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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권 님의 서재입니다.

제국 사냥꾼은 총을 두 번 쏜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심권
그림/삽화
메이산
작품등록일 :
2022.06.02 01:20
최근연재일 :
2022.12.03 23:30
연재수 :
142 회
조회수 :
9,252
추천수 :
927
글자수 :
790,487

작성
22.08.12 18:30
조회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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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글자
13쪽

천재 비서의 하루

DUMMY

"아, 지금 바로 오실 수 있으신가요? 다행이다. 급한 일인 것 같거든요. 그럼 최대한 빨리 부탁드립니다. 네. 시간 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파리스는 통신을 끊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모르긴 몰라도, 저 정도 크기의 인형을 망가뜨렸다가는 물어줘야 할 돈이 한두 푼이 아닐 터였다.


이게 갑자기 무슨 일이야. 한동안 평안하다면 평안했던 그의 일상에 갑자기 폭풍우가 몰아치기 시작했다. 하긴, 너무 오랫동안 아무 일도 안 일어난다 했지.


아레인스터의 학장, 아실카 시칼트라의 장남인 파리스 마벨은 어머니의 비서 일을 도맡아 하고 있었다. 학장은 그리 꼼꼼하고 세심한 성격이 아니라서, 중요한 약속을 빠뜨리거나 손님을 바람맞히는 일이 빈번했다.


그는 어머니 곁에 붙어 어머니의 뒤치다꺼리를 하는 생활에 꽤 만족하는 편이었다. 아실카 시칼트라는 그의 어머니이기도 했지만, 위대하다고 해도 모자람이 없는 마법사였다. 그런 사람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다는 사실이 그에게 성취감을 가져다주었다.


"어떻게 된 거야? 정말 회로에 손만 댔는데 저렇게 됐다고?"

"거짓말 아니야. 제대로 뜯어보기라도 했으면 덜 억울하겠어······."


파리스는 안절부절못하는 산드린에게 차를 한 잔 타 주고, 훌륭한 의자를 내어준 뒤 적당한 음악을 틀어주었다. 그는 손님을 대접하는 데 아주 익숙했고, 여기를 떠나 사는 누나들은 그에게 모두 손님이나 다름없었다.


"걱정하지 마. 곧 바넬드 씨가 와서 봐줄 거니까. 만약에 그분이 못 고치시면 어쩔 수 없는 거고."

산드린은 그 말을 듣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렇게 되면 그때는 어떻게 하지?!"

"그때는 우리 손을 떠난 거지. 뭐 어쩌라고?"


어쩔 수 없는 일 때문에 전전긍긍할 필요는 없다. 그게 파리스의 신조였다. 그는 하품하며 냉장고를 뒤졌다. 아레인스터에서 가장 실력 있는 인형사는 바넬드 하이넨이라는 남자였다. 그리고 그는 엘펜슈타인이라는 맥주를 끔찍하게 좋아했다.


다행스럽게도 아직 사다 둔 게 좀 남아 있었다.


"모처럼 여기까지 와서 제대로 쉬지도 못하네."

"나, 나? 아니, 괜찮아. 푹 쉰 건 아니지만 지금도 즐거워.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조금 아까까지는 즐거웠어."


산드린 카잔치카는 휴가를 맞아 모처럼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기 위해 여기까지 왔다. 파리스와는 제일 사이가 좋은 누나이기도 했다. 다른 누나들은 죄다 나이 차이가 좀 나거나, 성격이 괴팍하다는 등의 사유로 그리 친하게 지내지 못했으니까.


"그래, 좀 더 쉬어. 어차피 거기서 발 구른다고 그 인형이 고쳐지지는 않아."

"그거 말이야. 역시 평범한 인형은 아니지?"

"무슨 뜻이야?"


산드린이 목소리를 살짝 낮췄다. 여기는 아실카 시칼트라가 지내는 곳, 그 누구도 감히 그들의 이야기를 엿들을 수 있을 리가 없는데도.


"그···뭐라고 해야 하지. 평범한 재료로 만든 게 아닌 것 같아. 못 느꼈어?"

