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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2.05.11 10:21
최근연재일 :
2022.08.07 06:20
연재수 :
21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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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수 :
188
글자수 :
1,063,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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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7.30 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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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사로잔_낯선 시선

DUMMY

소사매의 집 마당에는 이른 아침부터 상쾌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생기발랄한 로와의 웃음소리였다. 할머니와 둘이 쓸쓸하게 지내다 사람들이 모여들었으니 늦잠 잘 시간조차 아까웠다.


아침 일찍 일어나 사로잔과 다루영을 깨웠다.

“언니! 이모! 아침 만들어줄게. 빨리 나와요!”


로와는 소사매를 도와 부지런히 야채를 손질했다. 방석과 목도리를 만드는 사이사이 조금이라도 더 놀기 위해 열심이었다.


나루뫼가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털면서 마당으로 나왔다.

밤을 달려 헛간으로 돌아온 나루뫼는 해무찬과 아순치의 몰골을 보고는 도저히 깨울 마음이 들지 않았다.

할 수 없이 구석에 누워 쪽잠을 청했는데 허리가 아파 더는 누워있을 수 없었다.


나루뫼를 본 로와가 달려가 폴짝 뛰어올랐다. 그는 퀭한 눈동자에 핼쑥한 낯빛을 하고도 로와에게 활짝 웃어주었다.


“엄청 좋은가 보네.”

사로잔이 들마루에 앉아 그릇을 늘어놓으며 신기한 듯 나루뫼를 보았다.


“큰누님의 손녀니까. 어린 시절의 나를 보는 것 같지 않소?”

순간 사로잔의 손이 멈추었다. 눈이 툭 튀어나올 것 같았다.

“대체 어디가?”


“하하, 나도 귀엽고 씩씩한 어린 시절이 있었소. 믿기 어렵겠지만.”

“그렇다고 해두지. 찬도 꼬마였던 시간이 있으니까.”

사로잔은 해무찬의 코흘리개 시절을 떠올리며 씨익 웃었다.


야채죽이 완성되자 로와는 깡총거리며 해무찬과 아순치를 깨우러 갔다.


“오늘은 놀아줄 수 없는데···.”

나루뫼가 안타까운 마음에 중얼거렸다.


“새로 알아낸 사실이 있나?”

사로잔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나루뫼가 고개를 끄덕였다.

“성주가···.”


로와가 양쪽 손에 해무찬과 아순치의 손을 잡고 걸어 나왔다.

흐트러진 매무새로 질질 끌려오는 두 사람은 저승길로 떠밀리는 망자 같았다.


들마루에 앉은 사람들은 조용히 식사를 마쳤다. 각자 다른 생각에 빠져 말이 없었다.

로와만 맑고 힘찬 목소리로 어제 얼마나 뜨개질을 하고, 어떻게 놀았는지 노래하듯 재잘거렸다.


다루영이 그런 로와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오늘은 우리가 할 일이 있어.”


로와가 울상이 되었다. 입을 꾹 다물며 눈물을 참았다.

“그럼, 내일은?”

“내일은···, 음, 일이 잘 끝나면···.”

다루영이 얼버무리자 로와가 다짐하듯 말했다.

“오늘 못 놀았으니 여기 오래 있어야 해.”


나루뫼가 손가락으로 로와의 이마를 가볍게 튕겼다. 딱 소리가 나자 로와는 입술을 뾰루통 내밀고는 이마를 문질렀다.


“삼촌보다 언니가 더 좋아?”

“응!”

로와가 다루영의 팔을 꽉 끌어안았다.


“삼촌이 또 올 테니까 로와가 양보해. 언니랑 이모는 할 일이 아주 많단다.”

“무슨 일? 아! 악기 연주?”

“그 비슷한 것?”

다루영은 난처해하면서도 로와의 손을 놓지 못했다.


한 아이가 대문 앞으로 달려왔다. 진흙 놀이를 함께 하던 아이였다. 로와는 한이를 보자 통통 뛰어나갔다.


