화
메이산
작품등록일 :
2022.06.02 01:20
최근연재일 :
2022.12.03 23:30
연재수 :
142 회
조회수 :
9,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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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7
글자수 :
790,487

작성
22.08.30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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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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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글자
13쪽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

DUMMY

젠은 문간에 간신히 기대어 서 있었다. 얼굴은 여전히 창백했지만, 그래도 눈동자에는 생기가 돌아온 것 같았다. 유리오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게 그렇게 중요한 이야기인가?"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건 아니지?"


그렇게 말한 건 이엘 쪽이었다. 그는 유리오에게 눈빛으로 한 마디를 더 남겼다.

나중에 보자.

그러고는 손에 들고 있던 약 봉투를 젠에게 내밀었다.


"마력 신경계를 다쳤으니 약을 먹으랍니다. 이틀 동안 아침저녁으로. 소마법이라고 해도 마법은 쓰지 말고요."

"이엘 알체이라 씨?"

"그런데요."


"젠입니다. 아이니 교단의 신관이고요."

이엘은 그가 내민 손을 맞잡았다.

"이엘 알체이라, 제국 사냥꾼입니다."


"뭐, 나도 소개해야 해?"

"하지 마."


유리오가 젠에게 검을 돌려주었다. 그는 어깨를 두어 번 돌려 보더니 다시 검을 멨다. 그러고는 지저분해진 옷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얼굴을 찌푸렸다.


"다른 사람들은 학장의 집에 있대. 서비가 학장이라는 사람과 대화하는 중인가 봐."

"오래 걸리네."

"오래 걸리는 게 오히려 좋은 거 아냐?"


맞는 말이었다. 다짜고짜 성물을 달라고 요구했음에도 칼같이 거절당하지 않았다는 뜻이니까. 사실 바로 쫓겨난다고 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먼저 갈 테니까 천천히 따라와."

"왜?"


젠이 고개를 옆으로 살짝 기울였다.

"할 이야기가 많은 거 아냐? 조금 이따 보자."


그러고는 의무실을 떠나 버렸다. 이엘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예전의 기준으로 따지자면 지금은 그가 유리오에게 훈계해야 할 타이밍이었다. 그가 제 검으로 아리나딘의 사자를 두 동강 내기 직전, 분명 그녀는 총을 쏘려고 했으니까.


하지만 그가 유리오를 가르치려 한다 한들, 그 이야기가 그녀에게 그리 효과적으로 가 닿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 총, 아직 못 쏘지?"

"쏠 수 있을 거야, 아마도. 한 번도 쏜 적은 없지만."

"한 번도 쏜 적이 없는데 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뭐야?"


유리오가 가지고 있는 마법 총의 법적인 주인은 이엘이었다. 그리고 마법적인 주인은 이쉐 알첸브라임. 그러니까 냉정하게 따지자면 유리오는 총을 훔쳐 달아난 입장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 두 사람 모두 그녀에게 책임을 물을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도 일어나지 않았을 뿐.


"그냥 그런 느낌이 들어서."

"만약에 아까 총이 발사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글쎄. 다른 방법을 찾아봐야 했겠지."


그런 방법 같은 건 없다는 걸 유리오 본인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 총이 발사되지 않았다면. 그리고 이엘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두 사람 중 하나, 높은 확률로 젠의 목숨이 위험해졌을 것이다.


유리오가 고개를 쳐들었다. 그러고 보니, 이엘에게 반드시 확인해야 할 게 하나 있어. 그녀는 꿈속에서 본 사건들이 현실에서 일어났던 일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엘이라면 그걸 확인해줄 수 있을 터였다.


"이엘. 그 마법 총을 쐈다고 엄마한테 한 소리 들은 적 있었어?"

이엘의 표정이 살짝 흐려졌다. 그건 가장 확실한 대답의 형태였다.

"있었지."


"그때 엄마가 두 번 다시 그 총을 쏘지 말라고 했었지?"

"그렇게 말씀하셨어."

"하지만 지금도 총을 차고 있네."