"잘 모르겠어. 그렇게 가까이서 보거나 만져 본 것도 아니고."

"응. 내가 너무 쓸데없는 곳에 신경 쓰는 걸까."


두 사람이 거기까지 대화했을 때 대문 밖에서 초인종이 울렸다. 바넬드 하이넨이 벌써 도착한 모양이었다.

"여기 있어, 다녀올게."


파리스는 방에 산드린을 내버려 둔 채 계단을 내려갔다. 그리고 현관으로 향하는 좁은 복도에서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손님들을 위해 현관 앞에 비치한 긴 의자 위에서 두 사람이 잠들어 있었다. 분명 통신하러 올라갔을 때만 해도 두 사람 다 깨어 있었는데.


이엘 알체이라와 루토 시칼트라는 나란히 앉아 어깨를 기댄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잠들어 있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이지?


그가 조금 더 머리를 굴려 보기도 전에 재차 초인종이 울렸다. 파리스는 그 초인종 소리가 두 사람을 깨울까 조마조마했다. 그리고 자신이 그런 걱정을 하는 사실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손님을 맞으러 대문 밖으로 나갔다. 어느새 해가 지는 시간이었다.


"바넬드 씨, 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이렇게 갑자기 불렀는데······."

"파리스가 갑자기 불렀다면 이유가 있겠지. 연구실이 여기서 먼 것도 아니고."

"인형이 꽤 무겁고, 마법으로 옮기기에는 불안정한 상태라서 부득이하게 오시라고 했습니다. 안으로 들어오시죠."


하지만 현관 앞에는 그 괴상한 조합의 한 쌍이 있는데. 파리스는 그들의 존재를 이 인형사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아, 현관 앞에 다른 손님들이 계시는데, 피곤하신지 잠이 드신 모양입니다. 죄송하지만 깨지 않게 조용히 들어갈 수 있을까요?"

"음? 그래, 그렇게 하지."


다행히도 바넬드 하이넨은 소문내는 걸 좋아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마법사 중에서는 소문과 이야깃거리에 환장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그런 이들에게 잘못 걸렸다가는 가루가 되도록 부서지는 건 일도 아니지.


파리스 역시 제 아버지를 닮은 외모 탓에, 종종 그런 사건에 말려들 때가 있었다.


"인형은 이쪽입니다. 제가 응접실로 옮겨 가겠습니다. 엘펜슈타인을 좀 가져다드릴 테니, 먼저 가 계시죠."


엘펜슈타인이라는 말에 바넬드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그는 현관 앞에 잠들어 있는 한 쌍을 유심히 쳐다보지 않기 위해 매우 신경 쓰고 있었다. 파리스는 바넬드를 응접실로 먼저 들여보내고, 그에게 엘펜슈타인 맥주 한 잔을 따라다 준 뒤 현관으로 다시 돌아왔다.


"이걸 어떻게 옮긴담."


분명 여기까지 올 때는 이 남자가 업고 왔었지. 하지만 내려놓을 때 났던 소리로 미루어 보아 이건 굉장히 무거운 물건이었다. 마법으로 옮기기에는, 아까 말한 것처럼 지금 꽤 불안정한 상태일 게 뻔해 불안했다.


파리스는 인형의 몸체를 끌어 올리려 시도했다. 어찌어찌 일으킬 수는 있다고 쳐도, 그의 힘으로 들어서 옮기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무게였다.

결국 이 남자를 깨울 수밖에 없는 건가.


이엘 알체이라.

파리스는 그를 실제로 만났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그는 원래도 유명하다고 할 법한 사람이었지만, 파리스의 집안사람들에게 그의 위상은 단순히 유명인이라고 할 범위를 넘어서 있었다.


이 세상에 실비나 카잔치카를 감당할 수 있는 남자가 있을 줄이야. 이엘 알체이라를 실제로 만나 본 소감은, 과연 그가 그럴 만한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이엘 씨."

파리스가 아주 낮고 조용한 목소리로 이엘을 불렀다. 그는 이엘의 옆에 잠들어 있는 루토 시칼트라의 존재를 필사적으로 무시했다.


