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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2.05.11 10:21
최근연재일 :
2022.08.07 06:20
연재수 :
21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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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3,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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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7.27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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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아랑누_다음 목적지

DUMMY

보름삭이 서쪽 하늘에서 밝게 빛났다. 불그스름한 삭빛을 받아 구름도 발그레해졌다. 눈썹달도 하늘에서 눈웃음 짓는 듯 보였다.


별무리가 강물처럼 흐르니 술 향기도 별을 따라 흘렀다. 벗과 어울려 이스락주를 마시기에 딱 좋은 경치였다.

공량원 정자에 아랑누, 온설지와 이연이 모여 앉았다.


도조는 어디로 갔는지 낮부터 보이지 않았다. 암귀모와 싸우면서 변신도 가능해졌고, 몸도 더 키울 수 있었다.

완전한 신조가 되려면 천인이나 선인을 태울 정도가 되어야 하니 갈 길이 멀었다.


“도조는?”

아랑누가 묻자 이연이 이스락주의 향을 맡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모르겠어요. 찾을 게 있다고 했는데 뭔지는 말 안했어요.”

“성물 아니면 주전부리지. 중간을 몰라.”


온설지가 모래사장 가까이 찰랑이는 바닷물을 바라보며 잔을 채웠다.

“아누, 암귀모를 봉인하다니 대단해. 대단한 줄은 알고 있었지만, 새삼 대단해.”

“하하, 칭찬은 받을게, 온형. 그래도 난 많이 부족해. 영안도 어두워지고, 손가락 하나 움직일 힘이 없어서, 죽는 게 이런 거구나 싶었어.”


“누님, 지금은 괜찮아요?”

이연이 잔을 들어 홀짝였다. 조마조마했던 결투 장면이 떠올라 심장이 오그라들었다.


“마로니님과 에레혼님이 도와주셔서 지금은 좋아졌어.”

“다행이에요. 누님한테 무슨 일 생기면 스승님 얼굴을 어떻게 봐요?”

“어, 꼬마, 넌 이거 꿀물 마셔야지! 이리 내.”


“딱 한 잔만 마실게요. 이스락주가 어떻기에 형님이 맨날 노래하나 궁금하거든요.”

“엉? 내가 언제?”

온설지는 술잔을 뺏으려고, 이연은 잔을 지키려고 투닥거렸다.


아랑누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가만히 허리에 매단 영진성 조각을 쓰다듬었다.

‘틔움 도사님의 주문이 정확했어. 어디서 배우셨을까? 혹시 스승님도 알고 계셨을까.’


모여사원에서의 그녀는 영력이 부족해서 배우려다 포기한 주술도 많았다. 지금은 모든 주술을 거뜬히 해낼 텐데.

세운랑 원로를 생각하니 모여사원의 식구들이 보고 싶었다.


“온형, 전에 말한 친구는 어떻게 지낸데? 새로운 소식 있어?”

“아치 말이지? 그때 사냥꾼들에게 들은 소식이 전부야. 하지만, 어디서든 잘 해낼 거야. 그 녀석 보기에는 곱상하고, 목소리도 야리야리하지만 강단 있고 능력 있거든. 햐, 이렇게 말하니 무척 보고 싶네.”


“무사가 같이 다닌다고 했지? 용족 여인도.”

온설지가 술잔을 내려놓고 그녀에게 바짝 다가앉았다.

“아누, 뭔가 있지? 이유 없이 그런 말을 꺼낼 아누가 아니거든.”


아랑누는 눕혀놓은 흰 지팡이에 손을 얹었다.

“사로잔을 봤어. 나와 같은 혼 조각에서 나온 사람이야. 공간 너머 나타났지만 도망쳤어. 다시 볼 거라 생각했는데, 이어지지 않아.”


“에이, 누님. 당연하죠. 우리야 귀령송환도 매일 보고, 쇳디랑 사음귀도 아니까 그런가 보다 하지만, 모르는 사람들은 다 무서워해요.”

이연은 한 잔을 채 마시기도 전에 눈동자에 힘이 풀렸다. 기분이 좋은지 헤롱헤롱 웃음을 흘렸다.


“얘 좀 보게. 겨우 한 잔에 나가떨어진 거야?”

온설지가 이마를 톡 건드리니 이연은 웃으며 그대로 옆으로 벌렁 누워버렸다. 온설지는 허허 너털웃음을 지으며 모포를 덮어주었다.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할지 알아.”

“길잡이 구름이 나타났어?”

“아니. 이제 길잡이가 없어도 돼. 우린 유리산으로 갈 거야.”

“유리산? 불라국에 있는 거 말이야? 아누, 거긴 아무도 못 올라가는 거 알지?”


“그곳에 해답을 아는 존재가 있대. 왜 내가 여기 있는지, 무엇을 할지 알려줄 거야.”

