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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시(錄始)의 서재

숨은 사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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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2.05.11 10:21
최근연재일 :
2022.08.07 06:20
연재수 :
21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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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31
추천수 :
188
글자수 :
1,063,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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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7.30 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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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쪽

사로잔_안타까운 면회

DUMMY

비밀 통로는 깊숙한 나무 덩굴 속에 숨겨져 있었다.

작은 문 안쪽으로 좁은 통로가 길게 이어졌다. 누리예가 왼손으로 벽을 짚으며 조심스럽게 나아갔다.


모퉁이를 돌아 불빛이 보이는가 싶더니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리예과 사로잔은 그 자리에 서서 숨을 죽였다.


문 앞에서 중년의 남자와 얘기하던 대장이었다.

“위혼제까지 아이들 몸에 상처 하나 나서는 안 돼. 알겠나?”

“네. 명심하겠습니다.”

시녀로 보이는 여자 셋이 동시에 대답했다.


“제물을 신성하게 다루라는 신녀님의 지시이니, 알아서 처신하도록.”

“저기, 또 아이를 데리러 오면 어쩌죠? 제물을 못 구하면···.”

한 시녀의 말에 대장은 창살 너머 안쪽을 바라보았다.


“셋 남았군.”

대장은 소매에서 문서를 꺼내 읽었다. 아이들에 대한 기록이었다.


“하나는 샛골, 쌍둥이는 양짓골에서 왔군. 부모가 없거나 돈을 댈 수 없는 형편이야. 제물은 확정된 거다.”

샛골이라는 말에 사로잔의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샛골에는 아이가 거의 없었다. 설마···.


대장이 자리를 떠나자 세 명의 시녀도 안쓰러운 듯 아이들을 보고는 돌아섰다.

”간식이라도 만들어주자.“

”맞아. 먹는 거라도 잘 먹어야지.“


”나이도, 태어난 시각도 모두 다르다며?“

”쉿! 큰일 날 소리.“

앞장서던 시녀가 뒤돌아보며 검지로 입술을 꾹 눌렀다. 말을 꺼낸 시녀도 어깨를 움츠리며 종종걸음으로 따라갔다.


복도에는 불빛만 흔들거렸다. 인기척이 완전히 사라지자 사로잔이 속삭였다.

”아무래도 내가 아는 아이 같아요.“


소리 나지 않게 창살 가까이 나아갔다.

여자아이는 고개를 양팔 사이에 밀어 넣고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남자아이 둘은 구석에서 동그랗게 몸을 만 채 잠들어있었다.


”로와.“

사로잔이 속삭였다.


로와가 두리번거리다가 그녀를 발견하고는 헉 소리를 내뱉었다.

사로잔이 검지로 입술을 두드리자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된 거니?“

”어떤 아저씨들이 할머니를 막 밀쳤어요. 할머니가 쓰러졌는데. 자고 일어나니 여기예요. 이모, 나 무서워요.“

로와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내가 구해줄게. 조금만 기다려.“

사로잔이 자물쇠를 잡자 누리예가 가만히 그 손을 막았다.


”지금 탈출시키면 일이 복잡해져. 위혼제에서 구하는 게 좋겠어.“

”하지만 로와는···.“

사로잔이 로와를 돌아보았다.

로와는 처음 보는 여자를 경계하며 몸을 움츠렸다.


”로와라고 했지?“

누리예가 무릎을 꿇고 창살 앞에 앉았다.


”난 사로잔의 언니야. 지금 상황을 말해줄게.“

누리예는 조금 더 부드럽고 더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제물이 필요해서 너희들을 데려왔대. 걱정하지 마. 우리가 구해줄 테니. 그런데, 지금 도망치면 병사들이 쫓아올 거야. 그럼, 할머니도 다치고, 너도 다치겠지.

얌전히 있으면 먹을 것도 주고, 잘 돌봐줄 거야. 위혼제가 시작되면 바로 구해줄게.“


”여기 친구들은요?“

”당연히 같이 구해야지.“

누리예가 팔목에 찬 팔찌를 풀었다.

세 개의 작은 돌을 질긴 끈으로 묶어놓았다. 서로 다른 색깔의 돌은 삼신성을 나타냈다.


”이건 아줌마의 아들이 만들어준 거야. 그 아이도 아홉 살이란다.“

누리예가 손을 내밀자 로와가 다가와 손을 잡았다.


로와의 팔에 팔찌를 채워주었다.

”약속의 증표야. 꼭 구하러 온다는. 알겠지? 나중에 로와가 직접 돌려줘야 해. 이거 잃어버리면 내 아들이 많이 서운해 하거든.“

로와가 콧물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로잔이 주위를 둘러보며 속삭였다.

”제사가 시작되면 구해줄 테니 무서워도 조금만 참아.“


”할머니는요?“

”우리가 돌봐드릴게. 우리 만난 건 비밀이야. 알았지?“

사로잔이 한쪽 눈을 찡긋했다.


로와는 팔찌의 돌을 매만졌다.

‘삼신성님이 지켜주실 거야.’

할머니가 버릇처럼 하던 말을 이번에는 로와가 되뇌었다.


복도 끝에서 사람들의 발소리가 울렸다.

