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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2.05.11 10:21
최근연재일 :
2022.08.07 06:20
연재수 :
21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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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29
추천수 :
188
글자수 :
1,063,745

작성
22.07.27 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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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1쪽

선계_미사랑의 편지

DUMMY

부녹은 찻잔을 내려놓고 허공에 시선을 맞추었다. 기억을 더듬는 그녀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미사랑이 방문했을 때는 아만상단을 이끌기 전이었다.


순단대륙 북쪽에 있는 벽랑국의 작은 도시, 이노에서 이름 없는 의원으로 일하며 인간세의 정보를 수집했다.

그 당시 이노는 지금처럼 넓지 않았고 인구도 적었다. 그때 부녹은 남자의 모습이었다.


변두리에 있는 부녹의 의원은 작고 허름했는데, 의술이 뛰어나다는 입소문을 타고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다른 지방 사람들이 진찰이라도 받겠다며 길바닥에 천막을 칠 정도여서 주변 사람들과의 마찰도 잦았다.

결국 의국에서 주변의 빈집을 사들여 병실로 꾸며주었다.


미사랑이 찾아왔을 때는 어느 정도 공사가 끝나 천막을 거두고 병실로 들어간 다음 날이었다.

그녀는 부모의 심부름을 온 아이처럼 두루마리를 끌어안고 다소곳이 의원으로 들어왔다.


부녹은 미사랑을 보자마자 코웃음을 쳤다.

“미사랑님, 그런 모습이라도 안 속습니다.”

“쳇, 재미없어. 하지만 널 속이려는 게 아니라 사람들을 속이려는 거야.”


“인간세에서는 예쁜 소녀가 혼자 다니는 것도 위험해요.”

“내가 예쁘긴 하구나. 부노는 역시 눈이 좋다니까.”

“에고, 저 지금 농담할 기운도 없습니다요.”

“그렇게 보여. 여기 엄청 잘 되네.”


미사랑은 눈을 빛내며 의원 내부를 여기저기 둘러보았다.

“부녹은 사람이었을 때도 의원이었지? 선계에서도 의술을 닦았으니 못 고치는 병이 없겠네?”

“그렇지도 않아요. 게다가 선계의 의술을 쓰면 천기누설 아닙니까? 그러다간 저 노각부줄 근처에도 얼씬 못합니다.”


“그것도 그래. 괜히 요귀로 오해받을 수 있고.”

“미사랑님, 그런데 정말 구경하러 여기까지 오신 거예요?”


미사랑이 배시시 웃으며 종이 두루마리를 내밀었다.

“부탁이 있어. 이 두루마리 좀 보관해줘. 나중에 찾으러 올게. 지금은 축제를 구경할 거야.”

“그 정도야 어렵지 않죠. 그런데 축제라니요? 근처에서 축제가 열리나요?”


미사랑은 대답하지 않았다. 어찌나 환하게 웃는지 눈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렇게 미사랑은 축제구경에 들뜬 소녀처럼 폴짝거리며 떠났다.


며칠이 지나도 미사랑은 오지 않았다.

미사랑을 기다리던 그에게 들려온 소식은 대분성전투와 암흑성의 소멸이었다. 율명의 검 끝에서 산산이 흩어졌다는 소식에 그는 며칠 동안 방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병실에 머무는 환자가 갑자기 위독해지지 않았다면 며칠이고 더 자신을 가두었을 것이다.


*


미사랑이 찾아왔었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었다.

부녹은 그 두루마리가 어디로 갔는지 생각해내려 했지만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인간세의 시간으로 이천년이면 선계의 시간으로도 백 년 가까운 시간이기에 조그만 두루마리의 행방을 기억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기억을 가로막았던 벽이 녹아내리자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여라함을 불렀다.

“여라함님, 제게 봉인된 기억이 있어요. 분명 미사랑님이 남기신 걸 겁니다.”


여라함은 그녀를 향해 봉인 해제 주문을 외웠다.


그의 주문이 부녹의 몸에 닿자 살갗 안쪽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아지랑이는 연기처럼 솟아오르며 희미하게 빛을 냈다.


빛나는 글자가 되어 스멀스멀 주위를 감쌌다.

연 회색빛 투명한 글자들은 허공에서 춤을 추듯 뒤섞이고 출렁거리며 순서를 찾아갔다.


여라함은 가슴이 먹먹해졌다.


공명의 들판에서 수련하던 시절, 미사랑이 율명과 여라함을 부르던 방식이었다.

빛으로 그려진 편지를 받고 별의 무덤으로, 차원의 틈으로, 인간세까지도 함께 다녔다.


그는 아스라한 감동에 젖어 글자가 문장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 은은한 빛을 내며 편지가 완성되자 그곳에서 미사랑의 목소리가 들렸다.


