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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야성

웹소설 > 자유연재 > 판타지, 현대판타지

이원호
작품등록일 :
2018.01.29 15:12
최근연재일 :
2018.01.29 15:18
연재수 :
1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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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12
추천수 :
15
글자수 :
35,639

작성
18.01.29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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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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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쪽

불야성 3화

DUMMY

“그럼 6월 말에 한꺼번에 해결해 주실 수가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6월 중순이면 수출대금 65억이 들어옵니다. 내수 판매대금까지 합하면 100억이 넘습니다.”


이제까지 부품 공급이 안 되는 바람에 수출이 늦어진 것이다. 환율이 폭등한 후로 컴퓨터 주요 부품을 수입해야 했던 컴퓨터 제조업체 모두가 겪는 일이었다. 신준이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당좌는 그 날짜에 연장해 드리기로 하지요. 염려 하지 마십시오.”


“정말 신세는 잊지 않겠습니다.”


이병호가 앉은 채로 머리를 숙였다. 얼굴에는 희색이 가득차 있다.


“저희 회사는 4월이 고비올시다. 이번만 도와주시면 앞으로 무리한 부탁은 하지 않겠습니다.”


“서로 돕고 사는 것이지요.”


자리에서 일어선 이병호가 신준의 손을 잡았다. 손바닥이 거친 것은 지금도 기계를 손수 만지기 때문이다.




* * *




사무실로 돌아온 이병호가 마악 자리에 앉았을 때 이지현이 들어섰다.


“아버지, 다녀오셨어요?”


“그래, 잘 해결되었다.”


그가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다른 곳에 취직하느니 회사일을 도우라고 이지현을 비서실에 배치했던 것이다. 입사 2년째지만 재치있고 밝은 성격이어서 도움이 되고 있다. 찻잔을 내려놓은 이지현이 소파에 앉아 그를 바라보았다.


“당좌 연장을 받으셨어요?”


“그렇다, 6월 말까지 받았으니 한숨 돌렸다.”


“한일상사가 그렇게 돈이 많나요?”


“그럼. 당장 돌릴 수 있는 현금만 수천억이다.”


걱정이 풀린 때문이지 이병호가 여유있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은행길이 까다로우니 한일상사는 우리 같은 중소기업의 은행 역할을 하는 게야. 그들도 말하자면 수출공신이다.”


“사채업자일 뿐인데요, 뭘.”


“그것도 기업이야. 게다가 한일상사는 기업체를 여섯 개나 소유하고 있어. 불황이 끝나면 아마 그룹 회사가 될 것이다.”


“소문이 좋지 않아요. 회사를 곤경에 빠뜨려 인수한다고 하던데요···.”


“상일전자는 방만하게 경영을 했다. 그러나 내 경우는 다르다.”


한일상사의 사장 신윤수를 알게 된 것이 1년이 조금 넘었을 뿐이지만 철저히 신용을 지켜왔고 그쪽도 자신을 최고의 고객으로 대해왔던 것이다. 이것은 이지현도 아는 사실이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아버지, 명식 씨가 대기발령을 받았어요.”


“대기발령을?”


이병호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더니 금방 머리를 끄덕였다.


“차라리 잘 되었다. 당장 그만두고 나한테 오라고 해라.”


“하지만 조금 기다려 본다고 하던데요.”


“기다리긴 뭘. 조금이라도 빨리 나한테 오는 것이 피차 이롭다.”


무남독녀인 이지현이다. 이병호는 이미 대양컴퓨터의 후계자로 오명식을 예정하고 있었다.




* * *




홍혜선이 머리를 들었다. 붉게 달아올랐던 얼굴이 이제는 석고처럼 희게 굳어져 있다.


“노동부에 알아보았더니 자기들로서는 방법이 없다는 거야. 밀린 봉급에 대해서 합의서에 기록하지 않은 것이 실수라고 했어.”


상일전자의 회의실 안이다. 어수선한 회의실이 회사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홍혜선이 쓴웃음을 지었다.


“산전수전 다 겪은 내가 그딴 놈한테 당하다니, 나도 이젠 한물 갔군.”


상일전자를 인수할 당시 신준은 전직원을 모아놓고 밀린 석 달치 월급을 지불하겠다고 약속했던 것이다. 그러나 합의서에는 그 사항이 들어 있지 않았다. 인수인계 협상에 노조위원은 참석하지 못했기 때문인데 신준의 말을 믿고 방심한 원인도 있다. 양선영이 입을 열었다.


“언니, 내가 그만두겠어. 언니가 남아서 일을 끝내줘.”


“안돼.”


단호하게 머리를 저은 홍혜선이 길게 숨을 뱉었다.


“그놈이 칼자루를 쥐었으니 시킨 대로 하자. 네가 남아서 공장을 돌려라. 50명의 생활이 있다.”


“싫어, 이 짓 안 하더라도 밥 먹고 살 수 있어.”


