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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야성

웹소설 > 자유연재 > 판타지, 현대판타지

이원호
작품등록일 :
2018.01.29 15:12
최근연재일 :
2018.01.29 15:18
연재수 :
10 회
조회수 :
3,001
추천수 :
15
글자수 :
35,639

작성
18.01.29 15:15
조회
266
추천
2
글자
8쪽

불야성 4화

DUMMY

“형님은 아직도 영화 만들어요?”


“영화는 무슨, 돈을 대줘야 하지.”


입술끝만 비틀고 웃는 그가 턱으로 선반의 술병을 가리켰다.


“술이나 가져와. 오늘은 한잔 마셔야겠다.”


차남이었지만 그는 신윤수의 뒤를 이을 것이다. 하나뿐인 형인 신현은 영화에 미친 사람이었다. 신윤수가 회사일을 시키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결국은 포기하고 말았는데 그동안 회사돈을 무척 까먹었다. 그래서 신현은 지금 신윤수와 한집에 살면서도 의절 상태였고 분가시키지 않는 것은 집을 팔아 영화 제작비로 쓸까 봐서 였다.

한 달 생활비는 형수인 윤정화에게 건네주지만 신현은 매일 술독에 빠져서 산다.


신윤수는 새 살림을 차린 정부집에 사흘에 한 번 꼴로 들렀고 그때마다 어김없이 신준도 외박을 했다. 남편인 신현은 주정뱅이가 되어가고 있었으니 저택 안에서 정상적인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은 윤정화뿐이었다.

얼음을 채운 양주를 한 모금 삼킨 신준이 한동안 벽을 바라본 채 움직이지 않았다. 무언가를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다음날 회사에 출근한 양선영은 공장장실에 불려 들어갔다. 사장과 임원, 간부직원 대부분이 정리되어서 공장장이 회사를 총괄하는 중이었다. 공장장은 50대 중반으로 기술자 출신이다. 양선영이 앞자리에 앉자 그가 입을 열었다.


“위원장이 그만두었으니 이젠 양선영 씨가 위원장이 되어서 저쪽과 협의를 해줘야겠는데···.”


“무엇을 말씀이죠?”


“앞으로 두 달이면 오더 받은 것 생산이 끝나. 공장을 돌리려면 오더를 받아야 돼.”


알고 있었던 일이므로 양선영은 시선을 내렸다. 상일전자는 일본의 고멘사에 주로 전자부품을 수출해왔다. 한 달 수출량이 10억 안팎으로 지금 물려 있는 양은 회사가 쓰러지기 전에 받은 오더인 것이다. 상일이 한일상사에 넘어간 후에는 고멘사와의 상담도 끊겨 있는 상황이다.


공장장이 주름진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고멘사도 회사가 정상화되면 오더를 계속 주겠다고 했지만 이쪽에서 서둘러야 되는데 말이야.”


“공장장님이 말씀해 보시는 것이··· 저는 노조대표일 뿐입니다.”


“지금 회사를 대표하는 것은 양선영 씨야.”


공장장이 길게 숨을 뱉었다.


“저 사람들은 도무지 무슨 꿍꿍이 속인지 앞일에 대해서는 입도 열지 않는다네.”


이제까지 공장장은 시킨 일만 해온 사람이다. 기계와 부속은 눈을 감고도 고장난 부분을 찾아내고 고쳤지만 기획과 영업은 사장이 직접 챙겨왔던 것이다. 그러니 사장이 떠난 지금 누군가가 일선에 나서야 한다. 서둘러야 하는 것이다.

고멘사가 잠자코만 있는 상일전자에 오더를 밀어줄 리는 만무했다. 경쟁 생산업체가 많은 것이다. 이윽고 양선영이 머리를 들었다.


“알겠습니다. 제가 한일상사에 찾아가 보겠습니다.”


월급을 받은 것이 어제여서 회사의 분위기는 조금 밝아져 있었다. 홍혜선을 포함하여 반수 인원이 나간 것은 사흘 전이다. 그땐 분위기가 흉흉했지만 간사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함께 분개하여 울던 것이 엊그제인데도 지금은 남아 있게 된 것이 다행이라는 표정들을 노골적으로 보이고 있는 것이다.




* * *




“그렇군요. 오더가 있어야 공장이 돌아가는 것이지.”


신준이 얼굴을 펴고 웃었다. 한일상사의 전무실이었다. 넓고 밝은 분위기의 방안에는 신준과 양선영 두 사람뿐이다.


“영업 책임자를 조만간 임명하도록 해야겠군.”


혼자소리처럼 말한 신준이 양선영을 바라보았다.


“누구, 추천할 사람 있습니까?”