‘부녹, 드디어 봉인을 풀었구나! 여하, 네가 해낼 줄 알았어.


이 편지를 볼 때쯤에는 내 혼이 거의 모였겠지. 네가 이걸 본다면 계획대로 되고 있다는 뜻일 거야.


아유라는 우리 차원을 닫고 자신의 차원을 열려고 해. 율은 완전한 선을 이루려는 열망 때문에 아유라와 손을 잡았어. 눈도, 귀도 닫고 자신을 가두었어.

곧 검을 들 거야. 빛과 어둠이 대립하면 우리 차원은 무너지겠지.


차원을 지키면서 이 혼돈을 빨리 끝낼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해.

내겐 천계의 병사들 하나하나가 소중해. 그들의 희생을 막고 아유라와 맞설 새로운 힘을 찾으려면 나를 버리는 방법밖에 없어.


난 아유라를 차원의 틈으로 돌려보낼 거야. 그녀를 필요로 하는 차원이 있을 테니까.


그녀는 다른 차원의 신이라서 천선계의 힘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어. 인간세의 도움이 필요해.

천계의 성물과 인간세의 전사가 하나가 되어야 해. 그들이 나와 같은 소망을 가질 때 비로소 가능해질 거야.


내 선택이 최선이 아닐 수 있지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야.

생각대로 이루어질지 모르겠어. 우린 신이 아니고 완전하지도 못하니까.


여하, 난 너무 두려워.

암흑성단이 흔들리지 않도록 겹겹이 결계를 쳤지만 제대로 작동할까.

몸과 혼이 부서지는 순간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인간세에서 내 혼이 제 때에, 필요한 모습으로 모일까.


모든 것이 두려워.

흩어진 혼이 다시 모여도 이 모습으로 돌아오지 못할 거야.


그래도 네가 있기에 용기를 낼 수 있었어.

너라면 내가 어떤 모습이어도 찾아낼 테니까. 네 모든 것을 걸고 날 도와줄 테니까. 그곳이 어디인지 상관하지 않고, 이유도 모르면서 말이지.


나의 영원한 벗, 여하. 부디 슬퍼하지 마. 우린 곧 만날 테니까.’


여라함은 먹먹한 마음으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빛으로 펼쳐졌던 글자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굳어있었다. 가슴이 따끔거리고 아팠다. 눈시울이 붉어지며 가슴이 뜨거워졌다.


부녹은 어느새 주저앉아 주먹으로 눈물을 닦으면서 훌쩍였다. 분칠과 눈물이 범벅이 되어 끈적거렸으나 개의치 않았다.


“미사랑님···.”

부녹이 울면서 중얼거리자 여라함은 난감한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검은 색 화장이 흘러내린 얼굴을 보니 슬프면서도 웃음이 나왔다.


“부녹, 이건 유언장이 아니야. 너무 슬퍼하지 말게.”

“그래도, 그래도. 얼마나 괴로우셨을까요. 그것도 혼자서. 그런데도 늘 웃어주시고, 힘을 주셨어요.”

“알아. 나도 미사에게 받은 게 많으니까. 왜 어이없이 사라졌는지 이제 알겠군.”

여라함의 얼굴에 쓸쓸한 미소가 번졌다.


“그렇죠. 미사랑님이 허무하게 가실 리 없죠. 무슨 계획이 있는 거라고 믿었습니다!”

부녹이 들뜬 목소리로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여라함이 부녹을 일으켜 세웠다.

“우리에게 할 일을 알려준 거야.”

“무슨 일을 할까요? 지금 당장 시작하겠습니다.”


여라함은 미사랑의 편지가 있던 허공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글자가 남아있기라도 한 듯 아련한 눈빛이었다.

“아유라, 차원의 틈, 천계의 성물과 인간세의 영웅, 율의 각성···.”


여라함의 입가에 미소가 돌아왔다.

그는 라온당의 푹신한 의자에 기대앉았다. 부녹도 맞은편에 앉아 영진성이 결단을 내리기를 기다렸다.


“다행히 율은 예전으로 돌아왔어. 미사랑이 소멸하는 순간부터 돌아오고 있었어. 염라성역에서 해밀을 구한 것도, 진유를 인간세에 가둔 것도 아유라의 진짜 모습을 알았기 때문이지. 문제는 아유라야.”


여라함은 손가락으로 희고 부드러운 팔걸이를 톡톡 두드렸다.

겨우 마음을 추스른 부녹이 얼굴에 묻은 눈물과 분칠의 범벅을 손수건으로 닦았다.


“아유라가 그냥 물러서지는 않을 거야.”

“치열한 싸움이 되겠군요.”

