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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권 님의 서재입니다.

제국 사냥꾼은 총을 두 번 쏜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심권
그림/삽화
메이산
작품등록일 :
2022.06.02 01:20
최근연재일 :
2022.12.03 23:30
연재수 :
142 회
조회수 :
9,231
추천수 :
927
글자수 :
790,487

작성
22.08.16 18:30
조회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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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글자
13쪽

망가진 자물쇠

DUMMY

아레인스터의 인형사에게 레몬을 맡기고 나서 얼마나 지났을까. 나는 가만히 앉아 그가 작업하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는 레몬을 한 번 훑어보고는, 꽤 오래 걸릴 것 같다는 말을 남겼다.


그 후로 말 한마디 없이 일에 열중했다. 내가 이렇게 쳐다보고 있는 게 귀찮거나 부담스럽지는 않을까 걱정했는데, 그렇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나를 신경조차 쓰고 있지 않은 것 같으니.


하지만 생각보다 오래 걸리는 것 같아서 슬슬 불안해지는데.


뭔가 마실 거라도 가져다주면서 말을 붙여 볼까, 그런 생각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다가, 나와 같은 생각을 했을 파리스가 쟁반을 들고 들어오는 걸 마주쳤다.


"안 그래도 마실 걸 좀 부탁하려고 했는데, 타이밍이 좋네요."

"그 타이밍을 잘 알아야 하는 게 비서니까요."


쟁반 위에 올려진 잔은 특이하게도 맥주잔이었다. 음료 역시, 거의 흰색에 가까워 보일 정도로 옅은 맥주였다.


"엘펜슈타인이라는 맥주입니다. 중부 지방의 특산물이죠. 이엘 씨는 좋아하시는지?"

"한 번도 마셔 본 적이 없네요. 이름도 처음 듣습니다."

"아, 실비나가 굉장히 좋아하는 맥주이기도 한데요."


아무래도 그는 한 번씩 이렇게 나를 놀려먹을 생각인 모양이었다. 내 발로 여기 들어왔으니 그 정도는 감당해야지, 어쩌겠는가.


파리스가 테이블에 쟁반을 내려놓았다. 고개를 처박은 채 작업에 집중하고 있던 인형사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 역시 이 맥주를 좋아하는 듯했다. 인기가 많은 맥주군.


"오래 걸리실 것 같으세요? 조금 쉬었다 하시죠."


인형사는 사양하지 않고 몸을 일으켰다. 목을 돌리고 팔다리를 몇 번 늘리더니, 테이블에 앉았다.


"이 한 잔을 위해서 여기까지 오는 거지. 그럴 가치가 있어."

"이엘 씨도 한잔하시죠."


나는 술을 마시지 않는다고 거절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괜찮지 않을까? 차를 가져온 것도 아니고, 독한 술도 아니고 맥주 한 잔인데. 그래서 그 인형사의 맞은편에 앉았다. 나와 파리스, 그리고 그 인형사는 같은 공간에서 말없이 각자의 잔을 들었다.


"잘 마시겠습니다."


과연,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맥주였다. 목 넘김이 부드럽고 첫맛부터 상쾌하군. 역시 더울 때는 맥주만 한 게 없지. 나는 금방 한 잔을 다 비웠고, 내 몫을 다 마시고 보니 다른 두 사람의 잔도 비어 있었다.


"좋은 맥주네요. 저도 곧 좋아질 것 같은데요."

"입에 맞으신다니 다행이네요. 취향이 아니셨다면 그냥 바넬드 씨에게 드리는 게 나을 뻔했거든요."

"아, 그러고 보니까 레몬은 어떻게 된 겁니까? 좀 알려주실 수 있나요?"


인형사는 맥주를 마셔서 기분이 좋아졌는지, 활력이 넘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레몬은 카펫 위에 반듯하게 누워 있었다.


눈을 뜨고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더 기괴해 보였다. 저러고 있으니, 저게 정말 나와는 다른 세계에 속한 존재라는 게 거듭 실감이 났다.