그녀가 왜 여기서 이 남자와 함께 잠들어 있는 건지 궁금했지만 동시에 알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이 광경을 목격했다는 사실을 그녀에게 알리고 싶지도 않았다.


"이엘 씨. 일어나 보세요."

목소리를 살짝 키우자 이엘 알체이라는 바로 눈을 떴다. 제 어깨에 기대 잠들어 있는 루토의 모습을 본 그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인형을 손봐 주실 분이 오셨는데요. 제가 저걸 도저히 옮길 수가 없어서요."

"아, 네. 제가 옮겨야죠."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제 옆에 잠들어 있는 여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녀를 깨워도 될지 고민하는 표정이었다. 비슷한 종류의 선글라스를 쓴 그 두 사람은 마치 동지처럼 보였다.


"누나는 제가 알아서 하죠. 잠깐 안 깨도록."

"그럼 좀 부탁드립니다."


이엘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파리스가 살짝 손을 써서, 루토는 여전히 의자에 앉은 채 잠든 채였다. 이엘은 바닥에 놓여 있던 인형을 들어 제 어깨에 둘러멨다. 파리스는 혀를 내둘렀다. 저걸 어떻게 들어 옮기는지 원.


응접실에는 맥주 한 잔을 만족스럽게 비운 바넬드가 앉아 있었다. 그는 두 사람이 들어서자 일어나서 인사를 했다.


"바넬드 하이넨입니다. 아레인스터의 인형사죠."

"이엘 알체이라라고 합니다. 이 인형의 이름은 레몬이고요."


인형의 이름까지 굳이 소개할 필요가 있나? 파리스는 속으로 그런 딴지를 걸었다. 이엘은 인형을 조심스레 응접실 바닥에 내려놓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리 크게 손상된 것 같지 않았다. 옷이 조금 더러워지긴 했지만.


"내가 알아서 할게, 파리스. 바쁘면 가서 일 봐. 알체이라 씨라고 하셨죠? 제가 혼자 볼 수 있으니 다른 일이 있으시면 이따 다시 오셔도 됩니다."


"괜찮습니다. 저는 지금 달리 할 일이 없으니 여기 앉아 있어도 될까요?"

"얼마든지요."


파리스의 시선이 응접실 벽에 걸린 시계로 향했다. 오후 일곱 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학장은 이 시간쯤 되면 슬슬 저녁 식사를 가져다 달라고 하고는 했다.


"저는 잠시만 자리를 좀 비우겠습니다. 슬슬 학장님께서 저녁 식사하실 시간이라서."

"그래, 그래. 가 봐. 마무리되면 말할게."


그는 두 사람과 인형 하나를 응접실에 내버려 둔 채 계단을 올랐다. 위층의 응접실에는 또 산드린이 엎드려 잠들어 있었다. 애들도 아니고, 다들 이 시간부터 자는 거냐고. 학장의 방으로 찾아가 문을 두드렸다.


"응, 빵이랑 주스로 좀 부탁해, 파리스."


요즘 학장의 식사는 단조로워지는 추세였다. 원래 학장은 상당한 미식가였는데, 심경에 변화가 있을 때면 식사량이나 메뉴에 변화가 생기고는 했다. 아마 요즘은 고등 마법 무기 연구소 일로 심경이 복잡할 터였다.


그 사건 자체가 비통한 일이기도 할뿐더러, 연구소에는 학장이 가르쳤던 유능한 학생들이 꽤 많았으니까.


파리스는 식사를 준비해서 학장의 방에 대령하고, 산드린을 찾아가 흔들어 깨웠다.


"이런 자세로 자면 허리 나간다."

"음···맞다! 그 인형은?"

"지금 바넬드 씨가 보고 계셔. 궁금하면 내려가 보든가."


파리스 역시, 인형을 고치는 모습에 흥미가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할 일이 너무나도 많았다. 원래는 학장이 식사하는 동안 마지막으로 우편물을 정리하고, 접견 요청이나 연락이 들어온 게 없는지 확인하면 파리스의 일과도 끝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예상치 못한 손님이 오지 않았던가.