이엘은 사월을 떠난 뒤로 총을 몸에서 떼어 놓은 적이 없었다. 심지어 루토와 함께 호수에 들어갔을 때도. 아마 일반적인 총이었다면 그때 망가졌을 것이다.


"가능한 한 쏘지 않을 생각이야. 하지만 쏴야만 할 때가 있을지도 모르거든."

"나한테는 그게 오늘이었어."


이엘이 픽, 웃었다. 그는 유리오가 더 어렸을 때를 떠올리고 있었다. 굉장히 고집이 센 애였지, 아무도 말릴 수 없을 정도로. 그건 틀림없이 제 엄마를 닮아서 만들어진 성격일 터였다.


"그래, 누가 말려도 소용없겠지. 네가 그렇게 믿는다면."


두 사람은 아레인스터의 교정을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습도를 머금은 공기 때문에, 마치 안개 속을 걷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아까 의무실에서 들었던 이야기, 마저 들을 수 있을까."

"무슨 이야기?"

"스승님이 남겼다는 말 말이야."


유리오는 틀림없이 이렇게 말했다. 이쉐 알첸브라임은 아이니를 찾으러 떠나겠다는 말을 남겼다고. 이엘로서는 완전히 처음 접하는 이야기였다. 그는 지금까지 제 스승이 말 한마디 남기지 않은 채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아. 그거. 말 그대로야. 엄마가 메모를 남겼었거든. 아이니를 찾으러 떠난다고."

"너한테 직접 한 말이 아니라?"

유리오가 고개를 까딱였다.


"어쩔 수 없지. 집에 나밖에 없는데. 내가 제일 먼저 발견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니겠어."


이엘은 탈력감에 휩싸였다.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이런 엄청난 사실이 지금까지 모두에게 숨겨져 있었다니. 아까 그 젠이라는 소년의 반응으로 미루어 보아, 유리오는 제 일행들에게도 그 사실을 말하지 않은 것 같았다.


"왜 그걸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어?"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다는 건 어떻게 아는데?"

"네가 누구한테 말했겠니."


대답하지 못하고 눈을 내리 까는 모습을 보니, 역시 아무한테도 말 안 했군. 이엘은 그제야 제 옆에서 걷는 옆모습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키는 확실히 많이 자랐다. 머리카락은 대충 어깨를 좀 넘는 정도. 뺨에는 작은 생채기가 하나. 허리에는 총 한 자루와 검 한 자루를 차고 있었다.


"그거 쓸 줄은 알아?"

"뭐 말하는 거야? 칼?"

"그래."


그 작은 검은 분명 보통 물건이 아니었다. 유리오의 일행은 성물을 찾고 있다고 했으니, 저게 성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리오가 허리에서 검을 뽑아 대충 아무렇게나 휙휙 휘둘렀다.


"쓸 줄은 알지. 나는 신니에서도 검술 수업 들었단 말이야. 성적도 좋았거든?"

"학교 성적이 좋았다고 끝인 줄 아냐."


"아까도 이걸로 백 놈 정도는 베었다고. 이엘이 직접 봤어야 했는데."

"뭘 베었는데?"

"인형."


이엘의 눈썹이 아주 살짝 찌푸려졌다. 인형이라.


"아리나딘의 사자가 인형 같은 걸 썼나?"

"어? 아, 아니. 인형을 쓴 건 평범한 강도였을걸. 누가 이 총을 노리고 있나 봐. 용병을 푼 거 같더라고. 안타레스의 뒷골목에 갔다가 그 녀석들한테 좀 쫓겼지."

"안타레스의 뒷골목이라. 상당히 방탕한 곳이라고 하던데."


파리스의 말에 따르자면 말이지만. 유리오가 손으로 차양을 만들어 멀리 바라보는 시늉을 했다. 확실히 학교는 깨끗하고 공기 좋은 곳에 지어져 있네. 이래서야, 아까 그 창고가 있던 곳과 여기가 같은 행정구역에 속한다고 믿을 수가 없을 정도다.


"방탕한 정도가 아니야. 적어도 나는 그런 데는 처음 봤어."