사로잔은 로와의 손을 힘껏 잡아주고는 서둘러 어둠 속에 몸을 숨겼다.


시녀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재잘대던 소리가 멈추고 한 사람이 목을 가다듬었다.

”얘들아, 과자가 왔단다.“

”쌍둥이들은 계속 자는데?“

”얘, 네가 먹을 복이 있구나. 친구한테도 남겨줘.“

”이따가 맛있는 저녁 만들어줄게.“


잠시 후 시녀들의 발소리가 다시 들렸다. 올 때는 세 명, 갈 때는 두 명이었다.

‘한 명은 남아서 아이들을 지키는구나.’


사로잔과 누리예는 소리도 내지 않고 좁은 통로를 따라 밖으로 나왔다.


*


”로와는 분명 가을에 태어났다고 했어요.“

사로잔이 숲길을 따라 내려오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건 중요하지 않을 거야. 어떻게든 제물을 세워야 하니까.“

누리예도 주먹을 꼭 쥐었다.


”소사매님이 걱정이에요. 빨리 가야겠어요.“

마음이 급하니 사로잔의 걸음이 빨라졌다. 걷는다기보다 날고 있었다. 걸음이 빠른 누리예도 따라가지 못할 정도였다.


”제 손을 꽉 잡으세요.“

사로잔이 손을 내밀었다.


한 손으로는 누리예를 잡고 한 손으로는 장검 모얀을 빼 들었다.

”가자, 모얀.“


모얀의 몸체에서 빛이 났다. 그들은 곧 바람처럼 산에서 내려와 들판을 가로질렀다.


*


소사매는 들마루에 쓰러져있었다. 그 옆에서 한선댁이 두 손을 맞잡고 발을 동동 굴렀다.


사로잔을 보자마자 달려와 손을 잡았다.

“에구, 아가씨. 얼마나 기다렸다고. 형님이 쓰러져 있기에 여기 눕혔는데 깨어나지를 않어.”


한선댁은 얼마나 사로잔 일행을 기다렸는지 순서 없이 빠르게 읊어댔다.

“사냥하러 나가는 사람들이 도와줬어. 이러다 큰일 나는 건 아니겠지?”


소사매의 숨소리와 눈동자를 살폈다. 다리와 팔에 난 상처도 살펴보았다.


“쓰러지면서 쓸린 것 같아요. 다루가 와야 제대로 볼 수 있는데···.”

사로잔이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은 다루영과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누리예가 능숙한 손놀림으로 소사매를 살펴보았다.

“괜찮아. 조금 있으면 깨어날 거야.”


누리예는 한선댁을 돌아보았다.

“어떻게 된 건지 보셨어요?”

“아, 글쎄, 사원에서 병사들이 나와서는 로와를 데려갔지 뭐요. 아이는 금방 잠잠해지더라고. 잠든 것처럼 말이지. 형님이 울며불며 매달리니깐 사람을 내팽개치고는 가버렸어. 못된 놈들!”


“로와는 가을에 태어났으니 제물과 상관없잖아요?”

한선댁은 들마루 끝에 털썩 주저앉았다. 소사매의 손을 주무르며 한숨을 쉬었다.

“그러게 말여. 분명 가을인디. 허긴···.”


여자는 고개를 푹 수그렸다.

“날짜야 뭔 상관이여. 부자들은 돈 내면 되는 거고, 저 윗분들은 아예 처음부터 못 건드리니. 우리처럼 힘없는 사람만 골라내는 거여.”


누리예가 소사매의 손과 발을 주무르고, 몇 군데의 혈점을 누르니 소사매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형님! 형님!”

소사매는 한선댁의 천둥 같은 고함에 눈을 번쩍 떴다. 초점을 찾으려 눈동자가 흔들렸다.


정신이 돌아오자 엉엉 울기 시작했다.

“아이고, 우리 로와 어떻게 하면 좋아. 응?”

그녀는 울면서 사로잔의 팔을 잡았다.


사로잔은 소사매를 안은 채 한선댁에게 고개를 돌렸다.

“소사매님은 저희가 돌볼게요. 고생 많으셨어요. 곧 해가 질 텐데 일하러 가셔야죠?”


“아, 맞다! 나무하러 가야 하는데! 형님, 그럼, 사람이 왔으니 가볼게요. 몸조리 잘하셔요.”

한선댁은 흐느껴 우는 소사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고는 뒤뚱거리며 대문을 나섰다.


그녀가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사로잔이 소사매의 귀에 속삭였다.

“로와는 잘 있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소사매가 두 손으로 사로잔의 손을 꼭 잡았다.

“정말, 정말이요?”

“네. 위혼제까지는 상처 하나 없이 보살핀다고 했어요. 제사가 시작되면 구해낼 거예요.”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소사매가 자기 가슴을 주먹으로 두드렸다. 눈물이 마르자 눈동자에 붉은 핏줄이 번졌다.

“그 어린 애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 이게 다 할미를 제대로 못 만나서···.”


누리예가 소사매를 부축했다.

“일단 방으로 모시자. 따뜻한 물과 미음도 준비해줘.”

소사매는 처음 보는 누리예가 자신을 부축하는데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다루, 지금 어디 있어?’

사로잔은 부엌에서 물을 데우며 다루영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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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 사로잔_수배전단 22.07.29 36 0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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