"듣자 하니, 산드린 씨가 인형의 회로 부분을 만지려고 했을 때 갑자기 인형이 이상 반응을 보였다고 했었죠. 그건 인형에 탑재된 보안 장치가 반응했기 때문입니다. 그 정도는 예상하기 어렵지 않으시죠?"


그가 누워 있는 레몬의 손목 쪽을 가리켰다. 저 안쪽에 회로가 있다는 건, 맨 처음에 레몬을 빌릴 때 자나가 보여줬기 때문에 알고 있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만족스러운 듯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까, 정말 손만 댔는데 인형이 갑자기 이상해졌다는 건 거짓말은 아닐 겁니다. 이 인형은 자나가 만든 거죠?"

"네. 새서림에 있는 인형의 집에서 빌린 겁니다."


마법사들 사이에서는 유명인이군. 그는 조금 애틋한 눈으로 레몬을 바라보았다.


"역시. 아레인 밖에 이 정도의 실력을 갖춘 인형사는 자나밖에 없겠죠. 그립네요, 자나와 함께 연구하자고 했었는데. 결국 거절하고 학교를 떠나더군요."

"고칠 수 있는 고장입니까?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이게 제 물건이 아니라서요."


남자의 표정이 살짝 흐려졌다. 왠지 자신 없어 보이는 것 같은데, 기분 탓인가?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보안 장치에 관해서는 자나가 저보다 훨씬 정통하거든요. 이 인형이 고장 났다는 걸 자나가 알면 안 되는 건가요?"

"알면 안 되는 건 아니지만······."


사실 솔직하게 말하는 게 맞는 건지도 모른다. 일단 한 번 이런 일이 생겼으면 후유증 같은 게 있을지도 모르고, 어쨌든 한 번도 고장 나지 않았던 것과는 다를 테니까. 하지만 그래도 일단 레몬이 움직이고 말하는 상태로 돌아왔으면 좋겠는데.


허전하단 말이지.


"간단한 비유를 들자면, 잠긴 문이 있죠. 누군가가 그 문을 열려고 했는데, 문에 달린 자물쇠가 그 사람을 도둑으로 인식한 겁니다. 그래서 문을 여는 기능을 아예 고장 내 버린 거죠. 말하자면 대충 그런 상태인데요."


"왜 갑자기 그런 일이 생겼을까요? 산드린 씨가 인형에 손을 댄 게 처음은 아니었을 텐데요."


내가 학장과 함께 영혼석 세 개를 감정하는 동안 레몬은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분명히 파리스와 산드린이 레몬을 건드렸었는데.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 인형의 보안 체계는 그렇게 굴러갑니다. 단계가 있죠. 주변이 안전하다고 판단하는 단계, 그리고 경계해야 할 필요성이 있는 단계, 마지막으로는 위험하다고 느끼는 단계입니다. 각각 1, 2, 3단계라고 가정하면요. 지금이 어떤 단계냐에 따라 같은 자극에도 다르게 반응하는 겁니다."


"갑자기 그 단계가 변화했다는 겁니까?"

"예, 뭐, 그럴 가능성이 높지요. 자나에게 인형을 빌리면서 특별한 주의 사항에 대해서는 듣지 못하셨나요?"


그런 말은 없었다. 그런 이야기를 했다면 나는 레몬을 가져오자는 의견에 극구 반대했을 테니까. 인간도 아닌 걸 모시면서 다닐 자신이 있을 리가.


"그런 말은 특별히 없었습니다. 왜 갑자기 경계를 강화했는지 잘 모르겠네요."

"어쨌든 그게 지금 당장 중요한 건 아니니까요. 문을 여는 기능이 고장 났으니, 그걸 먼저 고친 다음 문을 열어야 합니다. 둘 다 그렇게 쉬운 작업은 아닙니다."


"그렇군요. 너무 무리는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정 방법이 없으면 제가 책임지고 인형의 집에 연락하죠."

"무리하는 건 또 아닌데. 하여튼 재미있는 작업이긴 하니까요. 모처럼 공부도 좀 되고. 하여튼 저는 조금 더 뜯어보겠습니다. 자리 비우셔도 되니 부담 갖지 마시고요."


