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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권 님의 서재입니다.

제국 사냥꾼은 총을 두 번 쏜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심권
그림/삽화
메이산
작품등록일 :
2022.06.02 01:20
최근연재일 :
2022.12.03 23:30
연재수 :
142 회
조회수 :
9,289
추천수 :
927
글자수 :
790,487

작성
22.08.15 18:30
조회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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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글자
13쪽

시체와 꽃

DUMMY

시신은 수염을 기른 중년 남자였다. 죽은 지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의 사인(死因)은 시신을 척 보기만 해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소검 한 자루가 배를 관통하고 있었으니까.


"피를 많이 흘렸겠군."

"상처가 깊기는 하지만 급소를 피했으니 살아날 수 있었을 것 같아요. 제대로 된 처치를 받지 못해서 과다출혈로 목숨을 잃은 걸로 보입니다."


일행의 의사인 코나가 시신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죽은 남자는 평상복 차림이었다. 칼라가 없는 푸른빛 셔츠에 면바지를 입고 있었다. 깊은 숲속으로 들어오기에 그리 적절한 복장은 아니었다.


"죽고 나서 여기로 옮겨진 거겠죠, 시신이 조각상 위에 얹혀 있었으니까."


그녀는 얼굴빛이 그리 좋지 않았지만, 시신으로부터 떨어지려 하지는 않았다. 시신의 얼굴에 대고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더니 고개를 두어 번 저었다.


"약 냄새가 나네요. 어쩌면 맨정신이 아니었을지도 모르겠어요. 그러고 보니, 요즘 약물을 이용한 범죄가 성행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요."


"무슨 약물인지도 알 수 있는 거야?"

"이게 어떤 종류인지까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대강 추측할 수는 있을지도요."


시신의 품 안에서 그의 신원을 특정해 낼 만한 물건은 일절 나오지 않았다. 남자가 가진 거라고는 배에 꽂힌 검 한 자루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들 그 검에 대해 언급하기를 꺼리듯 시선을 피했다.


"이거, 평범한 검이 아니지?"


그럴 때 먼저 말을 꺼내는 게 유리오가 해야 할 역할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이 일행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유리오는 성큼성큼 다가가 검 손잡이로 손을 뻗었다. 검 손잡이에는 무늬 없는 손수건이 묶여 있었는데, 때가 타 지저분한 상태였다.


"그래, 그건 리오나의 검이야. 우리가 이미 한 번 놓친 물건이지."

"뽑아도 되는 건가?"


그리 길이가 긴 검이 아니었다. 유리오의 한쪽 팔 길이 정도 될까. 성물이라기에는 그 생김새 역시 평범했다. 누군가 이 검을 허리춤에 차고 길을 걷는다고 해서 사람들이 그를 돌아볼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럼 내가 뽑는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두려워하고 있었다. 정체 모를 시신에서 그 검을 빼앗는 걸. 그게 그들이 찾던 물건이었음에도, 그들은 쉽사리 행동하지 못했다. 유리오는 그들의 마음을 이해했다. 원래 신을 믿는 이들은 다른 것 역시 믿기 마련이었다.


그녀가 한 번에 검을 뽑았다. 누군가는 그 모습을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자, 이제 어떻게 할까."


유리오가 제 손에 들린 검을 훑어보았다. 이게 성물이라면, 성검이라고 말할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아무리 봐도 성검처럼 생기지는 않았군. 시골의 한 수습 대장장이가 만들었다고 해도 믿겠어.


하지만 이건 분명히 성물이었다. 순례자들은 검에 손을 대지 않고도 그 사실을 알았다. 유리오의 손에 그 검이 들어간 순간부터, 그 검에서 흐르는 기가 이 공간을 압도하고 있었으니까.


"이게 왜 여기 있었던 걸까. 우리는 첫 번째 신전에서 이 검을 놓쳤지. 그때 이 검을 손에 넣었던 건 아마 진짜 도굴단이었을 거야."