“그건 또 어디서 들었어?”

“호설이 알려줬어.”

“호설이라···.”

온설지는 입맛을 다시며 술병을 흔들었다. 술이 남은 것을 확인하고 잔을 채웠다.


“호설이 있다면 아랑누에게 더 도움이 되었을 텐데. 나는 많이 부족하네.”

“온형, 호설은 호설의 역할이 있고, 온형은 온형의 역할이 있잖아. 지금도 충분히 잘하는 걸. 그 정도면 훌륭해. 앞으로 능력을 보여줄 기회는 얼마든지 있어.”


“그래. 바로 그거야. 아랑누, 지금 네가 한 말 잊지 마.”

온설지가 잔을 들며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온형, 지금 장난해?”


“하하, 고마워서 그러지. 고마워서. 유리산에 대한 소문을 알려줄게.”

그는 빈잔을 내려놓았다.


“비와 바람을 다스리는 비결이 숨겨져 있다는 얘기도 있고, 불로장생의 비법이 있다고도 해. 여하튼 시조새가 지키고 있어.

이 시조새가 얼마나 크고 무시무시한지 발톱으로 꽉 쥐기만 해도 사람은 숨이 끊어진대. 유리산은 계속 높아지고 있어. 주변의 땅은 더 깊은 협곡이 되어가고.

그렇게 넓어진 협곡이 불라국 영토의 반은 될 걸? 유리산까지 다가가기도 어렵다는 말이야.”


“그래도 간다면 갈 거잖아?”

“그야, 당연하지. 네가 간다면 그건 운명이니까.”

온설지는 아랑누의 잔에도 술을 채웠다. 또르르 맑은 소리가 울렸다.


아랑누는 술을 입안에 머금고 향을 느꼈다.

‘운명이라···. 지금 내가 여기 있는 것도 운명일까?’

부드러운 향이 입안에 오래 남아 밤의 향기를 즐기기에 알맞은 술이었다.


‘어떤 것이 우연인지, 운명인지 지금은 알 수 없어. 지나고 나서야 그것이 운명이었구나, 그때 아는 거지. 난 그저 최선을 다하는 거야.’


아랑누는 금화가 들어있는 노리개 주머니와 작은 영진성 조각을 손에 꼭 쥐었다.

‘이루다가 알려준 대로라면···, 얼마 안 남았어. 아주 큰 싸움이 되겠지.’


미사랑의 혼을 지키기 위해서는 더 열심히 영력을 키워야 한다. 양쪽 손목의 신령석 팔찌가 삭빛을 반사하며 은은히 빛났다.


*


그동안 편안하게 배를 채운 나귀 보리는 눈이 초롱초롱 빛나고 털에도 윤기가 흘렀다.


아랑누는 보리의 등을 쓰다듬으며 잔잔하게 노래를 들려주었다. 그녀의 노래에 다른 소와 말도 킁킁거리며 귀를 쫑긋거렸다.


노래 소리를 따라 니엘이 문을 열었다.

“역시 아랑누님이었군요. 바다의 노래보다 감미로워요.”

“니엘님, 일찍 일어나셨네요.”

“까다로운 병자가 늘어나서요.”


니엘이 한숨을 쉬었다.

그녀가 말하는 병자는 구심을 비롯한 백사귀들이었다. 몸의 구멍마다 피를 흘리던 그들이 여간해서는 낫지 않아 바론과 니엘이 밤낮으로 고심하고 있었다.


“요귀와 거래했으니 무언가는 희생하겠죠. 그렇게 으뜸초를 욕심내더니 결국 으뜸초로 치료 받는군요.”

아랑누는 씁쓸한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그들 때문에 고난을 겪었지만, 지금의 초라한 모습까지 미워할 수는 없었다. 정귀가 사라진 지금, 예전과 같은 몸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눈은 영영 고칠 수 없을 거래요, 그자한테 억울한 일을 많이 당해서 보기도 싫지만, 막상 저런 모습이니 안쓰러워요.”


아랑누는 여행용 궤짝을 정리하다 말고 허리를 폈다.

“구심이라면···. 온형이 해준 말이 있어요. 정령의 안개와 이스락성 경계에 보화를 묻어놨대요. 금관나무 숲이라던데. 그걸 어디에 쓸지는 몰라도.”


니엘이 씩씩거리며 콧김을 내뿜었다.

“약값은 내라고 해야죠. 바론도 맨손으로 치료하는 건 아니니까요.”

“그럼, 온형에게 안내하라고 할게요.”

아랑누는 가벼운 걸음으로 마구간을 나섰다.


니엘이 나귀 보리 옆에 놓인 궤짝을 발견하고 황급히 따라 나왔다.

“아랑누님, 떠나는 건 아니죠?”