그는 맥주잔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다시 바닥으로 내려갔다. 바닥에는 공구 상자처럼 보이는 게 펼쳐져 있었다. 물건을 고치는 모습은 평범한 인간이나 마법사나 똑같은 모양이지.


"그러면 잠시 자리를 비워도 될까요? 처리해야 할 일이 좀 있어서요."

"얼마든지요."


쟁반을 들고 방을 나서자 문 앞에 파리스가 팔짱을 낀 채로 서 있었다. 그는 아주 자연스럽게 내게서 쟁반을 건네받았다.


"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아직은 영 진척이 더딘 것 같긴 하지만요."

"산이 인형을 만졌을 때 이엘 씨는 그 옆에 없었던 모양이죠?"

"네, 시칼트라 씨와 잠시 할 이야기가 있어서······."


그러고 보니, 나는 잠든 루토 시칼트라를 복도에 놔두고 왔다. 어쩌다 거기서 나란히 눈을 붙이게 되었냐고 하면 설명하기 좀 이상하지만, 어쨌든 그전까지는 그녀와 같이 잠들어 있었다.


나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이상할 정도로 잘 잤다. 무슨 꿈을 꾼 것 같은데 기억은 이미 흐려진 지 오래였다. 파리스는 나와 그녀가 함께 잠들어 있는 모습을 봤을 터였다. 그렇지만 그는 그 일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까, 원래 내일 제게 부탁할 일이 있다고 하셨었죠."

"아, 네. 사실 그렇게 중요한 일은 아니죠. 오히려 이엘 씨가 맞닥뜨린 일들이 훨씬 중요해 보이긴 하네요."


"제가 맞닥뜨린 일들이라. 그래도 여기 와서 많은 도움을 받았죠."


영혼석을 감정하고, 고등 마법 무기 연구소에 있던 보고서의 내용에 관해서도 들었다. 예상치 못했던 황제 직속군의 존재까지 조금 더 자세히 알게 됐지.


하지만 가장 중요한 일은 아직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그래서, 고등 마법 무기 연구소에서 그 많은 사람을 죽인 건 대체 누구란 말인가. 무엇을 위해서 그런 일을 저질렀을까?


"루토 시칼트라 씨는 지금 어디 계시죠?"


치안관리부의 부장은 진범이자 배후가 따로 있다고 추측했다. 그 점에 관해서는 나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진상에 더 가까이 다가가려면 내게는 루토 시칼트라가 필요했다.


그녀가 사건 현장에서 나온 돌들을 낱낱이 파헤쳐 주기를 바랐다. 그 하나의 진짜 영혼석. 어떻게 만들어진 물건인지만 알 수 있다면 범인을 특정하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파리스는 잠시 침묵했지만, 이내 손가락으로 그녀가 있을 방향을 가리켰다.


"지금은 아마 학장님이 부탁하신 일을 하고 있을 겁니다. 오늘은 밤을 새우겠죠. 잠도 좀 잤으니까."


마지막 문장에 뼈가 있다고 느껴지는데, 내 착각인가? 학장이 부탁한 일이라면 그건 내가 맡긴 가짜 영혼석을 분석하는 것일 터였다.


"그렇다면 지금은 방해하지 않는 게 낫겠네요."

"아이니 신을 믿는 종교에 대해, 뭐 좀 아시는 게 있나요?"


파리스가 불쑥 그런 이야기를 꺼낸 탓에 나는 조금 당황했다. 갑자기 너무 뜬금없게 느껴지는 주제였으니까. 인제 보니, 그는 손에 편지 봉투 몇 개를 들고 있었다.


"파리스 씨보다는 많이 알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잘 아는 건 아닙니다."

"뭐라도 좀 알려 주시면 안 됩니까?"


아이니는 사냥의 신으로, 제국 사냥꾼을 수호하는 신이라고 일컬어지기도 했다. 물론 제국 사냥꾼을 둘러싼 다른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아이니를 믿는 종교 역시 지금은 쇠퇴한 지 오래지만.


"뭐가 궁금하신 거죠? 아주 기본적인 정보는 파리스 씨라도 아실 것 같은데요. 참고로 덧붙이자면, 저는 아이니 사제를 딱 한 번 만나 봤습니다. 사냥의 숲에서 계시를 받았을 때요."