그녀는 다리처럼 놓인 판자들을 밟고 건물 위를 뛰어다니던 조금 전을 떠올렸다. 약에 취한 사람들이나 거의 다 무너져 내린 건물. 어린아이 울음소리.


유리오가 자란 사월 역시 밝은 곳과 어두운 곳의 차이가 극심하다는 평가를 받는 지역이었다. 하지만 이 안타레스에 오니 사월은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도유망한 젊은 학생들. 깨끗한 대로와 고급스러운 학교 건물. 하지만 한 꺼풀 벗겨내면, 그림자에 가려져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곳이 있다. 그 학생들 역시 약이나 술, 혹은 다른 무언가를 사러 그림자 뒤를 드나들겠지.


"하여튼, 설명하자면 복잡한데 젠이 알아볼 게 좀 있다고 해서. 그래서 뒷골목 쪽으로 갔다가 복잡한 일에 좀 엮인 거지."

"복잡한 일이라. 그 총을 알아보고 노리는 녀석들한테 쫓긴 거?"


"응. 뭐 그런데, 이상하다니까. 혹시라도 귀찮은 일이 생길까 봐 총은 단단히 가려서 감춰 놨는데 말이지. 내가 총을 가지고 있다는 걸 한 번에 알아보더라고."

"총이 아니라 너를 알아봤을 가능성은?"


유리오 알첸브라임이 마법 총을 가지고 있다는 건 기밀이 아니었다. 모두 그녀가 실종되었다고 여겼을 때, 꼼꼼한 초동 수사를 위해 밝혀진 사실이었으니까. 물론 제국 전체에 쩌렁쩌렁 알려진 건 아니었지만, 조금만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아볼 수 있었을 터였다.


"운이 좋은 줄 알아야 해. 지금까지 큰 위험 없이 돌아다닐 수 있었다는 거."

"사실 그렇게 오래 돌아다니지는 않았어. 한동안 고모 집에 숨어 있었거든."

"숨었다니, 무엇으로부터?"

"그냥 이것저것. 세간의 관심이라든지. 하여튼 그건 그렇게 중요한 이야기가 아니야."


이엘에게는 그 이야기 역시 중요했다. 유리오가 불과 열네 살 때 사월을 떠나, 지금까지 어떻게 지냈는지가 중요하지 않을 리 없었다. 하지만 그는 굳이 그 이야기를 캐묻지 않기로 했다.


가장 중요한 문제가 남아 있었으니까.


"스승님이 예전에 나한테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었어. 인간은 신이 될 수 있다고."

"맞는 말이야. 아이니 신의 그릇이 되는 사람은 그 자체로 신이 되는 거래. 나는 자기 몸에 신을 받아들이고 자기 영혼은 사라져 버리는, 뭐 그런 건 줄 알았는데."

"역시 신이 되려고 하신 걸까."


유리오가 슬쩍 시선을 피했다. 그녀 역시 그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아이니의 그릇은 아이니 그 자체가 된다는 말을 젠에게 들었을 때, 그 생각에 몸서리쳤다.


이쉐 알첸브라임이 사라지기 전에 어떤 고민을 하고 있었는지 알았으니까. 무엇 때문에 괴로워했는지 알고 있었으니까.


이쉐는 자신이 신이 될 수 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렇게 할 사람이었다.


"내가 아까 말했잖아, 사람을 죽인 사람은 아이니의 그릇이 될 수 없다고. 아리나딘의 사자인지 뭔지 그 녀석이 그렇게 말했다니까."

"그 말이 사실일지를 먼저 의심해야지. 그 녀석들 말은 믿을 수 없어."


"그렇긴 한데, 사실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정확히는 다른 사람들을 다시 만났을 때 서비한테 물어보면 돼. 아, 서비는 순례자들의 대장 같은 사람이야. 신관이고."

"그 여자는 이미 만났어."

"아, 그랬다고 했었나."