"그러고 보니까, 이엘 씨 말이야. 어떻게 만난 거야? 어떻게 생겼는지 알고 있었어?"

"응? 아니. 정문 앞에 웬 잘생긴 남자가 인형을 데리고 서 있길래."


"잘생겼나."

"파리스는 미남에 대한 기준이 너무 엄격한 것 같아. 본인을 기준으로 삼지 말라고."


그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래, 잘생겼다 치자. 잘생긴 남자에게 우연히 말을 걸었는데 그게 그 이엘 알체이라였단 말이지. 그것참 우연히 일어날 법 한 일이었다. 마치 이엘 알체이라라는 남자가 여기로 오도록 누군가가 정해 놓은 것 같았다.


"잘생겼으면 뭐 해? 아무 소용 없잖아."

"잘생긴 게 소용없다는 게 무슨 뜻이야?"


"아니, 산이 뭐 어떻게 해볼 거냐고. 아니잖아? 실비나랑 사귀었던 사람을 어떻게 만나, 찝찝하게."


산드린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녀는 원래 파리스의 이런 농담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녀가 힘이 잔뜩 들어간 자세로 테이블을 짚고 일어섰다.


"안 될 건 또 뭐야? 어차피 헤어졌잖아."

"어차피 그럴 마음도 없으면서. 마음대로 하든가. 그러고 보니까, 밥은?"

"안 먹었어. 언니랑 이엘 씨도 식사 안 하셨을 거야."


식탁 차려줘야 될 사람이 늘었군. 파리스는 한숨을 쉬었다. 하긴, 한가할 때가 있으면 이렇게 바쁠 때도 있기 마련이지. 하지만 오늘은 아직 우편물조차 제대로 정리하지 못했다. 일단 저 인형이 고쳐지는 동안 뭐 하나라도 더 끝내 둬야 했다.


이 집에는 우편함이 두 개 있었다. 대문 밖에 있는 종이 우편함, 2층 발코니 창문 밖에 걸려 있는 마법 우편함. 파리스는 그 우편함 두 개를 뒤져 우편물을 싹 모아 왔다.


"도대체 무슨 날이냐고."

하필이면 우편물도 평소보다 많은 날이었다. 그는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흰 봉투로 손을 뻗었다. 지나칠 정도로 반듯해서 기묘한 느낌을 주는 필체로 발신자와 수신자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아레인스터의 아실카 시칼트라 학장님께. 서비 아이니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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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의외의 만남 22.09.09 35 4 12쪽
105 허물어지는 경계선 22.09.08 31 4 12쪽
104 감기지 않는 눈, 영혼의 조각 +1 22.09.07 31 4 12쪽
103 불명확한 존재들 +1 22.09.06 34 4 12쪽
102 아무것도 아닌 22.09.05 29 4 13쪽
101 후유증 +1 22.09.01 33 4 12쪽
100 진실 +2 22.08.31 35 4 13쪽
99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 +1 22.08.30 31 4 13쪽
98 적격 심사 +1 22.08.29 39 4 13쪽
97 안부 인사 22.08.28 25 4 13쪽
96 뜻밖의 조력자 22.08.27 29 4 13쪽
95 낯선 도시에서 22.08.26 26 5 12쪽
94 별의 뒷면 22.08.25 26 3 13쪽
93 허용되지 않은 것 22.08.24 28 4 13쪽
92 균열 +1 22.08.23 33 4 13쪽
91 혼돈의 꽃 +1 22.08.22 30 4 12쪽
90 신에게 가까워지는 이들 +1 22.08.17 25 4 13쪽
89 망가진 자물쇠 22.08.16 28 4 13쪽
88 시체와 꽃 +1 22.08.15 28 4 13쪽
87 가장 깊은 곳에서 발견한 것 22.08.14 29 4 13쪽
86 밤의 숲, 제단의 아래로 22.08.13 30 4 12쪽
» 천재 비서의 하루 +1 22.08.12 32 4 13쪽
84 바꿀 수 없어 받아들이는 것 22.08.11 29 5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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