소사매가 밭일하러 나가는 것을 확인하고 나루뫼가 성주원에서의 일을 알렸다.

해무찬과 아순치가 차례대로 이야기를 정리했고, 다루영 역시 사람들에게 들은 이야기를 전달했다.


사로잔이 팔짱을 끼고 앉아 손가락을 차례대로 움직였다.

“나눠서 찾아보자. 아치와 나는 아름사원에 가볼게.”


“내가 유령선과 타랑대귀에 대해 알아보지.”

해무찬의 눈짓을 알아챈 다루영이 곧 대답했다.

“나도 찬과 같이 알아볼게.”

두 사람의 눈 맞춤이 예상했던 그대로여서 사로잔은 뻐끔뻐끔 입맛을 다셨다.


“성주원은 내가 맡겠소. 상대가 요귀이니 놔둘 수 없지.”

나루뫼가 주먹으로 바닥을 두드렸다.


“좋아. 해가 지면 여기서 다시 보자고.”

해무찬이 사로잔의 어깨를 툭 쳤다. 졸린 눈으로 끌려 나올 때와는 전혀 다른 눈빛이었다.

이번에도 반드시 임무를 마칠 것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


샛골과 아름사원은 사널리성의 서쪽과 동쪽 끝이었기에 서둘러야 했다.


사로잔은 말몰이꾼의 옷으로 갈아입고 말을 끌었다.

수배 전단에 오르지 않은 아순치는 깔끔하고 고급스러운 옷을 꺼내 입었다. 거대상단의 문양이 새겨진 옥빛의 긴 조끼를 덧입으니 소단주 다운 풍채가 엿보였다.


“루월관에 들렀다 가자고. 다른 소식이 오면 알려줄 테니 그쪽이 더 빠를 거야.”

루월상단에서 운영하는 루월관은 유우대륙 각 지역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여관으로 유명했다.

어제보다는 훨씬 활기찼지만, 평소에 비하면 초라했다. 사맟항에서 가까워 해가 뜨기 전부터 해가 질 때까지 북적거리던 곳이니까.


“아치는 거대상단이잖아? 루월상단과도 친해?”

“그걸 친하다고 해야 하나···. 아는 사람도 별로 없어. 그 녀석이라면 몰라도.”

아순치가 주먹에 힘을 주었다. 꽉 쥔 주먹과는 반대로 입가에는 미소가 번졌다.


“나와 비슷한 실력을 가진 자는 그 녀석뿐이지. 게으름을 경계하게 만드는 숙적이랄까.”

“아치에게 맞설 정도라면 대단한데. 그런 숙적이라면 나쁘지 않아. 경쟁자는 나를 발전시키니까.”

“만약 그가 단주가 못 되면···. 거대상단이 유우대륙을 누빌지도.”


“그 정도 실력이면 당연히 단주가 되겠지.”

“사고를 당했거든. 심하게 절룩거리는데, 아무리 해도 낫지 않아. 그것이 치명적인 결격사유지.”

사로잔은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사람에게 동정심이 들었다. 아순치가 인정하는 경쟁자라면 대단한 실력자일 텐데.


“아만상단에 선사 하날이 있었잖아? 거대상단에도 선사가 있어?”

“하날이 대단한 능력을 가진 건 맞아. 겁은 많아 보여도 실력은 출중해. 하지만 상단에서는 역시 장사 실력이 진짜 능력이지.”


“하이고, 아치는 정말 한결같구나.”

“그래도 선사가 측근으로 있으면 좋긴 하겠군.”

아순치가 부채를 까딱거렸다.


*


웅장하고 화려한 루월관에 도착하자 부점장이 반갑게 맞으러 나왔다.

거대상단의 소단주라는 명패가 위력을 발휘했다.


부점장은 아순치를 안쪽의 별실로 이끌었다.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탁라국에서 오셨다고요?”

아순치의 태도는 어느새 거대상단의 소단주에 걸맞은 위엄을 갖추었다.


