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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야성

웹소설 > 자유연재 > 판타지, 현대판타지

이원호
작품등록일 :
2018.01.29 15:12
최근연재일 :
2018.01.29 15:18
연재수 :
10 회
조회수 :
3,009
추천수 :
15
글자수 :
35,639

작성
18.01.29 15:16
조회
262
추천
1
글자
8쪽

불야성 5화

DUMMY

“아마 아버지는 나 같은 자식이 더 있는지도 모릅니다. 지금도 열심히 만들고 계실 테니까.”


양선영이 시선을 내렸다. 이름도 모르는 고급 식사에 최고급 포도주를 마시고 있는 중이다. 처음에는 거부반응이 들었다가 그의 자연스런 태도에 조금 마음이 가라앉는 중이었는데 가족사를 듣게 된 것이다. 신준이 가늘게 숨을 뱉었다.


“살벌한 집안이지요. 나는 어머니는 물론 아버지하고도 거의 이야기를 해본 적이 없습니다. 회사에서는 철저하게 고용인의 입장이지요.”


“······.”


“아버지의 눈에 들기 위해서 온갖 궂은 일을 다 했습니다. 인정을 받고 싶었지요. 상속보다도 자식으로 인정을 받고 싶었던 겁니다.”


시선이 마주치자 그가 입술 한쪽만을 올리며 웃었다.


“부질없는 이야기 그만하겠습니다. 어쨌든 난 이 일을 머지않아 그만둘 테니까.”


“그럼 뭐 하시려구요?”


저도 모르게 양선영이 그렇게 묻자 신준이 조그맣게 머리를 저었다.


“인도네시아에 가서 광산을 개발할 생각입니다. 난 광산에 흥미가 있습니다.”


“그럼 회사일은···.”


“아버지가 알아서 하시겠지요. 난 한일상사에 미련이 없습니다.”


양선영의 머리에 문득 골프장 입구에서 보았던 화려한 모습의 여자가 떠올랐다. 벤츠에 탄 신준과 어울리는 여자였다. 잔을 내려놓은 신준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늦었습니다. 내가 댁까지 모셔다 드리지요.”


문득 양선영은 두 시간 가깝게 그와 있는 동안 회사운영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지도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쪽에서 묻지도 않았던 것이다.




* * *




밤 12시 반이었다. 신준이 카페에 들어서자 안쪽 테이블에 앉아 있던 고광도가 벌떡 일어섰다. 테이블 위에는 반쯤 비워진 양주병이 놓여 있었다.


“잘 끝내셨습니까?”


그가 공손하게 물었지만 눈에는 웃음기가 배어져 있다.


“끝내다니? 내가 너처럼 짜장면 곱배기를 20초 안에 먹는 것을 자랑으로 삼는 놈 같나?”


신준의 분위기도 밝았다. 앞자리에 앉은 그는 고광도가 채워준 양주잔을 들었다.


“맛있는 음식일수록 아껴서 먹어야 돼.”


“배 고플 땐 입장이 다르지요.”


“넌 걸신들린 놈이다.”


한 모금에 술을 삼킨 신준이 빙긋 웃었다.


“내가 갓난아이 때 데려온 자식으로 어머니의 얼굴도 모르는 인생이라고 했더니 눈빛이 달라지더군.”


“오늘은 색다른 레퍼토리를 쓰셨군요.”


“나는 인도네시아에서 광산을 개발하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


“갑자기 웬 인도네시아입니까?”


“텔레비전에서 언뜻 보았어.”


“아아···.”


“집에 가서 지도책 좀 봐야 되겠다.”


사석에서 때로는 친구처럼 대하는 사이였지만 고광도는 긴장을 풀지 않았다. 언제 변할지 예측할 수 없는 성격의 신준인 것이다. 고광도가 정색을 했다.


“전무님, 사장님께선 오늘도 대치동으로 가셨습니다.”


“알고 있어.”


다시 한모금에 양주잔을 비운 그가 고광도에게 잔을 내밀었다.


“내가 아버지보다 나은 점이 있다면 여자 관계지.”


시선이 마주치자 그가 흰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아버지는 병신이다.”




* * *




“좋아, C라인은 오후부터 가동시키기로 하지.”


컴퓨터에서 시선을 뗀 이병호가 공장장에게 말했다.


“멕텔사에서는 다음 달에 주문량을 30퍼센트 늘린다고 했어. 전 라인을 정상가동시켜야 돼.”


“다음 달까지는 준비될 수 있습니다.”


자리에서 일어선 공장장이 활기 있는 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이병호가 이지현에게로 머리를 돌렸다.


“나는 이제 공장장 얼굴만 보아도 어떤 문제가 생겼는가를 알아맞춘다. 거의 틀린 적이 없어.”


그가 웃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어제도 공장장이 들어왔을 때 B라인의 27번 배선에 이상이 있다는 걸 내가 알아맞췄다.”


“설마요.”


이지현이 따라 웃었다.