“예. 오후에 출발하려고요. 바론님께 인사도 해야죠.”


“왜요? 왜 벌써 가나요? 여기 더 머물면 안 되나요?”

아랑누가 니엘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은 에레혼과 달리 보송보송했다.


“할 일이 있어요. 일을 끝내고 저도 스승님께 돌아가야죠.”

“그렇지만···.”

니엘은 아랑누의 손을 내려다보며 말을 잇지 못했다.


공량원 입구에서 무언가가 느릿느릿 움직였다.

녹디약방의 사무장 만치가 허리를 잔뜩 구부리고 살금살금 걸어왔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이리저리 눈을 굴렸다.


니엘은 그를 보자 화가 치밀었다. 만치에게로 뛰어들었다. 조금 전까지 아랑누의 손을 잡고 울먹이던 모습은 남아있지 않았다.


“만치! 바론이 당신을 얼마나 도왔는지 잊었어?”

“그, 그래서 이렇게 사죄하러 왔습니다. 니엘님, 잘못했습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이게 죄송하다는 말로 해결될 일이야? 당장 바론에게 가자고!”

니엘은 팔뚝을 불끈거리며 만치를 끌어당겼다.


만치는 고개를 푹 수그리고는 그녀의 손에 이끌려 다솜관으로 들어갔다.


*


이스락성에서 북쪽 계곡을 따라 가는 길은 가파르지는 않아도 쉼 없는 오르막이었다.

아랑누는 지친 다리를 다독이기 위해 산등성이에 앉았다.


말리항을 내려다보였다.

정령의 숲은 여전히 안개에 싸여있었으나 이전보다 엷어져 맑은 기운이 스며 나왔다. 가까운 바다에 솟은 해설피탑이 조그마한 점처럼 보였다.


“항구에 있던 사람들도 괴물만 기억하고, 요귀와 싸운 것은 모르던데요? 시나님의 결계가 대단했나 봐요.”

이연도 말리항을 바라보며 마른 풀잎을 뜯어 날렸다.


“시나님의 결계도 굉장했지만, 요귀들이 사람의 기억을 바꿨을 거야. 상재믈의 연기귀신도 그랬잖아? 그걸 중독이라고 기억하다니···.”

아랑누의 말에 온설지도 고개를 끄덕였다.


“모르는 게 낫지. 반귀도 아니고 정귀가 언제 나타날지 모른다고 생각해봐. 조마조마해서 심장병 걸리기 십상이지.”

그는 공량원에서 얻어온 과자를 한 움큼 집어먹었다.

재바우와 일꾼들이 몇 가지 음식을 챙겨주었다. 며칠 동안 버티기에 충분한 양이었다.


도조는 까마귀 모양으로 온설지의 팔에 앉아 과자를 쪼아 먹었다.

“까망아, 넌 왜 아직도 까마귀냐? 아무 때나 모습을 바꾼다고 자랑했잖아?”

“발이 아프다. 다리가 아파. 다닐 때는 이렇게 다녀야지. 눈사람! 그 과자 이쪽에도 놓아라.”


“하하, 변신 못 해서 안달하더니 엄살은.”

말은 퉁명스러워도 온설지는 과자봉지를 열어 도조 앞에 펼쳐주었다.

“너만 먹지 말고. 아누에게도 갖다 줘.”

“오웅오웅.”


도조는 과자봉지를 부리에 물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지금은 아랑누님을 방해하면 안 돼.”


아랑누는 지팡이를 무릎 위에 얹고 쓰다듬었다.

지팡이 속 미사랑의 검에 집중하면 아주 잠깐, 공간 저편의 사로잔의 모습이 스쳐갔다.


그녀가 자신을 찾으면 언제든 얘기할 수 있으니 느긋하게 기다렸다.

지금처럼 바라보는 것도 좋았다. 같은 미사랑의 혼 조각인데도 전혀 다른 모습이라 더욱 즐거웠다.

‘우린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으니 곧 만날 거야.’


이제 곧 끝날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빨리 끝내고 모여사원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아직 배워야 할 것이 많아. 스승님도 보고 싶고, 슬옹 아저씨도 보고 싶어. 아담도 많이 컸겠지?’


‘미사랑의 혼 조각으로서 할 일이 있다면, 아랑누로서도 할 일이 있어. 내겐 똑같이 소중해.’

아랑누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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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 사로잔_수배전단 22.07.29 36 0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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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 아랑누_탐색 22.07.26 35 0 13쪽
160 아랑누_전언 22.07.25 39 0 12쪽
159 아랑누_고백과 결심 22.07.25 36 0 9쪽
158 아랑누_갈피를 찾다 22.07.25 35 0 12쪽
157 아랑누_미사랑의 검 22.07.25 32 0 9쪽
156 아랑누_해왕 모수 22.07.24 34 0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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