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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가밥먹는다

먼치킨은 여동생을 잘 키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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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휴
작품등록일 :
2023.01.15 20:58
최근연재일 :
2023.01.18 19:25
연재수 :
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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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글자수 :
44,633

작성
23.01.16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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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3화, 여동생 (2)

DUMMY

맑은 생기를 띄는, 찬연한 청록의 푸르름으로 덧칠된 아름답고도 견고한 건축물.

자연과 문명의 조화로움. 그 틈 사이에 섞여서 열정과 혈기를 쏟아내며 성장하는 생도들.


이사장의 집무실에서 내려다보는 아카데미의 조각 같은 전경.

조금만 시선을 멀리두면 활기로 넘쳐나는 아르카나까지 한 눈에 잡힌다.


“네게 볼 일이 있다.”


오직 그녀만이 누릴 수 있는 경치이자, 위엄에 걸맞은 눈높이.

늘 정상에서 군림하며, 아래의 족속들을 부리는 그녀의 입지를 대변하는 경관이었다.


“그렇군요.”


생긋 웃는 슈아 스칼라.

그녀의 금발이 햇볕을 받아 부드럽게 물결쳤다.


“헌데 이상하네요. 저는 만남을 약속한 기억이 없는 걸요?”


불쑥 찾아온 내 무례를 지적하는 나긋한 음성.


살인적인 업무량에 치여 사는 그녀의 시간은 희소하고도, 귀중하다.

몸이 둘로 나뉜다고 해도 턱없이 부족할 만큼.


“기별 없이 온 것은 사과하지.”


그 값진 가치를 효율적으로 쓰기 위해 마련해둔 엄격한 절차들을 모조리 생략하고.

나는 지금 여기에 있다.


“좋아요. 사과는 받을게요.”


불청객의 침입에도 여유를 잃지 않고 기품 있는 미소로 일관하는 슈아.

가히 요염하고도 인상적인 그 웃음의 색이 한결 짙어졌다.


“단, 용서는 별개랍니다.”


세계를 구성하는 수많은 국가와 협회, 길드의 구성원들을 총망라하여 결집시킨 세계 연합.

그 연합의 여덟 계급으로 나누어진 서열의 꼭대기를 차지하는 그녀가 내게 엄포를 놓았다.


이제부터는 정신 바짝 차려야한다.

···지만. 그다지 긴장은 되지 않았다.


휴이는 결코 내가 될 수는 없겠지만.

그 누구보다도, 도리어 휴이보다도 휴이를 잘 알고 있는 나로서는.

그녀와의 독대에서 밀려나는 그림은 도무지 상상되지 않았으니.


의외로 약간은 달가운 심정이었다.

지금 펼쳐지는 모든 상황은 기대하던 후속작의 첫 페이지와 다름없었으니.

꽤나 리얼한 감이 탈이긴 하지만.

오히려 좋다.


“그럼 어디 용건을 들어볼까요?”


바야흐로, 새로운 세계에서 새로운 시작.

나쁘지 않은 설렘이었다.



*



“궁금하네요. 이렇게까지 급하게 접선할 일이 대체 무엇일지.”


슈아는 상냥한 음성을 흘리며, 순수한 눈으로 상대를 주시했다.


“별 것 없다.”


그가 무심하게 말을 뱉자, 곁에 있던 여인이 슈아에게 다가와서는.

붉은 머릿결을 흩날리며 도도한 자태로.

짧은 치마가 벗겨질 듯 아슬아슬하게, 테이블에 엉덩이를 걸터앉으며.

서류 한 장을 내려놓았다.


“그건 봐야 알겠죠.”


떠나가지 않고, 도발적인 눈빛으로 마주보는 여인에게 살며시 웃어주고는.

받은 서류를 살펴보았다.


진정 궁금했다.

대체 얼마나 흥미로운 사안을 들고 왔길래 이토록 대담하게 침입을 시도한 것일까.


시시하다면 사지가 갈기갈기 찢겨져 저 어딘가에 있을 짐승의 끼니로 던져질 텐데.

알고는 있으려나 모르겠네.


그런 마음으로 서류를 확인했는데, 이건 뭘까.


너무나 평범한, 많고 많은 예비생도 중 일개 한 명의 합격 통지서.

영문 모를 까닭에 그녀는 잠시 멍해졌다.


“이게 무슨···.”

“직함이 필요하다.”


난처한 음성을 끊는, 무정한 음색.


“직함이라고 하시면요?”

“교관이면 충분하다.”


그리 일축한 사내는 집무실의 유리창 너머로 비치는 일대를 감상하는 중이었다.

음흉하고도 순수한, 순수하고도 음흉한 눈길.


그 선악의 우열을 가늠할 수 없었던 슈아는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교관이라고 하셨어요?”

“그렇다.”


간결하게 긍정하는 남자. 필요한 직함은 교관. 제시한 서류는 예비생도.

고민할 필요도 없이 원하는 바가 귀결되긴 하지만.

슈아는 그대로의 의미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이 아이에게 추천서를 내어주고 싶은 모양인가봐요?”


농락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무엇을 놓친 것일까.