“인간세에 성물이 얼마나 퍼져있지?”

“아, 그거라면. 경매에 오를 때마다 최고가에 팔립니다.”


“천계로는 오지 않았군.”

“성물이 거부해서요. 인간세에 남으려는 물건의 의지입니다. 그런 식으로 주인을 찾으려는 거겠지요. 이미 진짜 주인을 만난 것도 있지요.”


“그들이군. 미사랑이 그런 식으로 함께 싸울 전사를 찾은 거였어.”

여라함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미사랑이 하던 말이 이런 뜻이구나.

‘두려움을 갖게 하면 복종하기는 하겠지. 그렇게 해서는 진짜 힘을 끌어낼 수 없어. 진심으로 나와 공명해야 내 편이 되는 거야.’


미사랑, 대체 어디까지 생각한 거야.

여라함은 그녀가 얼마나 깊이 고민했는지 가늠할 수 있었다. 그녀가 그렇게 고뇌하는 동안 자신은 어디 있었던가.


이제 그녀를 위해 무슨 일이든 해야 한다.

‘걱정 마. 미사. 난 언제나 너를 도울 테니까.’


아랑누와 사로잔이 인간세에서의 시간을 마치면 미사랑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녀가 어떤 모습이든 그 혼에 가장 잘 어울리는 모습이리라.


그녀의 모든 현재를 아끼고 사랑할 것이다. 여라함이 주먹을 꽉 쥐었다.

“내가 직접 가야겠다.”

“이번에는 어떤 모습으로 가시려고요?”

“가면서 생각해야지.”


라온당을 나서는 여라함에게 마로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어디 나가십니까?”

“마로, 암흑성단에 가서 한울을 불러줘.”


“한울이요? 벌써 인간세로 내려갔습니다. 사로잔을 보러···.”

마로의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여라함은 그의 불안한 기색을 놓치지 않았다.

“무슨 일인가?”

“아무래도 한울이 노각부줄을 포기한 것 같습니다.”


여라함의 입에서 짧은 탄식이 새어나왔다.

지금의 한울이라면 사로잔을 위해 목숨도 아끼지 않을 것이다. 그는 애써 숨겨온 내 마음을 그대로 잡고 있으니까.


그가 암흑성단이 있는 하늘을 바라보자 부녹이 고개를 숙였다.

“저는 먼저 내려가겠습니다. 필요하면 언제라도 부르십시오.”

그녀는 인사와 함께 모습을 감추었다. 마음이 급해 선계에 더 이상 머무를 수 없었다.


여라함 역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알고 있었다.

미사랑이 알려주지 않았던가. 그때, 인간세에 함께 내려갔을 때.


꽃등을 바라보던 미사랑이 여라함의 손을 잡았다.

‘약속해줘. 무슨 일이 있어도 결계에만 전념한다고, 너의 소명을 소중히 여기겠다고.’

‘뭐야? 왜 이렇게 비장해? 무슨 일 있어?’

‘아니. 일은 무슨.’

미사랑은 빙긋 웃으며 등불을 바라보았다.


‘내가 무엇이 되던 지켜봐 줘. 무슨 일이 있어도 다시 돌아올 테니까.’

발갛게 달아오른 미사랑의 뺨을 보며 여라함은 대답하지 못했다.


왜 그런 말을 하는지 그때는 알 수 없었다.

이제 그 의문이 풀렸다.


“알아. 미사. 내가 할 수 있는 일, 그걸 해야지.”

여라함은 미사랑을 떠올리며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걸 알게 된 이상 몰랐던 나로 돌아갈 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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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 사로잔_소사매의 집 22.07.29 39 0 13쪽
172 사로잔_너르목 광장 22.07.28 32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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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 사로잔_반파홍귀 22.07.28 34 0 10쪽
169 사로잔_노들산 아름 사원 22.07.28 38 0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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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 선계_각성 22.07.27 36 0 12쪽
166 아랑누_나다움꽃 22.07.27 34 0 9쪽
165 아랑누_다음 목적지 22.07.27 32 0 12쪽
164 아랑누_인어족의 재회 22.07.26 32 0 13쪽
163 아랑누_다시 봉인하다 22.07.26 39 0 12쪽
162 아랑누_불길한 전조 22.07.26 38 0 13쪽
161 아랑누_탐색 22.07.26 35 0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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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 아랑누_고백과 결심 22.07.25 36 0 9쪽
158 아랑누_갈피를 찾다 22.07.25 35 0 12쪽
157 아랑누_미사랑의 검 22.07.25 32 0 9쪽
156 아랑누_해왕 모수 22.07.24 34 0 10쪽
155 아랑누_바다 괴물 22.07.24 45 0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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