사로잔은 말몰이꾼이기에 아순치와 같이 들어가지 못했다. 현관 옆에 따로 마련된 쉼터에 앉았다.


점원이 차와 과일조림을 들고 별실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사로잔 앞에도 뜨거운 차와 과자 몇 개가 놓였다.


차를 홀짝이며 루월관 안을 둘러보았다.

높은 천장에 섬세하고 아름다운 그림이 썩 어울렸다. 화려한 색과 질감은 등불과 어울려 아늑한 공간을 만들었다.


실내 장식과 손님들을 둘러보다가 사로잔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꼈다.

눈을 돌렸을 때는 상대가 별실로 고개를 돌린 뒤였다.


구석에 혼자 앉아 차를 마시는 사람이었다. 짙은 갈색의 가죽 외투를 입고 모자를 눌러써서 남자인지 여자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모르는 사람인데···.’

여기 아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이 더 이상할 것이다.


상대는 아순치가 들어간 별실을 주의 깊게 바라보았다. 신경이 곤두섰다.

‘누구지? 좀도둑은 아닌 것 같고. 보물 사냥꾼인가. 아니면 현상금사냥꾼?’


수배령이 내려진 지 이틀도 안 되어 현상금사냥꾼이 나타날 리 없다. 진짜 사냥꾼이라면 목표를 발견한 이상 태연하게 관찰하지도 않을 것이다.

어느 쪽이든 조심해야 했다. 섣불리 움직이다가는 일을 그르칠 테니까.


아순치와 부점장이 함께 나왔다.

사로잔은 재빨리 일어나 공손하게 두 손을 모으고 현관 옆에 섰다.

장황한 인사가 끝나고 돌아보니 구석에 앉아있던 그 손님은 보이지 않았다.


거리로 나와서도 자신을 지켜보는 눈이 있는지 두리번거렸다.

“왜 그래?”

“별일 아니야. 얘기는 잘했어?”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알려줄 거야. 공을 쌓고 싶어서 안달이 났더라고. 남쪽 지방으로 내려가 여각을 맡는 게 꿈이라나.”


아순치가 어깨를 쭉 펴고 손을 뒤로 잡았다. 가볍게 쥔 부채를 흔들거렸다.

막겨울의 기운이 남아 부채가 어색할 법 한 데도 그가 들고 있으니 맞춤인 듯 어울렸다.


“아름사원은 이쪽이야.”

아순치는 사원으로 가는 방향을 향해 돌아섰다.


사로잔도 말을 끌고 큰길로 나서는데 멀리서 마차가 쏜살같이 달려왔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몸을 피했다.


마차는 요란한 바퀴 소리를 내며 지나갔다. 아무런 장식 없이 수수하고 소박한 마차였다. 우윳빛 장막이 거친 바람에 휘날렸다.


마차의 창문이 굳게 닫혀 안에 누가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마부를 제외하고 앞과 뒤에 병사 세 명이 타고 있었다.


그들은 달리는 마차에 앉아서도 매서운 눈초리로 거리를 노려보았다. 먹잇감을 찾는 짐승의 눈빛이라 보는 이들의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사로잔도 엉겁결에 뒤로 물러났다.

그녀는 뒤편에 있어서 무사했지만, 아순치가 먼지를 뒤집어쓰고 휘청거렸다.


마차는 거센 회오리처럼 동쪽으로 사라졌다.

소리가 잠잠해지자 노점 상인들이 흐트러진 물건을 주워 담기 시작했다.


“저거 신녀님의 마차지?”

“제물을 찾았나 보네. 저리 급히 가는 걸 보면.”

“그렇다고 마차를 이리 험하게 몰다니! 큰일 날 뻔했잖아.”


그중 한 여인이 애처로운 눈으로 마차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았다.

“참 안됐네요. 아홉 살이면 아직 어린데. 불쌍하기도 하지.”


“에구, 이 사람아. 살아남을 수많은 아이들을 생각해야지. 어쩌겠나. 타랑대귀에게 우리가 다 죽을 순 없으니.”