복잡한 실타래를 찬찬히 풀 듯, 그녀는 그와의 짧은 대화를 복기했는데.

여인이 서류 한 장을 더 내려놓고는 남자에게로 돌아갔다.


“가급적이면 오늘 내로 부탁하지.”


대뜸 그가 일어서며 말을 붙였지만, 슈아의 신경은 서류에 쏠렸다.


“···이건?”

“내 인적서류다.”


갑자기 인적서류?


“만일 필요한 나머지가 있다면, 다음에 제출하도록 하지.”

“······.”


그러니까 뭐야. 정말 단순하게 교관이 되어서 생도 하나 추천하겠답시고, 멋대로 집무실까지 쳐들어온 거야?

진짜로?


그녀는 믿지 않았다. 아니, 믿지 못했다. 정도껏 굴어야 믿는 척이라도 해주지.

대체 어떤 내막을 숨기고자, 이런 저렴한 연막을 치는 것일까.


의심을 지우지 않는 눈초리로 남자를 노려봤으나.

그는 뜬금없이 나타났던 처음처럼,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이대로 가신다면.”


그러나 아직 남자의 기척은 미세하게 남아 있다.

사라졌더라도, 떠나지는 않은 것이다.


“저는 거절할 텐데요?”


혼자 덩그러니 남은 집무실에서, 잔잔한 호수에 조약돌이 던져지듯.

울려 퍼지는 그녀의 목소리.


[거절이라···.]


그리고 불현듯 머릿속을 울리는, 세계의 바깥에서 들려오는 사념.

슈아는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만일 그리된다면,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겠지.]


듣는 슈아의 입 꼬리가 가늘어진다. 이토록 정밀하고 선명한 사념.

이로써 증명되었다.

그는, 그녀가 어림짐작했던 수준을 아득하게 뛰어넘는 경지였다.


“재미있는 일이 뭐려나, 전쟁이라도 일으키시게요?”


뻐끔거리는 입술이 타들어가고, 날름거리는 혀가 메말라갔다.


[아니.]

“그렇겠죠. 전쟁은···.”

[누군가 상상할 수 있는 일은, 재미없지.]


사념이 전해질수록, 사념에 묻은 그의 잔악한 의지가 그녀의 심상을 좀먹어갈수록.

그녀의 팔뚝에서부터 돋아난 소름이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그럼에도, 그녀는 입술을 벌렸다. 간곡하게, 그의 의사를 전해 듣고 싶었다.


“그보다 더한 것이라면 대체···.”

[글쎄.]


이제는 사념조차 멀어져간다. 대화의 종결이 머지않은 것이다.


[그런 중대안은, 자네의 본신과 독대하는 것이 낫겠지···.]


말문의 끄트머리가 짓뭉개지듯 멀어졌다. 비로소 그가 집무실을 완전히 떠난 것이었다.


“그건··· 정말 제가 미처 상상하지 못한 사태로군요···.”


그러나 그가 떠나고서도, 슈아는 사색에 잠길 수밖에 없었다.

특히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문장은 오래도록 곱씹어야만 했다.


“휴이 아스포델.”


이제야 눈에 들어오는, 서류에 적힌 그의 이름을 한참 바라보다가 문득.

슈아는 무거운 엉덩이를 들고 일어나, 유리창 너머를 내려다보았다.


오늘도 훈련에 여념 없는 생도들로 분주한 아카데미.

정체불명의 불청객께서는, 이 광경을 보며 무엇을 눈에 담았을까.


“당신은 대체 누구일까요?”


그녀는 어떤 측면으로든, 세계에 영향력을 행사하거나, 혹은 할 수 있는 인사들은 모조리 꿰고 있는데도.

한 번도 들어보지도 못한 이름. 보지도 못한 얼굴.


“정말 오랜만이었어요. 무례를 넘어서, 오만하기까지 했던 인간은.”


오만하나, 그에 합당한 역량을 지녔던 인간은 처음이었다.


그는 실로 위험하다. 마치 세계가 발아래에 있는 듯이 망동하던 폭군이었다.

그러나 마땅히 그럴 자격이 있는 남자였다.


어떤 세력도 감히 저지르지 못할 만행을 잘도 벌여놓고, 대가로 고작 교관의 직책을 요구한 남자.


도저히 속내가 들여다보이지 않았던 주제에, 잘도 그녀의 본신까지 거들먹거렸던 남자.


좀처럼 접점을 찾지 못해서, 선뜻 판단 내리지 못할 그 남자가, 슈아는 몹시도 흥미로웠다.


“···이단일까요?”


그녀는 감히 거론해 보았다. 까마득한 옛적부터 찾아왔던.

신성한 계시록에 새겨진, 예언의 인간.


물론 섣부른 예측이었다. 그와 교류한 시간은 채 한 시간이 되지도 않는, 무엇도 단정 짓지 못할 만큼 짧았으니.

그녀가 살아온 생으로 치자면 찰나에 불과했다.


“뭐가 되었든, 재미있겠네요.”


겨우 그 찰나만으로도, 기약 없이 잠들어 있던 그녀의 본능을 충동질한 남자.