"그래요? 제국 사냥꾼들에게 전도한다거나, 무료로 구직을 도와준다거나, 뭐 그런 일을 하지는 않나 보네요."

"그런 일을 하는지 안 하는지는 모르죠. 저에게는 한 번도 접근하지 않았을 뿐이니까."


내가 종교인이라고 해도 나 같은 사람한테는 굳이 접근하지 않을 것이다. 좀 더 사교적이고 협조적인 사람한테 접근하면 했지.


"이런 질문은 조금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겠는데, 그 신을 믿긴 하시는 겁니까?"

"아뇨."


신을 믿느냐는 질문은 크게 두 가지 뜻을 가진다. 먼저 그 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믿느냐는 것. 다음으로 그 신을 따르고 섬기냐는 것.


나로 말하자면 둘 다 아니라고 할 만한, 당당한 불신자다.


"교단에서 손님이 오기로 했거든요. 저한테 벌써 편지를 두 통이나 보냈네요."

"보통 손님이랑 다를 게 있습니까? 기부라도 요청하려고 하는 건가요? 아니면 학교에 종교 수업을 넣어 달라고?"


그는 조금 골치 아프다는 표정이었다. 조금 더 복잡한 문제인 모양이군.

"일반적으로 종교인들이 학교를 방문하겠다면 그런 목적을 가지고 오죠. 그게 아니라서 문제인데요."


"그럼 뭔데요? 학교 안에 커다란 제단이라도 만들어 달라고? 신상을 세워 달라고?"

"이엘 씨, 성물이 뭔지 알아요?"

"저를 도대체 뭐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아무리 나라도 그 정도의 상식은 있는데. 아니, 내가 평균보다 상식이 없는 편인가? 그래도 그렇지는 않겠지?


"그 성물이라는 게, 여기 하나 있거든요. 그걸 줄 수 있냐고 물어보네요."

"결국 기부를 요청하는 거잖아요. 그냥 평범하게 대응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아닌가 보네. 파리스는 제 머리칼을 마구 흩었다. 관리직이라는 건 원래 힘든 거지.


"그 사람들이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

"저는 모르죠."

"자기들이 이 땅에 신을 강림시킬 거고, 그걸 위해 성물이 필요하다고 하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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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 수업 시간 +1 22.09.12 37 4 12쪽
107 죽어 사라질 권리 22.09.11 34 3 13쪽
106 의외의 만남 22.09.09 35 4 12쪽
105 허물어지는 경계선 22.09.08 31 4 12쪽
104 감기지 않는 눈, 영혼의 조각 +1 22.09.07 30 4 12쪽
103 불명확한 존재들 +1 22.09.06 34 4 12쪽
102 아무것도 아닌 22.09.05 28 4 13쪽
101 후유증 +1 22.09.01 32 4 12쪽
100 진실 +2 22.08.31 34 4 13쪽
99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 +1 22.08.30 30 4 13쪽
98 적격 심사 +1 22.08.29 38 4 13쪽
97 안부 인사 22.08.28 25 4 13쪽
96 뜻밖의 조력자 22.08.27 29 4 13쪽
95 낯선 도시에서 22.08.26 26 5 12쪽
94 별의 뒷면 22.08.25 26 3 13쪽
93 허용되지 않은 것 22.08.24 28 4 13쪽
92 균열 +1 22.08.23 32 4 13쪽
91 혼돈의 꽃 +1 22.08.22 29 4 12쪽
90 신에게 가까워지는 이들 +1 22.08.17 24 4 13쪽
» 망가진 자물쇠 22.08.16 28 4 13쪽
88 시체와 꽃 +1 22.08.15 28 4 13쪽
87 가장 깊은 곳에서 발견한 것 22.08.14 29 4 13쪽
86 밤의 숲, 제단의 아래로 22.08.13 29 4 12쪽
85 천재 비서의 하루 +1 22.08.12 31 4 13쪽
84 바꿀 수 없어 받아들이는 것 22.08.11 29 5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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