“그것도 그렇지만요.”

여자는 한숨을 내쉬며 바구니를 정리했다.


사로잔과 아순치의 눈빛이 공중에서 부딪쳤다.

“쫓아가자!”

“분명 아름 사원 쪽이었어.”


아순치가 긴 옷자락을 걷어 올렸다.

말은 우듬 한 마리뿐이어도 바람을 부르는 하늘의 성물이 있으니 그편이 더 빨랐다.


사로잔이 막 고삐를 죄려는 찰나, 루월관의 부점장이 헐레벌떡 뛰어나왔다.

“소단주님! 소단주님!”


부점장은 숨이 턱에까지 차올라 제대로 소리도 내지 못했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손사래를 치며 고꾸라지듯 아순치 앞까지 뛰어왔다.


“큰일났습니다요! 큰일! 지금 의정관 사병들이 들이닥쳤대요.”

“의정관 사병이라고?”

“그러니까, 그게, 성주의 부친이 의정관장이라, 진짜 성주를 내놓으라고 왔답니다.”


“진짜 성주···?”

나루뫼의 증언이 기억났다.

지금의 성주는 요귀라고 했다. 요귀가 성주 행세를 한다면 진짜 성주는 다른 곳에 있을 것이다.


“성주원 문 앞에서 시위한답니다. 사병대가 백여 명이나 된답니다.”

“알겠습니다. 저도 가보죠.”

“예, 예. 허허, 제가 다른 소식이 있으면 바로바로 알려드리겠습니다.”


부점장은 눈을 가늘게 뜨며 이빨이 드러나도록 활짝 웃었다.

이만큼 대단한 소식을, 이토록 빨리 알려주는 사람은 자신밖에 없으리라. 루월관으로 돌아가는 그의 어깨가 살짝 올라갔다.


“아치는 성주원으로 가야겠군.”

사로잔이 부점장의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아순치가 말고삐를 받아들었다.


“좋아. 넌 사원으로 가서 상황이 어떤지만 살펴봐. 혼자 상대하지 말고.”

아순치는 그의 말 우듬에 올라타고 고삐를 잡아당겼다. 우듬도 주인의 마음을 아는지 빠른 걸음으로 저잣거리를 빠져나갔다.


사로잔도 기다리지 않았다. 담장과 지붕 위를 날아 마차가 간 길을 따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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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 사로잔_성주원 22.07.30 34 0 10쪽
176 사로잔_수배전단 22.07.29 36 0 13쪽
175 사로잔_정탐꾼 아리수 22.07.29 39 0 11쪽
174 사로잔_다시 만난 아랑누 22.07.29 34 0 10쪽
173 사로잔_소사매의 집 22.07.29 39 0 13쪽
172 사로잔_너르목 광장 22.07.28 32 0 12쪽
171 사로잔_사맟항 22.07.28 32 0 9쪽
170 사로잔_반파홍귀 22.07.28 34 0 10쪽
169 사로잔_노들산 아름 사원 22.07.28 38 0 9쪽
168 선계_미사랑의 편지 22.07.27 37 1 11쪽
167 선계_각성 22.07.27 36 0 12쪽
166 아랑누_나다움꽃 22.07.27 34 0 9쪽
165 아랑누_다음 목적지 22.07.27 32 0 12쪽
164 아랑누_인어족의 재회 22.07.26 32 0 13쪽
163 아랑누_다시 봉인하다 22.07.26 39 0 12쪽
162 아랑누_불길한 전조 22.07.26 38 0 13쪽
161 아랑누_탐색 22.07.26 35 0 13쪽
160 아랑누_전언 22.07.25 39 0 12쪽
159 아랑누_고백과 결심 22.07.25 36 0 9쪽
158 아랑누_갈피를 찾다 22.07.25 35 0 12쪽
157 아랑누_미사랑의 검 22.07.25 32 0 9쪽
156 아랑누_해왕 모수 22.07.24 34 0 10쪽
155 아랑누_바다 괴물 22.07.24 45 0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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