“틀렸어도 공장장이 맞췄다고 했겠지요.”


“내가 공장장만큼 기계와 장치를 알아.”


이병호가 단호한 표정이 되었다.


“20년 동안 같이 있다 보면 서로 통하게 되는 법이다.”


“어머니는 20년이 넘게 같이 사셨는데도 아버지를 알 수 없는 분이라고 하시던데요.”


“이놈아, 경우가 다르다.”


입맛을 다신 이병호가 자리를 고쳐 앉았다.


“그래, 명식이는 아직도 기다린다더냐?”


“며칠 더 기다려 보겠대요.”


“기다려도 헛일이다. 내가 알아보았더니 이번 대기발령자들을 구제할 방법은 없다더라.”


방안의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회사일이 바쁜 와중에도 그는 오명식의 주변을 알아본 것이다. 재경원뿐만 아니라 정부 각 부처의 인원감축 작업이 진행되고 있는 중이다. 이병호가 부드러운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다음주부터 회사에 출근하라고 해라. 자존심도 중요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현실에 순응하고 적응하는 것이 우선이야. 더구나 이 일은 집안일이 아닌가? 망설일 이유가 없다.”


이지현이 오피스텔에 들어섰을 때는 저녁 8시경이었다. 20평형의 오피스텔이었는데 오명식은 셔츠 차림이었다.


“저녁은?”


들고 온 식품 봉지를 건네받은 그에게 건성으로 물은 그녀는 곧장 주방으로 다가갔다. 예상했던 대로 주방은 썰렁했다. 언제 먹고 넣었는지 개수대에는 음식 찌꺼기와 마른 그릇들이 쌓여 있었다.


“내버려둬. 배고프지 않아.”


이지현은 고무장갑을 끼고 그릇을 씻기 시작했다. 집안 분위기로 보면 오늘도 오명식은 하루종일 집안에만 박혀 있었던 모양이었다. 하긴 기구를 축소한 재경원에 가도 앉아 있을 만한 자리도 없다.


“총무부장이 안산공장 공장장으로 영전이 된 바람에 총무부장 자리가 비었어.”


꽤 요란하게 그릇을 씻으면서 이지현이 그보다 더 큰 목소리로 말했다.


“총무부장 자리는 회사업무 전반을 파악할 수 있는 곳이야.”


수도꼭지를 잠그자 소음이 뚝 그쳤다. 머리를 돌린 이지현이 소파에 앉아 있는 오명식을 바라보았다.


“난 다음 달까지만 다니고 회사 그만둘 거야.”


이미 예정되었던 일이지만 기간까지 못박은 건 처음이었다. 오명식이 리모컨으로 텔레비전의 스위치를 켰다가 꼈다.


“알았어, 다음주 월요일부터 출근할게.”


“정말?”


고무장갑을 벗어던진 이지현이 한걸음에 다가와 그의 무릎 위에 앉았다. 그녀는 오명식의 목을 두 팔로 안았다.


“약속한 거지?”


“고마워. 이렇게 신경을 써줘서.”


“그게 무슨, 아버지가 도움이 필요해서 그러시는데.”


그녀의 허리를 안은 오명식이 볼에 입술을 댔다.


“내가 요즘 차츰 자신감이 없어졌어.”


“···.”


“아마 너도 알고 있을 거야. 하지만 이젠 다시 시작하겠어.”


다음날 아침, 사직서를 받은 한국장이 눈을 껌벅이며 오명식을 바라보았다.


“이봐, 이거 왜 이래? 사직서를 쓰다니, 이러면 이제까지 헛고생한 셈이 되잖아?”


한성규는 재정국장으로 이번 개편에서 오히려 승진이 되었다. 그는 진작부터 정치권에 든든한 배경이 있다는 소문이 떠돌았던 사람이다. 한성규가 그를 끌고는 소파에 마주앉았다. 그는 오명식의 대학선배가 된다.


“모두들 눈 딱 감고 석 달쯤 기다릴 작정을 하는데 왜 혼자서 이러는 거야? 어디 갈 데 있어?”


“장인 회사에 들어갈 생각입니다.”


“무슨 회산데?”


“컴퓨터 제조업체로 대양컴퓨터라고···.”


한성규가 머리를 저었다.


“조금만 기다리면 은감원이나 정부 산하 기관에 자리가 생겨. 지금은 기구축소네 뭐네 하면서 정치권이 설치지만 공무원 사회가 하루 이틀에 생긴 것이 아냐. 곧 유야무야될테니 기다려.”


“국장님, 하지만···.”


“장인 회사야 언제든지 들어갈 수 있는 것 아닌가? 행시 패스하고 이제까지 닦아온 경력을 하루아침에 버린단 말이야?”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가 말을 이었다.


“내가 자네 하나는 밀어줄 수 있어. 앞길이 창창한 사람이 이쯤 참지 못해서야 어찌 큰일을 하겠나? 자네는 정부에 필요한 사람이야. 내 말 명심하고 기다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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