그러나 양선영은 어금니를 물었다. 물가는 작년의 두 배 가깝게 된데다가 실업자는 통계상으로 이미 150만 명이 되었으니 실제 실업 인구는 그 이상일 것이다. 지금이라도 직원을 모집하면 수천 명의 구직자가 몰려올 테니 신준의 살생부에 적히지 않은 50명의 노조원들은 기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경제파탄으로 국가가 망하기 직전이다. 새 정권은 죽을 힘을 쏟고 있었지만 지난 5년의 거짓과 허세로 치장한 대통령의 오만과 독선, 무능이 나라를 이 꼴로 만든 것이다. 물론 경제관료의 무책임에다 한술 더 뜨는 무능과 독선이 대통령과 손발을 맞춘 것은 물론이다. 홍혜선이 입을 열었다.


“그놈한테 요구조건을 받아들이겠다고 전해. 그리고 이번에는 그 약속을 합의서에 적고 서명을 해야 한다고.”


머리를 돌린 그녀가 뱉듯이 말을 이었다.


“없는 자는 더욱 멸시받는 세상이 되었다. 난 이제 정의 같은 건 믿지도 않아.”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 거야.”


신준이 혼자소리처럼 말하고는 강으로 시선을 돌렸다. 승용차는 한남대교를 건너는 중이다. 운전석에 앉은 고광도는 잠자코 앞 쪽만 보았다.


“경쟁사회다. 이긴 자가 강한 것이야.”


신준은 언제나 이겨왔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으므로 고광도가 흘낏 백미러를 보았다. 1미터 80센티미터가 훨씬 넘는 키에 단단한 체격의 신준이다. 한일상사 사주의 아들이 아니더라도 한가락 했을 기질이었다.


“합의한 대로 상일에 돈을 지불해.”


“알겠습니다, 전무님.”


“이것으로 상일은 완전히 우리 손아귀에 들어왔다. 이젠 꿈틀 대지도 못할 것이다.”


방금 상일전자와 합의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인 것이다. 상일은 노조위원장을 포함하여 강경파 대부분이 이번에 사직서를 제출했다. 그리고 남은 반수도 한 달분 봉급을 받고 일을 시작하는 것으로 합의를 했던 것이다.


“청담동으로 돌려. 오늘은 별일 없으니 회사에 들어가지 않겠다.”


오후 4시였다. 고광도는 핸들을 틀었다. 청담동에는 그의 섹스 파트너인 장경아의 오피스텔이 있는 것이다. 한남동의 버젓한 저택을 놔두고 오피스텔을 얻어놓은 것은 호텔을 들락거리는 번거로움을 덜기 위한 것뿐이었다.


“몇 시에 모시러 올까요?”


“오지 않아도 돼. 오늘은 거기서 쉴 테니까.”


“알겠습니다, 전무님.”


스물여덟 동갑내기였지만 신준은 고용주인 것이다. 주방용구회사에서 실직하고 체육관을 운영하는 선배를 찾아갔다가 신준을 만난 것이 그에게는 행운이었다. 그는 단번에 신준의 보디가드 겸한 한일상사의 부장으로 채용되었던 것이다. 의자에 등을 기댄 신준이 만족한 듯 말했다.


“이제 대양을 처리할 일이 남았군.”




* * *




30평형의 원룸 아파트 형식으로 꾸민 오피스텔에는 가구와 장식이 화려했다. 장경아의 성격이 방안 치장에도 그대로 드러나 있는 것이다. 샤워를 마친 신준은 가운차림으로 소파에 앉았다.


“영감은 아마 지금쯤 대치동에 가 있을 거야.”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 여자 나이가 몇인 줄 알아? 나보다 겨우 세 살 위다.”


장경아가 한쪽 다리를 꼬아 앉았다. 그러자 실크가운이 젖혀지면서 한쪽 허벅지가 모두 드러났다. 잘 닦인 상아처럼 매끈하고 곧은 다리였다.


“형님도 알고 있어요?”


“알겠지. 벌써 2년이 되어 가는데.”


밤 10시 반이었다. 한바탕 격렬한 섹스를 나눈 후여서 방안의 야릇한 공기는 아직 가셔지지 않았고 두 사람의 얼굴에는 화색이 남아 있었다.


“아마 형수도 알고 있을걸.”


신준의 말에 장경아는 대꾸하지 않았다. 지금 신준의 부친이자 한일상사 사장인 신윤수의 이야기를 하는 중인 것이다. 신윤수는 대치동의 아파트에 여자를 들여앉혔는데 전직 은행원이었다.

그의 여성편력은 화려해서 이제까지 몇 명째 여자에게 살림을 차려 주었는지 셀 수 없을 정도였다. 10년 전에 어머니가 암으로 돌아가신 후로 그 횟수가 더 잦아진 대신 기간은 짧아졌지만 이번 경우는 꽤 길었다. 장경아가 머리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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