서비가 그나마 차분한 태도로 상황을 정리해 보려 애썼다. 그러나 그녀 역시 곧 입을 다문 채 후드를 눌러 썼다. 성물을 찾았다는 건 분명 좋은 일이었다. 성물과 함께 의문의 시신까지 찾아 버렸다는 게 문제였지만.


"일단 여기를 나가지. 언제까지 여기 있을 이유는 없잖아. 저 시신에 관해서는, 나가서 신고하고."


다시,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그들이 목표로 하던 걸 얻은 건 사실이니까. 여기에 시신이 있다는 건 살인범이 여기를 다녀갔을 확률이 매우 높다는 뜻이었다. 그런 공간에 오래 있고 싶지 않다는 마음도 컸다.


들어올 때처럼 서비가 앞장서고, 유리오와 젠이 맨 뒤에 섰다. 리오나의 검은 여전히 유리오의 손안에 있었다. 아무도 그걸 굳이 유리오에게서 거둬 가려 하지 않았으니까.


"이상하지, 난 신을 믿는 사람이 아니었는데 말이야. 이 검이 평범한 물건이 아니라는 건 그냥 보기만 해도 알 수 있었어."

"그야 성물이니까."


젠은 리오나의 검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아름답게 생긴 것도 아니고, 말을 하거나 노래를 부르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분명히 이 검에는 아주 특별한 힘이 있었지.


"리오나 질프렌이라는 이름, 한 번도 들어본 적 없어?"

"리오나···질프렌?"


젠의 물음에 유리오는 고개를 흔들었다. 이 검의 원래 주인이었을 터였다. 유리오는 생각에 잠겨 입을 다물어 버렸고, 젠은 굳이 더 길게 설명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보다, 아무리 소검이라 하더라도 검 한 자루를 덜렁덜렁 들고 다니는 모습이 훨씬 거슬렸다. 그는 제 허리에서 벨트를 풀어내 유리오에게 내밀었다.


"갑자기 바지라도 벗으려는 줄 알고 깜짝 놀랐네."

"이상한 소리 좀 하지 마."


유리오는 벨트를 차고 검을 거기 단단히 고정했다. 검 손잡이에 묶여 있던 손수건을 풀어 얼굴로 가져갔다. 젠이 기겁하며 팔을 뻗었다.


"야, 그 더러운 걸 어디다 갖다 대는······."

"꽃향기가 나."

"뭐?"


그녀가 자리에 멈춰 서서 눈을 감았다. 다시 모든 감각을 후각에 집중해, 그 손수건에서 나는 냄새를 맡았다. 그건 분명히 꽃향기였다. 땀 냄새도, 피 냄새도, 다른 그 어떤 역한 냄새도 아닌 꽃향기.


"정말인데."


젠이 근처로 슬쩍 코를 가져다 댔다. 그의 표정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수상한데. 시신의 배에 꽂혀 있던 검, 그 손잡이에 묶여 있던 손수건에서 이런 냄새가 나다니.


차라리 피나 땀, 혹은 시신에서 날 법한 냄새가 났다면 그냥 손수건을 버리고 잊어버렸을 터였다.


"무슨 꽃인지 알겠어, 젠?"

"이건 아카시아야."


그가 어렸을 때 자주 맡던 향기였다. 아카시아 나무가 잔뜩 서 있는 아래를 지나기만 해도 그 근처는 이런 향기로 진동했다. 이건 다 같이 이야기해 볼 만한 가치가 있겠어.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손수건을 유리오에게 돌려주었다. 유리오는 손수건을 대충 구겨 주머니에 넣었다.


"여기서 나가면, 이제 아레인스터로 가는 거야?"

"그렇겠지. 아실카 시칼트라가 히산나의 목걸이를 가지고 있다고 했으니까."


"그걸 가지고 있다고 순순히 줄까? 내가 집을 나오면서 얻은 교훈이 몇 가지 있는데. 그중 하나는, 공짜로 상대방에게 무언가를 베푸는 사람은 정말 거의 없다는 거야. 착한 사람이든 나쁜 사람이든."

"특히 마법사들이라면 더 그럴걸."