“좋아요. 원하는 대로 해줄게요.”


근심을 걷어내고, 화사하게 미소 짓는 슈아의 얼굴.

그 안광에 찬란하고도, 미묘한 빛이 스며든다.


“부디, 저를 즐겁게 해주세요.”



*



눈부신 광원.

무엇도 없는, 완전한 무(無)의 배경 속에서 홀로 덩그러니 떠있는 새하얀 그 빛무리를, 미야는 간절하게 쫓고 있다.


“오빠!”


지독히도 멀리 떨어져서는 손을 뻗어도 닿지 않았고, 전력으로 뛰어도 간격은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소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얼마나 시간이 걸려도 괜찮다.

끝내 잡을 수만 있다면.

그것이 설령 평생일지라도.


“거의 다··· 왔어!”


진심이 닿았을까.

탈진이 되도록 쫓아가며, 빛을 향해 겨우 밀어낸 손 끝에 간신히 닿은 감촉.

사람의 살결이었다.


“드디어 만났어!”


놓칠까 봐, 미야는 얼른 와락 안았다.

품을 안은 양 손은 깍지를 꼈고, 살결에 파묻은 얼굴은 실컷 부비적거리다가.


“오빠.”


어느새 그렁거리는, 애틋한 눈망울로 살며시 올려다보면.


“···아.”


부스스 눈이 떠지고, 서서히 맞춰져가는 초점에 보이는 불이 켜진 전등.


“꿈이었구나.”


차갑게 심해로 가라앉는 마음.

공허했다.

마치, 가슴에 구멍이라도 꿰뚫린 듯. 밀물처럼 차오르는 외로움과 허전함.


“깜박 졸아버렸네.”


그러나 그 부정에 더는 부질없게 허우적거리고 싶지 않았던 미야는.

잠이 덜 깬 눈가를 비비며 느릿하게 일어났는데.


“어라? 어디 있지?”


없다.

아카데미 합격 통지서.


바닥에도, 침대에도, 서랍에도, 책상에도 없다.

깔아뭉갰나 싶어서 들썩인 엉덩이 밑에도 없다.

정말 아무 데도 없다.


없을 수가 없는데.


분명 꺼내놓고 잠들었는데. 없어지면 안 되는 건데.


“안 돼···.”


통지서가 없어진다고, 이미 정해진 합격이 취소되지는 않지만.

아카데미 정책 상 통지서를 재발급 받으려면 위조 방지를 위해 현장에 직접 방문해야만 한다.

그러고도 소요 시간은 일주일.


문제는, 보육원의 지원 받으려면 이번 주까지 증명 서류로 제출해야 된다.


받아봤자 앞으로 아카데미에서 지출하게 될 천문학적인 비용에 비하면 푼돈이지만.

그마저도 미야에게는 감지덕지였다.


“아, 통지서 없으면 절대 지원 안 해줄 텐데···.”


어릴 적부터 미야를 챙겨주었던 전 보육원장님이면 모를까.

이번에 새로 부임한 보육원장은 말 그대로 돈에 미친 작자라서 통지서를 가져가도 오만상을 찌푸릴 텐데.

구두로는 절대 해줄 리가 없다.


하아―.


우울하다. 되는 일이 없다. 가뜩이나 신경 쓸 일이 많은데.

이런 생각지도 못한 돌부리까지 걸려 넘어지니 서러울 지경이었다.


“그래도 뭐 어쩌겠어··· 뭐라도 해야지···.”


들어줄 리가 없지만, 그렇더라도 우선 원장님을 뵙고 사정을 말씀드려봐야겠다.

정 안 되면 아카데미에 가서도 사정해봐야지.


“보자, 여섯 시 퇴근이시니까···.”


시간을 확인하려고 만진 핸드폰에 수신된 메시지 하나.

반사적으로 문자를 누르고 확인한 내용에 미야의 눈이 커졌다.


눈에 띈 첫 낱말, 추천서. 그 다음에 똑똑히 박혀 있는 자신의 이름.


홀린 듯 이어진 문장들을 읽어 내려가며 소녀는 머리가 하얘졌다.

추천서를 받은 생도는 아카데미에 지불해야하는 전액을 면제 받는다.

그 특혜의 대상으로 소녀가 선정된 것이었다.


악질적인 스팸은 아닐까. 누가 장난친 건 아니겠지 싶어서 확인한 번호는 오차 없이 아카데미가 맞았다.


“······.”


망연하게 바라보던 시선이 문득 흐릿해진다. 눈가를 쓱쓱 문지르자 묻어나는 촉촉한 물기.

앙 다문 입술에서 희미하게 새어나는 신음.


“으윽··· 흐읍···!”


그렇게 소녀는 깊은 침묵 속에서,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훔쳤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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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4화, 수족 23.01.16 44 0 12쪽
» 3화, 여동생 (2) 23.01.16 49 1 12쪽
3 2화, 여동생 23.01.15 66 1 11쪽
2 1화, 빙의 23.01.15 74 2 10쪽
1 프롤로그, 귀환 23.01.15 79 2 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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