“저는 잘 모릅니다.”


“모르다니, 무책임한 말인데.”


시선이 마주치자 그가 다시 웃었다.


“회사 사정은 나보다 더 잘 아실 텐데.”


“영업은 모릅니다.”


“영업부에 사원이 셋 남아 있지요?”


신준이 정색을 했다. 영업부 직원 여섯 명에서 윗사람만 셋이 잘리고 남은 것은 사원급 셋이었다. 그들은 양선영의 또래들로 제대로 상담이나 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커피잔을 든 신준이 한 모금을 삼켰다.


“이대로 놔두면 석 달 후에는 회사가 문을 닫을 수밖에 없겠군요, 그렇죠?”


“······.”


“우리가 담보로 잡고 있는 것의 가치는 10억도 안 돼요. 하지만 이제까지 우리가 투자한 돈은 20억이 넘습니다. 큰 손해지요.”


의자에 등을 기댄 신준이 얼굴을 부드럽혔다.


“고멘사의 오더를 받아 돌려도 투자비를 뽑으려면 최소한 5년이 걸리겠군요. 너무 긴 시간이오.”


시선을 내린 양선영이 가늘게 숨을 뱉었다. 괜히 찾아왔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두 달 후에 오더가 끊기면 놀게 되는 직원들뿐만 아니라 새로운 주인인 한일 쪽도 애가 탈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쪽은 전혀 그런 분위기가 아니다. 불안해진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물었다.


“양선영 씨.”


부르는 소리에 양선영이 머리를 들었다. 신준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 저녁에 시간 있습니까?”


그가 다시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같이 저녁식사나 하면서 이야기를 합시다. 지금은 약속이 밀려서 자세한 이야기를 나눌 수가 없을 것 같은데···.”




* * *




“꽤 미인이다. 그렇지 않아?”


신준이 묻자 고광도가 커다랗게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회사에서 인기도 좋습니다.”


그들은 방금 방을 나간 양선영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고광도가 소파의 구석 자리에 앉더니 수첩을 꺼냈다.


“홀어머니 밑에서 두 자매가 살고 있더군요. 저 여자 밑으로 대학에 다니는 여동생이 있습니다.”


“어머니는 뭘 하는데?”


“중학교 국어 선생을 합니다.”


“남자관계는?”


“어머니 말씀입니까?”


“이 병신아, 양선영이.”


“조사한 바로는 없습니다, 전무님.”


“저 몸매에 저 얼굴이면 있을 만한데.”


“저도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만 됐어.”


쓴웃음을 지은 신준이 벽시계를 올려다보았다.


“길게 갈 것도 아닌데 깊게 알 필요는 없다.”


수첩을 집어넣은 고광도가 그를 바라보았다.


“오늘 오전에 사장님께서 현금 3억을 인출해 가셨습니다.”


“어디에서 말이야?”


“기업은행 무기명 채권으로 금고에서 꺼내가셨습니다.”


“무슨 일로?”


“말씀하지 않아서 김실장도 모릅니다.”


김실장은 신윤수의 비서실장인 김승환을 말하는 것이다. 이미 정색한 표정의 신준이 굳은 목소리로 물었다.


“아버님은 지금 어디 계셔?”


“대치동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오후 5시가 되어가고 있었으니 빠른 시간이다. 그리고 오늘까지 연속 사흘째 대치동행인 것이다. 신준이 턱으로 고광도의 수첩을 가리켰다.


“이제까지 아버님이 명목없이 가져가신 돈은 얼마나 돼?”


“언제부터 말씀입니까?”


“2년 전부터. 대치동 여자한테 간 돈을 말하는 거야.”


“자세한 금액은 뽑아봐야 알겠지만 대충 25억이 조금 넘습니다.”


그러자 신준이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그러나 치켜뜬 두 눈은 번들거리고 있다.


“가만있었더니 이것이 우리 집안에 사람이 없는 줄 알고 있는 모양이다.”




* * *




크리스탈 호텔의 라운지에서는 한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물자절약 운동이 한창이어서 강변도로의 가로등은 모두 꺼놓았지만 차량의 불줄기로 도로는 휘황하게 밝혀져 있었다. 창에서 시선을 땐 신준이 생각난 듯 양선영의 잔에 포도주를 채웠다.


“나는 내 어머니의 얼굴도 모릅니다. 이른바 아버지가 데려온 자식이지요.”


문득 말을 뱉은 그가 양선영을 향해 빙그레 웃었다.


“갓난아이 때 데려왔다는데 돌아가신 어머니는 내 형의 친모였지 나하고는 남이었습니다.”


그가 한 모금 포도주를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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