그에게는 마법사들은 이해득실을 칼같이 따진다는 편견이 있었다. 실제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마주친 마법사들에 대해 떠올려 보면, 그저 편견만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유리오의 신경은 다른 데 쏠려 있었다. 아레인스터라는,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새로운 세계에.


"마법 학교라. 재미있겠네."

"학교가 재밌을 거라 생각하는 건, 학교를 많이 안 다녀 봐서 그런 거지."

"혹시 아냐? 내가 학업에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을지."


그녀는 상상만 해도 즐겁다는 듯 콧노래를 부르며 걸었다. 젠은 영 불만스러운 표정이었다. 그는 원래 진짜 마법사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별 볼 일 없는 몇 가지 마법을 배우려고 그들에게 얼마나 기었던가. 특히, 학교의 교수들이나 학장이라면 훨씬 더 끔찍한 인간들일 게 틀림없었다.


"지금이라도 학교로 돌아가면 되잖아. 누가 말려?"


유리오는 그와 근본부터 다른 인간이었다. 마치 갈 곳 없는 양 떠돌고 있지만. 멀쩡한 부모도 있었고, 돌아갈 집도 있고, 듣자 하니 보호자도 있었던 모양인데. 지금이라도 다시 공부를 하고 입학시험을 치러 학교에 들어가면 학생이 될 수도 있을 터였다.


젠에게는 그런 선택지 같은 건 없었다.


"학교에 가고 싶은 건 아니야. 원래 사람은 자기가 고르지 않은 쪽이 더 멋진 쪽이었을 거라 생각한다고. 젠은 그런 거 없어?"

"난 무언가를 고른 적이 거의 없어."


그가 처음에 유리오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살기 편한 집을 뛰쳐나와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다니. 만약 그에게 부모와 집과 보호자가 있었더라면 절대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을 텐데.


"아실카 시칼트라. 들어본 적 있어."


불쑥 유리오가 그런 말을 하자 모두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조금 당황하며 시선을 피했다. 이 정도로 주목받을 만한 말인가. 사실 그렇게 중요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도 아닌데.


"어디서?"

"뉴스에서······라고 하면 다들 나한테 엄청 뭐라고 하겠지?"

"어디에서 들었는데?"


유리오 알첸브라임은 원래 기억력이 좋은 편이었다. 스쳐 지나갔던 사소한 이야기, 잠깐 본 풍경이나 인물 등을 잘 잊지 않고는 했다. 아실카 시칼트라. 그 이름 역시 그녀의 머릿속에 분명히 남아 있었다.


정확히는 그 이름이 아니라 성 쪽이.


"그러니까, 우리 엄마한테 제자가 하나 있었거든. 나한테는 대충 삼촌 같기도 하고 오빠 같기도 한 사람이었는데. 우리 집에 같이 살면서 가족같이 지냈어."


아무도 그 뜬금없는 서론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이 순례자들의 좋은 점 중 하나였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지나칠 정도로 잘 들어 준다는 것.


"그 사람한테 여자친구가 있었는데, 그 여자친구가 성격이 좀···매사 불평불만이 많고 항상 누군가를 욕하고 있었단 말이야."

"그래서?"


"그 여자가 욕하던 대상이 '시칼트라'였어. 그렇게 불렀거든."

"야, 너 기억력 좋다."

"뭐, 좀 그런 편이지."


그 여자와 아레인스터의 학장은 무슨 관계였을까. 유리오는 거기까지 알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 여자의 성격으로 보건대, 그 여자에게 그렇게 욕을 먹었다는 건 인생을 잘 살았다는 증거가 아닐까? 대충 그렇게 생각하고 말뿐이었다.


"그러고 보니까, 그 여자랑 어떻게 됐는지는 난 모르네. 혹시라도 결혼했을지도 모르겠는걸."

"매일 남을 욕하는 사람과 결혼하면 피곤할 텐데."