유리오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옆머리를 긁적였다. 그 모습이 놀라울 정도로 이쉐 알첸브라임과 닮아 있어, 이엘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떨었다. 굳이 따지자면 유리오의 외모는 제 아버지 쪽을 더 닮은 편이었다. 하지만 저런 사소한 습관은 아무리 봐도······.


"그런데, 사실 따지고 보면 있잖아. 사람을 죽인 자는 신이 될 수 없다는 말이 진짜라고 해도 말이야. 엄마는 신이 되기 위해 사라진 건지도 몰라. 엄마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는 모르는 거잖아?"

"그것도 맞는 말이네."


"일단 그게 사실이라는 전제하에 이야기하자고. 아리나딘의 사자라는 놈은 나를 신으로 만들고 싶다고 말했어. 그게 도대체 무슨 꿍꿍이라고 생각해?"

"아리나딘의 꿍꿍이 같은 건 알 수가 없어."


그걸 알 수 있으면 그 녀석들은 더 이상 아리나딘이 아니니까. 도달과 엮였을 때도 그랬다. 황제를 죽이겠다는 도달의 계획에 합류해 손을 잡는 척 하고는, 뒤통수를 쳤었지. 이엘은 결국 그들이 왜 황제를 죽이려 했는지, 그리고 왜 도달의 뒤통수를 쳤는지 알 수 없었다.


"가끔은 그냥 누군가를 한없이 짜증 나게 하는 게 그 자식들 목표가 아닌가 싶거든."

"그런가. 여튼 이상하잖아. 왜 다른 신의 일에 개입하는 거야? 그리고, 아이니라는 신이 강림하는 건 결국 아이니 신을 믿는 사람들에게나 좋은 일 아냐? 나랑 아무 상관도 없는 신이 길을 걸어 다니든 말든 나는 관심이 없다고."


"신기하니까 구경 정도는 하러 가지 않을까."

"애야?"

"애였으면 좋겠다······."

"어른이면 어른답게 굴어야지."


이제 애한테까지 잔소리를 듣는 신세라니. 하지만 그게 그리 싫은 건 아니었다. 두 사람은 아실카 시칼트라의 집 바로 앞에 도착했다. 유독 오늘 이 길이 짧군. 처음에 이 오르막길을 걸어 올라왔을 때는 까마득하게 길게 느껴졌는데.


"시그니 호, 본 적 있어?"

"아니. 그게 뭔데?"


"이 근처에 있는 커다란 호수. 안타레스의 명물이래."

"그래? 한 번 가 볼까. 복잡한 게 좀 끝나고 나면."


유리오가 반쯤 어른이 되어 버린 얼굴을 하고는 씩 웃었다. 이엘은 커다란 시곗바늘이 움직이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반사적으로 시계탑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그 소리는 사실 제 안에서 들린 거라는 사실을, 그는 알지 못했다.

멈춰 있던 그의 시계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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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아무것도 아닌 22.09.05 28 4 13쪽
101 후유증 +1 22.09.01 32 4 12쪽
100 진실 +2 22.08.31 34 4 13쪽
»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 +1 22.08.30 31 4 13쪽
98 적격 심사 +1 22.08.29 39 4 13쪽
97 안부 인사 22.08.28 25 4 13쪽
96 뜻밖의 조력자 22.08.27 29 4 13쪽
95 낯선 도시에서 22.08.26 26 5 12쪽
94 별의 뒷면 22.08.25 26 3 13쪽
93 허용되지 않은 것 22.08.24 28 4 13쪽
92 균열 +1 22.08.23 32 4 13쪽
91 혼돈의 꽃 +1 22.08.22 29 4 12쪽
90 신에게 가까워지는 이들 +1 22.08.17 24 4 13쪽
89 망가진 자물쇠 22.08.16 28 4 13쪽
88 시체와 꽃 +1 22.08.15 28 4 13쪽
87 가장 깊은 곳에서 발견한 것 22.08.14 29 4 13쪽
86 밤의 숲, 제단의 아래로 22.08.13 29 4 12쪽
85 천재 비서의 하루 +1 22.08.12 31 4 13쪽
84 바꿀 수 없어 받아들이는 것 22.08.11 29 5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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