일행은 그런 잡담을 나누며 다시 출발했다. 통로의 끝, 신전으로 빠져나온 건 두 시간쯤 지난 뒤의 일이었다. 밤의 숲은 언제나 어두컴컴했기 때문에, 시계를 보지 않으면 시간을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건 역으로, 여기에서는 시간의 구애를 크게 받지 않고 움직일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적어도 여기서는, 작은 불을 들고 조심조심 움직여야 하는 건 낮에도 마찬가지였으니까.


"계획을 변경해야겠어. 가능한 한 빨리 밤의 숲을 빠져나가자."


서비가 그렇게 말했을 때 모두가 강력하게 동의했다. 원래는 이 숲에서 하나의 신전을 더 방문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여기에서 성물을 찾아 버린 이상, 거기에도 성물이 있을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았다.


"독립시행 아냐? 이번 신전에서 성물을 찾은 건 다음 신전이랑은 상관없잖아."


"설명하자면 긴데, 기회가 생기면 알려 줄게. 하여튼, 이 근처에서 누군가가 죽었어. 무슨 사건이 벌어졌던 건지, 그 남자를 죽인 사람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잖아. 게다가 유리오가 지금 리오나의 검을 가지고 있고. 여기를 빠르게 떠나는 게 좋겠어."


"안타레스는 여기서 얼마나 걸려?"

젠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지도를 펼쳐 유리오에게 보여주었다.


"안타레스는 제국 남부에 있어. 여기서 차로 쉬지 않고 이동한다고 가정하면, 하루 안에도 갈 수 있는 거리지."

"차를 탈 거야?"


유리오는 의외라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지금까지 이 일행이 차로 이동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걷고, 야영하고, 작은 숙소에 묵고. 그게 전부였는데. 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 할 것 같아. 우리는 지금 안타레스를 기준으로 북서쪽에 있어. 여기서 동쪽으로 조금 더 가면 차를 빌릴 만한 도시가 있고. 거기서 차를 빌려서 안타레스까지 바로 갈 거야."


"왠지 조금 급해 보이네, 그럴 만한 이유라도 있어?"

빨리 가서 나쁠 건 없지만, 지나치게 서두른다는 느낌을 지울 수는 없었다. 게다가 아까부터 젠이 미묘하게 생각에 잠긴 얼굴이란 말이지.


"알 것 같아서."

"뭘 알 것 같다는 거야?"


모두의 시선이 젠에게 쏠렸다.

"아까 그 남자를 죽인 게 뭐 하는 녀석들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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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 수업 시간 +1 22.09.12 38 4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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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의외의 만남 22.09.09 36 4 12쪽
105 허물어지는 경계선 22.09.08 32 4 12쪽
104 감기지 않는 눈, 영혼의 조각 +1 22.09.07 31 4 12쪽
103 불명확한 존재들 +1 22.09.06 35 4 12쪽
102 아무것도 아닌 22.09.05 29 4 13쪽
101 후유증 +1 22.09.01 33 4 12쪽
100 진실 +2 22.08.31 35 4 13쪽
99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 +1 22.08.30 31 4 13쪽
98 적격 심사 +1 22.08.29 40 4 13쪽
97 안부 인사 22.08.28 26 4 13쪽
96 뜻밖의 조력자 22.08.27 31 4 13쪽
95 낯선 도시에서 22.08.26 27 5 12쪽
94 별의 뒷면 22.08.25 28 3 13쪽
93 허용되지 않은 것 22.08.24 29 4 13쪽
92 균열 +1 22.08.23 33 4 13쪽
91 혼돈의 꽃 +1 22.08.22 31 4 12쪽
90 신에게 가까워지는 이들 +1 22.08.17 25 4 13쪽
89 망가진 자물쇠 22.08.16 28 4 13쪽
» 시체와 꽃 +1 22.08.15 29 4 13쪽
87 가장 깊은 곳에서 발견한 것 22.08.14 30 4 13쪽
86 밤의 숲, 제단의 아래로 22.08.13 30 4 12쪽
85 천재 비서의 하루 +1 22.08.12 32 4 13쪽
84 바꿀 수 없어 받아들이는 것 22.08.11 30 5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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